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사와라 미치히로
1. 개요
일본의 전 야구 선수. 현재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군 수석코치.
타격 준비자세에서 검객이 칼을 뽑듯 배트를 쭉 뻗어주는 특유의 타격 준비자세와 호쾌한 스윙, 거기에 수염을 휘날리던 외모까지 합쳐져 '검객' 혹은 '미스터 풀스윙'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갓츠'(Guts)로 불리는 근성 넘치는 플레이로도 명성이 높았다. 2000년대 일본을 대표했던 강타자 중 한 명이였다.
선수 시절 등번호는 닛폰햄 파이터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엔 2번,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엔 36번을 달았다.
2. 선수 경력
2.1. 프로 데뷔 이전
고교 시절[5] 엔 주로 포수, 2루수를 보았고 현내 코시엔 예선대회 결승까지 진출한 적은 있었지만 코시엔 진출은 단 1번도 없었던, 무명에 가까운 선수였다. 졸업 후 NTT 칸토에 입사해 팀내 사회인 야구팀에서 주전 포수 겸 중심타자로 활약했으며, 1996년 도시대항 야구대회에 신일본제철 키미츠 측의 보강선수로 출장하기도 했다. 그 후 1996년 드래프트 3위로 닛폰햄 파이터즈에 지명받으며 프로에 데뷔한다.
2.2. 닛폰햄 파이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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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도쿄돔을 홈 구장으로 사용했던 닛폰햄 파이터즈에 입단한 오가사와라는 데뷔 후 첫 2년간은 포수로 활동했지만 출장기회를 많이 잡지는 못했는데, 1999년부터 전년도에 은퇴한 오치아이 히로미츠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1루수로 전향하면서 타격 포텐이 폭발. 이해 처음으로 규정타석에 도달함과 동시에 타율 .285, 25홈런 83타점을 기록하면서 단숨에 주전 자리를 확보하며 닛폰햄의 중심타자로 정착한다. 1999~2000년에는 2번 타자로, 2001년에는 1~3번을 오가며 최다 안타 1위(2000~2001년)와 20-20(2000년) 등을 달성했다.
2002년 주전 3루수이자 붙박이 3번 타자이던 카타오카 아츠시가 FA로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면서 오가사와라는 3번 타순에 정착하여 타율 0.340로 수위타자에 올랐다. 3루수로 전향한 2003년, 타율 0.360를 기록하며 2년 연속 수위타자를 차지하는 동시에 골든글러브를 수상.
팀이 홋카이도로 연고지를 옮긴 2004년에는 2004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하여 동메달을 획득했고, 2006년에는 3월 WBC 초대 챔피언에 오른 이후 정규시즌에 돌입하여 '''홈런왕, 타점왕, 리그 MVP'''까지 차지하면서, 팀에 '''44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6] 을 안겨주었다.
2.3.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
2006년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하자 닛폰햄으로부터 잔류 요청을,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인기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입단 권유를 받았고[7] 검토 끝에[8]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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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에 입단하면서 수염도 깔끔하게 면도를 하게 되는데, 이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 선수는 수염을 기를수 없다'는 구단의 규정 때문. 사실 당시 오가사와라를 애타게 원하던 요미우리는 '''"너님은 특별 케이스로 수염 안 깎아도 좋으니 제발 오셈"''' 이라고 했으나, 오가사와라는 이왕 요미우리의 일원이 된 이상 자신이 팀에 맞추어야 한다면서 스스로 면도를 했다고 한다. 허나 이건 반쯤 언플이고 요미우리 구단은 수염 기르는것조차 허락 안하는 구단이라 한명을 예외로 봐주면 나중에 다른 선수들도 그런 요구를 할게 뻔하기 때문에 결국은 깎게 했을 것이다.[9]
그런 팀의 기대에 부응하듯 이적 첫 해인 2007년, 요미우리의 리그 우승에 공헌하며 2년 연속으로 MVP를 수상했다. 이로서 일본프로야구 사상 두번째로 '''양대리그 MVP'''를 차지한 선수가 되었다.[10]
2008~2010년에도 3할-30홈런을 기록하며 2009년 요미우리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주로 3루수를 맡았지만 1루수로도 자주 기용됐다. 3루 405경기, 1루 206경기.
이러한 뛰어난 활약에 힘업어 2006년 초대대회에 이어 2009 WBC에도 일본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대회내내 주전 1루수로 활약한 결과 일본은 대회 창설 이후 두 대회 연속 석권이라는 대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이적 후 성공적인 4년[11] 을 마무리하고 오가사와라는 FA 권리를 재취득할 수 있게 되었으나 행사하지 않고 요미우리에 잔류한다.
이에 구단도 최고 수준의 연봉인 4억3000만엔에 2년 계약으로 보답했다.
2.4. 2011년 이후
2011년부터는 붙박이 1루수로 확정되었다. 오가사와라의 수비부담도 덜어주는 한편 고졸 3년차 거포 유망주 오타 다이시의 3루 주전 정착을 위한 포석. 그러나 오가사와라는 부진에 빠지며 6번, 7번, 8번 타순에 배치되는 등 어려움을 겪는다. 8월에 들어선 그나마 타격감을 올리며 3번 타순을 되찾기도 했지만, 최종 성적은 타율 0.242, 5홈런. 부진 속에서 명구회 가입 기준이 되는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34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타율 0.152, 0홈런의 초라한 성적을 거뒀다. 나이도 39세에 2년 계약 종료시점이라 은퇴 가능성도 점쳐졌지만 오가사와라는 현역 생활 연장을 선언했고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연봉 최대 삭감(3억 6천만엔 삭감)을 감수하며 재계약에 성공했다.#
2013년 6월에는 깜짝 기용으로 굿바이 쓰리런 홈런을 쳐내기도 했다.[12] 하지만 이 홈런 이후로 다시 침체기에 빠져들었으며, 이 홈런이 그의 2013시즌 처음이자 마지막 홈런이 되고 말았다. 이후 FA를 선언했다.[13]
2013년 11월 26일 계약기간 1년 연봉 3000만엔에 주니치 드래곤즈와 계약했다. 주니치와 계약하자마자 수염을 다시 길렀다. 그리고 2014년에는 나이 때문에 선발출장보다는 주로 대타나 경기 도중 교체 식으로 출장하며 83타수 25안타(타율 0.301)를 기록했다. 비록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고 작년에 이어 1년에 홈런이 1개밖에 안 나오는 등 노쇠화로 인해 장타력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아쉬운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당시 일본프로야구의 무시무시한 투고타저에도 불구하고 4년만에 3할에 복귀하며 대타요원으로 그럭저럭 쏠쏠한 활약을 해 2015년 재계약에 청신호를 켰다.
2015년에도 대타요원으로서 활약. 장타는 거의 때려내지 못했지만(홈런 없이 2루타만 3개) 시즌 초에는 타율이 3할 9푼(!)까지 오르는 등 최종적으로 51타수 15안타(타율 0.294)로 대타요원 치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시즌 후 은퇴를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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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21일 요미우리전에서 현역 은퇴경기를 치뤘다. 4회 내야안타로 마지막 안타를 쳤고, 7회 프로 마지막 타석에서 좌익수 플라이 아웃. 그리고 경기 종료 후 전 소속팀이었던 요미우리와 현 소속팀인 주니치 양팀 선수단 모두에게 헹가레를 받는 인상적인 은퇴식을 끝으로 현역생활에서 은퇴했다. 은퇴 소감을 이야기 할 때 본인의 프로 데뷔 첫 안타가 내야안타였는데 마지막 안타도 내야안타로 기록하게 되어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소감을 밝혔다.
프로 통산 성적은 '''1992경기 출장, 6828타수 2120안타, 378홈런 1169타점 63도루, 타/출/장 .310/.389/.540 OPS .932'''
2.5. 은퇴 이후
은퇴하자마자 2016년엔 마지막 소속팀 주니치 드래곤즈 2군 감독으로 부임했는데, 2016년 팀이 암흑기에 빠지며 타니시게 감독이 중도경질, 오가사와라도 감독 후보 중 하나로 꼽혔으나 아직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지 반년 된 오가사와라에게는 짐이 무겁다는 판단으로 모리 시게카즈 수석코치가 뒷수습을 위해 감독대행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대로 모리가 정식 감독으로 취임해 버리며 오가사와라는 일단 좀 더 기다리게 되었다.
여튼 2군 감독인 만큼 유력한 모리 이후 차기 사령탑 후보 중 하나로 꼽히고 있었고 2018년 모리 감독의 계약이 끝나며 다음 감독 1순위로 꼽혔는데, 팀은 뜬금없이 라쿠텐 골든이글스 투수코치인 요다 츠요시 코치를 감독으로 선임하며 다시 한번 물을 먹었다. 요다 감독도 16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서 오가사와라와 코치 짬밥은 동기인데, 주니치에서 은퇴 후 쭉 지도자 커리어를 쌓은 오가사와라가 아닌 비록 예전 주니치 출신 신인왕이었다지만 주니치를 떠난 지 20년이 넘고 선수시절 커리어도 오가사와라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요다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팀과 사이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고, 결국 2020년은 주니치를 떠나 친정팀 닛폰햄 수석코치로 영전했다.
2.6. 연도별 기록
3. 플레이 스타일
일본인 타자치고는 스윙이 큰 편인데, 치기엔 좋지 않은 공도 잡아당겨 장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배트 컨트롤이 일품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프로야구계의 대표적인 배드볼 히터로 분류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방망이부터 내고보는 프리스윙어는 아니어서 통산 출루율이 .390에 달한다. 선구안이 좋아 나쁜 공에는 거의 속지 않았는데, 이를 배드볼 히터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냥 남들보다 뱃 컨트롤을 더 잘 해서 칠 수 있는 공의 범위가 넓은 것에 가까웠다.
의외로 신체사이즈는 홈런타자치고는 체격이 그닥 크지 않은 178cm 84kg인데, 그래서 타고난 파워 자체는 대단하지 않았다. 그걸 증명하듯이 프로 데뷔 이전 고교 시절 통산 홈런은 '''0개'''였는데, 데뷔 이후엔 이런 약점을 특유의 방망이를 세운 자세에서 나오는 강렬한 풀스윙의 원심력으로 파워를 보태 넘겨버리는 식의 스윙을 구사하며 극복해내어 강타자로 성장했다. 이렇게 큰 스윙을 하면 컨택트가 떨어지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어마어마한 속도의 배트스피드에서 나오는 투구 대응능력으로 이를 벌충해 웬만한 교타자보다 타율이 높았으며 선구안 또한 훌륭하여 결과적으로는 일본프로야구사에 남을 A급 강타자의 성적을 남길 수 있었다.
선천적인 힘이 뒷받침되지 않은지라 그의 홈런은 비거리가 짧은 편이었는데, 2004~2006년 삿포로 돔을 홈으로 쓴 것을 제외하면 선수생활 거의 전부를 도쿄돔을 홈으로 보냈는데, 상승기류로 타구 비거리가 뻥튀기되기 쉬워 흔히 돔런이라고 불리는 홈런이 많은 도쿄돔을 홈으로 쓰면서도 겨우 펜스를 넘기는 정도의 홈런이 많았고, 실제로 홈런타자임에도 불구하고 40홈런을 넘긴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거기에 2011년 저반발구 공인구가 도입되면서, 단순한 노쇠화만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장타력이 급격하게 폭락하여 결국 은퇴에 이르게 되었다. 은퇴 직전까지 선구안과 컨택은 살아있었고, 그의 성적하락은 도저히 정상적인 기량 하락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급작스러웠다. 30홈런을 밥먹듯 치던 타자가 타자가 단 1년만에 순식간에 5홈런도 넘기기 힘들어져 버렸으니, 노쇠화보다는 저반발구로 안 그래도 짧은 비거리가 더 짧아져 버린 영향이 컸던 것.
홈런타자의 신체조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홈런스윙을 구사해서 혹자는 홈런타자 행세를 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플레이 스타일로 보면 확실히 그러하다. 그러나 행세라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매년 30홈런에 5할~6할을 넘나드는 장타율을 보여주었으니, 충분히 슬러거라고 불릴 만 하다. 본인의 타고난 체격조건에 맞지 않는 플레이를 하였으나 그걸 또 어찌어찌 잘 소화해내서 좋은 결과를 얻은, 독특한 플레이스타일의 선수.
일본 최고의 타자치고는 메이저리그 진출 떡밥이 거의 없었는데, 대졸-사회인을 거쳐 입단하다 보니 이미 06WBC시점에 33세로 나이가 너무 많은 점도 있었고, 저 선천적인 파워를 타고나지 못한 문제가 상당히 컸다. 당시 일본은 이치로와 마쓰이의 성공적인 메이저리그 진출 후 메이저리그 진출 붐이 일기 시작한 시점이라 오가사와라 본인도 MLB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2차례의 WBC에 참가해서 똑딱질은 잘했지만 정작 홈런을 하나도 치지 못해서 우승팀의 주전 1루수였음에도 올스타에 들지 못했고 WBC 유망주 랭킹에서도 순위에 들지 못했다. 오가사와라 본인도 메이저리그 공인구는 멀리 뻗지 않는다는 짤막한 소감을 끝으로 도전의사를 드러내지 않았다. 실제로 이 당시 일본 공인구는 메이저리그보다 반발력이 좋았고 상술했듯 오가사와라의 홈런은 이 반발력 좋은 공인구와 펜스가 짧고 상승기류가 있는 구장 등 외부조건의 덕도 컸기에 넘어갔어도 일본과 같은 홈런타자로서의 모습은 보이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아, 베테랑 타자답게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내린 평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의외로 주력도 준수한 편으로 2000년 시즌에는 31홈런-24도루를 기록했을 정도로 수준급의 주루 능력을 보여줬으나, 팀의 주포였기 때문에 부상을 우려한 탓인지 이후로는 도루를 많이 줄여 10도루 이상을 기록한 시즌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러나 주루플레이를 보면 확실히 도루만 안할 뿐이지 발이 느리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수비는 본래 포수로 입단했으나, 미숙한 수비와 적은 주전기회가 맞물려 타격을 살리기 위해 내야수로 전향하였다. 주로 1, 3루 수비를 보았는데, 처음에는 1년 정도 1루수로 뛰었다가 3루의 공백으로 인해 3루수로 포지션을 번경, 그렇게 3루수로 정착하였다. 그러나 1루도 부포지션으로 자주 출장하였으며, 나이가 들고 나서는 다시 1루수로 돌아왔다. 수비력은 3루수 골든글러브를 한 차례 수상한 적도 있는 등 전체적으로 준수한 편이었다. 특히 베이스라인을 타고 흐르는 타구의 처리가 좋았다. 다만 나이가 들며 급격히 수비 범위가 줄어들었고, 이후 때맞춰 입단한 3루수 무라타 슈이치의 입단으로 1루수로 다시 전향하게 된다. 요미우리 말년~주니치 시절에는 거의 대타로 나왔고 수비는 거의 1루 대수비로 들어갔다. 일단 골든글러브는 3루수 시절에 탔기에 3루수라고 불러주는 편이기는 하나 출장기록만으로 보면 1-3루를 거의 동일하게 보았다고 봐도 되는 수준.
오가사와라 하면 흔히 교진 3번으로서의 거포 이미지가 강해서 묻히기 쉬운데, 각각 다른 시즌에 먹은 것이긴 하지만 수위타자, 홈런왕, 타점왕, 출루율왕, 장타율왕, 골든글러브를 다 한번씩 수상한 경험이 있고 20도루를 넘긴 시즌도 있어, 충분히 5툴 플레이어로 불러줄 만 하다.
졸업 후 바로 프로에 온게 아니라 사회인야구에서 활동하다가 왔기 때문에 프로 입단이 좀 늦은 편이었는데, 그럼에도 378홈런이나 친 것을 보면 정말 꾸준하게, 매년 많은 양의 홈런을 친 선수.
4. 여담
-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과 요미우리 시절 이승엽과 같이 뛴 영향으로 인해 국내의 야구 팬들에게도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 특히 WBC에서는 한국 투수들에게 호구 잡히는 인상.
- 클로저 이상용에 나오는 남승우,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시리즈 석세스 캐릭터인 토죠 코지로가 이 선수를 모델로 삼았다.
- 타격폼이 꽤나 신기하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타격 코치였던 가토 히데지의 영향을 받은 폼이었다고 한다. 이걸 모티브로 시로바코의 오가사와라 린코가 배팅센터에서 미치히로를 본딴 타격폼으로 연달아 쳐낸다. 오클랜드 애슬래틱스의 맷 올슨이 비슷한 타격폼을 구사한다. 참고로 이쪽도 좌타 거포 1루수.
- 이름 탓에 닛폰햄 시절부터 오가사와라 제도의 오가사와라무라 관광 홍보 대사를 지내왔다. 닛폰햄 시절 응원가 전주는 아예 선수 오가사와라가 아닌 오가사와라무라 홍보 내용으로 불렸을 정도.[17]
- 박동희 기자의 취재로 알려진 재일동포 야구단 감독 한재우 옹의 증언 등 재일 한국인들 중에는 오가사와라가 원래 조선적을 유지하던 재일교포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재일 루머와 마찬가지로 증언 이상의 근거는 없고, 오히려 오가사와라가 재일이 아니라는 쪽의 물증이 더 많다. 일단 오가사와라는 자신이 재일 출신이라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고, 오가사와라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이후 여러 차례 일본 대표팀에 선발된 선수다. 만약 루머대로 오가사와라가 원래 재일 출신이었다면 아테네 올림픽 전에 일본으로 귀화를 했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일본의 관보에 고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관보에는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로 추정되는 1973년 10월 25일 생 치바 출신 남성이 귀화했다는 내용이 고시된 적이 없다. 한국인들이나 재일동포들이 비뚤어진 민족주의의 발로로 어느 업계건 간에 뭔가 한국스러운 성씨를 가진 사람이 조금만 잘한다 싶으면 사실 재일교포 내지는 한국계라는 루머를 퍼트리는 것이 일본 내에서는 일종의 전통(?)이라,#일본 구계에서도 숱한 선수들이 근거없는 한국계 루머에 시달렸고, 오가사와라도 마찬가지다.
- 은퇴 후 주니치의 2군감독으로 재직했으나 2017시즌부터 차기감독으로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모리 시게카즈 감독 대행의 정식 감독 승격, 후임 요다 츠요시 감독의 취임으로 주니치 감독설은 없던 일이 되었다.[18] 2019년 시즌 종료 후부터는 데뷔를 함께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1군 수석코치를 맡는다.
- 글러브의 웹 형태 중 올라운드 글러브에 많이 쓰이는 형태인 오가사와라웹은 이 오가사와라 미치히로가 애용하는 글러브의 웹 모양을 본뜬 것. 웹이 촘촘하여 내구성이 좋아 사회인들이 애용하는데, 아무래도 프로내야수는 내구성이 좀 별로더라도 공이 잘 보이는 뚫린 형태의 웹을 애용하는 편이고 프로레벨에서 이런 촘촘한 웹을 사용하는 내야수는 드물어 유명선수로는 오가사와라가 거의 유일해 자연스럽게 오가사와라웹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1] 전주:'''小笠原村には海がある 小笠原村にはイルカがいる 小笠原村には夢がある 毎日サバイバル'''(오가사와라무라에는 바다가 있다 오가사와라무라에는 돌고래가있다 오가사와라무라에는 꿈이 있다 매일 서바이벌)[2] '''立ち上がれ小笠原 この世のために 島国が生んだ 和製大砲'''(일어나라 오가사와라 이 세상을 위해서 섬나라가 낳은 일제 대포)[3] '''飛び立とう高く 絆共にして 明日を照らす道広げ 放て君よ今'''(날아오르자 높이 인연을 함께해 내일을 비추는 길을 펼쳐줘 그대여 지금)[4] '''闘志をこめた そのフルスイング 一振りで放てよ 誰より強く'''(투지를 담은 그 풀스윙 한번에 날려버려 누구보다 강하게)[5] 1학년때 들어왔을때 동기들보다도 현저히 실력이 떨어져서 본인 자신이 열등감을 느껴 죽기 살기로 노력했다고 한다.[6] 이 팀의 전신인 도에이 플라이어스 시절인 1962년에 우승하고 44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 62년에 도에이를 우승시키며 리그 MVP를 차지했던 선수가 바로 장훈이었다.[7] 도쿄돔 시절의 닛폰햄 파이터즈가 '''초안습''' 수준의 비인기팀이었던 탓에 오가사와라 역시 그 시절까지는 성적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닛폰햄 파이터즈가 연고지 이전 후 처음으로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했던 2006년 시즌의 맹활약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다.[8] 당시 닛폰햄은 3년 계약을, 요미우리는 4년 계약을 제시했다. 4년 16억엔 내외로 추정. 오가사와라는 요미우리와의 협상에서 4년 계약을 제시받자마자 구단측의 성의에 감격, 곧바로 입단 의향을 밝혔다고 한다.[9] 역사상 예외가 아예 없던 건 아니다. 90년대부터 명문화된 규정이라 그 이전 선수들은 많지는 않아도 장발과 수염을 기르는 선수가 가끔씩 있었다. 물론 이 규정을 품위유지 조항으로 계약서에 박아넣기 시작한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얄짤없다.[10] 첫 번째 양리그 MVP 수상자는 에나츠 유타카이며 1979년 히로시마 카프, 1981년 닛폰햄 파이터즈 소속으로 수상한 바 있다.[11] 4년간 평균 140경기 타율 .310 33홈런 95타점 OPS 9할 WAR 5의 성적을 꾸준히 찍어주면서 지금까지도 요미우리의 외부FA 영입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게다가 해당 4년이 34~37세 시즌이라는걸 감안하면 더욱 높게 평가받을만하다.[12] 이 이전에 니코니코 동화에서 오가사와라의 굿바이 쓰리런 홈런을 예언한 MAD가 있어서 잠시화제가 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히메카와 유키 항목 참고.[13] 당시 오가사와라는 출전 기회가 적어진 요미우리를 떠나 새로운 팀에서 도전하고 싶다고 했지만 전성기가 지난 40살 선수를 받아줄 팀이 있을지는 의문이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주니치 드래곤즈와 계약에 성공했다.[14] 2013년까지는 http://blog.naver.com/ever_17의 자료, 2014년부턴 http://1point02.jp/op/gnav/leaders/pl/pbs_dashboard.aspx?sn=2015&lg=0&tm=0&ps=0&sl=1&sr=0&pn=-1 이용[15] 2013년까지는 http://blog.naver.com/ever_17의 자료, 2014년부턴 http://1point02.jp/op/gnav/leaders/pl/pbs_dashboard.aspx?sn=2015&lg=0&tm=0&ps=0&sl=1&sr=0&pn=-1 이용[16] 2013년까지는 http://blog.naver.com/ever_17의 자료, 2014년부턴 http://1point02.jp/op/gnav/leaders/pl/pbs_dashboard.aspx?sn=2015&lg=0&tm=0&ps=0&sl=1&sr=0&pn=-1 이용[17] 이 시기 닛폰햄 응원가에는 가족이 운영하던 야키니쿠 집의 위치를 알려주는 모리모토 히초리의 응원가를 비롯해 좀 이상한 방향의 PR이 들어간 것들이 더러 있었다. 나중에 한신에서 트레이드로 온 츠보이 토모치카의 응원가도 학력과 출신 사회인야구 팀을 읇는 특이한 전주가 붙어있었고.[18] 그동안 정식 감독 경험이 없었던 모리 시게카즈 감독은 63세에 감독 데뷔를 하게 되었는데 이는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고령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