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무라 다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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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은 아내인 배우 무라카미 마리에.
겉모습만 보면 그저 가정적이고 순박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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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은 현재 퍼시픽리그를 대표하는 홈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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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21일 크레용 신짱 747화에 등장! [1][2] 다만 본명이 아닌 오카와리(한그릇 더)라고 불린다. 신노스케는 오스와리(앉아)군 이라고 부르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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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소속의 야구선수. '''홈런왕 6회, 타점왕 4회'''에 빛나는 일본프로야구 현역 최고의 슬러거이다.[4] 2019년 시즌 종료 시점에서 통산 20개의 만루홈런을 치며 일본프로야구에서 가장 많은 만루홈런을 친 타자이기도 하다.
푸짐한 체구와 더불어 아래의 일화 이후로 일본에서는 '한 그릇 더 군'(おかわり君)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대한민국 한정으로는 이대호와 구분하기 위해 일본 돼지(...)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집에서 가까운(도보 5분 거리) 오사카 토인고교[5] 에 진학하여 4번 타자로 활약하며 고교 3년간 통산 83홈런을 기록했다.[6] 또한 프로에서 도루왕 경력이 있는 1년 후배 니시오카 츠요시가 고교 시절 자신보다 나카무라가 더 빨랐다고 증언할 만큼 주력도 뛰어난, 정말로 대단한 재능을 지닌 선수였다. 이러한 성적에 힘입어 2001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 2순위로 지명되어 모두의 기대를 한껏 받으며 프로에 입문했다. 고3 시절 경기모습[7]
순조롭게 1군에 적응해 갈 것이라던 예측과 달리 나카무라의 프로 초년병 시절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장타력은 뛰어났지만 정교함이 떨어지는데다가 삼진이 너무 많았다. 2003년 1군 데뷔전을 치르긴 했지만 큰 활약을 하지는 못했고, 2005년 중반에 이르러서야 이토 쓰토무 감독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기회를 얻기 시작했다. 이토 감독은 당시 3루수를 보고 있던 용병 호세 페르난데스를 지명타자로 돌리고 나카무라를 붙박이 3루수로 기용하였다. 나카무라는 80경기에서 22홈런을 폭발시키며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특히 센트럴리그와의 교류전 기간 동안에는 12홈런을 기록하며 교류전 우수선수상을 받았다.
2006 시즌에는 당시 개인 최다인 100경기에 출전하였으나 홈런은 9개로 급감하였으며, 득점권에서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즌타율 .276, 득점권 .205) 부진했다. 또한 좌상바의 모습도 보이며 상대선발이 좌완일 경우 선발에서 제외되기 일쑤였다.
2007 시즌 역시 부진하며 5월에는 2군을 가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결국 시즌 98경기 출장에 타율 .230, 홈런 7개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였다.
그러던 중 2008년에 세이부에 와타나베 히사노부가 신 감독으로, 오쿠보 히로모토가 타격 코치로 들어오면서 나카무라의 커리어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오쿠보 코치는 정교함이 떨어지는 나카무라가 자신의 단점을 고치기 위한 훈련을 반복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단점을 고치기보다는 장점을 살리자' 라며 그의 스윙 스타일을 변화시켰다. 동계훈련 기간동안 보다 당겨치는 타구가 많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 히팅포인트를 앞 무릎 앞쪽에 형성시키는 훈련을 한 나카무라는 2008년 드디어 홈런타자로 각성하여 46홈런으로 리그 홈런왕에 등극한다. 반면에 삼진 또한 162개를 기록하며 삼진 1위에도 동시에 등극한다(...) 그러나 리그 최다인 22개의 실책, .231의 낮은 득점권 타율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이듬해인 2009 시즌에도 48홈런을 몰아치며 홈런왕 자리를 유지하였으며 122타점으로 생애 최초 타점왕도 달성한다. 타율 또한 .285로 전년도(.244)에 비해 크게 향상되었다. 다만 실책(15)과 삼진(154)에서도 여전한 모습을 보여주며 2년 연속 해당부문 리그 1위를 지켰다.
2010년에는 시즌 전 자신이 친 타구에 얼굴을 맞아서 골절상을 입는 등 시즌 내내 부상으로 고생하며 85경기 출전, 25홈런에 그친다. 부상만 없었다면 홈런왕은 따놓은 당상이던 페이스였지만 이로 인해 홈런 타이틀은 T-오카다가 가져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111개의 아름다운 삼진 개수를 기록하였으며 득타율은 .170을 기록하며(!!!) 공갈포가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반발력이 낮은 통일구가 도입되어 일본프로야구 전체의 장타력이 급감한 2011 시즌에도 홀로 대포를 양산해내며 48홈런으로 개인 최다 타이를 이룸과 동시에 3번째 홈런왕을 차지한다. 해당 시즌 퍼시픽리그 홈런 2위인 마쓰다 노부히로의 홈런 갯수는 25개였으며[8] , 퍼시픽리그 전체 홈런이 454개, 치바 롯데 마린즈의 경우 '''팀 홈런'''이 46개였을 정도로 역대급 '''투신타병''' 시즌이었다. 나카무라는 리그 전체 홈런의 10.57%를 혼자 양산해내며 양 리그 출범 이후 최초로 리그 홈런의 10% 이상을 홀로 치는 위엄을 보여줬다. 116타점으로 당연히 타점왕도 그의 몫. 리그 전체의 투고타저 경향에 홀로 역행한, 나카무라 타케야의 실질적인 커리어하이 시즌이다.
2011 시즌 후 팀과 3년 10억엔의 계약을 맺는다.
2012 시즌을 앞두고 본인의 등번호와 같은 60홈런을 칠 것을 선언한다. 시즌 초반 잠시 부진을 겪으나 교류전을 계기로 괴물같이 부활하며 홈런 1위에 등극한다. 하지만 6월 등부상이 악화되어 부상자 명단에 오른다. 그 사이 이대호에게 홈런과 타점 1위 자리를 빼겼지만 이내 역전하면서 27홈런으로 2년 연속 퍼시픽리그 홈런왕에 올렀다.
2013년 시즌에는 전년도 무릎 수술로 인해 시즌 대부분을 날려먹으면서(어깨 부상으로 인해 복귀 지연) 26경기 출전, 4홈런에 그쳤다. 4번타자 자리는 .317 27홈런 110타점으로 타점왕 타이틀을 획득하며 각성한 고교 후배 아사무라 히데토가 메웠다.
2014 시즌에는 완전히 각성. 타율은 여전히 2할 중반대에서 머물렀지만, 출루율이 확연히 높아진 모습을 보였다. 완벽히 타석 접근법을 자신에게 맞는 형태로 찾아낸 모양. .257 .384 .579 34홈런[9] 90타점의 좋은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2015 시즌에는 7월 24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경기에서 4회말에 선발투수 오타니 쇼헤이를 상대로 솔로 홈런을 기록하면서 300홈런(일본프로야구에서 41번째)과 1,000호 안타(일본프로야구에서 281번째)를 동시에 달성하였다. 300호 홈런은 1,158경기만이며 이는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8번째로 빠른 기록이다. 아울러, 같은 날 경기에서 역시 투수 오타니를 상대로 158km의 강속구를 밀어쳐서 만루홈런을 뽑아냈는데, 개인 통산 15번째 만루홈런이며,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많은 만루 홈런(15개)를 친 타자로 오 사다하루와 타이를 이뤘다. 8월 9일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열린 오릭스 버팔로즈전에서 시즌 31호이자 일본프로야구 신기록이 되는 통산 16번째 만루 홈런을 날렸다. 2015 시즌의 70%정도가 지난 8월 16일에(전날 스리런으로 생일을 자축하였다) 리그 타점 '''106점'''으로 2위인 이대호와의 차이가 '''27점'''이다. 홈런도 이대호보다 7개 앞선 33개. 진짜 독주란게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결국 37홈런, 124타점으로 2관왕 타이틀을 차지하였다.
2015 WBSC 프리미어 12 일본 대표팀으로 선발되었다. 부상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도쿄 대첩 때 일본 팀 마지막 타석에서 대타로 나왔으나 범타를 기록하며 대한민국에 패배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2016년 시즌 초반 사구에 부상을 당해 주춤했으나, 다시 홈런 페이스를 끌어올리면서 파리그 홈런 경쟁 레이스에서 닛폰햄의 브랜든 레어드, 팀 동료 에르네스트 메히아의 뒤를 쫓고 있다. 물론 삼진 숫자는 당당히 1위를 마크하고 있다. 5월 13일부터 3루수로 출전했고, 6월 15일게임 수비 도중 협살 플레이 처리 과정에서 왼쪽 무릎을 다친 뒤 6월 28일까지 1군 경기 출장 기록이 없다. 7월 1일부터 경기에서 다시 출전하고 있으나, 홈런을 날리지 못하고 있다. 타율과 출루율도 하향세.
극도의 타격부진이 계속되자, 타나베 노리오 감독은 오카와리 군의 2군행을 결정했다. '16년 7월에는 19경기에 출전하여 타율은 0.194, 홈런은 2개에 그쳤다. 나카무라는 스스로 몸상태는 이상이 없다고 밝혔다. '16시즌은 108경기에서 타율 0.238, 21홈런, 61타점, 출루율 0.313, 장타율 0.447, 125개의 삼진 등 지난해에 비해 크게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2017년 시즌을 앞두고 많은 준비를 했다. 체중 4킬로를 감량하여 무릎의 부담을 줄였고, 신예 거포 츠츠고 요시토모의 타격폼을 참고해 폼을 개선했다. 개막전 안타 이후 4월 23일까지 17경기 연속안타를 기록했다.[10] 오른쪽 발목 염증으로 25일 경기를 결장하고 26일에 출전했으나 4타수 무안타를 기록해 기록 갱신에 실패했다. 2017년 6월 14일 한신 타이거즈와의 교류전 원정경기에서는 홈런을 날리며 12구단 본거지에서 홈런을 모두 기록하게 되었다. 고시엔 구장에서 77타석만의 첫 홈런.
2017년 최종 성적은 115경기 타율 .217 출루율 0.319 장타율 0.446 27홈런 79타점으로 퍼시픽리그 홈런 6위과 타점 7위를 기록했다. 1루수로는 야마카와 호타카, 3루수로는 토노사키 슈타라는 젊은 자원들이 대두하면서 메히아-오카와리의 우타 거포 듀오에게는 위기가 찾아온 한 해가 되었다.
2018년에는 본인의 부상도 있고 그 와중에 야마카와와 토노사키가 1군에서 불을 뿜고 있는지라 2군에서 개막을 맞았다. 1군에서 2018. 6. 26 기준 24시합 81타수 9안타(1홈런) 4타점 30삼진 타율 0.111 / 출루율 .198 / 장타율 0.160을 기록하고 있으며 부진이 장기화되고 있다. 시즌 첫 홈런을 6월 9일에야 신고했다. 7월 21일 라쿠텐과의 홈경기에서 시즌 8호(솔로)홈런을 기록하며 에토 아키라를 제치고 일본프로야구 통산 홈런 순위 단독 26위에 올랐다. 7월 31일 소프트뱅크와의 홈경기에서 시즌 11호(솔로)홈런을 날렸고 통산 368호 홈런으로 에토 신이치(前 롯데)를 제치고 통산 홈런 순위 단독 25위에 올랐다. 8월 7일 오릭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앤드류 앨버스를 상대로 시즌15호홈런(2점)을 날리며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45번째로 1,000타점 고지에 올랐다.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17경기에서 10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다. 부진 탈출의 계기는 동갑내기 선수인 라쿠텐의 이마에 토시아키가 사용하는 배트와 동일한 모델을 사용해서라고 한다. 평소에 쓰던 950그램보다 50그램 가벼운 900그램의 배트다. 8월 9일 오릭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시즌 17호 홈런(2점)을 날리며 본인 최초 5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
그리고 8월 10일 라쿠텐 원정에서 시즌 18호 홈런을 쳐내며 퍼시픽 리그 타이기록인 6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11] 다음날인 11일, 일본프로야구 타이기록[12] 인 7경기 연속 홈런에 도전했으나 5타수 1안타에 홈런없이 물러나며 퍼시픽리그 타이기록으로 만족했다.
8월 17일 닛폰햄과의 홈경기에서 20호 홈런을 쏘아올렸다. 5년 연속, 11번째 20홈런 이상을 기록한 시즌이 되었다.
2018년 최종 성적은 97시합 출전, 타/출/장 0.265 0.329 0.546, 28홈런(리그6위) 74타점(리그공동10위) 112삼진이다. 시즌 종료 후 해외 FA 권리을 행사하고 "평생 세이부 라이온스"를 선언하며 팀에 잔류한다고 발표했다. FA권을 재취득하는 것은 만39세가 되는 2022년이다. 극도의 부진으로 은퇴까지 고민했으나 여름에 부활을 이뤄냈으며 내년 세이부의 일본시리즈 제패를 맹세하였다.
다만 2018 시즌부터 퍼시픽리그를 대표하는 홈런왕의 이미지는 팀 후배인 야마카와 호타카가 가져가버렸다.
아사무라 히데토의 FA이적으로 인해 내야진을 개편함에 따라 3루와 외야를 병행하던 토노사키 슈타가 2루로 이동함으로서 3루수를 보게 되었다. 시즌 초반까진 2할 초중반대의 저타율에 허덕이며 고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교류전을 기점으로 타격감이 살아나고 있다. 5월 11일 닛폰햄과의 경기에서 개인 통산 17번째 만루홈런을 치며 2015년 이후 처음으로 만루홈런을 기록했다. 다만 팀은 7:5로 패배했다.
6월 14일 야쿠르트와의 홈경기에서 개인통산 18번째 만루홈런을 날리며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통산 최다 만루홈런 기록을 또다시 경신했다. 6월 18일의 주니치와의 원정경기에서는 상대 선발 오노 유다이에게 투런홈런을 날리며 홈런을 기록한 투수의 수를 229명으로 늘리고 교류전 통산 200타점도 기록했다. 6월 22일 한신 원정경기에서는 오사카 토인 동기 이와타 미노루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작렬하며 홈런을 기록한 투수의 수가 230명이 되었다. 이는 요미우리의 아베 신노스케와 더불어서 일본야구 타이 기록.
교류전이 종료된 이후인 7월 19일. 개인통산 400호 홈런을 '''끝내기 홈런으로 달성했다!!''' 거기다 타격감도 점점 더 좋아지며 30대 중반에 타율 커리어 하이를 찍을 기세다. 8월 29일 기준 타/출/장 .290 .369 .535에 25홈런 99타점을 기록중이다. 2015년 이후로 4년만에 세 자릿수 안타를 달성하는가 하면 타점도 야마카와 호타카의 뒤를 이어 리그 2위에 올라있다. 과거처럼 30~40개의 홈런을 치던 파괴력을 가진 거포에서 적재적소에 타점을 올려주는 클러치 히터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9월 3~5일 오릭스와의 경기에서 개인 통산 19번째 만루홈런을 기록하며 10타점(2타점, 5타점, 3타점), 9월 6일 라쿠텐과의 경기에서도 또다시 만루홈런을 쳐내 4타점을 쓸어담으며 야마카와 호타카(11개)를 제치고 타점 선두(117개)를 달리고 있다. 9월 6일 홈런으로 2015시즌 이후 또다시 한 시즌 만루홈런 4개를 기록했고, 통산 만루홈런 기록도 20개로 늘리며 독보적 1위가 되었다.
2019년 종료 성적은 타율(.286), 장타율(.528), 출루율(.359), 135경기, 홈런 30개(리그 공동 5위), 타점 123개다. .286의 타율은 개인 커리어 하이이며 2위 야마카와 호타카를 3개차로 제치고 타점왕을 차지했다.[13] 베스트나인에서도 선정됐다.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해 단축시즌으로 진행됐고 79시합 출전, 297타석에서 타율 .213, 9홈런, 31타점, 삼진 75개를 기록하였다.
프로에서의 20번째 시즌을 맞이했다. 오카와리군의 체중은 102kg로 드래프트 1순위로 입단한 내야수 와타나베 켄토(요코하마 토인대학교 졸)는 '''117'''kg(176cm), '''103'''kg의 야마카와 호타카와 더불어 삼중사(三重士)라는 별명이 붙었다. 와타나베를 포함한 신인 합동 트레이닝 장소에서 나카무라도 훈련중이며 와타나베의 스윙을 보고 ''타격을 보면 타구가 멀리 날아갈 거라고 생각했다"고 칭찬했으며[14] 체중감량 중인 와타나베에게 "나도 한 달만에 92,93kg까지 감량한 적있지만 곧 리바운드 될 것"이라고 하며 억지 감량은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많은 삼진과 좋지 않은 컨택 능력을 장타력과 사사구로 커버하는 OPS 히터로, 마크 맥과이어나 애덤 던의 플레이스타일과 유사하다. 다만 맥과이어의 그것보다는 장타력이, 던의 그것보다는 눈야구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 하단의 통산 성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데뷔 이래 단 한번도 타율은 3할을 넘지 못했으며 커리어 최고 타율이 .285, 통산 타율은 .255 에 불과하다. 하지만 통산 출루율은 9푼 가까이 더 높은 .346 이며, 통산 장타율은 .543 에 이른다. 좋은 선구안과 강력한 파워가 가져오는 압박을 바탕으로 스윙을 아끼며 볼넷을 얻어내고, 비록 컨택은 좋지 않지만 실투는 용납하지 않으며 홈런 내지 장타로 연결시키는 타자. 상대도 그것을 알기에 더더욱 조심스레 바깥쪽 승부를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그에게 볼넷을 주게 되어 있다. 다만 이런 스타일이 으레 그렇듯이 홈런 수나 OPS에 비해서 타점이 좀 부족하고, 단타를 많이 쳐서 적립되는 통산 안타 수를 쌓기가 불리하기 때문에 명구회처럼 클래식한 누적 기록을 중시하는 일본 야구계 풍토상 다소 저평가받을 수 있는 유형이다.
다만 주전으로 발돋움 하기 시작한 2008년에는 이러한 스타일의 확립이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아 고 출루율 타자라기 보다는 공갈포적인 성향이 더 강했다. 이런 스타일이 자라잡기 시작한건 2010시즌 부터로, 이후 커리어 동안 타율 - 출루율 간 간극을 1할 내외로 넓히며 자기의 스타일을 완전히 확립했다. 특히 2014 시즌에는 6월 14일 기준 타/출/장. 255/.461/.650 이라는 공포의 스탯을 찍기도 했다. 출루율이 타율보다 2할이나 높다. (...)[15]
'70%의 힘만으로도 공을 스탠드로 날릴 수 있다'라고 말할 정도의 순혈 파워 히터로, 일본프로야구 최고수준의 장타력은 그의 아이덴티티이다. 172cm라는, 야구선수로는 크지 않은 키를 가지고 있지만 타고난 파워를 바탕으로 당겨쳐서 홈런을 만들어내며, 홈런들이 라이너성 타구보다는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문샷이 많은 것이 특징. 세이부 시절의 팀 동료였던 와쿠이 히데아키에게 홈런을 많이 쳤으며, 이혜천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뛰던 시절에도 메이지진구 구장 좌측스탠드에 꽃히는 라인드라이브 만루홈런을 안겨줬다. 다만 시원한 스윙만큼이나 삼진 또한 많아서 삼진왕을 3차례나 기록했다.
3루수로서의 수비 능력은 영 좋지 않아서 리그 실책 1위를 3차례나 기록하는 불명예를 안았는데, 3루수로서 2014년까지 통산 필딩률 .950이라는 극악의 수비를 보여주었다. 그래서인지 해가 갈 수록 1루수(.989) 기용이 많아지는 중. 그리고 2014년에 들어와서는 1루수로 나왔음에도 부상을 당해 몇몇 팬들은 아예 지명타자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팀 내에 1루밖에 못 보는 에르네스트 메히아나[16] , 주 포지션은 포수지만 수비력이 여물지 않은 모리 토모야, 외야수 출신이지만 체력관리가 필요한 베테랑 외야수 쿠리야마 타쿠미[17] , 포동포동한 외모와 장타력뿐만 아니라 3루 수비 못 하는 것까지 꼭 닮은 야마카와 호타카[18] 등 1루/지명타자 슬롯을 차지할만한 자원이 많은데다 차기 3루수 자원도 마땅치 않은지라[19] 2020년까지도 나카무라가 3루수로 출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오른쪽은 아내인 배우 무라카미 마리에.
겉모습만 보면 그저 가정적이고 순박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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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은 현재 퍼시픽리그를 대표하는 홈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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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21일 크레용 신짱 747화에 등장! [1][2] 다만 본명이 아닌 오카와리(한그릇 더)라고 불린다. 신노스케는 오스와리(앉아)군 이라고 부르지만. (...)
1. 소개
2. 프로 입문 전
2.1. 고등학교 시절
3. 선수생활
3.1.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3.1.1. 2002~2007 : 프로에 적응하기까지
3.1.2. 2008 : 첫 리그 홈런왕
3.1.3. 2009 : 2년연속 홈런왕 및 첫 리그 타점왕
3.1.4. 2010 : 얼굴 골절 부상
3.1.5. 2011 : 3번째 홈런왕, 2번째 타점왕
3.1.6. 2012 : 4번째 홈런왕
3.1.7. 2013 : 무릎 수술로 인한 부진
3.1.8. 2014 : 5번째 홈런왕
3.1.9. 2015 : 300홈런, 1000안타 돌파 및 통산 만루홈런 신기록 달성, 6번째 홈런왕, 3번째 타점왕
3.1.10. 2016 : 극도의 부진, 그리고 2군행
3.1.11. 2017 : 부상으로 인한 하향세
3.1.12. 2018 : 부진 탈출 및 빠른 속도로 홈런 생산
3.1.13. 2019 : 개인통산 400호 홈런 달성 및 정규시즌 타점왕 등극
3.1.14. 2020 : 노쇠화
3.1.15. 2021
4. 플레이 스타일
5. 이모저모
6. 연도별 기록
7. 관련 문서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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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소속의 야구선수. '''홈런왕 6회, 타점왕 4회'''에 빛나는 일본프로야구 현역 최고의 슬러거이다.[4] 2019년 시즌 종료 시점에서 통산 20개의 만루홈런을 치며 일본프로야구에서 가장 많은 만루홈런을 친 타자이기도 하다.
푸짐한 체구와 더불어 아래의 일화 이후로 일본에서는 '한 그릇 더 군'(おかわり君)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대한민국 한정으로는 이대호와 구분하기 위해 일본 돼지(...)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2. 프로 입문 전
2.1. 고등학교 시절
집에서 가까운(도보 5분 거리) 오사카 토인고교[5] 에 진학하여 4번 타자로 활약하며 고교 3년간 통산 83홈런을 기록했다.[6] 또한 프로에서 도루왕 경력이 있는 1년 후배 니시오카 츠요시가 고교 시절 자신보다 나카무라가 더 빨랐다고 증언할 만큼 주력도 뛰어난, 정말로 대단한 재능을 지닌 선수였다. 이러한 성적에 힘입어 2001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 2순위로 지명되어 모두의 기대를 한껏 받으며 프로에 입문했다. 고3 시절 경기모습[7]
3. 선수생활
3.1.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3.1.1. 2002~2007 : 프로에 적응하기까지
순조롭게 1군에 적응해 갈 것이라던 예측과 달리 나카무라의 프로 초년병 시절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장타력은 뛰어났지만 정교함이 떨어지는데다가 삼진이 너무 많았다. 2003년 1군 데뷔전을 치르긴 했지만 큰 활약을 하지는 못했고, 2005년 중반에 이르러서야 이토 쓰토무 감독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기회를 얻기 시작했다. 이토 감독은 당시 3루수를 보고 있던 용병 호세 페르난데스를 지명타자로 돌리고 나카무라를 붙박이 3루수로 기용하였다. 나카무라는 80경기에서 22홈런을 폭발시키며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특히 센트럴리그와의 교류전 기간 동안에는 12홈런을 기록하며 교류전 우수선수상을 받았다.
2006 시즌에는 당시 개인 최다인 100경기에 출전하였으나 홈런은 9개로 급감하였으며, 득점권에서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즌타율 .276, 득점권 .205) 부진했다. 또한 좌상바의 모습도 보이며 상대선발이 좌완일 경우 선발에서 제외되기 일쑤였다.
2007 시즌 역시 부진하며 5월에는 2군을 가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결국 시즌 98경기 출장에 타율 .230, 홈런 7개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였다.
3.1.2. 2008 : 첫 리그 홈런왕
그러던 중 2008년에 세이부에 와타나베 히사노부가 신 감독으로, 오쿠보 히로모토가 타격 코치로 들어오면서 나카무라의 커리어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오쿠보 코치는 정교함이 떨어지는 나카무라가 자신의 단점을 고치기 위한 훈련을 반복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단점을 고치기보다는 장점을 살리자' 라며 그의 스윙 스타일을 변화시켰다. 동계훈련 기간동안 보다 당겨치는 타구가 많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 히팅포인트를 앞 무릎 앞쪽에 형성시키는 훈련을 한 나카무라는 2008년 드디어 홈런타자로 각성하여 46홈런으로 리그 홈런왕에 등극한다. 반면에 삼진 또한 162개를 기록하며 삼진 1위에도 동시에 등극한다(...) 그러나 리그 최다인 22개의 실책, .231의 낮은 득점권 타율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3.1.3. 2009 : 2년연속 홈런왕 및 첫 리그 타점왕
이듬해인 2009 시즌에도 48홈런을 몰아치며 홈런왕 자리를 유지하였으며 122타점으로 생애 최초 타점왕도 달성한다. 타율 또한 .285로 전년도(.244)에 비해 크게 향상되었다. 다만 실책(15)과 삼진(154)에서도 여전한 모습을 보여주며 2년 연속 해당부문 리그 1위를 지켰다.
3.1.4. 2010 : 얼굴 골절 부상
2010년에는 시즌 전 자신이 친 타구에 얼굴을 맞아서 골절상을 입는 등 시즌 내내 부상으로 고생하며 85경기 출전, 25홈런에 그친다. 부상만 없었다면 홈런왕은 따놓은 당상이던 페이스였지만 이로 인해 홈런 타이틀은 T-오카다가 가져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111개의 아름다운 삼진 개수를 기록하였으며 득타율은 .170을 기록하며(!!!) 공갈포가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3.1.5. 2011 : 3번째 홈런왕, 2번째 타점왕
반발력이 낮은 통일구가 도입되어 일본프로야구 전체의 장타력이 급감한 2011 시즌에도 홀로 대포를 양산해내며 48홈런으로 개인 최다 타이를 이룸과 동시에 3번째 홈런왕을 차지한다. 해당 시즌 퍼시픽리그 홈런 2위인 마쓰다 노부히로의 홈런 갯수는 25개였으며[8] , 퍼시픽리그 전체 홈런이 454개, 치바 롯데 마린즈의 경우 '''팀 홈런'''이 46개였을 정도로 역대급 '''투신타병''' 시즌이었다. 나카무라는 리그 전체 홈런의 10.57%를 혼자 양산해내며 양 리그 출범 이후 최초로 리그 홈런의 10% 이상을 홀로 치는 위엄을 보여줬다. 116타점으로 당연히 타점왕도 그의 몫. 리그 전체의 투고타저 경향에 홀로 역행한, 나카무라 타케야의 실질적인 커리어하이 시즌이다.
2011 시즌 후 팀과 3년 10억엔의 계약을 맺는다.
3.1.6. 2012 : 4번째 홈런왕
2012 시즌을 앞두고 본인의 등번호와 같은 60홈런을 칠 것을 선언한다. 시즌 초반 잠시 부진을 겪으나 교류전을 계기로 괴물같이 부활하며 홈런 1위에 등극한다. 하지만 6월 등부상이 악화되어 부상자 명단에 오른다. 그 사이 이대호에게 홈런과 타점 1위 자리를 빼겼지만 이내 역전하면서 27홈런으로 2년 연속 퍼시픽리그 홈런왕에 올렀다.
3.1.7. 2013 : 무릎 수술로 인한 부진
2013년 시즌에는 전년도 무릎 수술로 인해 시즌 대부분을 날려먹으면서(어깨 부상으로 인해 복귀 지연) 26경기 출전, 4홈런에 그쳤다. 4번타자 자리는 .317 27홈런 110타점으로 타점왕 타이틀을 획득하며 각성한 고교 후배 아사무라 히데토가 메웠다.
3.1.8. 2014 : 5번째 홈런왕
2014 시즌에는 완전히 각성. 타율은 여전히 2할 중반대에서 머물렀지만, 출루율이 확연히 높아진 모습을 보였다. 완벽히 타석 접근법을 자신에게 맞는 형태로 찾아낸 모양. .257 .384 .579 34홈런[9] 90타점의 좋은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3.1.9. 2015 : 300홈런, 1000안타 돌파 및 통산 만루홈런 신기록 달성, 6번째 홈런왕, 3번째 타점왕
2015 시즌에는 7월 24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경기에서 4회말에 선발투수 오타니 쇼헤이를 상대로 솔로 홈런을 기록하면서 300홈런(일본프로야구에서 41번째)과 1,000호 안타(일본프로야구에서 281번째)를 동시에 달성하였다. 300호 홈런은 1,158경기만이며 이는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8번째로 빠른 기록이다. 아울러, 같은 날 경기에서 역시 투수 오타니를 상대로 158km의 강속구를 밀어쳐서 만루홈런을 뽑아냈는데, 개인 통산 15번째 만루홈런이며,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많은 만루 홈런(15개)를 친 타자로 오 사다하루와 타이를 이뤘다. 8월 9일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열린 오릭스 버팔로즈전에서 시즌 31호이자 일본프로야구 신기록이 되는 통산 16번째 만루 홈런을 날렸다. 2015 시즌의 70%정도가 지난 8월 16일에(전날 스리런으로 생일을 자축하였다) 리그 타점 '''106점'''으로 2위인 이대호와의 차이가 '''27점'''이다. 홈런도 이대호보다 7개 앞선 33개. 진짜 독주란게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결국 37홈런, 124타점으로 2관왕 타이틀을 차지하였다.
2015 WBSC 프리미어 12 일본 대표팀으로 선발되었다. 부상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도쿄 대첩 때 일본 팀 마지막 타석에서 대타로 나왔으나 범타를 기록하며 대한민국에 패배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3.1.10. 2016 : 극도의 부진, 그리고 2군행
2016년 시즌 초반 사구에 부상을 당해 주춤했으나, 다시 홈런 페이스를 끌어올리면서 파리그 홈런 경쟁 레이스에서 닛폰햄의 브랜든 레어드, 팀 동료 에르네스트 메히아의 뒤를 쫓고 있다. 물론 삼진 숫자는 당당히 1위를 마크하고 있다. 5월 13일부터 3루수로 출전했고, 6월 15일게임 수비 도중 협살 플레이 처리 과정에서 왼쪽 무릎을 다친 뒤 6월 28일까지 1군 경기 출장 기록이 없다. 7월 1일부터 경기에서 다시 출전하고 있으나, 홈런을 날리지 못하고 있다. 타율과 출루율도 하향세.
극도의 타격부진이 계속되자, 타나베 노리오 감독은 오카와리 군의 2군행을 결정했다. '16년 7월에는 19경기에 출전하여 타율은 0.194, 홈런은 2개에 그쳤다. 나카무라는 스스로 몸상태는 이상이 없다고 밝혔다. '16시즌은 108경기에서 타율 0.238, 21홈런, 61타점, 출루율 0.313, 장타율 0.447, 125개의 삼진 등 지난해에 비해 크게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3.1.11. 2017 : 부상으로 인한 하향세
2017년 시즌을 앞두고 많은 준비를 했다. 체중 4킬로를 감량하여 무릎의 부담을 줄였고, 신예 거포 츠츠고 요시토모의 타격폼을 참고해 폼을 개선했다. 개막전 안타 이후 4월 23일까지 17경기 연속안타를 기록했다.[10] 오른쪽 발목 염증으로 25일 경기를 결장하고 26일에 출전했으나 4타수 무안타를 기록해 기록 갱신에 실패했다. 2017년 6월 14일 한신 타이거즈와의 교류전 원정경기에서는 홈런을 날리며 12구단 본거지에서 홈런을 모두 기록하게 되었다. 고시엔 구장에서 77타석만의 첫 홈런.
2017년 최종 성적은 115경기 타율 .217 출루율 0.319 장타율 0.446 27홈런 79타점으로 퍼시픽리그 홈런 6위과 타점 7위를 기록했다. 1루수로는 야마카와 호타카, 3루수로는 토노사키 슈타라는 젊은 자원들이 대두하면서 메히아-오카와리의 우타 거포 듀오에게는 위기가 찾아온 한 해가 되었다.
3.1.12. 2018 : 부진 탈출 및 빠른 속도로 홈런 생산
2018년에는 본인의 부상도 있고 그 와중에 야마카와와 토노사키가 1군에서 불을 뿜고 있는지라 2군에서 개막을 맞았다. 1군에서 2018. 6. 26 기준 24시합 81타수 9안타(1홈런) 4타점 30삼진 타율 0.111 / 출루율 .198 / 장타율 0.160을 기록하고 있으며 부진이 장기화되고 있다. 시즌 첫 홈런을 6월 9일에야 신고했다. 7월 21일 라쿠텐과의 홈경기에서 시즌 8호(솔로)홈런을 기록하며 에토 아키라를 제치고 일본프로야구 통산 홈런 순위 단독 26위에 올랐다. 7월 31일 소프트뱅크와의 홈경기에서 시즌 11호(솔로)홈런을 날렸고 통산 368호 홈런으로 에토 신이치(前 롯데)를 제치고 통산 홈런 순위 단독 25위에 올랐다. 8월 7일 오릭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앤드류 앨버스를 상대로 시즌15호홈런(2점)을 날리며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45번째로 1,000타점 고지에 올랐다.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17경기에서 10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다. 부진 탈출의 계기는 동갑내기 선수인 라쿠텐의 이마에 토시아키가 사용하는 배트와 동일한 모델을 사용해서라고 한다. 평소에 쓰던 950그램보다 50그램 가벼운 900그램의 배트다. 8월 9일 오릭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시즌 17호 홈런(2점)을 날리며 본인 최초 5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
그리고 8월 10일 라쿠텐 원정에서 시즌 18호 홈런을 쳐내며 퍼시픽 리그 타이기록인 6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11] 다음날인 11일, 일본프로야구 타이기록[12] 인 7경기 연속 홈런에 도전했으나 5타수 1안타에 홈런없이 물러나며 퍼시픽리그 타이기록으로 만족했다.
8월 17일 닛폰햄과의 홈경기에서 20호 홈런을 쏘아올렸다. 5년 연속, 11번째 20홈런 이상을 기록한 시즌이 되었다.
2018년 최종 성적은 97시합 출전, 타/출/장 0.265 0.329 0.546, 28홈런(리그6위) 74타점(리그공동10위) 112삼진이다. 시즌 종료 후 해외 FA 권리을 행사하고 "평생 세이부 라이온스"를 선언하며 팀에 잔류한다고 발표했다. FA권을 재취득하는 것은 만39세가 되는 2022년이다. 극도의 부진으로 은퇴까지 고민했으나 여름에 부활을 이뤄냈으며 내년 세이부의 일본시리즈 제패를 맹세하였다.
다만 2018 시즌부터 퍼시픽리그를 대표하는 홈런왕의 이미지는 팀 후배인 야마카와 호타카가 가져가버렸다.
3.1.13. 2019 : 개인통산 400호 홈런 달성 및 정규시즌 타점왕 등극
아사무라 히데토의 FA이적으로 인해 내야진을 개편함에 따라 3루와 외야를 병행하던 토노사키 슈타가 2루로 이동함으로서 3루수를 보게 되었다. 시즌 초반까진 2할 초중반대의 저타율에 허덕이며 고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교류전을 기점으로 타격감이 살아나고 있다. 5월 11일 닛폰햄과의 경기에서 개인 통산 17번째 만루홈런을 치며 2015년 이후 처음으로 만루홈런을 기록했다. 다만 팀은 7:5로 패배했다.
6월 14일 야쿠르트와의 홈경기에서 개인통산 18번째 만루홈런을 날리며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통산 최다 만루홈런 기록을 또다시 경신했다. 6월 18일의 주니치와의 원정경기에서는 상대 선발 오노 유다이에게 투런홈런을 날리며 홈런을 기록한 투수의 수를 229명으로 늘리고 교류전 통산 200타점도 기록했다. 6월 22일 한신 원정경기에서는 오사카 토인 동기 이와타 미노루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작렬하며 홈런을 기록한 투수의 수가 230명이 되었다. 이는 요미우리의 아베 신노스케와 더불어서 일본야구 타이 기록.
교류전이 종료된 이후인 7월 19일. 개인통산 400호 홈런을 '''끝내기 홈런으로 달성했다!!''' 거기다 타격감도 점점 더 좋아지며 30대 중반에 타율 커리어 하이를 찍을 기세다. 8월 29일 기준 타/출/장 .290 .369 .535에 25홈런 99타점을 기록중이다. 2015년 이후로 4년만에 세 자릿수 안타를 달성하는가 하면 타점도 야마카와 호타카의 뒤를 이어 리그 2위에 올라있다. 과거처럼 30~40개의 홈런을 치던 파괴력을 가진 거포에서 적재적소에 타점을 올려주는 클러치 히터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9월 3~5일 오릭스와의 경기에서 개인 통산 19번째 만루홈런을 기록하며 10타점(2타점, 5타점, 3타점), 9월 6일 라쿠텐과의 경기에서도 또다시 만루홈런을 쳐내 4타점을 쓸어담으며 야마카와 호타카(11개)를 제치고 타점 선두(117개)를 달리고 있다. 9월 6일 홈런으로 2015시즌 이후 또다시 한 시즌 만루홈런 4개를 기록했고, 통산 만루홈런 기록도 20개로 늘리며 독보적 1위가 되었다.
2019년 종료 성적은 타율(.286), 장타율(.528), 출루율(.359), 135경기, 홈런 30개(리그 공동 5위), 타점 123개다. .286의 타율은 개인 커리어 하이이며 2위 야마카와 호타카를 3개차로 제치고 타점왕을 차지했다.[13] 베스트나인에서도 선정됐다.
3.1.14. 2020 : 노쇠화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해 단축시즌으로 진행됐고 79시합 출전, 297타석에서 타율 .213, 9홈런, 31타점, 삼진 75개를 기록하였다.
3.1.15. 2021
프로에서의 20번째 시즌을 맞이했다. 오카와리군의 체중은 102kg로 드래프트 1순위로 입단한 내야수 와타나베 켄토(요코하마 토인대학교 졸)는 '''117'''kg(176cm), '''103'''kg의 야마카와 호타카와 더불어 삼중사(三重士)라는 별명이 붙었다. 와타나베를 포함한 신인 합동 트레이닝 장소에서 나카무라도 훈련중이며 와타나베의 스윙을 보고 ''타격을 보면 타구가 멀리 날아갈 거라고 생각했다"고 칭찬했으며[14] 체중감량 중인 와타나베에게 "나도 한 달만에 92,93kg까지 감량한 적있지만 곧 리바운드 될 것"이라고 하며 억지 감량은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4. 플레이 스타일
많은 삼진과 좋지 않은 컨택 능력을 장타력과 사사구로 커버하는 OPS 히터로, 마크 맥과이어나 애덤 던의 플레이스타일과 유사하다. 다만 맥과이어의 그것보다는 장타력이, 던의 그것보다는 눈야구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 하단의 통산 성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데뷔 이래 단 한번도 타율은 3할을 넘지 못했으며 커리어 최고 타율이 .285, 통산 타율은 .255 에 불과하다. 하지만 통산 출루율은 9푼 가까이 더 높은 .346 이며, 통산 장타율은 .543 에 이른다. 좋은 선구안과 강력한 파워가 가져오는 압박을 바탕으로 스윙을 아끼며 볼넷을 얻어내고, 비록 컨택은 좋지 않지만 실투는 용납하지 않으며 홈런 내지 장타로 연결시키는 타자. 상대도 그것을 알기에 더더욱 조심스레 바깥쪽 승부를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그에게 볼넷을 주게 되어 있다. 다만 이런 스타일이 으레 그렇듯이 홈런 수나 OPS에 비해서 타점이 좀 부족하고, 단타를 많이 쳐서 적립되는 통산 안타 수를 쌓기가 불리하기 때문에 명구회처럼 클래식한 누적 기록을 중시하는 일본 야구계 풍토상 다소 저평가받을 수 있는 유형이다.
다만 주전으로 발돋움 하기 시작한 2008년에는 이러한 스타일의 확립이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아 고 출루율 타자라기 보다는 공갈포적인 성향이 더 강했다. 이런 스타일이 자라잡기 시작한건 2010시즌 부터로, 이후 커리어 동안 타율 - 출루율 간 간극을 1할 내외로 넓히며 자기의 스타일을 완전히 확립했다. 특히 2014 시즌에는 6월 14일 기준 타/출/장. 255/.461/.650 이라는 공포의 스탯을 찍기도 했다. 출루율이 타율보다 2할이나 높다. (...)[15]
'70%의 힘만으로도 공을 스탠드로 날릴 수 있다'라고 말할 정도의 순혈 파워 히터로, 일본프로야구 최고수준의 장타력은 그의 아이덴티티이다. 172cm라는, 야구선수로는 크지 않은 키를 가지고 있지만 타고난 파워를 바탕으로 당겨쳐서 홈런을 만들어내며, 홈런들이 라이너성 타구보다는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문샷이 많은 것이 특징. 세이부 시절의 팀 동료였던 와쿠이 히데아키에게 홈런을 많이 쳤으며, 이혜천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뛰던 시절에도 메이지진구 구장 좌측스탠드에 꽃히는 라인드라이브 만루홈런을 안겨줬다. 다만 시원한 스윙만큼이나 삼진 또한 많아서 삼진왕을 3차례나 기록했다.
3루수로서의 수비 능력은 영 좋지 않아서 리그 실책 1위를 3차례나 기록하는 불명예를 안았는데, 3루수로서 2014년까지 통산 필딩률 .950이라는 극악의 수비를 보여주었다. 그래서인지 해가 갈 수록 1루수(.989) 기용이 많아지는 중. 그리고 2014년에 들어와서는 1루수로 나왔음에도 부상을 당해 몇몇 팬들은 아예 지명타자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팀 내에 1루밖에 못 보는 에르네스트 메히아나[16] , 주 포지션은 포수지만 수비력이 여물지 않은 모리 토모야, 외야수 출신이지만 체력관리가 필요한 베테랑 외야수 쿠리야마 타쿠미[17] , 포동포동한 외모와 장타력뿐만 아니라 3루 수비 못 하는 것까지 꼭 닮은 야마카와 호타카[18] 등 1루/지명타자 슬롯을 차지할만한 자원이 많은데다 차기 3루수 자원도 마땅치 않은지라[19] 2020년까지도 나카무라가 3루수로 출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5. 이모저모
- 애칭인 '한 그릇 더 군'은 선배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한 그릇 더 입니다'라고 대답해서 생겼다. 이 말이 통통한 그의 이미지와 어울려서 애칭으로 굳어버렸다. 그래서인지 유독 멀티홈런이 많다.
- 2살 연상인 탤런트인 무라카미 마리에와 2008년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3남을 두고 있다. 장남은 2009년7월22일생, 차남은 2011년12월3일생, 3남은 2014년6월12일생이다.
- 이대호가 일본에 진출했을 당시 한국 언론에서 라이벌로 거론하기도 하였는데, 사실 두 사람의 타격 스타일은 많이 다르다. 나카무라가 압도적인 장타력을 앞세운 스테레오타입 슬러거라면, 이대호는 기본적으로 교타자에 타고난 파워가 더해진 스타일이다.
여담으로 키순으로 치면 일본 돼지 < 미국 돼지 < 한국 돼지 순이다.
- 팀 후배 유망주 야마카와 호타카가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통통한 체형과 장타력 등 닮은 점이 많아 기대를 받았고, 오카와리 2세로 별명이 붙었다. 그리고 2018년 포텐이 완전히 다 터지며 세이부의 4번타자 자리를 계승했다.
- 오랜 경력과 준수한 성적을 자랑하지만, 잦은 부상으로 정작 국가대표와는 인연이 없었다. 32세가 된 2015년에 프리미어 12대회 국가대표로 처음 차출되었으나 한국에 우승이 좌절되었고 2년 뒤 WBC에서는 노쇠한 기량으로 인해 국대 홈런타자 자리를 츠츠고에게 물려주면서 이 이후에 국가대표로서는 뽑히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도 후배인 야마카와 호타카가 충분히 그의 자리를 채워주고 있기에 사실상 국가대표에서의 경쟁력도 밀린다. 어찌보면 양준혁과 비슷한 케이스의 국가대표에서는 비운의 선수.[20]
- 2살 아래의 동생 나카무라 미츠스케도 야구선수로 포지션은 형과 똑같은 3루수. 그러나 플레이 스타일은 형과 반대로 타격보다는 수비로 승부를 보는 똑딱이 3루수이며 키는 형과 비슷하지만 홀쭉한 몸매를 가졌다. 오사카토인고교를 졸업하고 교토산업대학에 진학했으며 그 후 프로에 가지 못하고 회사를 다니며 사회인야구 클럽팀에서 뛰고 있다. 공교롭게도 사회인야구 클럽팀 대회 결승이 형의 홈구장인 메트라이프 돔에서 열렸고 그 곳에서 대회 우승에 성공했다.
6. 연도별 기록
7. 관련 문서
[1] 설정상 신노스케 가족이 사는 곳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연고지인 사이타마 현의 카스카베 시다.[2] 영상 초반부 녹화 장면으로 보아 본인이 직접 녹음까지 한 듯하다.[3] '''その胸を焦がす 炎のままに 気迫で打ち抜くんだ バックスクリーン(그 가슴을 태우는 불길처럼 기백으로 꿰뚫어라 백 스크린/소노 무네오 코가스 호노오노 마마니 키하쿠데 우치누쿤다 박 스크린)'''[4] 2017년 깨지기 전까지는 규정타석을 채운 해엔 모두 홈런왕을 기록했었다.[5] 재학 당시 이와타 미노루가 동기, 니시오카 츠요시가 1년 후배였다. 토인 고교는 전국 대회 우승후보들이 즐비한 초 격전구 오사카에서도 항상 본선 진출 후보 1순위로 평가받는 야구 명문고이다. 라이벌 격인 PL학원고등학교가 야구부에 대한 방침을 바꾸며 예전과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2010년대에 들어와서는 오사카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강호로 자리매김했으며, 특히 2014년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는 오사카에서 30년만에 3년 연속 본선 진출, 그대로 전국 제패까지 달성했다. 나카타 쇼, 아사무라 히데토, 후지나미 신타로, 모리 토모야등이 나카무라의 후배이다.[6] 당시 역대 2위의 기록.[7] 배번호 3번이며 프로 때와 달리 군살이 없는 체구다.[8] 참고로 퍼시픽리그 3위인 아롬 발디리스와 나카타 쇼는 18개였고, 센트럴리그 홈런 1위인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31개, 센트럴리그 홈런 2위 하타케야마 카즈히로와 알렉스 라미레스가 23개를 쳤다. 당시 홈런타자들 중 유일하게 탱탱볼 시절과 똑같은 홈런 페이스를 보여주었다.[9] 같은 팀이었던 에르네스트 메히아와 함께 리그 공동 1위. 다만 메히아는 겨우 106경기 만에 34홈런을 때려냈다.[10] 개막부터 연속 안타 경기 기록 관련, 퍼시픽리그의 기록은 1954년 래리 레인즈(한큐)가 세운 20안타, 센트럴리그의 기록은 1997년 와다 유타카(한신)가 세운 24경기다.[11] 퍼시픽리그에서는 2004년 마쓰나카 노부히코(前 소프트뱅크) 이후 최초, 세이부에서는 2003년 알렉스 카브레라 이후 첫 기록.#[12] 1972년 오 사다하루(前 거인), 1986년 랜디 바스(前 한신)가 기록[13] 역시 팀 동료들인 타점 3위는 모리 토모야(105개), 타점 6위는 토노사키 슈타(90개)다.[14] 와타나베도 팀 선배 오카와리군, 야마카와를 동경하지만 '제3의 ooo'라는 타이틀보다는 본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주력하겠다고 했다.[15] 이정도 출루율과 타율간의 간극을 보였던 타자는 약먹던 시절의 베리본즈를 제외하면 야구 역사에서 찾기 힘들다. 물론 나카무라의 이러한 스탯이 시즌 내내 유지되지도 않았고.[16] 다만 메히아는 2018년부터 퇴물이 돼서 거의 대타로 나오고 있다. 2019년과 2020년 2년 연속 2군에서 개막을 맞이하는 굴욕도 겪었고.[17] 메히아가 1군에 못 올라오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사람이 고정적으로 지명타자를 차지해서이다. 타격은 선구안이 굉장히 뛰어나고 발 빠른 중거리포였지만 현재는 도루는 사실상 하지 않으며 장타도 뜬금포 정도밖에 없으며 강점이었던 출루능력도 예년만 못하다. 그러나 명구회 가입을 목전에 뒀던 선수라 꾸준히 주전으로 기회를 줄 듯하다.[18] 1루수 자리에 굉장히 애착이 큰 상태라 지명타자로 돌릴 가능성은 낮지만 쿠리야마 때문에 어차피 지명타자로 돌릴 수도 없다.[19] 주전 3루수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던 유틸리티맨 토노사키 슈타가 아사무라 히데토의 FA 이적 후 주전 2루수 자리를 차지했다.[20] 하지만 무었보다 인터뷰등을 보면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주위에서 하라고 하는듯란 인상이 강하다. 아예 프리미어 12가 끝난뒤 두번다시 대표팀 안한다 라고 할정도로 본인이 대표팀을 싫어하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