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조던 개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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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Jordan Gatling
1818.09.12 - 1903.02.26.(84세)
미국의 의사 겸 발명가로, 개틀링 기관총의 발명자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났으며, 30대에 세인트루이스로 이사, 잡화점을 하던 중 발명에 흥미를 느껴 연구끝에 이앙기(볍씨나 밀의 씨를 심는 기계)를 발명하게 된다. 그 이후로도 이런저런 발명을 하던 도중, 천연두에 관심이 생겨서 의대에 입학하여 40대에 의사가 된다. 막상 의사가 되고 나서 평생동안 진료는 한번도 하지 않았지만, 직업이 직업이라 의학 관련 도구도 많이 발명해서 의사보다는 의공학자에 가까웠다. 상기했듯 농업용 기기 개발로 발명 인생을 시작한지라 농업용 기기 발명도 계속 행하여 증기 트랙터도 발명해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발명한 것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아래의 개틀링 기관총. 하도 유명한 나머지 이제는 이 '개틀링'이라는 단어는 그 본인보다는, 그의 이름을 딴 화기 체계를 뜻하는 단어로 더 잘 쓰인다. 아예 개틀링이 사람 이름인 걸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정작 본직은 의사에다 본인의 발명품들 중 무기는 이것밖에 없다는 점이 아이러니의 극치.
기관총 이전까지 이 사람이 발명한 물건들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 됐지 해가 될 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람 죽이는 무기를 만들어냈다. 그것도 의뢰가 들어와서 그런 것도 아닌 자발적으로! 하지만 이걸 만든 이유를 알고 나면 이런 무기를 만든 동기도 나름 타당성은 있었다.
그가 살았던 시기의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혼란한 상황이였다. 당시 전쟁으로 인하여 너무 많은 사람이 죽자[1] 심각한 실의에 빠진 그는 갑자기 무기 개발을 서둘렀다. 그리고 개틀링을 개발하는데, 그 목적은 '''"이게 있으면 기관총 사수 한 명이 소총수 수십명 분의 몫을 할테니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겠지!"'''라는 의도로 개발한 것이었다. 나아가서는 그 압도적인 화력에 국가들이 대량의 희생자를 우려해 전쟁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 대해서 개틀링이 콜트 사[2] 의 창업자 새뮤얼 콜트의 부인 엘리자베스 자비스 콜트의 질녀 엘리자베스 자비스(Elizabeth Jarvis)에게 보낸 편지에 자세히 나와있다.[3]
게다가 얼마 동안은 지휘관들이 라이플이나 개틀링을 비롯한 신개념 무기의 압도적인 위력을 이해하지 못해서 19세기 라인배틀 시절의 구시대적 전술로 보병들을 잘 보호된 기관총 진지에 무작정 닥돌시키고, 보병들은 기관총의 화력 앞에 녹아내리는 전투가 크림 전쟁에서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사람의 인식이 과학기술의 발달을 따라가지 못해 생긴 지체 현상인 셈이다.[6] 덕분에 개틀링의 의도와는 달리, 거꾸로 기관총이 생기자 더 많은 인해전술이 필요해졌다! 이러한 무모한 전술은 기관총의 위력이 실증된 뒤 산개 및 엄폐가 기본으로 자리잡으면서 사장되었으나, 그럼에도 기관총은 여전히 강력한 무기체계였다.
그런데 이 의사양반은 이런 꼴을 보고 '''"아, 총의 위력이 약해서인가 보다!"'''라고 생각하여 전기모터를 장착하여 1800년대에 '''분당 무려 3000발급 사격능력을 가진 발칸포의 전신격인 기관총'''을 만들었지만 당시 부족한 배터리 기술 등으로 인하여 미 육군에는 채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에 따라 현재는 그 목표가 모두 실현되었다.
개틀링이 의도했던 바는 원자폭탄까지 가서야 핵보유국 한정으로만 상호확증파괴라는 개념으로 실현됐지만, 그리 되기까지는 도시 2개가 지도에서 지워질 뻔 해야 했으며, 그 이후로도 인류는 정신을 못 차리고 전 세계를 수십번이나 멸망시킬 수 있는 폭탄더미 위에서 살게 되었으니 절대로 다행인 일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발명품은 또 다른 피를 부르고 있다는 것은 희대의 아이러니다. 비슷한 논리로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있었지만 결국은... 여하간 그의 이 발명품이 없었다면 전쟁이 오히려 덜 잔혹해졌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개틀링이 없었어도 비슷한 무기체계는 결국 개발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개틀링의 노력이 아주 헛된 것만은 아니였다. 1차대전에서 지리한 참호전의 반복과 기관총으로 인해 이전까지의 전쟁과 차원이 다른 많은 피를 보고 난 이후에야 유럽 - 북미 사회에서 드디어 시민들이 국가의 자존심이 걸린 대결이 아닌 '전쟁 = 인간의 목숨을 헌신짝처럼 내다버리는 참혹한 재앙'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 그 전까진 일반 시민들은 전쟁이 얼마나 나쁜지는 전쟁에 휘말리거나, 스스로 현장에 가보기 전까진 전혀 몰랐다. 오히려 기사도 비스무리한 구시대적 신념 탓에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7] . 특히나 잘해야 소총 갖고 싸우던 이전 시절의 전쟁만을 경험한 부모 세대들이 이런 자부심이 강하여 자식들을 어느 정도 전쟁으로 내모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가 이런 잔혹한 무기의 도입으로 피가 강처럼 흐르고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이런 사실들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고 그제서야 시민들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를 알게 되었고 권력자들이 함부로 전쟁해선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뒷처리도 어설프고 뭔가 일이 꼬이면서 한번 더 대대적으로 터지게 되지만...
그리고 일선의 지휘관들 역시 기관총에 대판 깨지고 난 후에야 '야 이거 안 되겠다'하고 깨닫게 되면서 각종 전술교범을 대대적으로 수정, 이전처럼 무식하게 기관총 화망을 향해 병력을 밀어넣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1차 대전에서 기관총이 없어서 보병들이 소총만 가지고 싸웠다고 생각해보자. 지휘관들은 1차 대전 이후로도 계속해서 적을 전면적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을 오랫동안 고수했을 것이고 그러면 보병들의 피해가 계속해서 더 누적되어 늘어났을 것이다. 물론 개틀링의 바람대로 그의 신무기의 도입으로 전쟁이 쨘! 하고 끝난것은 아니였다만, 그의 무기가 만들어낸 참혹함이 이후 사람들이 피를 덜 보는 쪽으로 움직이게 만든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투입한 병력 대비 사상자수는 개틀링의 시대였던 남북전쟁보다 1차대전이 더 낮고, 1차대전보다 2차대전은 더 낮다. 엄청나게 늘어나는 사상자수만 보면 2차대전이 셋 중 제일 참혹해보이지만 투입 병력은 더 어마무시하게 많았고, 1차대전때처럼 특정 세대가 통으로 증발하는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8]
강력한 무기에 의한 평화라는 것은 일견 아이러니해보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무기 덕분에 사람들은 전쟁을 드디어 두려워하게 되었다. 현대에 과거와 같은 국가 규모의 대규모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는 것 역시 핵무기라는 강력한 무기가 쌍방의 완전한 파멸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언제 누가 터트릴 지 모를 폭탄더미 위에서 살게 되었지만, 이러한 폭탄더미의 위력을 사람들 역시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들 간의 사소한 칼부림은 일어날 지언정, 과거처럼 세계를 홀랑 태워먹을 불장난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9] .
어쨌건 그의 목적이 꼭 틀렸던 것만은 아니다. 단지 보다 많은 사람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예상보다 '''차원이 다른 위력'''이 필요했고, 바람과 다르게 굉장히 많은 피가 필요했을 뿐이었다[10] .
2019년 11월 17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내용이 다뤄졌다.
Richard Jordan Gatling
1818.09.12 - 1903.02.26.(84세)
1. 개요
미국의 의사 겸 발명가로, 개틀링 기관총의 발명자다.
2. 생애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났으며, 30대에 세인트루이스로 이사, 잡화점을 하던 중 발명에 흥미를 느껴 연구끝에 이앙기(볍씨나 밀의 씨를 심는 기계)를 발명하게 된다. 그 이후로도 이런저런 발명을 하던 도중, 천연두에 관심이 생겨서 의대에 입학하여 40대에 의사가 된다. 막상 의사가 되고 나서 평생동안 진료는 한번도 하지 않았지만, 직업이 직업이라 의학 관련 도구도 많이 발명해서 의사보다는 의공학자에 가까웠다. 상기했듯 농업용 기기 개발로 발명 인생을 시작한지라 농업용 기기 발명도 계속 행하여 증기 트랙터도 발명해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발명한 것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아래의 개틀링 기관총. 하도 유명한 나머지 이제는 이 '개틀링'이라는 단어는 그 본인보다는, 그의 이름을 딴 화기 체계를 뜻하는 단어로 더 잘 쓰인다. 아예 개틀링이 사람 이름인 걸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정작 본직은 의사에다 본인의 발명품들 중 무기는 이것밖에 없다는 점이 아이러니의 극치.
기관총 이전까지 이 사람이 발명한 물건들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 됐지 해가 될 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람 죽이는 무기를 만들어냈다. 그것도 의뢰가 들어와서 그런 것도 아닌 자발적으로! 하지만 이걸 만든 이유를 알고 나면 이런 무기를 만든 동기도 나름 타당성은 있었다.
그가 살았던 시기의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혼란한 상황이였다. 당시 전쟁으로 인하여 너무 많은 사람이 죽자[1] 심각한 실의에 빠진 그는 갑자기 무기 개발을 서둘렀다. 그리고 개틀링을 개발하는데, 그 목적은 '''"이게 있으면 기관총 사수 한 명이 소총수 수십명 분의 몫을 할테니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겠지!"'''라는 의도로 개발한 것이었다. 나아가서는 그 압도적인 화력에 국가들이 대량의 희생자를 우려해 전쟁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 대해서 개틀링이 콜트 사[2] 의 창업자 새뮤얼 콜트의 부인 엘리자베스 자비스 콜트의 질녀 엘리자베스 자비스(Elizabeth Jarvis)에게 보낸 편지에 자세히 나와있다.[3]
그러나 이걸 받아든 미 육군은 '''"화력 끝내주네? 우왕ㅋ굳ㅋ"''' 하는 반응만 보였을 뿐이다. 개틀링이 기대한 것은 한 사람이 백 명의 몫을 해 내는 것이었지만 군인들이 기대한 것은 백 명이 만 명의 몫을 해 내는 것이었던 것이다.[5]'친애하는 자비스 양에게.
내 이름을 딴 총을 발명한 것에 대한 너의 흥미에 답하마.
1861년, 전쟁이 시작될 때(인디애나폴리스에 거주 중일 때란다.) 나는 거의 매일 전선으로 출발하는 부대와 부상당했고 죽은 자들이 귀환하는 걸 목격했었지.
나중에 그들 대부분이 전투가 아닌 질병과 각종 사고에 목숨을 잃었다는 걸 알게 됐지.
이 일로 인해 나는 기계, 그러니 빠르게 발사되는 총을 만들어 1명이 100명처럼 싸울 수 있게 하려 했어.
이러면 대군의 필요성이 줄어들 거고 그 결과 전투를 해야 하거나 질병에 걸리는 것이 대폭 감소할 것이라 생각한 거지.
그래서 이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개틀링 건을 발명했단다.
1877년 6월 15일, 하트퍼드
R. J. 개틀링
자비스가 이웃집인 개틀링 가에 방문했을 때, 개틀링이 총을 만든 이유에 대해 설명한 편지.[4]
게다가 얼마 동안은 지휘관들이 라이플이나 개틀링을 비롯한 신개념 무기의 압도적인 위력을 이해하지 못해서 19세기 라인배틀 시절의 구시대적 전술로 보병들을 잘 보호된 기관총 진지에 무작정 닥돌시키고, 보병들은 기관총의 화력 앞에 녹아내리는 전투가 크림 전쟁에서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사람의 인식이 과학기술의 발달을 따라가지 못해 생긴 지체 현상인 셈이다.[6] 덕분에 개틀링의 의도와는 달리, 거꾸로 기관총이 생기자 더 많은 인해전술이 필요해졌다! 이러한 무모한 전술은 기관총의 위력이 실증된 뒤 산개 및 엄폐가 기본으로 자리잡으면서 사장되었으나, 그럼에도 기관총은 여전히 강력한 무기체계였다.
그런데 이 의사양반은 이런 꼴을 보고 '''"아, 총의 위력이 약해서인가 보다!"'''라고 생각하여 전기모터를 장착하여 1800년대에 '''분당 무려 3000발급 사격능력을 가진 발칸포의 전신격인 기관총'''을 만들었지만 당시 부족한 배터리 기술 등으로 인하여 미 육군에는 채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에 따라 현재는 그 목표가 모두 실현되었다.
개틀링이 의도했던 바는 원자폭탄까지 가서야 핵보유국 한정으로만 상호확증파괴라는 개념으로 실현됐지만, 그리 되기까지는 도시 2개가 지도에서 지워질 뻔 해야 했으며, 그 이후로도 인류는 정신을 못 차리고 전 세계를 수십번이나 멸망시킬 수 있는 폭탄더미 위에서 살게 되었으니 절대로 다행인 일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발명품은 또 다른 피를 부르고 있다는 것은 희대의 아이러니다. 비슷한 논리로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있었지만 결국은... 여하간 그의 이 발명품이 없었다면 전쟁이 오히려 덜 잔혹해졌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개틀링이 없었어도 비슷한 무기체계는 결국 개발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개틀링의 노력이 아주 헛된 것만은 아니였다. 1차대전에서 지리한 참호전의 반복과 기관총으로 인해 이전까지의 전쟁과 차원이 다른 많은 피를 보고 난 이후에야 유럽 - 북미 사회에서 드디어 시민들이 국가의 자존심이 걸린 대결이 아닌 '전쟁 = 인간의 목숨을 헌신짝처럼 내다버리는 참혹한 재앙'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 그 전까진 일반 시민들은 전쟁이 얼마나 나쁜지는 전쟁에 휘말리거나, 스스로 현장에 가보기 전까진 전혀 몰랐다. 오히려 기사도 비스무리한 구시대적 신념 탓에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7] . 특히나 잘해야 소총 갖고 싸우던 이전 시절의 전쟁만을 경험한 부모 세대들이 이런 자부심이 강하여 자식들을 어느 정도 전쟁으로 내모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가 이런 잔혹한 무기의 도입으로 피가 강처럼 흐르고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이런 사실들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고 그제서야 시민들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를 알게 되었고 권력자들이 함부로 전쟁해선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뒷처리도 어설프고 뭔가 일이 꼬이면서 한번 더 대대적으로 터지게 되지만...
그리고 일선의 지휘관들 역시 기관총에 대판 깨지고 난 후에야 '야 이거 안 되겠다'하고 깨닫게 되면서 각종 전술교범을 대대적으로 수정, 이전처럼 무식하게 기관총 화망을 향해 병력을 밀어넣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1차 대전에서 기관총이 없어서 보병들이 소총만 가지고 싸웠다고 생각해보자. 지휘관들은 1차 대전 이후로도 계속해서 적을 전면적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을 오랫동안 고수했을 것이고 그러면 보병들의 피해가 계속해서 더 누적되어 늘어났을 것이다. 물론 개틀링의 바람대로 그의 신무기의 도입으로 전쟁이 쨘! 하고 끝난것은 아니였다만, 그의 무기가 만들어낸 참혹함이 이후 사람들이 피를 덜 보는 쪽으로 움직이게 만든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투입한 병력 대비 사상자수는 개틀링의 시대였던 남북전쟁보다 1차대전이 더 낮고, 1차대전보다 2차대전은 더 낮다. 엄청나게 늘어나는 사상자수만 보면 2차대전이 셋 중 제일 참혹해보이지만 투입 병력은 더 어마무시하게 많았고, 1차대전때처럼 특정 세대가 통으로 증발하는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8]
강력한 무기에 의한 평화라는 것은 일견 아이러니해보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무기 덕분에 사람들은 전쟁을 드디어 두려워하게 되었다. 현대에 과거와 같은 국가 규모의 대규모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는 것 역시 핵무기라는 강력한 무기가 쌍방의 완전한 파멸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언제 누가 터트릴 지 모를 폭탄더미 위에서 살게 되었지만, 이러한 폭탄더미의 위력을 사람들 역시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들 간의 사소한 칼부림은 일어날 지언정, 과거처럼 세계를 홀랑 태워먹을 불장난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9] .
어쨌건 그의 목적이 꼭 틀렸던 것만은 아니다. 단지 보다 많은 사람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예상보다 '''차원이 다른 위력'''이 필요했고, 바람과 다르게 굉장히 많은 피가 필요했을 뿐이었다[10] .
3. 창작물에서
2019년 11월 17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내용이 다뤄졌다.
[1] 남북전쟁에서 미군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2] 당시 콜트 사에서도 개틀링 기관총을 생산 및 판매하고 있었다.[3] 출처[4] 이에 대해 그의 손녀는 '할아버지는 평화로운 감성을 가지셨고 내가 기억하기론 저 흉기를 만드신 건 전쟁을 끔찍하게 만들어서 끝내버리기 위해서였지.'라고 회고했다.[5] 다시 말해 개틀링이 기대한 것은 같은 화력을 더 적은 병력으로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정작 군인들이 기대한 것은 같은 병력을 투입하고도 훨씬 강력한 화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6] 특히 일본군은 2차 대전 때도 반자이 돌격을 했다가 미국의 화력에 학살되었다.[7]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에 병역의 의무가 명시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임시정부가 설립됐을 시기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됐을 시기라서, 아직 전쟁을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남아있던 시절의 영향으로 인해, 이 시기의 웬만한 나라들은 징병제를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들의 당연한 의무로 인식하는 일이 많았다. 엄연히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했던 임시정부도 당시의 이런 트렌드를 따라갔던 것이다. [8] 물론 전술 발전도 있었지만 의료지원이나 보급 행정 등 제반 지원기술이 늘어난 영향도 있긴 하다.[9] 일례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핵무장국 간에 벌어진 전쟁인 카길 전쟁 당시에는, 막상 그 당사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이 핵전쟁이 발발할 것을 두려워해서 그 어느 쪽도 서로에게 핵무기는 단 한 발도 쏘지않고 재래식 무기로만 싸운 바가 있으며, 전쟁 자체도 분쟁 지역인 카슈미르 일대에서만 국지전 형식으로 치뤄졌다.[10] 재미있는 건, 개틀링보다 좀 더 발전된 형태의 기관총인 맥심 기관총을 발명한 하이럼 맥심도 비슷한 내용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다른 사람이 이 기관총 때문에 전쟁이 더 끔찍해지지 않겠냐고 질문하자 하이럼 맥심은 "아뇨, 전쟁을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입니다.(No, it will make war impossible.)"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