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다 유우키

 

[image]
'''프로필'''
'''이름'''
'''야마다 유우키'''
山田裕貴(やまだ ゆうき)
'''성별'''
남성
'''직업'''
배우
'''출신지'''
일본 아이치
'''생년월일'''
1990년 9월 18일 (33세)
'''신장'''
178cm, 65kg [1]
'''혈액형'''
O형
'''소속사'''
와타나베 엔터테인먼트
'''배우 활동 시기'''
2010년 ~ 현재
'''관련 링크'''
블로그
1. 개요
2. 연기
2.1. TV 드라마
2.2. 영화
3. 기타


1. 개요


일본의 남성배우
2010년 9월 19일에 개최된 D-BOYS 스페셜 유닛 오디션의 최종 합격자였지만, 신규 회원으로는 선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전 투표에서 1위를 했던 영향인지, 이후 D-BOYS 오디션에서 그랑프리된다. 이후, 와타나베 엔터테인먼트 소속.

2. 연기


2011년, 해적전대 고카이저에서 주역인 조 깁켄 역으로 데뷔 이후 꾸준히 연기활동 중이다.[2]
그리고 2012년 6월, 텔레비전 드라마 D×TOWN 복들이 연애할 수 없는 이유에서 첫 주연을 맡고 2014년 라이브에서 영화 첫 주연을 맡는다.

2.1. TV 드라마


  • 해적전대 고카이저 - 조 깁켄 / 고카이 블루
  • D×TOWN 제3편 <우리가 연애할 수 없는 이유> - 주연 미야모토 켄지 역
  • 검은 보고서 남자와 여자의 사건 파일 "고독" 제1화 '그림자의 여자' - 코지마 요헤이 역
  • GTO - 후지요시 코지 역
  • GTO가을도 귀신 날뛰는 스페셜
  • GTO설 스페셜!방학도 열혈 수업이다
  • GTO완결편, 그러면 오니즈카!졸업 스페셜
  • 사토 가의 아침식사, 스즈키 가의 저녁식사 - 하시모토 나오토 역
  • 장난스런 Kiss ~ Love in TOKYO - 이케자와 킨노스케 역
  • 장난스런 Kiss ~ Love in TOKYO 2 - 이케자와 킨노스케 역
  • 스타 맨·이 별의 사랑 - 안도 군 역
  • D-BOYS 설날 스페셜 드라마 <무녀를 사랑해서> - 야시로 역
  • N을 위하여 제4화-5화 - 미조구치 역
  • 수요 미스터리 9 <검사 사와키 마사오2 공소 취소> - 카리야 무안 역
  • 텔레비전 아사히 21세기 신인 시나리오 대상 <화석의 미소> - 후카다 켄스케 역
  • 호텔 컨시어지 - 콘노 코타로 역
  • HiGH&LOW, THE STORY OF SWORD - 무라야마 요시키 역
  • 기묘한 이야기 25주년 기념. 가을 2주 연속 SP 걸작부활 편 <이마키요 씨> - 요시이 역
  • 황무지의 사랑 제3, 5화 - 카야마 마사오 역
  • 여자 구애의 밥 Season2 제2화 - 오가사와라 야마토 역
  • 수험의 신데렐라 - 오키타 유타 역
  • 사폐-DEATH CASH- - 미우라 사토시 역
  • 동물전대 쥬오우저 - 조 깁켄 / 고카이 블루
  • 과수연의 여자 제16시리즈 4화 이이 나오토 역
  • 캬바스카 학원 4,5화 - 우에노 히로시 역
  • 나에게 운명의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 하세가와 유스케 역
  • 친구 게임 - 미카사 텐지 역
  • 3명의 아빠 - 하노 쿄헤이 역
  • 여자 성주 나오토라 - 이하라 스케에몬 역
  • 우리가 했습니다 - 들판 레이몬 역
  • 이토 군 A to E - 오키 역
  • 홀리데이 러브 - 쿠로이 요시노부 역
  • 특수 9 시리즈 - 신도 료 역
  •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 -
  • 경시청 수사 자료 관리실 (임시) 제10화 - 사메지마 역
  • 이노센스 원죄 변호사 제2화
  • TV소설 <여름 하늘> - 오바타 유키지로 역
  • 대전력실종 - 시로가네 마사야 역
  • 세대전쟁 - 카시와기 역
  • 홈룸 - 아이다 린타로 역
  • 선생님을 없애는 방정식 - 요리타 아사히 역
  • 청의 SP - 학교 내 경찰 • 시마다 류헤이 - 사에구사 히로키 역
  • 여기는 지금부터 윤리입니다 - 타카야나기 역

2.2. 영화



3. 기타


송일국과 매우 닮았다.(...) 덕분에 그가 맡은 배역인 조 깁켄은 한국에서 '일국 조', '송 깁켄' 등의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또, 그의 또다른 출연작인 '장난스런키스 Love In Tokyo'에서 머리를 올리고 출연하였는데, 지코와 매우 닮아 한국 팬들이 지코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한국 음식을 매우 좋아한다고 한다.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삼겹살과 매운 음식. 삼겹살을 먹기 위해 2시간이나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라고. 블로그에 따르면 비스트와 만난 적이 있는 듯 하다.
한국 음식뿐만 아니라 케이팝도 굉장히 좋아해서 국내 아이돌의 일본 콘서트에 자주 가는듯 하다.
기동전사 건담 00의 팬으로 TV판 기동전사 건담 00의 DVD 박스나 극장판 건담00의 초회한정 블루레이를 가지고 있으며, 세츠나 F 세이에이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배우가 된 계기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여동생으로부터 배우 양성소의 오디션 소식을 듣게 된 것이라고.[3]
야마야 카스미[4]하고는 친분이 꽤 두터운 사이라고 한다. SNS상에서도 서로 맞친구라고.
아버지가 야구선수 출신으로 현재 히로시마 카프의 코치를 맡고 있는 야마다 카즈토시이기에 고등학교 3학년 전까지만[5] 하더라도 프로 야구선수를 목표로 했었다고 한다. 다만 본인이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는 나가시마 기요유키와 트레이드 되면서 히로시마로 옮겼다. 2018년 드래곤즈 vs 야쿠르트 스왈로즈 경기 시구식때 입은 옷은 아버지가 드래곤즈 현역 시절 등번호인 30번[6]을 기록했던 야마모토 마사이다. 90년에는 16번(전 주인은 미야시타 마사미.)으로 바뀌었다가 아들 출산직후 트레이드 되면서 히로시마 현역시절 등번호는 레전드 아라이 타카히로가 달았던 25번. 아라이가 은퇴한 직후부터 임시결번상태다. 94년까지는 히로시마 내야뎁스가 요미우리를 압도할 정도로(쇼다 고조, 노무라 겐지로, 에토 아키라가 대표적이다.) 거의 2군에만 있었으나 95년에 홈런 12개를 치면서 커하를 찍었지만 부상당하면서 시즌을 일찍 접었다. 현역 마지막해에는 호시노 감독과 같이 주니치로 복귀했을때 등번호는 우노 마사루카와이 마사히로, 이병규가 달았던 7번이었다. 96년에는 95년 부상여파가 심해서 전혀 출장을 못한채로 은퇴했는데 소속팀은 요미우리의 11.5겜 차이 역전우승의 조력자가 되고 말았다. 그것도 10월 6일 나고야구장 고별전에서 나가시마 시게오의 우승헹가레를 허용하게 되었는데 그때 삼진으로 시마이시키던 좌완투수가 유우키의 친아버지의 히로시마 선수시절 동료이자 전직 요미우리 투수코치였던 가와구치 가즈히사인데 히로시마에선 가즈토시의 주니치 입단동기생인 야마모토와 같은 34번이었고 요미우리에선 34번이 카네다 마사이치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어서 이승엽이 달았던 25번. 하지만 가와구치는 연봉대비 기대이하의 활약으로 먹튀취급을 받았다. 사실 가와구치는 히로시마 잔류를 원했으나 장인의 간병에 매달리던 마누라의 바가지를 못이겨 처가 연고팀인 요미우리로 갔으나 이적한지 얼마되지 않아 장인이 사망하면서 멘탈이 개발살났고 요미우리는 작년 10.8 결전때 우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3위로 고꾸라졌다. 재향군인회에게 임대료 뜯어먹은적 있었던 이승엽도 25번달고 똑같이 요미우리 4번타자 명단에 있는 무라타 슈이치처럼 급료도둑으로 찍히는 수모를 당했다. 다만 성적은 무라타가 나은 수준이지만. 베이징올림픽때도 25번달고 삽질을 신나게 하다가 4강전때 이와세를 털어먹으면서 호시노재팬을 시원하게 조져버린 덕에 경질설에 시달리던 하라보살을 지킨건 물론 호시노의 요미우리 감독부임설을 영원히 재워버렸다. 현재는 4번타자로 꿰찬 오카모토 카즈마가 달고 있다. 이병규가 7번 달고 2007JS우승에 기여했다. 카와이 마사히로는 유우키 친아버지 1년선배인데 10년이나 더 선수생활을 했다. 선수생활 마지막해에는 안방에서 친정팀이었던 요미우리전에서 번트장인답지 않게 '''번트병살'''로 횡사당하는 안습한 날도 있었는데 그 횡사시킨 장본인이 4번타자로 선발출장했던 1루수 이승엽이었다. 이여파로 팀은 전날 우에하라 고지에게 사요나라 만루홈런 갈긴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이승엽과 고쿠보 히로키에게 털리면서 패배. 이날 승리투수는 2006시즌 센트럴리그에서 연패한 우츠미 테츠야. [7] 정작 아버지는 현직 히로시마 코치였고 히로시마는 주니치에게 호구잡혔으나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압도하면서[8]로 돌려막기 하는데 급급했다. 말년에는 주장완장차고 선동열에게도 삼진쳐먹은적이 있다. 현재는 요미우리 야수종합코치. 쪼인트를 본의아니게 분질러버리는 타구를 날린 나카오는 1982년 센트럴리그 MVP 수상자로 포수출장을 워낙 원해서 이로 인해 우노 마사루의 헤딩사건때 배터리이자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와의 불화로 담해 니시모토 타카시와 트레이드로 요시무라와 한솥밥을 먹게 되면서 사이토 마사키의 사와무라상 수상에 기여하며 우승시킨다. 그것도 일본시리즈에선 혼자서 포수로 풀타임 출장했다. 그리고 트레이드 상대였던 니시모토와 컴백상을 공동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의 부상까지 겹치는 바람에 3위까지 고꾸라졌다가 겨우 2위로 마치면서 감독이었던 왕정치도쿄돔 입주 첫해를 시원하게 말아쳐먹고 모가지가 짤려나가면서 요미우리와 영원한 이별이 시작되었다. 1군 첫출장도 1986년 5월 25일 요미우리전이었는데 1군데뷔시킨 감독은 시즌 중 모가지 짤리고 시즌종료하자마자 요미우리 감독이던 왕정치의 부름을 받고 코치 커리어를 시작했던 요미우리 타격코치로 옮겨서 츠다 츠네미에게 손목 분쇄당한 하라보살의 타격폼 수정에 기여하면서 부활시킨건 물론 1989년에 코마다 노리히로를 만개시키면서 1989년 일본시리즈 MVP까지 만들어놨다. 베이징가서도 요미우리 소속 타자에게 분쇄당한 안티거인의 화신인 호시노 사부 못지않게 요미우리와 이리저리 악연이 있다. 다만 드래프트 지명받을때 당시 주니치 감독은 요미우리 시절 나카가미 히데오와 원투펀치를 이룬 에이스였고 단 두경기지만 요미우리 '''제12대 4번타자''' 명단에도 있는 곤도 사다오였으나 친정팀 요미우리의 우승을 허락해버리고 시즌 종료직후 물러나버렸다.) 리그우승했으나 일본시리즈에서 소뱅에게 분쇄당했다.[9]


[1] 참고, 오자와 료타보다 조금 더 커보인다.[2] 고카이저 주연 멤버들중에 배우 활동으로 가장 활발하다. 하지만 배우 활동을 제외시 연예계 활동은 M.A.O가 더 활발한 편.[3] 여동생은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4] 수리검전대 닌닌저에서 모모치 카스미 역을 맡은 배우.[5] 고등학교도 아버지랑 같다. 이학교도 2019년 고시엔에서 우승할 정도로 명문인데 대표적인 유명선수가 요미우리 주전포수이자 1987년 센트럴리그 MVP인 야마쿠라 카즈히로와 2007년 일본시리즈 우승시킨 아사쿠라 켄타 등이 있다.[6] 입단당시에는 33번이었으나 곽원치와 등번호를 맞바꾸면서 30번을 달았다. 입단동기가 50세 선수이자 최고령 완봉승이 박힌 유니폼을 입고 던졌다고 한다. 2010년에 기록했는데 허용구단이 아니나 다를까 요미우리 자이언츠인데 그 와중에 한참 삽질하던 이승엽은 7번타자로 선발출장해서 2020년 현재 친아빠랑 같은팀에 몸담고 있는 초노 히사요시와 함께 무려 삼진을 2개나 조공하면서 하라 다쓰노리의 목덜미를 잡게 했다. 다만 이승엽이 등번호 33번을 달고 4번타자로 꿰차던 시절 주장이자 룸메였던 고쿠보 히로키의 샌드백이었는데 2006년에도 나고야돔에서 4번타자인 이승엽이 1루에 출루해 있는 상태에서 백스크린쪽으로 투런쳤고 2011년 일본시리즈때 주니치를 탈탈 털어먹고 MVP먹었다.[7] 아버지가 주니치 코치로 재직했을때 대표적인 유명한 선수가 나고야 앙팡만 선동열이정후 아버지인 이종범 그리고 삼손리로 유명한 이상훈, 현재 삼성라이온즈 2군감독인 오치아이 에이지, 베이징에서 이승엽김현수에게 털린 이와세 히토키, 양대리그 홈런왕에 빛나는 야마사키 타케시, 미스터 드래곤즈인 타츠나미 카즈요시가 되시겠다. 참고로 주니치 현역시절에는 그 유명한 우노 마사루의 애미가출한 수비를 가장 가까이 봤었고 호시노칠드런으로 분류된다.[8] 17년때는 더 심했던게 똑같이 하위권이었던 자매구단인 삼성라이온즈도 안당한 특정팀 12연패를 히로시마 상대로 거두는 바람에 4위로 고꾸라졌다. 참고로 그의 친아버지의 데뷔 첫홈런 허용구단이기도 하다. 1988년 주니치가 우승하던해인 6월 18일에 기록했는데 상대투수는 이승엽 동료로 유명했던 쿠와타 마스미. 이날 주니치는 나고야 탁구장시절 그 특유의 강룡타선으로 8회에 타선의 핵폭발로 역전하면서 7회까지 잘던지던 쿠와타에게 패전쳐먹인다. 그전날에도 이미 마키하라 히로미우노 마사루오치아이 히로미츠에게 2번이나 당하면서 패전했다. 이해 홈런이 2개인데 죄다 요미우리 상대로 기록했다. 다른 1개는 구와타의 또다른 동료였던 정민태와 불화를 대놓고 일으킨 카토리 요시타카. 카토리는 이후 맛탱이가 가버려서 담해 그 역스윕의 대명사인 1989년 일본시리즈에 패전처리만 하다가 세이부로 트레이드 당했다. 결국 이해 주니치에게 패배한 요미우리는 워렌 크로마티와 요시무라 사다아키(87시즌 요미우리의 클린업일원으로 삿포로 지방구장에서 개인통산 100호 홈런쳤음에도 8회초 나카오 다카요시의 외야뜬공 타구때 수비도중 충돌로 쪼인트가 분쇄당하는 중상을 입고 이후 맛이 가버렸다. 그것도 크로마티의 참교육사건 상대팀인 주니치상대로 터졌다. 이로 인해 요미우리 외야진은 하라보살, 코마다 노리히로, 로 메이시(루밍츠, 2014 인천아시안게임 대만야구팀 감독으로 출전했으나 등신같은 투교로 14코시 우승감독이던 류중일의 한국대표팀에게 역전패당한다.), 미노다 고지, 오가타 고이치(히로시마 감독과는 동명이인)는 우승하던 1989년부터 주전으로 자리잡았으나 그해 일본 시리즈 때 공수에서 하라보살과 함께 총체적 난국을 보이는 바람에 스윕패 위기가 닥쳐왔고 계속 선발출장하던 하라보살과는 다르게 결국 은퇴시기가 가까워지는 미노다 고지가 1번타자로 나올 정도였다. 한큐시절 30-30클럽을 2번이나 찍은 미노다 고지가 4~7차전때 1번타자로 선발출장하면서 역스윕에 성공하게 된다. 미노다 고지는 담시즌 중반에 은퇴하고 바로 코치로 취임한다. 하라보살도 뒤늦게 타격감이 올라와서 5차전 만루포와 7차전 결승투런포로 긴테츠를 떡실신시켰다.[9] 심지어 우승이 결정된 6차전 안방에서 밴덴헐크에게 타자들이 1점도 못내고 분쇄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