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오 아바도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주요 수상 및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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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udio Abbado'''
'''본명'''
클라우디오 아바도 (Claudio Abbado)
'''출생'''
1933년 6월 26일, 이탈리아 왕국 밀라노
'''사망'''
2014년 1월 20일, 이탈리아 공화국 볼로냐
'''국적'''
이탈리아
'''직업'''
지휘자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60년대 ~ 80년대
2.3. 90년대
2.4. 2000년대 이후
3. 주요 수상 경력
4. 음악 스타일
5. 음반사
6. 사생활
7. 기타


1. 개요


이탈리아지휘자.

베르디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서곡[1]

2. 생애



2.1. 어린 시절


밀라노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겸 교육가였던 아버지 미켈란젤로 아바도와 피아노 교사 겸 아동문학가였던 어머니 마리아 카르멜라 사바뇨네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밀라노의 유명한 음악가 가문인 아바도 가문 출신으로 일가 친적이 밀라노 음악계의 요직에 앉아 있었다. 당시 밀라노에선 아바도 가문에 찍히면 음악을 접어야 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이러한 환경 덕분에 어릴 적부터 피아노 연주를 비롯한 기초 음악 이론을 배울 수 있었고, 열여섯 살 때 고향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 화성법, 대위법을 본격적으로 배웠고, 훗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문호 살바토레 콰시모도에게 문학 수업을 듣기도 했다.
1953년에 밀라노 음악원을 졸업한 뒤에는 시에나의 키지아나 음악원에서 지휘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 때 사귄 동창들로는 훗날 역시 지휘자로 대성하는 주빈 메타다니엘 바렌보임이 있었다. 특히 메타는 아바도에게 빈으로 유학하지 않겠냐고 권했고, 아바도는 이 권고에 응해 시에나에서 지휘 코스를 마친 뒤 1955년에 메타와 함께 빈으로 가서 여러 유명 지휘자를 양성하고 있던 한스 스바로프스키 문하에 들어갔다. 빈에서 공부하는 동안 메타와 함께 카라얀이 종신음악감독으로 있던 합창단 빈 징베라인의 베이스 파트에 참여하였다.
스바로프스키에게 배운 뒤 1958년에 미국 매사추세츠 주 탱글우드에서 열리는 음악제의 부속 행사인 세르게이 쿠세비츠키 지휘 콩쿠르에 참가했고, 여기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인 지휘 경력을 시작했다.

2.2. 60년대 ~ 80년대


위에서 서술되어 있지만 가문 자체가 밀라노 음악계를 꽉 잡고 있었던 덕분에 1960년에 이미 무려 밀라노 라 스칼라 가극장에 데뷔했고 이탈리아에 매우 순탄하게 경력을 쌓아 나갔다. 이미 세계 최고의 명문 오페라극장 중 하나인 라 스칼라좌를 지휘했다는 것 자체로 어지간한 오케스트라에서는 객원 지휘자로 초빙될 수 있었다. 하지만 60년대 초 그의 활동 영역은 이탈리아 안에서만 머물러 있었고 라 스칼라좌를 제외하면 이탈리아에 변변한 오케스트라가 없었기 때문에 경력을 넓히는데 한계가 있었다. 한편 그의 학창시절 동료였던 주빈 메타는 1962년 일약 LA 필의 상임지휘자로 발탁되면서 세계적인 지휘자로 성장하고 있었고 이에 비해 아바도는 국제적으로는 무명인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963년에는 뉴욕 필하모닉이 주최하는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지휘 콩쿠르에 참가해 우승했고, 덕분에 레너드 번스타인의 조수로 채용되어 뉴욕 필에서 부지휘자로 일했다. 하지만 정식 지휘자로서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부지휘자 생활을 5개월간에 때려치고 다시 밀라노로 돌아왔다. 어쨌거나 밀라노 라 스칼라좌를 정기적으로 지휘하는 지휘자라는 것은 상당히 경쟁력 있는 커리어였고 덕분에 196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고 여기서 일생일대의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당시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및 빈 국립가극장의 음악감독,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을 겸임하며 유럽 음악계의 황제로 군림하고 있던 카라얀이 빈 국립 가극장 경영진과 크게 마찰을 빚은 끝에 1964년 빈 국립 가극장 음악 감독직을 사임하면서 앞으로 조국 오스트리아서 절대로 지휘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카라얀에게 거의 전권을 위임하는 새 계약 조건을 제시했고 결국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도 떠나겠다는 발언을 번복하게 되었다. 어쨌든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196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일시적으로 객원 지휘자들이 대거 초빙되었고 이때 등장한 인물 중 한 명이 아바도였다. 아바도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호스트 오케스트라인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되었고 이것은 아바도가 밀라노 밖의 명문 악단을 처음으로 지휘하게 된 기회였다. 이때 말러 교향곡 2번을 지휘했는데,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아바도의 경력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아바도 본인은 이때 연주가 별로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실망과 자책을 하면서 지휘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녹음을 들어보니 생각보다 상당히 괜찮게 연주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후 메이저 오케스트라와 연결되기 시작했다. 곧 맨체스터의 할레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필두로 여러 오케스트라에서 객원지휘자로 초청되었다. 또 이를 바탕으로 도이치 그라모폰과의 녹음 계약이 성사되었다. 당시 독일계 지휘자 일색이었던 DG는 레이블의 세계화를 추진하면서 비독일계 지휘자들을 적극 영입하기 시작했는데 이탈리아인 아바도는 그 첫 주자였다.
DG와 계약을 맺으면서 빈 필, 베를린 필, 런던 심포니, 시카고 심포니 등 여러 명문 오케스트라와 녹음,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1960년대 중후반 부터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 유수의 악단들에 객원 출연을 시작했다. 1968년에는 라 스칼라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해 1986년 사임할 때까지 여러 오페라들을 공연하면서 콘서트와 오페라 양쪽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1976년에는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공동체에서 조직한 유럽공동체 청소년 관현악단(이후 유럽연합 청소년 관현악단)의 초대 음악 감독에 부임하면서 이후 평생에 걸쳐 이어진 청소년 악단 조직 활동에도 뛰어들었다.
1978년에는 베를린 필의 객원지휘자로 출연하여 현대 작곡가 노노의 작품을 연주했는데, 청중들의 야유 세례를 받았다. 이는 베를린 필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약 10년간 베를린 필과의 활동이 뜸해진다.
1979년에는 앙드레 프레빈의 후임으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부임하여 1987년까지 이 악단을 이끌었다. 동시에 1982년부터 1986년까지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1986년에는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고, 여기서는 정통 이탈리아와 독일 오페라의 레퍼토리들 외에도 무소륵스키보리스 고두노프와 호반쉬나 같은 러시아 작품, 슈베르트의 피에라브라스와 로시니의 랭스 여행 등 좀처럼 상연되지 않는 듣보잡 작품들까지 올리기도 했다.
동시에 유럽공동체 청소년 관현악단에 이어 두 번째로 비(非) 유럽연합 국가 출신의 청소년 연주자들까지 포괄하는 범유럽 악단인 구스타프 말러 청소년 관현악단을 창단해 수석 지휘자로 부임했다.
1980년대 후반 아바도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오랫동안 시카고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를 맡아왔던 게오르그 솔티가 90년 쯤에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진작부터 공언해왔기 때문이다. 아바도는 시카고 심포니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던 만큼 유력한 차기 상임지휘자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아바도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사임한 것도 세계 최고 수준의 연봉을 주는 시카고 심포니의 상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되었다. 그러나 1989년 결국 시카고 심포니의 후임지휘자 자리는 다니엘 바렌보임이 차지하게 되었다. 다급해진 아바도는 메타의 후임 자리를 물색하던 뉴욕 필과 긴급하게 접촉하여 계약이 성사 단계에 있었고 세부 조항을 조율 중에 있었다. 그런데 뉴욕 필과 계약이 거의 성사 단계에 있을 때 뜬금없이 베를린 필이 차기 상임지휘자로 아바도를 선택했다는 기사가 떴다.
1991년 빈 필 및 빈 국립 가극장과 여러 갈등 끝에 관계가 단절되고 말았다. 1991년 빈 필 신년음악회에서는 빈 왈츠와 폴카만을 레퍼토리로 하던 악단의 전통을 깨고 로시니,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의 작품을 선곡하면서 큰 파장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91년 이후 아바도는 더이상 빈 필의 신년음악회에 초대되지 못했다. 또 빈 국립오페라의 이사진과도 갈등이 생겨 1991년에는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에서도 물러났다. 아바도와 빈 필과의 관계는 베를린 필에 선임되기 이전부터 미리 잡혀있던 공연과 녹음 계획을 다 소화한 이후에는 거의 단절되고 말았고 아바도가 죽을 때까지 회복되지 못했다. 보통 트러블이 생기더라도 수년 내지 10년 정도 지난 후에는 관계가 회복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2] 아바도처럼 죽을 때까지 관계가 끊긴 것은 이례적이었다. 때문에 아바도는 전후 빈 국립 가극장의 감독을 역임했던 역대 지휘자들 중에서 빈 필의 명예지휘자 또는 명예회원으로 위촉되지 못한 유일한 지휘자가 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2.3. 90년대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 선출'''
1989년 베를린 필의 수장으로 있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직책을 사임하고 몇 달 후에 세상을 뜨자, 그해 10월 8일 베를린 필은 민주적인 투표 방식에 의한 상임 지휘자 선출을 도입해 아바도를 상임 지휘자로 뽑았다. 투표에 앞서 단원들 간의 오랜 의견 교환이 있었으며, 투표 당일에도 하루 종일에 걸친 난상 토론 끝에 어느 정도 의견의 합의를 본 후 투표를 실시했다고 한다. 베를린 필의 차기 지휘자로 거론된 인물은 여럿 있지만 다니엘 바렌보임, 로린 마젤, 리카르도 무티, 오자와 세이지 등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었다. 막판에는 바렌보임과 마젤의 양자 대결로 압축되었는데, 양 후보를 지지하는 단원들 간의 대립이 워낙 첨예해서 바렌보임이나 마젤이 될 경우 퇴단하겠다고 선언하는 단원들이 상당수 있을 정도였다. 바렌보임과 마젤에 대한 단원들의 호불호가 너무 강해서 도저히 타협점을 찾을 수 없게 되자 제3안으로 뜬금없이 아바도가 거론되었다. 불과 몇 개월 전에 아바도와 베를린 필과 브람스 교향곡 3번을 공연했는데, 이때 리허설에서 아바도의 민주적인 지휘 방식이 단원들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3] 대립각을 세우던 단원들은 결국 아바도로 타협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아바도를 선택한 베를린 필의 결정에 대해서는 세계 언론은 물론 아바도 본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당시 성음 라이센스 음반으로 클래식을 접하던 국내음악애호가들에게도 아바도의 지명은 충공깽이었음은 물론이다.[4]
뜬금없는 아바도의 선출은 세계는 물론 아바도와 베를린 필 당사자들에게도 놀라움과 충격이었다. 베를린 필의 콘서트마스터 다니엘 스타브라바도 아바도의 선출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아바도 본인도 베를린 필의 직책은 예상 못했다고 하면서 바로 수락하지 않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물론 누구나 예상했던 것처럼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 직책을 거절하지 않고 수락했다.
한편 카라얀 사후 역시 공석이 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운영권도 사실상 장악했다. 카라얀 사망 직후 게오르그 솔티가 카라얀의 대타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지휘하게 되면서 한때 솔티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후임이 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솔티는 얼마 후 페스티벌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사실은 카라얀 사망 직후 카라얀 미망인 엘리오테가 아바도에게 접근하여 밀약을 맺었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아바도가 곧바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한동안 솔티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던 것은, 당시 아바도가 시카고 심포니, 뉴욕 필 등의 차기 지휘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느라 무척 바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아바도가 처음에 솔티를 밀어줬던 것은 당시 아바도가 가장 원하고 있었던 시카고 심포니 상임 자리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솔티는 자신이 숱한 트러블을 겪고 물러났던 파리 오케스트라의 후임이 된 바렌보임이 예상과 달리 15년 가량 장기집권하면 파리 오케스트라를 무탈하게 이끄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에 솔티는 시카고 상임 자리를 다니엘 바렌보임에게 물려주었다.
베를린 필에 취임한 아바도는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소홀히 했던 현대음악을 적극적으로 무대에 올렸고, 문학과 음악의 결합을 꾀하는 여러 기획 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악단의 활동상에 큰 변화를 주었다. 그러나 현대음악을 중시하는 시도는 베를린 청중들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왔다. 베를린 언론은 아무도 연주하지 않는 곡을 연주한다고 해서 그것을 높이 평가할 수 없다는 논평을 냈다. 이는 자주 연주되는 전통적인 레퍼토리와 승부해서 인정받아야 하는데 아바도가 그것을 피하고 있다고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아바도가 현대음악을 자주 지휘하며 베를린 시민들로부터 외면받는 동안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바렌보임은 베를린 필을 자주 객원 지휘하면서 베토벤, 브루크너, 바그너 등의 정통 독일 고전 낭만주의 음악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청중들과 평단으로 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와 더불어 문학과 접목하여 레퍼토리를 구성하려는 소위 "문화운동"을 시도했다. 거창한 구호와는 달리 단지 같은 소재를 취했을 뿐 음악적으로 완전히 동떨어진 작품을 함께 선곡하여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예를 들어 차이코프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 서곡과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동시에 레퍼토리로 올리는 식이었는데, 두 곡의 소재는 같지만 음악적 지향성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를 한 연주회에서 연주하는 것은 그다지 공감을 얻지 못했다. 아바도의 이런 문화운동에 대해 '디 차이트'지는 "세련된 밀라노의 교양인인 아바도가 야만적인 베를린 청중들을 얼마나 개화시켰나?"하고 비아냥거렸다.
취임 공연인 말러 교향곡 제1번이 큰 히트를 쳤지만 [5] 이후에 발매된 음반들은 그만큼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93년 베를린 필과의 두번째 말러 녹음인 제5번 교향곡이 큰 기대 속에 발매되었다. DG사가 새로 개발한 4D 방식의 녹음이라는 점을 앞세우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이 음반은 당시로써는 이례적으로 녹음한 당해에 편집을 끝내고 발매되었다. 이 음반은 유례없이 논쟁적인 리뷰들을 양산했다.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은 연주였지만, 문제는 말러 교향곡 제1번의 큰 성공으로 음악 애호가들이 기대가 너무 높아졌던 데 있다. 결국 아바도의 새 말러 5번은 번스타인과 빈 필의 음반과 비교당하며 난도질 당하고 말았다. 이어 발매된 빈 필과의 말러 교향곡 제2번 역시 아바도 자신의 이전 녹음만 못한다는 평을 받았다. 이후 아바도와 베를린 필의 녹음들은 리뷰어들에게 이전처럼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DG도 아바도 음반의 마케팅을 크게 줄여서 드보르작 교향곡 제9번과 같은 대작이 소리소문 없이 발매되기도 했다.[6]
음반 판매 실적이 좋지 않자 DG와의 관계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1994년에는 소니와 계약을 맺고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 모차르트 교향곡 등을 녹음했으나 그다지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는 동안 본진이었던 DG와는 관계는 악화되었다. 80년대 지휘자 왕국이었던 DG는 간판 아티스트였던 카라얀번스타인이 차례로 타계했고,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7], 다니엘 바렌보임[8], 오자와 세이지[9]가 타사로 이적하면서 아바도는 제임스 레바인과 함께 DG의 간판 아티스트가 되었다. 그러나 DG는 아바도라고 해서 다른 소속 아티스트와 다른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DG는 이적한 오자와를 대신해서 아시아 시장과 프랑스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신예 정명훈을 영입해서 키우고 있었는데 정명훈에게도 아바도와 같은 개런티를 지급한 것이 아바도의 심기를 크게 거슬렀다.[10] 마침내 1997년 아바도는 DG와 완전히 결별을 선언하고 EMI와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EMI에서 발매된 음반은 베를린 필의 음향을 잘 살리지 못했다는 혹평을 받았고, 결국 몇 개월 후에 DG로 조용히 다시 돌아왔다.
'''관계 악화와 재계약 포기'''
음반 판매고의 급감은 베를린 필과도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카라얀 시절에 베를린 필 단원들은 음반, 영상물 취입 및 카라얀이 음악감독으로 있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출연하면서 본봉의 다섯배 가량의 부수입을 올렸다. 카라얀 시절 1년에 평균 25개 정도 발매되던 음반은 아바도 시절 연 3회 정도로 급감했다. 수입이 급감하자 여러 단원들이 베를린 필을 퇴단하여 교수나 솔로이스트로 전향했다. 특히 1992년~1993년에는 관악기 수석들이 대거 퇴단하여 싹 물갈이 되었다.[11]
평론가들 뿐만아니라 단원들도 베를린 필의 중후한 음색을 희석시키는 아바도의 해석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리허설에서 아바도가 금관악기와 팀파니 소리를 줄이라고 지시하면 단원들은 악보에는 포르테시모로 써있다고 항변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베를린 필의 콘서트마스터를 역임한 다니엘 스타브라바는 이탈리아식의 밝고 가벼운 해석을 추구했던 아바도의 해석에 다수의 단원들이 동의하지 않았고 이때문에 알려진 바와 같이 음악적으로 자주 부딪혔다고 술회했다. 베를린 필 금관단원들도 훗날 인터뷰에서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 시절 강렬한 금관사운드를 추구했던 베를린 필의 전통을 아바도가 evil, enemy로 치부하고 완전히 부정했던 일종의 암흑기였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당시 리허설 중에 단원들과 고성이 오갔다는 소문들이 밖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아바도의 민주적이고 탈권위주의적인 리허설 방식은 처음에는 단원들의 호응을 얻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단원들은 이러한 방식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바도는 종종 스스로 템포를 결정하지 못하고 리허설에서 여러 템포로 시도해 본 후 단원들에게 어떤게 좋을지 물어보곤 했는데, 이런 방식은 오히려 단원들의 불만을 유발했다. 지휘자 본인이 스스로 템포를 결정하지 못하는 태도는 단원들의 신뢰감을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리허설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기 때문에 단원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1997년에 이르러서 베를린 필과 아바도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1997년 12월 20일자 '프랑크푸트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지 기사는 베를린 필과 아바도의 리허설 장면을 폭로하여 파장을 일으켰다. 연습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하냐고 아바도에게 따지는 단원, 아바도의 리허설 와중에 잡담과 토론하는 단원, 리허설 시간에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편지를 쓰는 단원 등의 모습을 공개한 기사가 나오자 아바도의 리더쉽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면서 베를린의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얼마 후, 설상가상으로 베를린 필 측이 아바도의 임기가 끝나는 2002년 이후에 더이상 재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는 보도가 흘러 나왔다. 이전까지 베를린 필의 모든 상임지휘자는 거의 임기가 종신이었기 때문에 베를린 필이 아바도와 더 이상 재계약하지 않겠다는 이 보도는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보도가 나간지 불과 며칠 후인 1998년 2월 13일, 아바도는 두번째 임기가 끝나는 2002년 자진해서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2.4. 2000년대 이후


아바도가 재계약 포기를 선언한 이후 음악 애호가들의 관심은 누가 차기 지휘자가 될 것이냐에 쏠렸고, 베를린 필과 아바도의 관계는 무관심 속에서 서서히 수습국면으로 접어들었다. 2000년 7월에는 위암 수술을 받았다. 위의 3/4를 절제하는 대수술이었다. 이로 인해 수 개월 간의 공백기를 가져야만 했다. 2000년 초, 위암 수술에서 회복하고 복귀하자마자 아바도는 베렌라이터 신판을 사용하여 현대악기에 원전연주의 기법을 시도하여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녹음했고, 이듬해 초에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영상물로 다시 촬영했다. 이 음반과 영상물은 거의 동시에 발매되었는데, 영상물에서 암수술 이후 아바도의 완전히 달라진 수척해진 외모에 많은 음악 애호가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12] 위암 수술 이후 베를린 필과의 적대적인 관계도 다소 회복되어 베를린 필과 마지막 두 시즌은 별 탈 없이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베를린 필 퇴임 후에는 신생 오케스트라를 결성하여 왕성한 연주 활동을 이어갔다. 2003년에는 스위스루체른을 본거지로 하는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인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2004년에 이탈리아 볼로냐를 거점으로 하는 오케스트라 모차르트를 결성해 이 악단들을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는 구스타프 말러 청소년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대다수를 이루었지만 수석진은 베를린 필이나 밀라노 스칼라좌, 로마 산타 체칠리아 등의 전현직 수석들을 임시로 불러와서 구성했다.[13] 또 나탈리 구트만, 하겐 쿼텟 등도 참여했다. 주로 낭만에서 현대에 이르는 대작들 위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여 8~9월 페스티벌 기간 동안 지휘했다. 말러, 브루크너 등 규모가 큰 작품들의 영상을 다수 남겨 쉽게 실황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오케스트라 모차르트라는 악단을 구성했는데 이 악단 역시 수석진은 밀라노 스칼라, 로마 산타 체칠리아 등에서 임시로 데려온 단원들이었다. 바로크에서 초기 낭만에 이르는 곡들을 시대연주와 절충한 방식으로 연주하는 시도했다.
베를린 필 사임 후 이렇게 여름 페스티벌용 비상설 오케스트라인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비상설 소규모 체임버 오케스트라인 오케스트라 모차르트를 지휘할 뿐 따로 고정적인 오케스트라의 직책을 맡지 않아 스케줄이 '''매우''' 널널한 상황이었으나 의외로 메이저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영입 제의 소식도 없고 하다 못해 객원 지휘자로 초빙되는 것도 의외로 드문 안타까운 상황이 이어졌다.
겨울철에는 위암 후유증으로 따뜻한 남미 지역에서 생활하곤 했는데, 이 때 베네수엘라의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되고, 당시 혜성같이 나타났던 구스타보 두다멜과 인연을 쌓기도 했다.[14] 또 1시즌에 한번씩 전임자 예우로서 베를린 필을 객원 지휘하여 말러의 6번 교향곡, 대지의 노래 등 음반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만년에는 위암 수술 이후로 건강 상태가 들쑥날쑥해지면서 연주회 일정의 취소나 축소가 잦아졌고, 특히 2013년 8월 루체른 페스티벌에서의 연주회 이후 갑작스럽게 위암이 악화되면서 연주회 일정이 계속해서 취소가 되었다. 그리고 2014년 1월 20일에 볼로냐에서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내 병은 끔찍했어. 그러나 결과가 꼭 나쁘지만은 않았지. 내 안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말이야. 마치 위를 잃은 대신 내면의 귀를 갖게 된 것 같았다네. 그 느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설명할 순 없지만. 난 아직도 그때 음악이 내 삶을 구했다고 느낀다네."'''

― '''클라우디오 아바도''', 사이먼 래틀에게 한 말[15]


3. 주요 수상 경력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상 (1958)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니콜라이 금메달 (1980)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훈장 대십자장 (1984)
오스트리아 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 금장 (1994)
프랑스 레지옹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1급) (1994)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1994)
빈 시 명예반지 (1994)
그래미상 클래식 독주와 관현악 협연 부문 (1997)
독일 국제청소년음악재단 뷔르트상 (2001)
독일연방공화국 공로훈장 대십자성장 (2002)
독일 음악비평가상 (2002)
영국 로열 필하모닉 협회 금메달 (2003)
일본 타카마츠노미야 전하기념 세계문화상 (2003)
이탈리아 음악비평가상 (2003)
뒤셀도르프 키테라 음악재단 키테라상 (2004)
스페인 유디 메뉴인 음악상 (2006)
이스라엘 볼프 재단 볼프상 (2008)
이탈리아 상원 종신의원 (2013~14)

4. 음악 스타일


오페라로 유명한 이탈리아 출신 지휘자답게 이탈리아 오페라에 상당한 강점을 보였지만, 어릴 적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브루노 발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등의 레전설들이 출연한 여러 관현악 연주회를 실연으로 보고 자란 경험 때문인지 표준 독어권 레퍼토리에서도 상당한 실력자였다. 또 동향인 루이지 노노살바토레 스키아리노를 비롯해 피에르 불레즈, 칼하인츠 슈톡하우젠, 죄르지 리게티, 볼프강 림, 쿠르탁 죄르지, 베아트 푸러 등의 현대음악 작곡가들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여러 작품들을 초연 혹은 재연하는 등 현대음악 공연에도 적극적이었다.
전반적인 해석 기조는 시기에 따라 변화가 큰 편인데,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집하기 보다 각 시기별 유행하는 음악적 해석을 기민하게 따르는 것이 특징이다. 베토벤 이전 고전주의 음악에서 특히 유행에 민감한 편이지만, 유행을 덜 타는 후기 낭만주의 음악에서도 이런 점은 예외가 아니다.
템포 측면에서 시기 별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다양한 변화를 보이지만, 특유의 날카로움을 지양하면서 힘을 빼는 사운드를 추구하며 외성부와 내성부의 균형을 추구하는 음향적 특성만은 거의 일관되게 유지되는 편이다. 베를린 필 시절 리허설 때 여러 속도의 템포를 시도해가면서 단원들에게 어떤 템포가 더 좋은 것 같냐고 자주 물어봐서 단원들의 원성을 샀다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템포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요시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임을 알 수 있다. 많은 지휘자들이 음악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템포를 꼽는 것과 상당히 대조적인 점이다.
80년대까지는 전반적으로 20세기 초중반의 거장들이 확립한 전통을 따르면서, 그 가운데서 음향적인 측면에서 무게를 덜어내는 실내악 지향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때문에 젊지만 오히려 다소 보수적인 지휘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90년을 기점으로 당시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시대연주 스타일을 대거 수용하면서 해석의 큰 변화를 보이게 된다. 시대연주가 주로 베토벤 이전 음악을 다루기 때문에 고전주의 해석에서 큰 변화를 겪었다. 단적인 예로,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1980년대 후반에 빈 필과 만든 것과 2000년대 초반에 베를린 필과 만든 것을 비교하면 그 변화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후기 낭만주의에서는 변화의 폭이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와 90년대 이후 말러 등 후기 낭만주의 해석에서도 적지 않은 차이점이 발견된다.
과거의 지휘자들이 수시로 하곤 했던 악보의 변형 관행에도 엄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만은 않다. 2000년대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그 동안 통용되던 악보가 아닌 조너선 델 마 편집의 베렌라이터 신판 전집 악보를 사용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16] 그러나 아바도가 악보의 가필에 대해서 항상 완고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아바도가 악보 가필에 엄격했던 것은 그의 활동 중기에만 해당한다. 시대연주의 영향을 받기 전 젊은 시절은 물론이고, 만년에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연주한 베토벤에서도 관습적인 수정을 상당부분 적극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베토벤 교향곡 제3번 등에서는 1950년대 이후에는 거의 쓰이는 경우가 없는 사장된 호른 가필도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있다. 오케스트라 모차르트와의 베토벤 연주에서도 관행적인 가필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모차르트 레퀴엠 연주에서는 여러 판본을 혼합한 자신만의 판본으로 연주하였는데, 이는 연주의 다양성 측면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악보 자체에 수정을 가하는 것을 배격하는 원리주의자들에게는 크게 비판받을 일이다.
오페라의 경우에도 카라얀 등에 의해 4막판이 결정판으로 취급받던 돈 카를로스를 원전판 5막판으로 최초 공연하여 녹음하여 큰 화제를 모으는 등 악보의 원전을 매우 중시하는 지휘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역시 실상은 전혀 다른데, 그의 장기인 로시니의 오페라에서는 카라얀이나 토스카니니 같은 구세대 지휘자도 하지 않던 가필로 떡칠해서 공연하곤 했다.
주류 레퍼토리인 독일 고전 낭만주의 계열의 음악을 어느 정도 소화했지만 한계를 가지고 있다. 브루크너와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은 좀처럼 지휘하지 않았다. 특히 오페라 지휘자로써 활발하게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된 레퍼토리는 이탈리아 오페라 위주로 편중되어 있으며,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 특히 바그너, 슈트라우스의 작품은 거의 지휘하지 않았다. 바그너 중에서는 가장 낭만적인 로엔그린만이 디스코그라피에 남아있을 뿐이다. 브루크너 교향곡도 드물게 지휘했는데, 브루크너의 대표작인 8번은 끝내 평생 지휘하지 않았다.
아바도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분야인 이탈리아 오페라에 있어서도 의외로 레퍼토리가 편중되어 있는데, 거의 베르디에 집중되어 있다. 베를린 필 재직 시절도 콘서트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이 베르디를 연주할 일이 거의 없지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물론, 발트뷰네 콘서트, 송년음악회 등에서 꾸준히 베르디를 지휘했다. 그밖에 때때로 로시니의 작품을 지휘하였지만, '''의외로 푸치니를 거의 전혀 지휘하지 않았다. 그의 방대한 디스코그라피에 푸치니가 전혀 없다!!!'''
청소년 음악 교육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는데, 생애 란에서도 언급했지만 청소년 관현악단을 두 개나 만들 정도로 이 분야에 상당한 열의를 보였다. 그리고 해당 악단의 단원들이 나이가 차 퇴단하자, 이들 중에서 단원을 뽑아 유럽 실내 관현악단(유럽연합 청소년 관현악단 출신)과 말러 실내 관현악단(구스타프 말러 청소년 관현악단 출신)이라는 두 실내 관현악단을 결성하면서 연속성을 가지게 만들기도 했다. 또 베네수엘라의 청소년 관현악 운동인 엘 시스테마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직접 현지로 가서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을 비롯한 악단들을 지휘하기도 했다.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오케스트라 모차르트 역시 자신이 조직한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젊은 단원을 주축으로 한 후 밀라노 라 스칼라좌나 베를린 필의 수석 등을 임시로 데려오는 식으로 해서 구성했다.
음악회에서 극적인 효과를 싫어하는 점잖은 이미지로 알려져 왔다. 특히 LD로 발매되어 화제를 모았던 베를린 필 취임 공연의 말러 교향곡 제1번 리허설에서 악보에 지시된 대로 호른 단원들이 기립하자 기립하지 말고 벨만 들고 연주하라고 지시한 장면이 회자되면서 그런 이미지가 더욱 각인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성향이 달라져 콘서트에서 다른 지휘자들이 잘 시도하지 않는 작위적인 효과를 자주 사용하였다. 93년 베를린 필 송년음악회에서는 합창석에 기둥처럼 솟은 높은 단을 만들어 성악가들이 그 위에 서서 부르도록 하여 시각적으로 큰 효과를 주었다. 또 말러 교향곡 3번 마지막 악장에서 금관악기에 검은 모자(베를린 필)나 보자기(루체른 페스티벌)를 씌워 연주하게 한 경우, 말러 교향곡 제9번과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6번의 마지막 악장, 모차르트 레퀴엠 등에서 무대 조명을 어둡게 하고 연주자 보면대에 스탠드를 켜서 연주하게 한 경우, 말러 교향곡 제2번과 제5번 등에서 악보 지시에 관계 없이 호른 단원 등을 기립시켜 연주하게 한 경우 등이 있다.

5. 음반사


음반 녹음은 주로 도이체 그라모폰(DG)에서 많이 했지만, 필립스나 CBS(이후 소니 클래시컬), 데카, EMI, RCA 등 여타 메이저 음반사들에서 몇몇 음반을 내놓기도 했다.
대다수의 음반들은 DG에서 녹음되었다. 196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성공을 거둔 직후 DG와 계약을 맺었다. DG측에서 전략적으로 키운 영건이다. 아직 이탈리아에 활동영역이 한정되어 있던 시절부터 DG는 아바도를 베를린 필, 빈 필, 런던 심포니, 드레스덴 슈타츠카펠 등 유수의 오케스트라들과 연결하여 음반 녹음을 진행했다. 상술한 두 차례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17].[18], 베를린 필과의 브람스 교향곡 전집, 런던 교향악단 재임기에 남긴 멘델스존 교향곡 전집, 유럽 실내 관현악단과 남긴 슈베르트 교향곡 전집, 베를린 필과 빈 필, 시카고 교향악단 등과 녹음한 것을 합친 말러 교향곡 전집 등 굵직한 교향곡 전집 프로젝트 음반들도 모두 DG에서 녹음되었다. 오페라 쪽에서도 베르디의 맥베스, 돈 카를로, 가면무도회, 시몬 보카네그라, 아이다, 팔스타프, 로시니의 신데렐라, 세비야의 이발사, 알제리의 이탈리아인, 랭스 여행, 슈베르트의 피에라브라스, 무소륵스키의 호반쉬나 등이 모두 DG에 속해 있다.
초기에 DECCA에서 몇 장의 음반을 낸적이 있으나 곧 DG와 전속계약을 맺으면서 DECCA에서는 더 이상 음반을 내지 않았다.
90년대 후반 EMI에서 음반을 낸 적이 있다. 90년대 DG와 마찰이 계속되었는데, DG가 아시아와 프랑스 시장 확대를 위해 전략적으로 키우고 있었던, 당시에는 듣보나 마찬가지였던 정명훈과 거의 동등한 조건이어서 명색이 베를린 필의 수장인 아바도의 불만이 컸다는 풍문이 있었다. 계속된 마찰 끝에 97년 결국 DG와 계약을 파기하고 돌연 EMI로 완전 이적했다. 당시 음악계에서 아바도와 베를린 필의 생소한 빨간 딱지 음반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도 가쉽거리였다. 결국 몇 개월 후에 DG측과 재계약을 채결하고 다시 돌아왔다. 결국 DG의 재계약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EMI를 이용해 먹은 감이 있다.
80년대말에서 90년대초에 필립스에서 음반을 낸적이 있다. 모두 동거녀였던 바이올리니스트 빅토리아 뮬로바와 음반을 내기 위해서였다. 뮬로바의 전속 음반사가 필립스였다.
업계 불황으로 주요 인력이 떠나버리면서 DG 역시 2000년대부터 녹음상태가 열악한 음반이 나오고있는데 아바도의 녹음도 베를린 필 상임을 맡은 시점부터 녹음상태가 좋지 못하다. 그래도 연주 자체는 좋기 때문에 감수하고 들을 가치는 있는 편.

6. 사생활


사생활 관리에 매우 민감하여 본인과 관련된 사생활이 언론에 알려지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때문에 그의 정확한 가족 관계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나마 알려진 사생활은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바이올리니스트 빅토리아 뮬로바와 동거하면서 두집 살림했다는 정도다. 이것도 뮬로바가 워낙 유명 바이올리니스트라서 세간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혼외자녀를 포함하여 현재까지 알려진 자녀는 총 네 명이다.
첫번째 부인인 가수 Giovanna Cavazzoni과는 1956년에 결혼하여 1968년에 이혼했다. 첫번째 결혼기간 동안 아들과 딸을 한명씩 두었으며, 아들 다니엘레 아바도는 오페라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엔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한 추모 분위기 때문에 몸값이 상종가를 치고 있다고 한다.
두번째 부인인 Gabriella Cantalupi과의 결혼생활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한 명의 아들이 있다.
두번째 결혼기간 중에 1986년부터 91년까지 5년간 빈에서 26세 연하의 미모의 바이올리니스트 빅토리아 뮬로바와 동거했다. 뮬로바는 23세였던 1983년 단신으로 소련을 탈출하여 서방으로 망명하여 가족들과 생이별하고 홀로 미국과 유럽을 떠돌다가 84년부터 빈에 거주하고 있었다. 빈 음악계의 정점에 있던 50대의 빈 국립오페라 음악감독과 가족과 생이별하고 떠돌던 20대의 신예 바이올리니스트와의 만남이었다. 아바도는 뮬로바와 녹음을 위해 뮬로바와 계약되어있던 필립스에서 음반을 내기까지 했다. 아바도가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된 이후인 91년까지 둘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그러나 뮬로바가 임신한 후 둘의 관계는 깨졌다. 뮬로바가 "아바도가 떠나갔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상황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아바도는 임신 중이던 뮬로바를 5년 동안 함께 살았던 자기 집에서 내쫒은 후 아예 집을 팔고 베를린으로 이사했다. 뮬로바는 아바도가 떠난 후 홀로 아들을 출산하고 미샤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바도는 미샤의 양육비를 지속적으로 지급하여 법적인 의무는 다하였지만, 아들에 대한 어떠한 인간적인 접촉도 시도하지 않았다. 뮬로바 사이에서 난 아들인 미샤는 현재 Misha Mullov-Abbado라는 이름으로 재즈 뮤지션으로 활동 중이다. 성인이 된 미샤의 인터뷰를 보면 그는 태어나서 평생 한번도 아버지와 제대로 만나본 적이 없다고 한다.[19] 90년대 초 한 방송사에서 촬영된 뮬로바의 다큐멘터리에는 가족도 친구도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연주자 생활을 병행하는 그녀의 딱한 처지가 잘 드러나 있다. 근래의 뮬로바의 인터뷰를 보면 아바도와 헤어진 이후에는 완전 관심 끊고 지내는 듯. 아바도의 건강 문제 등에 대해서도 일반 음악애호가들보다도 훨씬 늦게 알게 된 듯하다.
아바도 본인이 자신의 사생활을 철저히 숨기기 위해 무척 많은 노력을 했기에 빅토리아 뮬로바가 짧게 언급한 내용 이외에 그의 사생활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뮬로바와의 짧은 일화만으로도 사생활 측면에서 막장스럽고 이기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소 문학에 깊은 조예를 강조해오며 세련된 이미지를 가꿔왔고,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들을 배려하는 사회적 정치적 참여 활동을 해오며 긍정적인 이미지를 연출해 왔지만, 이런 표면적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온 표리부동한 인물이었다.
아바도가 20년 동안 활발하게 활동했던 빈에서 92년 이후 빈 필과 빈 국립 가극장에 전혀 초청되지 못했던 배경에는 빈 필 및 빈 국립가극장과의 불화도 있지만, 뮬로바를 차버리면서 빈 대중들에게 파렴치한 남자의 이미지가 생겨 더 이상 무대에 오르기 어려웠던 측면도 있다. 유럽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면서 유명 음악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마치 연예인처럼 관심을 받는 빈에서 아바도의 행동은 충분히 매장되고도 남을 만했다.
어릴 적에는 음악 외에도 독서도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콰시모도 문하의 문학 수업도 들었다고 한다. 생전에 남긴 인터뷰나 에세이에서 카프카마키아벨리, 도스토옙스키 등 남긴 명문 등을 인용하기도 했다. 베를린 필과 개최한 여러 종합예술 지향 공연이나 빈 모데른 같은 현대예술제에서도 타르콥스키의 영화를 테마로 하거나 괴테셰익스피어의 극음악을 공연하면서 관록있는 배우들인 브루노 간츠[20]나 케네스 브레너, 주디 덴치 등을 기용해 실제 연극처럼 대사가 곁들여진 음악을 들려주는 등의 면모도 이러한 성격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으로는 좌파 성향이었는데, 라 스칼라의 음악 감독 부임 후 오페라극장 노동조합이탈리아 공산당, 극장장 등의 협력을 얻어 가난한 시민들에게도 저렴한 가격에 공연을 볼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고 공개 문화 포럼을 개최해 비음악인들의 예술 토론을 활성화하는 시도도 했다. 또 베를린 필의 전임자들이었던 푸르트벵글러나 카라얀과 달리 사회적인 사건에 대한 공개적 발언도 자주 했다. 하지만 토스카니니처럼 쉽게 노발대발하는 성격은 아니었고,[21] 뭔가 꼬인 일이 있으면 잠시 온건한 모습을 보이며 혼란을 가라앉힌 뒤 자신의 주장을 조용히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다. 이런 점이 베를린과 빈, 런던 같은 대도시에서도 별로 꿀리는 기색 없이 큰 직책을 맡을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7. 기타


한국에는 단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다. 1973년 3월 27일 ~ 28일 이틀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화여대 강당에서 내한공연을 했다. 해외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이 무척 드물었던 시대였던데다가 그것도 탑 클래스 오케스트라 최초의 내한 공연이었기에 국내 음악애호가들이 엄청난 관심과 기대를 모았던 공연이었다. 당시 서울의 대표 공연장이었던 서울시민회관이 화재로 전소된 후였기 때문에 서울 도심에서 가까우면서 규모가 큰 이대 강당에서 공연을 했다. 아바도와 빈 필의 내한공연에 대한 평은 좋지 않았는데, 특히 베토벤 영웅에 대한 평이 안좋았다. 정관호씨가 레코드음악에 쓴글에는 왠 꺼다리 미식축구 선수 같은 지휘자가 나와서 마구 흔들어대다가 들어가버렸다고 혹평했다. 아직 아바도의 이름이 국내에 알려지기 전이기도 해서 빈 필이라 잔득 기대했는데 왠 듣보잡이 지휘하냐는 반응이었는 듯. 사실 아바도가 10년 후 빈 필과 녹음한 영웅 음반을 들어보면 명연주로 알려진 카라얀, 등의 웅장한 영웅과는 거리가 있는 해석이라 해외 평론가들로부터도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아바도 또한 이 내한공연에 대해 매우 안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아바도가 훗날 베를린 필에 취임한 후 우리나라 클래식 매거진 "객석"과 가진 인터뷰에 73년 내한 공연에 관한 내용이 있다. 아바도는 당시에 포장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진흙이 질퍽한 길을 지나 공연장까지 갔던 일을 회상했다. 또 공연장(이화여대 강당)이 철길 옆에 있어서, 공연 중에 기차가 지나가서 홀이 흔들렸다고 회상했다. 베를린 필과 내한할 계획이 있냐는 객석의 질문에 대해서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카라얀이 내한 후 한국에 대해 무척 좋은 인상을 가지고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한국에서 다시 공연하고 싶다고 몇 차례 말한 적이 있는 반면, 아바도는 내한 공연 의사가 있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1]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가장 대표적인 레퍼토리인 베르디 작품의 지휘.[2] 카라얀이 빈 국립 가극장을 사임한 후 13년만에 복귀한 것,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에서 낙선한 마젤과 레바인이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며 베를린 필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나 수년 후 복귀한 것,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빈 필 정기연주회 리허설 중 자리를 박차고 나와 잠적한 후 4년 후 복귀한 것 등 여러 예가 있다.[3] 아바도 본인도 이것이 자신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라 말한 바 있다.[4] 당시 DG, DECCA, Philips 세 음반사를 보유하고 있던 폴리도어와 라이센스계약을 맺었던 성음음반은 카라얀, 뵘, 번스타인, 솔티, 쿠벨릭 등 네임밸류있는 지휘자 중심으로 음반을 발매했다. 그래서 이들과 레퍼토리가 중복되던 아바도의 음반은 라이센스로 잘 발매되지 않았다. 또한 일본에서 발매된 음반추천서적이 몇년이나 지나서야 번역되어 들어오던 터라 국내 애호가들에게 아바도는 잘 거론되지 않던 지휘자였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내한하여 국내 음악계에 큰 센세이션과 충격을 일으켰던 것이 이로부터 불과 5년 전이었음을 상기하자.[5] 큰 히트 정도가 아니라 역사에 남을 전설적인 공연으로 회자된다.[6] 90년대 후반부터 때마침 음반계의 불황이 닥쳐 메이저 음반사들은 큰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7] 소니 클래식스로 이적[8] 텔덱으로 이적[9] 필립스로 이적[10] 당시 DG 입장에서 아시아는 유럽, 미국과 더불어 3대 시장이었고, 특히 세계 2위인 일본 시장과 7위 한국 시장에서의 매출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정명훈은 프랑스가 프랑스 대혁명 200주념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야심차게 창단한 바스티유 오페라의 초대 음악감독이었다. DG가 정명훈을 영입한 것은 아시아 시장과 더불어 프랑스 시장을 노리기 위해서였다.[11] 로타어 코흐, 게르트 자이페르트, 칼 하인츠 쵤러 등이 동시에 퇴단했다. 하지만 이들 중 자이페르트와 쵤러는 베를린 필 하모닉의 단원 정년 퇴직 시기인 60대 중반이 되어 퇴단 한 것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베를린 필에서 오랫동안 콘서트마스터를 맡아온 미셀 슈발베도 66세의 나이에 베를린 필을 떠났다.[12] 이 싸이클은 DG를 통해 음반화되었으나, 현재는 폐반된 상태. 이유는 아바도 본인이 당시 베를린필과 로마에서 진행했던 베토벤 교향곡 전곡 실황이 더욱 본인의 뜻이 잘 표현된 연주라고 여겼기 때문. 현재 구할 수 있는 아바도-베를린필의 베토벤 교향곡 싸이클은 바로 이 로마 실황이다.[13] 알레시오 알레그리니, 알브레히트 마이어, 엠마뉴엘 파위, 자비네 마이어 등[14] 한 공연에서 아바도가 1부에는 베토벤의 삼중협주곡, 2부에는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2부가 시작될 때 청중석에 앉아있던 두다멜에게 지휘봉을 넘긴 적이 있다고 한다. 물론 사전에 그렇게 하기로 조율된 것이지만, 바통을 넘긴다는 상징적인 쇼맨십[1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7728&cid=59001&categoryId=59004[16] 아바도 이전까지 베렌라이터판은 대개 원전연주 단체가 택하고 있었지만, 아바도 이후로는 현대악기를 사용하는 일반 악단들에서도 채택 빈도가 늘기 시작했다.[17] 사실 전집은 80년대에 빈필과 녹음한 것, 베를린 필과 2000년에 베를린에서 녹음한 것, 그리고 역시 베를린 필과 2001년 로마에서 실황으로 녹음한 것으로 3가지이다. 그 중 베를린에서 녹음한 음반은 아바도의 의견에 따라 폐기되었다.[18] 물론 전집은 3가지 다 구할 수는 있다.[19] 하지만 Abbado라는 이름의 후광이 그의 뮤지션 생활에 큰 간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에 아버지에 대해 험한 말은 인터뷰에서 자제했다.[20]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다미엘을, 몰락에서 히틀러를 열연해 유명하다.[21] 이는 아바도가 젊은 시절에 토스카니니의 리허설에 참석한 경험에 기인했다. 아바도는 토스카니니가 단원들을 다루는 모습을 보고 질색하며, 자신은 단원을 정중하게 대하기로 결심했다고 본인이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