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 노부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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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을 친 후 '''"아츠오~!"''' 구호를 외치는 마츠다.
일본프로야구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주전 3루수.
프로 입단전에는 유격수로 뛰며 주쿄상고[4] 에서 통산 60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아지아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이구치 타다히토가 가지고 있던 토토 대학야구 리그 홈런 기록을 경신할 수 있을 만큼 홈런을 뻥뻥 날렸다. 하지만 3학년 때인 2004년에 동료 야구부원 5명이 열차에서 강제추행을 저지르는 대형사고를 치는 바람에 팀이 반년간 경기 출장 금지+2부 리그 강등 처분을 받게 되어 기록경신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4학년 때인 2005년에 팀의 주장을 맡아 춘계리그를 우승한 뒤 1부 리그로 복귀하는데 성공했으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희망입단 범위로 입단을 공식 표명했다.
2006년 개막전에 7번타자 3루수로 선발출장 하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서는 고쿠보 히로키 이후 12년 만에 신인이 개막전에 선발 출장을 했다. 그러나 그해 신통치 않은 타격과 잦은 수비실책 등으로 인해 2군으로 내려갔고 1군으로는 승격되지 못했다. 이듬해까지 고쿠보에 밀려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지만, 9개의 홈런과[5] 3할 초중반의 타율을 기록하며 6월부터 1군에 등록! 8월에는 월간타율 3할을 기록하였다. 193타수에 7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장타력은 여전했다.
2008시즌 주전 3루수로 시즌을 시작하며 큰 이탈 없이 타격면에서는 전년도에 비해 많은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9월 29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 에서는 이와쿠마 히사시에게서 홈런을 때려냈는데 이것은 2008시즌 이와쿠마가 퍼시픽 리그 선수에게 허용한 첫 번째 홈런이었다.
하지만 2009시즌 개막전에서 귀루를 하는 과정에서 오른손에 부상을 입었고 팀에서 이탈하게 된다. 6월 초 복귀를 했지만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 사구를 맞으며 다시 한번 부상을 입고 그해에는 46경기 출전에 그쳐야만 했다.
2010시즌에는 한국에서 온 미남과 함께 주전 3루수 경쟁을 벌였다. 그 기간에 좌익수로 출전을 하기도 했다. 이해에는 다나카 마사히로에게서 프로데뷔 첫 끝내기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시즌 타율은 2할5푼5리에 그쳤지만 19개의 홈런과 71타점, 그리고 17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데뷔 후 최고의 성적을 내며 팀의 리그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2011시즌 드디어 폭발했다. 한경기도 빠짐없이 출전하며 전이닝을 소화. 개인최다인 25개의 홈런(리그 2위)[6] 과 83타점 25도루 2할 8푼 2리의 타율을 기록. 전년도 자신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팀의 2년연속 리그우승에 기여했다. 하지만 포스트시즌에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는데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10타수 1안타 1홈런으로 1할 일본시리즈에서는 1,2차전 4번타자로 출장했지만 안타 2개에 도루 1개에 그쳤고 이후 타순이 뒤로 밀리며 타점을 기록하긴 했지만 4번타순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이후 1할 6푼(28타석 25타수 2득점 4안타 2타점 3도루 1희생타 1볼넷 1사구 5삼진)을 기록하며 정규시즌의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
더 좋은 모습을 기대하며 시작한 2012시즌에는 기대에 부응하듯 도루왕에 오를듯한 페이스로 도루를 무차별적으로 성공 시켰지만 5월부터 홈런과 도루가 급감. 그래도 타율면에서는 수위타자를 향해 좋은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8월초 라쿠텐전에서 미마 마나부의 사구에 맞아 손바닥이 골절되어 전치 3개월을 받으며 이탈하고 말았다. 10월 5일 복귀 했으나 이미 규정타석도 미달되었고 아쉽게도 최고의 시즌이 될 수 있었던 해를 날리고 말았다.
2013시즌에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일본대표에 승선해 타율 0.333, 5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3위에 기여했다. 정규시즌에는 초반 2할3푼대에 머물며 부진했지만 교류전에서부터 부활하며 4번타자로 정착. 3번 우치카와 세이이치 5번 하세가와 유야[7] 와 함께 막강 클린업을 형성했다. 본인 최다 90타점과 2년 만의 20홈런을 기록했지만 팀성적과는 무관했다.
2014시즌 5월 13일 롯데전에서 NPB통산 9만5천호 홈런을 쏘아올렸다. 7월초 연습도중 손가락에 공을맞는 부상을 당했지만 출전을 강행. 그러나 다음날에도 붓기가 빠지지 않아 병원에 가보니 손가락 골절로 6주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승리하는 팀이 리그우승팀이 되는 최종전 대 오릭스전 10회말 1대1 상황에서 좌중간 끝내기 안타를 치며 우승을 결정지었다.
2015시즌 자신의 1000호 안타를 홈런으로 기록한다. 최종성적은 자신의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 짧아진 야후돔의 영향으로 처음으로 30홈런을 돌파했고(35홈런), 94타점으로 13년 이후 오랜만에 90타점을 넘겼다.
시즌 후에는 FA를 통해 메이저리그행을 추진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오퍼를 했다고 일본언론에서 발표했으나 샌디에이고 지역언론에서 '마쓰다에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구체적 오퍼를 하지않았다'며 반박, 샌디에이고 오퍼설은 에이전트 피터 그린버그와 일본 언론의 마쓰다의 자존심을 생각한 자작극임이 드러났다. 결국 소프트뱅크 구단 회장 오 사다하루가 마쓰다의 자존심을 살려주기 위해 설득했다는 식으로 포장하여 소프트뱅크에 잔류를 결정했다.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일본 대표팀의 주전 3루수로 출전. 하위타선에서 .333, 1홈런, 7타점을 올리며 일본 대표팀의 4강 진출에 공헌했으나 미국과의 4강전에서 8회초 1사 2, 3루의 위기 이후 펼쳐진 만루작전에서 의도대로 유도된 땅볼타구를 펌블하면서 결승점을 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9회말 마지막 타석에서 어이없는 공에 배트를 내밀면서 3구삼진으로 경기가 종료되면서 일본 탈락의 원흉이 되었다.
야나기타 유키 이전에 10년간 호크스에서 보기 드물게 장타력 툴을 보고 2순위 안에 지명한 야수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 호크스의 드래프트는 대체적으로 1, 2위는 투수를 지명하는 경우가 많아서 야수가 드래프트에서 2순위 안에 드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8] 지명을 한다고 해도 광활한 홈 구장의 사정을 고려하여 장타력보다는 교타자 위주로 지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9] 그만큼 마쓰다의 장타력이 각별했다는 얘기.
일단 '''부상만 없으면''' 팀에서 기대한 만큼의 장타 포텐셜을 보여주고 있으나 문제는 그놈의 부상. 커리어 초기에는 1년이 멀다하고 '''부상으로 1개월 이상의 장기 이탈이 연례행사'''였다. 이 때문에 2014년까지 프로생활 9년동안 110경기 이상 출전한 해가 4번밖에 안 되고 통산 성적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2014년 이후는 금강불괴'''의 내공이라도 체득했는지 그 이후로는 특별한 부상도 없이 2015시즌부터 연속으로 시즌 전 경기 출장의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덩달아 통산기록도 상승곡선을 그리며 2014년까지는 불가능해 보였던 명구회 가입의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는 중이다. 또한 마쓰다가 부상이탈 없이 3루를 지키면서 3루수비가 안정되었고 이는 장타력과 더불어 소속팀이 전성기를 구가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기량이 상승하는 특이한 케이스
일본인 선수 중에서는 드물게 노피어 스윙을 구사하는 선수로, 타구 방향이 대부분 좌측으로 향하는 풀스윙어다. 그리고 1루까지 4초대 초반 3루까지 11.59를 기록할 정도로 발이 상당히 빠르다. 멀리던지기 110미터를 기록할 정도로 강견을 소유. 수비범위는 좁지 않으나 08시즌 17실책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래도 현장의 평가도 DELTA 사의 UZR 수치같은 세이버메트릭스적 평가도 모두 좋은 수비력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골든 글러브상도 8번이나 수상'''[10] 하는 등 수치적으로나 인상적으로나 수비력은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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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을 친 후 '''"아츠오~!"''' 구호를 외치는 마츠다.
1. 개요
일본프로야구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주전 3루수.
2. 경력
2.1. 프로 입단 전
프로 입단전에는 유격수로 뛰며 주쿄상고[4] 에서 통산 60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아지아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이구치 타다히토가 가지고 있던 토토 대학야구 리그 홈런 기록을 경신할 수 있을 만큼 홈런을 뻥뻥 날렸다. 하지만 3학년 때인 2004년에 동료 야구부원 5명이 열차에서 강제추행을 저지르는 대형사고를 치는 바람에 팀이 반년간 경기 출장 금지+2부 리그 강등 처분을 받게 되어 기록경신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4학년 때인 2005년에 팀의 주장을 맡아 춘계리그를 우승한 뒤 1부 리그로 복귀하는데 성공했으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희망입단 범위로 입단을 공식 표명했다.
2.2. 프로 입단 후
2006년 개막전에 7번타자 3루수로 선발출장 하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서는 고쿠보 히로키 이후 12년 만에 신인이 개막전에 선발 출장을 했다. 그러나 그해 신통치 않은 타격과 잦은 수비실책 등으로 인해 2군으로 내려갔고 1군으로는 승격되지 못했다. 이듬해까지 고쿠보에 밀려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지만, 9개의 홈런과[5] 3할 초중반의 타율을 기록하며 6월부터 1군에 등록! 8월에는 월간타율 3할을 기록하였다. 193타수에 7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장타력은 여전했다.
2008시즌 주전 3루수로 시즌을 시작하며 큰 이탈 없이 타격면에서는 전년도에 비해 많은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9월 29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 에서는 이와쿠마 히사시에게서 홈런을 때려냈는데 이것은 2008시즌 이와쿠마가 퍼시픽 리그 선수에게 허용한 첫 번째 홈런이었다.
하지만 2009시즌 개막전에서 귀루를 하는 과정에서 오른손에 부상을 입었고 팀에서 이탈하게 된다. 6월 초 복귀를 했지만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 사구를 맞으며 다시 한번 부상을 입고 그해에는 46경기 출전에 그쳐야만 했다.
2010시즌에는 한국에서 온 미남과 함께 주전 3루수 경쟁을 벌였다. 그 기간에 좌익수로 출전을 하기도 했다. 이해에는 다나카 마사히로에게서 프로데뷔 첫 끝내기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시즌 타율은 2할5푼5리에 그쳤지만 19개의 홈런과 71타점, 그리고 17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데뷔 후 최고의 성적을 내며 팀의 리그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2011시즌 드디어 폭발했다. 한경기도 빠짐없이 출전하며 전이닝을 소화. 개인최다인 25개의 홈런(리그 2위)[6] 과 83타점 25도루 2할 8푼 2리의 타율을 기록. 전년도 자신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팀의 2년연속 리그우승에 기여했다. 하지만 포스트시즌에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는데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10타수 1안타 1홈런으로 1할 일본시리즈에서는 1,2차전 4번타자로 출장했지만 안타 2개에 도루 1개에 그쳤고 이후 타순이 뒤로 밀리며 타점을 기록하긴 했지만 4번타순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이후 1할 6푼(28타석 25타수 2득점 4안타 2타점 3도루 1희생타 1볼넷 1사구 5삼진)을 기록하며 정규시즌의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
더 좋은 모습을 기대하며 시작한 2012시즌에는 기대에 부응하듯 도루왕에 오를듯한 페이스로 도루를 무차별적으로 성공 시켰지만 5월부터 홈런과 도루가 급감. 그래도 타율면에서는 수위타자를 향해 좋은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8월초 라쿠텐전에서 미마 마나부의 사구에 맞아 손바닥이 골절되어 전치 3개월을 받으며 이탈하고 말았다. 10월 5일 복귀 했으나 이미 규정타석도 미달되었고 아쉽게도 최고의 시즌이 될 수 있었던 해를 날리고 말았다.
2013시즌에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일본대표에 승선해 타율 0.333, 5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3위에 기여했다. 정규시즌에는 초반 2할3푼대에 머물며 부진했지만 교류전에서부터 부활하며 4번타자로 정착. 3번 우치카와 세이이치 5번 하세가와 유야[7] 와 함께 막강 클린업을 형성했다. 본인 최다 90타점과 2년 만의 20홈런을 기록했지만 팀성적과는 무관했다.
2014시즌 5월 13일 롯데전에서 NPB통산 9만5천호 홈런을 쏘아올렸다. 7월초 연습도중 손가락에 공을맞는 부상을 당했지만 출전을 강행. 그러나 다음날에도 붓기가 빠지지 않아 병원에 가보니 손가락 골절로 6주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승리하는 팀이 리그우승팀이 되는 최종전 대 오릭스전 10회말 1대1 상황에서 좌중간 끝내기 안타를 치며 우승을 결정지었다.
2015시즌 자신의 1000호 안타를 홈런으로 기록한다. 최종성적은 자신의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 짧아진 야후돔의 영향으로 처음으로 30홈런을 돌파했고(35홈런), 94타점으로 13년 이후 오랜만에 90타점을 넘겼다.
시즌 후에는 FA를 통해 메이저리그행을 추진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오퍼를 했다고 일본언론에서 발표했으나 샌디에이고 지역언론에서 '마쓰다에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구체적 오퍼를 하지않았다'며 반박, 샌디에이고 오퍼설은 에이전트 피터 그린버그와 일본 언론의 마쓰다의 자존심을 생각한 자작극임이 드러났다. 결국 소프트뱅크 구단 회장 오 사다하루가 마쓰다의 자존심을 살려주기 위해 설득했다는 식으로 포장하여 소프트뱅크에 잔류를 결정했다.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일본 대표팀의 주전 3루수로 출전. 하위타선에서 .333, 1홈런, 7타점을 올리며 일본 대표팀의 4강 진출에 공헌했으나 미국과의 4강전에서 8회초 1사 2, 3루의 위기 이후 펼쳐진 만루작전에서 의도대로 유도된 땅볼타구를 펌블하면서 결승점을 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9회말 마지막 타석에서 어이없는 공에 배트를 내밀면서 3구삼진으로 경기가 종료되면서 일본 탈락의 원흉이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야나기타 유키 이전에 10년간 호크스에서 보기 드물게 장타력 툴을 보고 2순위 안에 지명한 야수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 호크스의 드래프트는 대체적으로 1, 2위는 투수를 지명하는 경우가 많아서 야수가 드래프트에서 2순위 안에 드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8] 지명을 한다고 해도 광활한 홈 구장의 사정을 고려하여 장타력보다는 교타자 위주로 지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9] 그만큼 마쓰다의 장타력이 각별했다는 얘기.
일단 '''부상만 없으면''' 팀에서 기대한 만큼의 장타 포텐셜을 보여주고 있으나 문제는 그놈의 부상. 커리어 초기에는 1년이 멀다하고 '''부상으로 1개월 이상의 장기 이탈이 연례행사'''였다. 이 때문에 2014년까지 프로생활 9년동안 110경기 이상 출전한 해가 4번밖에 안 되고 통산 성적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2014년 이후는 금강불괴'''의 내공이라도 체득했는지 그 이후로는 특별한 부상도 없이 2015시즌부터 연속으로 시즌 전 경기 출장의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덩달아 통산기록도 상승곡선을 그리며 2014년까지는 불가능해 보였던 명구회 가입의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는 중이다. 또한 마쓰다가 부상이탈 없이 3루를 지키면서 3루수비가 안정되었고 이는 장타력과 더불어 소속팀이 전성기를 구가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기량이 상승하는 특이한 케이스
일본인 선수 중에서는 드물게 노피어 스윙을 구사하는 선수로, 타구 방향이 대부분 좌측으로 향하는 풀스윙어다. 그리고 1루까지 4초대 초반 3루까지 11.59를 기록할 정도로 발이 상당히 빠르다. 멀리던지기 110미터를 기록할 정도로 강견을 소유. 수비범위는 좁지 않으나 08시즌 17실책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래도 현장의 평가도 DELTA 사의 UZR 수치같은 세이버메트릭스적 평가도 모두 좋은 수비력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골든 글러브상도 8번이나 수상'''[10] 하는 등 수치적으로나 인상적으로나 수비력은 인정받고 있다.
4. 이모저모
- 타격 중 파울을 치거나 헛스윙을 하면 한쪽 다리를 든 채 몸을 웅크리고 뛰어다닌다. 중계를 보다보면 상당히 재미있다.
- 2015년부터는 홈런을 치면 맨 위 두번째 사진의 자세로 주먹을 올리면서 '아츠오(熱男)~!'[11] 라는 구호를 외치는 세레모니를 하고 있다. (궁금하다면 유튜브에 '松田 熱男' 라고검색하면 아츠오 모음영상이 나온다.) 팬들도 곧잘 따라하는 인기 제스쳐. 2019년 일본시리즈 2차전에도 7회말 선제 3점홈런을 때리고 어김없이 보여줬다. 경기후 수훈선수 인터뷰에서 100점만점의 아쓰오 콜이었다고 자화자찬. 그만큼이나 항상 화이팅 넘치며 리더십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덕아웃의 분위기 메이커.
- 눈을 상당히 자주 깜빡 거린다. 그냥 평범하게 깜빡이는 모양새가 아니라 눈을 질끈 감는 모습을 상당히 자주 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습관적으로 되는 듯 하니 쉽게 고치기는 힘들듯. 뭐 자주 깜빡이는건 눈 건강에는 좋긴 하다.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중견급 우완투수인 토가메 켄(十亀剣)에게 이상할 정도로 상성이 좋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2020년까지 마쓰다의 토가메 통산 상대성적은 타율 .509(57타수 29안타, 14볼넷) 10홈런 OPS 1.711이다. 그나마 2020년에야 4타수 무안타로 틀어막혀서 조금 낮아진 거지 이들이 처음 만난 2012년 이후 마쓰다는 매 시즌마다 토가메를 제대로 호구잡았다. 하이라이트는 전 타석(6타수 6안타, 홈런과 2루타 각각 1개씩 기록) 안타에 OPS 2.667을 기록한 2016년과 14타수 7안타 5할 타율에 5홈런 5볼넷을 얻어 OPS 2.203을 기록한 2018년 시즌이 있다.
- NPB에서도 오프시즌의 국제대회를 위한 국가대표 차출에 몸을 사리며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선수들이 꽤 있는데 비해 본인은 국대 차출에 적극적으로 응하고 있다. 2019 프리미어 12 국대차출 때도 자발적으로 주장을 맡으면서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자처했다. 국대선발 인터뷰에서 몸을 사리면서 자진사퇴하는 선수들을 의식한 듯 "이 좋은 기회에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다"면서 다른 스타급 선수들도 좀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한국 공식 유튜브 채널의 첫 인사를 맡아 특유의 유쾌한 모습으로 시그니처 세레모니인 '아츠오'와 함께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5. 연도별 성적
[1] 1993년부터 2006년까지 NPB에 존재했던 제도로 대학야구, 사회인야구 선수가 입단을 원하는 팀을 선택할 수 있었던 제도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KBO 신인 드래프트의 1차 지명 제도와 유사한 제도였다. 단 KBO 리그와는 다르게 연고지의 제약이 없었다는 점.[2] 등장곡을 많이 쓰는데다가 엄청 자주 바꾼다. 등장곡만 '''40곡을 넘게''' 썼다. 또한 과거의 등장곡 중엔 한국 노래도 있다. 소녀시대의 gee나 싸이의 강남 스타일 등. 과장 좀 보태서 일본에서 그 해나 그 전해에 인기있는 노래라면 일단 등장곡으로 쓰고 보는 수준이다. 일단 긴기라긴니사리게나쿠랑 울트라 소울은 몇년째 고정적으로 쓰고 있으니 서술하지만 다른 곡들은 일일이 서술하지 않는 것도 하도 자주 바꿔서(...) 한국에서도 이런 케이스로 작뱅이 있다.[3] '''沸き立つスタンドの 期待に応えて燃えてやれ 振りぬくその腕に 闘志を注ぎ込め(열광하는 스탠드의 기대에 부응하여 불타올라라 휘두르는 그 팔에 투지를 가득 담아라)'''[4] 기후현의 사립고등학교로 아이치 지역의 강팀이자 고시엔대회 단골 출전교인 주쿄대부속 주쿄고교하고 항상 헷갈리는 학교이다. 보다시피 고시엔도 곧잘 출전하고 마쓰다같은 프로선수도 배출하는 등 남의 학교 이름이나 도용하는 핫바리학교는 아니건만 아이치현의 학교가 워낙 명성이 높아 짝퉁취급을 받는 중이다(...). 참고로 학교이름이 자주 바뀌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은데 그 때마다 주쿄대-주쿄고교하고 비슷한 이름으로 개명을 하는 바람에 야구팬들을 더 헷갈리게 하고 있다. 2019년의 학교명은 '''주쿄"가쿠인"대학 부속 주쿄고교'''. 2019년 여름 고시엔에서 4강까지 진출했으며 본인도 오사카 원정온 김에 몸소 응원하러 달려와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5] 이는 팀내 1위였다.[6] 단 1위 나카무라 타케야와는 '''23개'''의 차이가 난다. 나카무라는 이 해 통일구의 저반발력 때문에 리그 전체적으로 장타가 급감한 와중에서도 홀로 예년 페이스로 홈런을 생산해 파리그 전체 홈런의 10분의 1을 혼자서 때려냈으며, 이는 치바 롯데 마린즈의 팀 홈런(46홈런)보다 많은 것이었다.[7] 13시즌 198안타와 0.341의 타율로 2관왕에 올랐다.[8] 실제로 드래프트 지명 1, 2순위를 모두 야수로 지명한 건 1996년의 이구치 타다히토와 마쓰나카 노부히코의 국가대표 콤비를 지명한 게 가장 최근이었다.[9] 그렇게 지명된 대표적인 사례가 2016년에 딱 한 번 교류전 MVP 한 걸 제외하면 대수비, 대주자로만 나오다가 33살에 방출당해 은퇴한 기도코로 류마와 어깨는 강하지만 잦은 실책과 빈타로 욕먹고 있는 이마미야 켄타이다.[10] 2013년부터 2019년까지는 7년연속 수상. 일본야구를 논할 때 항상 언급되지만 NPB의 골든글러브는 수비를 보고 주는 상이다. 포지션별 최고의 타자에게는 미국의 실버슬러거에 해당하는 베스트나인상이 따로 주어진다. 참고로 베스트나인의 경우에는 라이벌 팀의 3루에 무지막지하게 홈런을 쏘아올리던 거포돼지 때문에 프로입단 14년차인 2018년에 딱 한번 수상한 게 전부다.[11] 아쓰오는 2016년의 팀의 시즌 슬로건이었는데 이 슬로건에 맞춰 개발한 세리머니였고 팬들의 반응이 좋아서 계속하게 되었다. 그 후 2017년에 팀의 슬로건이 바뀌고 바뀐 슬로건에 맞춰서 세리머니도 바꿔봤지만 임팩트가 영 아쓰오만 못해서 다시 아쓰오로 되돌리고 그 후로는 본인의 전매특허처럼 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