미카 해키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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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라잉 핀으로 대표되는 핀란드의 전직 카레이서. 그리고 맥라렌의 암흑기와 영광을 함께한 (거의) 프랜차이즈 스타.'''슈마허의 가장 강력했던 라이벌 - 미카 해키넨'''
'''(Schumacher's Greatest Rival - Mika Häkkinen)'''
'''- F1 공식 사이트'''
1968년 10월생으로 69년 1월 생이었던 슈마허와 얼마 차이나지 않는다. 그리고 둘은 F3에서 종종 같이 달리기도 했으며 F1 데뷔년도도 1991년으로 같다.
5살 때 카트를 시작하며 레이싱에 입문했고 핀란드 카트계를 그야말로 '''작살'''내면서 1982년도 F1 챔피언이었던 케케 로즈버그의 눈에 띄게 된다. 원조 플라잉 핀이자 핀란드인으로 처음 F1을 제패했던 로즈버그는 해키넨의 재능을 알아보며 그에게 물심 양면의 지원을 해준다. 이는 후일 해키넨이 키미 래이쾨넨을 지원해주는 모티브가 되었을지도...
로즈버그의 지원 아래 포뮬러계로 들어오게 되었고 포뮬러 포드, F3 챔피언쉽 등에서 우승하며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나갔다. 마침내 1991년 로터스에서 그를 영입하며 F1에 데뷔한다.
2. 선수 경력
2.1. 로터스 F1 팀
2.1.1. 1991 시즌
여차저차 데뷔는 하게 되었지만 로터스는 약체에 속하던 팀이라 포인트 내는 것도 버거웠다. 그래도 1991년 3라운드였던 산마리노 GP에서 25그리드로 출발하여 5위로 피니쉬하는 깜짝 활약을 보이며 2점을 따내기도 했지만 그게 끝.[3] 더군다나 시즌 막바지에 영입되어 몇 경기 안뛰고 4점을 따낸 슈마허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그냥 묻혔다(...).
2.1.2. 1992 시즌
1992 시즌에는 더 나아진 것도 없는 성능의 차로 무려 '''11'''점을 올리며 타 팀의 눈길을 끌게 된다.[4]
2.2. 맥라렌 F1 팀
2.2.1. 1993 시즌
1993년 맥라렌에서 테스트 드라이버[5] 로 영입했다. 그래도 시즌 후반 자리가 생기며 3경기에 뛸 수 있었고 4점을 얻을수 있었다. 이 당시에 아이르통 세나와 같이 달리며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2.2.2. 1994 시즌
팀메이트였던 아이르통 세나가 1994년 윌리엄스로 이적을 하게 되어 얼떨결에 팀의 퍼스트 드라이버가 되었고 더불어 맥라렌의 암흑기가 이때부터 시작된다. 1993년에 84점을 기록했던 팀 성적이 1년만에 42점으로 정확히 반토막이 난 것이다. 해키넨의 부진이라기보단 5차례나 고장으로 멈춰야 했던 (충돌사고로 인한 것을 제외하면 시즌 절반이상을 고장으로 리타이어한 셈이다.) 그 해 맥라렌의 차량인 MP4/9가 좀 망작이었다. 1993년까지 쓰던 포드 엔진에서 푸조 엔진으로 교체를 했는데 대부분의 리타이어가 엔진 블로우였다... 그나마 해키넨이 리타이어 하지 않은 8경기중 6경기에서 포디움 피니쉬를 하며 꾸준히 포인트를 얻어 총 26점을 기록했다.
2.2.3. 1995 시즌
푸조 엔진으로 시즌을 망쳐버린 맥라렌에서는 엔진 공급업체를 메르세데스로 바꾸어 재도약을 노리게 된다. 결과는? 망했어요. 팀 득점은 30점으로 전 해보다 12점을 더 깎아 먹으며 부진의 나락에 빠지고 그 와중에 해키넨은 호주 GP에서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의 부상을 입게 된다.
시즌 최종전이었던 호주 GP 연습 주행중 타이어 파편을 밟으면서 컨트롤을 잃고 방호벽을 들이 받았다. 의식을 잃고 피까지 토할 정도의 중상이었다. 다행히 의료진의 빠른 응급처치와 후송으로 의식을 찾긴 했지만 이후 몇 달간 아무것도 못한 채 요양을 해야했다. 큰 후유증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빠른 은퇴의 주 원인이 된다.
2.2.4. 199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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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해키넨이 복귀 할 수 있을지, 복귀하더라도 사고의 트라우마로 제 기량을 잃은게 아닌지 하는 걱정의 시선들이 많았는데 해키넨은 테스트를 통해 아무 문제가 없음을 입증하며 팀에 돌아온다. 그리고 앞으로 맥라렌의 부흥을 함께하고 각종 어그로를 홀로 떠맡게되는 데이비드 쿨싸드를 팀메이트로 맞게 된다. 번째 시즌에 들어온 메르세데스도 1995년의 실패를 거울로 좀 더 개량된 엔진을 공급하며 맥라렌의 성적도 점차 상승곡선을 그리게 된다. 하지만 타 팀들의 성능은 더 괴수급이라 눈에 띄게 성적이 좋아지진 못했다.
2.2.5. 1997 시즌
드디어 1997년 최종전이었던 유럽 GP 헤레즈에서 생애 첫 승을 거두게 된다. 여기에는 챔피언쉽을 다투던 쟈크 빌르너브를 들이받으며 같이 자폭한 슈마허의 삽질이 있었지만... 여기까지만 보면 1994-1995년 2연속 챔피언에 20승 넘게 기록하고 있던 슈마허와 데뷔 7년만에 겨우 첫승을 신고한 해키넨은 적어도 그 당시까지는 비교대상이 되지 못했다.
아래는 1993~1997년까지 해키넨의 기록이다.
2.2.6. 1998 시즌
그런데 1998년 규정에 큰 변화가 있었다. 차의 너비가 줄어들고 27년간 사용하던 슬릭타이어의 사용이 금지된 것.[6] 그 동안의 부진에 절치부심했던 맥라렌은 작정하고 엔지니어들을 굴리고 또 굴려 MP4/13이라는 명차를 완성시킨다. 시즌 전 여러팀에서 모여 시행한 테스트 주행에서 맥라렌 경주차는 다른 팀 관계자들이 경악할 기록을 보여주었다. 맥라렌 경주차의 월등한 성능이 입증되자 감독 론 데니스는 '둘 중 먼저 첫 코너를 통과하는 사람에게 1위를 양보하자'는 협정을 제안하게 되고 둘은 이에 동의한다.
시즌 개막전이었던 호주 GP 퀄리파잉에 해키넨이 1위, 쿨싸드가 2위를 차지했다. 결승레이스에서 해키넨이 첫코너를 먼저 통과하게 되었고 예상했던대로 맥라렌 듀오는 3위와 1바퀴차이를 벌리며 1-2위를 차지하게 된다. 경기 중간에 잘못된 교신으로 해키넨이 이유없이 피트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바람에 2위로 떨어지기도 했었지만 약속대로 쿨싸드가 선두를 양보하여 우승할 수 있었다. 이에 페라리에서 팀오더가 아니냐며 항의를 했었지만 기각됐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팀오더는 (은연중에) 페라리가 압도적으로 더 많다.
맥라렌의 성능이 너무 압도적인지라 페라리 (및 페라리가 꼬드긴 다른 팀들)에서는 맥라렌의 비대칭 브레이크와 엔진 출력 재생 장치등이 '''규정 위반'''이라며 FIA에 항의했지만 FIA에서는 '''규정 밖의 문제'''로 항의할 것이 아니라고 일축하였다. 이는 나중에 2009년 브라운GP가 디퓨저로 대박친 상황과 비슷했다. 그렇지만 디퓨저같이 금새 따라할 물건들이 아니었던지라 페라리에서는 성능을 게임플랜을 통해 따라잡기로 방향을 잡게 된다.
그래서 채택한 것이 2스톱 작전과 광폭타이어였다. 최대한 연료를 적게 넣어 가볍게 하고 타이어의 그립은 최대로 살려서 맥라렌 경주차와 비등하게 싸워보자는 전략이 주효하게 된다. 다만 퀄리파잉은 모든 팀이 연료를 적게 넣고 달리기 때문에 시즌 개막후 9경기 연속 폴 포지션은 맥라렌의 차지였다. 시즌 중반까지 해키넨이 앞서가고 슈마허가 뒤쫓는 형태로 경쟁이 지속되었다.
12R까지 해키넨은 77점, 슈마허는 70점인 상황.
그리고 챔피언 승부의 분수령이 된 희대의 막장경기인 13R 벨기에 GP가 개최된다.
시작부터 대형사고로 레드 플래그가 뜨고 1시간만에 재개된 경기에서 해키넨은 첫 코너에서 스핀 이후 다른 차에 들이 받히며 한 바퀴도 못 돌고 리타이어한다. 남아서 슈마허를 견제해야할 쿨싸드도 사고로 피트에 들어왔다가 꼴지로 복귀한다.
백마커였던 쿨싸드와 선두로 달리던 슈마허가 충돌하며 슈마허 리타이어. 이에 열받은 슈마허는 맥라렌 피트로 달려가 쿨싸드를 찾아 현피를 뜨려 했지만, 쿨싸드는 꿋꿋히 살아남아 레이스를 완주했다. 맥라렌은 슈마허가 무리하게 백마커를 추월하려다 일어난 사고라 주장했는데 이에 대한 판단은 알아서 하길. 이 사고로 인해 슈마허는 거저먹을 수 있었던 우승과 10점을 눈앞에서 날려버리게 되었고, 쿨싸드는 티포시들에게 평생까임권을 획득함과 동시에 다음에 벌어질 (페라리의 홈 그라운드인) 이탈리아 GP에서 엄청 열받은 티포시들에게 무시못할 살해 협박까지 받게 된다. 이런 팬들의 난동을 우려한 FIA에서 전례없는 기자회견을 열어 둘을 데려와 화해를 시키는데 서로 아무 말없이 악수를 하는것으로 상황을 종료...되었을 리가 없고 슈마허와 쿨싸드는 그 후로도 계속 앙숙관계로 지냈다. 반면에 해키넨은 반대 급부로 슈마허와 라이벌 플래그를 세우기 시작한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벌어진 14R 이탈리아 GP에서는 슈마허가 우승, 해키넨은 4위를 차지하며 결국 80점 동률을 이루게 된다. 남은 경기는 룩셈부르크 GP와 일본 GP 둘.
15R 룩셈부르크 GP 예선전 퀄리파잉에서 의외로 슈마허가 폴 포지션을 차지하게 되었고 해키넨은 3위로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결승에서 2위였던 페라리의 에디 어바인이 해키넨을 막는 사이 슈마허가 치고 나가 기선을 제압한다는 페라리의 작전은 초반부터 강공에 나선 해키넨의 질주에 무너졌다. 14바퀴째에 해키넨은 어바인을 제쳐내며 2위로 올라섰고 그때까지 선두였던 슈마허가 24랩에서 피트인, 5위로 트랙에 복귀한다. 하지만 4위 차에 막혀 버벅대던 사이 28랩에 해키넨이 피트인을 했고 슈마허보다 앞서 트랙에 복귀하며 선두가 된다. 그대로 경기가 끝나면서 해키넨은 90점, 슈마허가 86점인 상황에서 최종전 일본 GP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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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종전은 싱겁게 끝난다. 슈마허가 폴 포지션을 잡고 해키넨이 2그리드를 차지한 결승 레이스에서 슈마허가 엔진을 꺼트리게 되어 스타트에 실패, 맨 뒤에서 다시 출발하게 되었다. 그래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며 티포시들은 기대했지만 경기 중반 슈마허가 파편을 밟고 펑크가 나면서 리타이어, 해키넨이 생애 첫 월드 챔피언 자리에 오르게 된다. 총 포인트는 100포인트.
2.2.7. 1999 시즌
1998년 막바지까지 치열했던 해키넨과 슈마허의 대결로 인해 이번 시즌도 비슷하게 가려니 했던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개막전 호주GP는 슈마허의 팀 동료 어바인이 우승하며 혼전의 서막을 알린다. 해키넨과 쿨싸드가 예선에서 원투를 차지했지만 결승에서 모두 고장으로 리타이어하며 맥라렌 차량들은 빠른데 불안정하다는 인식을 이 MP4/14 때부터 심어간다. 2R 브라질GP에서도 기어박스가 고장나며 리타이어할 뻔하지만 기적같이 기어박스가 살아나 시즌 첫승을 할 수 있었다. 같은 차를 몰았던 쿨싸드는 끝내 기어박스 고장으로 리타이어. 이런식으로 해키넨은 불안정한 차를 잘 컨트롤해서 꾸준히 점수를 쌓아나갔지만 쿨싸드는 차에 적응을 못한 듯 자주 고장으로 리타이어하게 된다. 이러다보니 해키넨은 페라리의 슈마허-어바인 듀오를 혼자 상대해야 할 상황에 놓이는데...
'''8R 영국 GP에서 슈마허가 정강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며 리타이어한다.'''
이때까지 점수가 '''어바인 40점''', '''해키넨 32점''', 슈마허 32점, 하인츠 헤럴드 프렌첸 26점, 쿨싸드 22점, 랄프 슈마허 19점으로 시즌 절반이 지난 시점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낮은 득점이었다. 슈마허의 이탈에 중위권 드라이버들까지 우승 한번으로 챔피언을 넘볼수 있을 정도로 혼전이 심해졌다. 일단 어바인과 해키넨의 대결로 압축은 되었는데 이 와중에 맥라렌은 팀 내 자유경쟁을 선언하며 쿨싸드가 마음껏 챔피언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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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벌어진 경기들에서도 어바인-해키넨-쿨싸드-프렌첸 등이 고루 1승씩 챙겨가면서 혼전양상은 계속 이어진다. 13R 이탈리아 GP에서 폴포지션을 따내 결승에서도 줄곧 선두로 달리던 해키넨은 마지막 코너에서 스핀하며 리타이어했고 경주차에서 나와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울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이겼으면 해키넨이 경쟁에서 치고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렇지 못했기에 3경기 남은 상황에서 점수가
'''하키넨 60점, 어바인 60점''', 프렌첸 50점, 쿨싸드 48점이 된다.
그러나 14R 유럽 GP에서 폭우 덕분에 하키넨은 5위로 2점을 얻는데 그쳤고 어바인은 7위로 1점도 못 얻으며 당최 승부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이에 현기증이 나기 시작한 페라리에서는 하라는 휴양은 안하고 열심히 축구를 하고 있던(...) 슈마허를 해결사로 불러들인다.
15R 말레이시아 GP로 복귀한 슈마허는 3개월의 공백이 무색하게 어바인-해키넨-쿨싸드를 제치고 폴포지션을 차지한다. 그리고 결승에서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전략을 보이게 되는데...
결승 레이스 당일 연료를 풀로 채워 1스탑 작전을 노리면서 타이어는 엑스트라 소프트를 골라서 끼고 나온 것.[7] 처음부터 1위에는 안중에 없었던 슈마허는 4바퀴째에서 어바인을 선두로 내보낸 뒤 해키넨-쿨싸드를 상대로 장판파를 시전한다. 철저히 타이어 관리를 하며 버텨내는 슈마허의 완벽한 방어에 똑같이 1스탑 작전을 세웠지만 하드 타이어를 끼고 나왔던 해키넨은 피트스탑에서 승부를 보기로 결정, 페이스를 늦춘 채 피트인을 준비한다. 그런데 연료를 다 채우지도 못하고 출발해버리는 바람에 생각치도 못한 피트스탑을 한 번 더 해야 했고 그것이 승부를 결정지었다. 결국 우승은 어바인, 2위 슈마허, 3위를 해키넨이 가져가게 되었다. 그리고 점수는 '''어바인 70점, 해키넨이 66점'''이 되어 최종전 일본 GP에서 챔피언이 가려지나 했는데...
그런데 경기 종료 후 페라리 차에서 규정 위반이 발견되어 두 선수 모두 실격되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하키넨 72점, 어바인 60점'''이 되어서 해키넨이 최종전에 상관없이 '''챔피언 확정'''이 되는듯 했으나...
페라리가 이 판결에 불복하여 FIA에 항소한 것이 받아들여져서 실격취소와 함께 도로 '''어바인 70점, 하키넨이 66점'''이 된다.
F1 규정상 동점이 되면 우승횟수가 더 많은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우승 횟수가 더 많던 해키넨은 최종전에서 1위를 차지하게 되면 어바인이 2위를 차지하더라도 같이 76점이 되어서 자력으로 챔피언이 될 수 있었다. 역으로 페라리에서는 해키넨의 1위만 막아내면 어바인이 4위만 하더라도 챔피언이 될 수 있었으므로 슈마허를 1위로 만드는데 온 힘을 기울이게 된다.
최종전 일본 GP 예선에서 페라리의 목표대로 슈마허가 해키넨을 2위로 제치고 폴포지션을 차지하는데 성공하지만 정작 어바인이 페널티를 받아 5위로 출발하게 되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게다가 어바인 앞에는 쿨싸드가 자리잡으며 이래저래 맥라렌이 유리한 상황이 된다.
대망의 결승전. 해키넨은 환상적인 스타트로 슈마허를 제치며 선두로 나서고 슈마허와의 간격을 벌려 나간다. 어바인도 쿨싸드를 추월하며 4위로 오르기는 했지만 쿨싸드의 재반격에 시달리느라 3위 공략은 엄두도 못내고 방어에만 급급한 상황. 결국 페라리에서 믿을 건 슈마허가 해키넨을 추월하는 것 밖엔 없었다. 중간에 있던 올리비에 파니스가 리타이어 하며 순위는 하키넨-슈마허-어바인-쿨싸드 순서가 된다.
1차 피트스탑에서 어바인은 쿨싸드에게 추월을 허용하며 다시 4위로 떨어진다. 해키넨과 슈마허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상황. 이 때 3위로 달리던 쿨싸드가 4위 어바인을 막다가 실수로 노즈가 망가지게 된다. 속력이 떨어진 차를 몰고 어렵게 피트로 돌아가던 쿨싸드 뒤에 슈마허가 다가 왔다. 여기서 백마커가 된 쿨싸드는 교묘하게 슈마허를 방해하며 좁혀지지 않던 차이를 더 벌려버리는 큰 전과를 세우게 된다.(...) 경기 후 기자회견장에서 슈마허는 다시 쿨싸드와 현피를 시도했지만 사람들이 뜯어말려서 실패. 사실 저 방어가 없었더라도 해키넨이 워낙 빨라서 슈마허의 추월은 어려웠을 것이라는게 중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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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체커기와 함께 2년 연속 챔피언 자리에 오르게 된다. 특히 1999년은 한 시즌 16경기, 10-6-4-3-2-1 점수제가 도입된 이래 가장 적은 점수로 챔피언이 결정난 대혼전 속에서 따낸 것이었다.[8] 모은 포인트는 단 76포인트였다.
2.2.8. 2000 시즌
시즌 초반부터 맥라렌의 경주차는 '빠른데 불안정하다'라는 공식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해키넨은 초반 3경기에서 연속 폴포지션을 차지했지만 고장으로 2번이나 리타이어했고 나머지 한 번도 슈마허에게 역전을 허용하며 순식간에 20점 넘게 포인트가 차이나게 된다.
스페인 GP에서 시즌 첫승을 기록하며 잠시 숨을 돌리기는 했지만 이후로도 부진과 고장은 계속 이어져서 시즌 절반이 지날때까지 포인트가 '''슈마허 5승 56점, 해키넨 1승 32점'''이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 챔피언쉽 경쟁이 사실상 무의미해질만큼 격차가 너무 커져버렸다.
하지만 후반기의 시작이었던 프랑스 GP를 시작으로 오스트리아 GP, 독일 GP 3전 연속으로 슈마허가 리타이어를 하게 되고 착실히 점수를 따라붙어 '''슈마허 56점, 하키넨 54점'''까지 추격하게 된다.
그리고 시즌 12R 헝가리 GP에서 슈마허를 2위로 밀어내고 우승을 하며 처음으로 챔피언쉽 선두로 나섰다. 다음 대회였던 벨기에 GP에서 슈마허와의 대결에서 최고의 명장면을 만들어낸다.
1스탑 작전으로 나온 슈마허를 2스탑 작전으로 나왔던 해키넨이 두번째 피트스탑 이후 맹추격을 하게 된다. 타이어 상태가 슈마허보다 나았기 때문에 1랩마다 격차를 좁히며 추격했고, 5랩 남은 상황에서 슈마허와의 거리를 사정권까지 좁혔다. 하지만 슈마허도 강력하게 저항하며 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해키넨도 쉽게 파고들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두 사람 앞에 백마커였던 리카르도 존타가 나타나는데...
여기서 F1 역사에서 최고의 추월 중 하나로 꼽히는 순간을 만들어내며 역전에 성공,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점수도 '''하키넨 74점, 슈마허 68점'''이 되며 기세를 타는가 싶었지만
이 대결에서 모든 힘을 쏟아낸 해키넨은 이어지는 4경기에서 거짓말처럼 참패를 당하며 슈마허에게 챔피언을 내주게 된다. 슈마허에겐 5연속 챔피언, 개인 통산 7번 챔프가 되는 시발점이요, 해키넨에게는 너무나도 허무한 결과였다. 총 포인트는 89포인트로 2위.
2.2.9. 2001 시즌과 은퇴
2001 시즌 페라리의 경주차는 맥라렌의 성능을 넘어서게 되고 윌리엄스마저 페라리-맥라렌의 양강구도에 맞설 정도로 성장하게 되지만, 맥라렌 차량인 MP4/16이 첫 경기부터 서스펜션이 나가면서 유리몸임을 증명했다. 브라질에선 스타트 그리드에서 출발조차도 못하는 부실함마저 보여주며 초반 4경기동안 해키넨의 점수가 고작 4점이라는 믿지 못할 상황까지 몰렸다. (2차례 리타이어. 4위 1번, 6위 1번)
5R 스페인 GP에서 간만에 부활의 모습을 보이며 경기내내 선두로 달렸고, 슈마허를 반바퀴 이상 따돌리며 지난해 벨기에 GP이후 처음으로 승수를 추가하나 싶었는데...
마지막 랩에서 엔진이 터졌다. 해키넨의 불운의 정점.
그리고 시즌 중반 해키넨은 은퇴선언을 하게 된다. 이유는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여자친구였던 아내 엘자가 1995년 부상때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으며 간호를 해주는 것을 보며 사고에 대한 부담감이 생겼었고 2000년에 아들 휴고가 태어나면서 은퇴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이유가 저렇다보니 사람들은 '몸이 근질거리면 복귀할지도...'라며 기대를 했지만 해키넨은 고향 후배 키미 래이쾨넨에게 시트를 넘겨주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2012년까지 현역으로 뛰었던 슈마허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이른 은퇴였던지라 사람들의 아쉬움이 컸다.
시즌 16R 미국 GP에서 마지막 우승을 하고 최종전 일본 GP에서 4위로 끝마치며 F1에서의 경력을 끝내게 된다. 총 37포인트로 5위로 마감.
3. 평가
슈마허가 5연속 챔프에 오르며 F1을 초토화시킬 때 많은 사람들이 해키넨이 있었더라면 독주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슈마허가 5챔을 하던 2000년~2004년의 맥라렌 레이스카는 성능이 개판 그 자체라 성능 차이를 생각해보면 해키넨이 있었더라도 슈마허를 막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해키넨은 슈마허의 7연속 월드 챔피언을 저지한 인물이 된다. 1998년은 그렇다치고 1999년에도 만약 해키넨이 없었더라면 슈마허는 중반에 몇 경기를 날려먹은 것을 감안해도 챔피언 경쟁에 뛰어들 수 있는 점수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승부를 걸어볼 만 하다 생각했으면 슈마허도 축구를 하는 대신 조기복귀를 했을테니...
경쟁심이 센 F1 드라이버들 사이에서 의외로 순하고 섬세한 성격이다.[9] 한마디로 안티가 거의 없다는 소리. 반면 슈마허는 여기저기서 어그로를 끌어왔던지라 특히 챔피언쉽 경쟁을 하면서 안티를 만든 경우가 많다. 1994년 챔피언 데이먼 힐과 1997년 챔피언 자크 빌르너브의 경우, 챔프 경쟁 이후 슈마허와는 원수지간이 되었고 쿨싸드와는 서로 그냥 죽어라 씹어대는 사이. 심지어는 팀 동료였던 어바인과 바리첼로마저 팀을 옮긴 후 슈마허를 독선적이라며 씹을 정도인데 이 둘은 유독 해키넨과는 사이가 좋다. 슈마허 본인도 최고의 라이벌을 꼽는 질문에 해키넨을 지목할 정도.
이렇게 슈마허와 같이 찍은 광고가 꽤 있다.
은퇴 후에는 DTM에서 뛰기도 했고 핀란드 현지 랠리에도 출전했으며 F1에도 가끔씩 맥라렌의 게스트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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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데스의 리더인 데이브 머스테인과 판박이다! 양쪽 다 이 사실을 잘 아는 듯.
상당한 애처가이다. 애초에 은퇴 사유가 아내와 아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덕분에 아내 엘자도 F1 팬 사이에선 꽤 인지도가 있다.[10] 하지만 2008년에 엘자와 이혼하고 이후 2016년에 마르케타 레메쇼바와 재혼한다.
[1] 영미권에서는 움라우트 a (ä)가 무시된 미카 하키넨으로 불린다. 국내에도 이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2] 에디 어바인과 비슷하다.[3] 로터스가 얼마나 약체였는가 하면 1991년 총 득점이 3점에 불과했다. 그 3점중에 2점을 해키넨이 얻어낸 것에서 어느정도 약체였는지 알 수 있다.[4] 이 해 로터스의 총 득점은 '''13점'''이었다. 그 중 '''11점을 해키넨이 얻어냈다.'''[5]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고 차의 세팅 변경등에 대한 성능시험을 주로 하다가 팀의 레귤러 드라이버가 부상이나 계약 해지등의 이유로 공석이 생겼을때 대회에 바로 투입되는 리저브 멤버로 보면 된다.[6] 우천시에만 사용 가능하도록 변경되었다.[7] 2018 시즌에 존재했던 하이퍼소프트를 생각하면 된다.[8] 한 레이스당 가장 적은 점수로 챔피언에 오른 것은 해키넨을 F1으로 이끈 1982년 챔피언 케케 로즈버그였다. 15경기 44점으로 챔피언이 되었다. 당시 점수제가 9-6-4-3-2-1이었던 걸 감안하더라도 한 경기당 3점이 안된다...[9] 같은 전투 종족인 키미 래이쾨넨과 케케 로즈버그와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10] 해키넨이 잘 나가던 시절 피트에 언제나 등장해서 방송 중계를 탄 영향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