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르크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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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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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말보르크의 독일 기사단 성
영어
Castle of the Teutonic Order in Malbork
프랑스어
Château de l’ordre Teutonique de Malbork
국가·위치
폴란드 포모제 주 말보르크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7년
등재기준
(ii)[1], (iii)[2], (iv)[3]
지정번호
847
폴란드어: zamek w Malborku
독일어: Ordensburg Marienburg
영어: Malbork Castle
1. 개요
2. 역사
3.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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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말보르크 성은 13세기 후반 튜튼 기사단프로이센 지방을 정복한 뒤 지은 벽돌 고딕(Brick Gothic) 양식의 성으로 현재 폴란드 포모제 주 말보르크 시에 위치해 있다. 1457년 폴란드에 넘어갈 때까지 튜튼 기사단장의 거성이자 기사단의 수도로 기능했다. 독일어 명칭은 '마리엔부르크(Marienburg) 성' 또는 '오르덴스부르크[4] 마리엔부르크(Ordensburg Marienburg)'.
제 2차 세계대전 시기에 크게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지상 면적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성채다.[5]

2. 역사


1190년 팔레스타인 아크레에서 구호단체로 창설된 튜튼 기사단은 1198년 팔레스타인의 성지와 순례객들을 보호하기 위한 기사단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의 공격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십자군 세력이 축출당한 후 근거지를 잃은 기사단은 유럽 전역을 떠돌아다니다 1211년 트란실바니아를 위협하던 유목민족 쿠만인을 막아내기 위해 헝가리 왕 언드라시 2세(II. András, 재위: 1205~1235)의 요청으로 트란실바니아에 정착하였다. 그 후 기사단은 트란실바니아의 방어 겸 트란실바니아 개발을 위해 독일인의 정착을 유도하는 중개인 역할을 맡고 있었으나 1225년 교황에 반항하는 언드라시 2세를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라는 교황의 밀명을 수행하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트란실바니아에서 쫓겨났다.
또다시 근거지를 잃고 떠돌아다니던 기사단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는데 1226년 폴란드 마조프셰 공 콘라트 1세(Konrad I Mazowiecki)가 기사단에게 프루시 지방의 발트인들을 정복하는데 협조해달라고 요청해온 것이다. 서프로이센에서부터 라트비아에 이르는 발트 해 연안 지역에는 그때까지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고 발트 신화 신앙을 유지하고 있던 이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폴란드를 비롯한 그리스도교 세력들은 이들을 굴복시키려 계속해서 노력해봤으나 발트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매번 빈손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발트인을 이루는 수많은 부족들 중에서 동프로이센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프루시인들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였다. 콘라트 1세 역시 자신의 영지 바로 북쪽에 위치한 프루시인들을 정복하기 위해 수차례 시도해봤으나 그 때마다 빈손으로 돌아왔으며 오히려 프루시인들의 역습으로 인해 자신의 거처인 프워츠크 성까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쿠만인 격퇴와 트란실바니아 개척 등 이민족 정복을 위한 능력을 입증해보였으면서 헝가리에서의 일로 마침 모시는 주인이 없던 튜튼 기사단은 콘라트 1세가 보기에 매력적인 카드로 보였다.
헝가리에서의 사례처럼 쫓겨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튜튼 기사단은 자신들이 정복한 영토에 대한 확실한 지배권을 원했고 이는 1226년 프리드리히 2세가 리미니 금인칙서를 공표하고 1230년 콘라트 1세가 크루슈비차 조약에 서명하면서 성공한다. 그 후 튜튼 기사단은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새로운 영지가 될 프루시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우월한 군사기술을 가지고 있던 기사단은 약 20년에 걸쳐 천천히 프루시 지방을 정복하였다. 발트인들을 격파하고 그들이 사는 마을을 파괴한 후 그들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수십 개의 기사단 성채를 건설하고 여러 개의 도시를 건설해 독일인 이주민들과 선교사들을 정착시켜 발트인들의 땅에 그리스도교와 독일 문화를 전파했다. 프루시인들은 순순히 기사단에 굴복하는 듯 했지만 1242년과 1260년 두차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튜튼 기사단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엄청난 학살과 파괴를 자행하며 반란을 진압한 튜튼 기사단은 자신의 영지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약 1280년 경 이 성을 지었고 '성모 마리아의 성'이란 뜻으로 마리엔부르크[6]라 이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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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년 포메렐리아 일대[7]를 완전히 정복하는데 성공한 기사단은 1309년 본부를 베네치아에서 말보르크 성으로 이전하면서 이 성은 기사단국의 수도가 되었다. 엘빙(엘블롱크)에 있던 포메라니아-프러시아 일대의 행정 본부도 말보르크 성으로 옮겨왔다. 말보르크 성은 튜튼 기사단장[8]의 궁전이면서 약 3000명의 기사와 그 휘하 병사들의 병영이기도 했다. 따라서 14세기 내내 성은 개축과 확장을 계속했고 유럽 최대의 요새가 되었다. 성이 비스와 강의 지류인 노가트 강에 딱 붙어 있어서 이 성은 무역항의 기능까지 수행했다. 또한 다른 튜튼 기사단의 성과 마찬가지로 이 강을 지나는 배에 통행세를 물려 소소한 수익을 챙기기도 했다.
하지만 기사단이 발트 해 연안 지역을 성공적으로 정복하면서 북유럽의 강자로 떠오르자 경각심을 느낀 폴란드는 기사단을 견제하기 위한 새로운 파트너를 찾게 되는데 그 파트너가 바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이었다. 발트 십자군으로 인해 수많은 발트인 부족들이 정복당한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리투아니아인들은 개종을 미끼로 양쪽에 위치한 가톨릭과 정교회 세력을 동시에 낚으며 세력을 크게 키웠다. 리투아니아는 그동안 동유럽 일대에 큰 영향력을 발휘해 오던 킵차크 칸국이 쇠락하고 훗날 러시아가 되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아직 크게 성장하지 못한 점을 틈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일대를 정복, 동유럽의 최강국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렇게 강대국이 되었음에도 수도 빌뉴스 코앞에 있는 강성한 기사단 세력은 리투아니아에게 있어서 큰 위협이었으며 결국 1385년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Jogaila/Jagiełło(폴란드어: 야기에워), 리투아니아 대공 재위: 1377~1434, 폴란드 국왕 재위: 1386~1434)가 폴란드 여왕 야트비가(Jadwiga, 재위: 1384~1399)와 결혼해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이 완성된다.
1410년 7월 15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군은 그룬발트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군을 궤멸시켰다. 3만의 연합군은 여세를 몰아 말보르크 성도 공성했지만 성의 엄청난 방어능력 때문에 실패했다. 기사단을 완전히 무릎 꿇리는데 실패한 1454년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의 카지미에시 4세단치히 일대에서 일어난 반기사단 봉기를 빌미로 13년 전쟁을 일으켜 기사단국에 대한 정복을 재차 단행했다. 1440년 기사단의 통치에 반발하는 한자동맹 소속 3개도시(단치히, 엘빙, 퇴른)가 주변 소도시들과 함께 프러시아 연합을 결성했고, 1454년 연합은 자신들에 대한 카지미에시 4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이와 함께 폴란드 왕에게 출병할 것을 탄원했고 이에 응해 카지미에시 4세는 기사단-폴란드 간의 마지막 전쟁인 13년 전쟁을 일으킨다. 프러시아 연합에 소속된 도시들 역시 폴란드 편에 참전해 싸웠다. 연합의 맹주격인 단치히 시는 동맹에 자금을 공급하거나 해군을 지원했고, 후술할 말보르크 성 점령에 도움을 준 것 외에 비스툴라 석호 해전에서 기사단 해군을 궤멸시키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덕분에 전쟁이 끝난 뒤 폴란드 왕으로부터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1410년의 전쟁으로 세가 크게 약화된 기사단은 핵심 전력인 '형제 기사'와 그 휘하 병사들을 야전에 보낼 수밖에 없었고 말보르크 성은 보헤미아의 용병들에 의해 방어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기사단은 폴란드에 포로로 잡히는 기사와 병사들의 몸값을 점점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고 용병들에 대한 급료 지불도 계속 늦어졌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기사단은 도시의 세금을 올렸지만 엄청난 반발을 사기만 할 뿐이었다. 당시 기사단의 지배를 받던 단치히는 폴란드와의 무역 금지조치, 세금 인상 등의 문제로 기사단의 지배에 불만이 많았다. 단치히는 폴란드로 복속되길 원하며 왕국에 자금을 지원해줬는데 폴란드는 이 자금을 모아 급료를 못 받고 있던 보헤미아 용병들에게 대신 지불하고 성을 떠나 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중부유럽 최강의 방어력을 자랑하던 말보르크 성은 어처구니없게도 빈 성이 되어버렸고 1457년 카지미에시 4세는 적국의 수도에 입성했다. 왕은 단치히(그단스크)에 감사를 표하며 특권을 향상시켜주었다. 1466년 13년 전쟁이 끝나고 폴란드와 기사단이 2차 토룬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기사단국은 폴란드의 속국이 되었으며 기사단국의 수도 말보르크는 완전히 폴란드 왕국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수도 마리엔부르크를 빼앗긴 기사단이 새로운 수도로 삼은 곳은 이후 기사단의 후계국이자 독일 통일을 완수하는 프로이센 왕국의 정신적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였다.
1466년 폴란드의 왕령 프로이센에 편입된 말보르크 성은 폴란드 왕의 별궁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폴란드가 몰락하고 1772년 1차 폴란드 분할 이후 말보르크는 프로이센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이 독일 기사단국의 후계국인 프로이센 공국인 점을 생각해보면 어찌 보면 말보르크 성이 다시 기사단의 후손에게 돌아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성은 한동안 프로이센군의 병영으로 쓰였다. 당시 프로이센의 건축가였던 다비트 길리와 프리드리히 길리 부자는 1794년부터 이 성에 대한 건축학적, 역사적 조사를 시작했고 1799년부터 1803년까지 이 성의 역사에 관한 자료들과 성을 묘사한 판화들을 베를린에 전시해 프로이센인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뒤 말보르크 성은 프로이센 역사와 민족 정체성의 상징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이센 왕국과 그 뒤를 이은 독일 제국은 다소 낡아있던 이 성을 정성스럽게 재건하고 다듬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집권한 뒤 이 성은 '독일인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명소'로서 히틀러 유겐트와 독일소녀동맹 등 나치 독일 청소년 단체들의 정기 순례지가 되고 말았다. 나치 정부는 이 성을 선전물에 자주 등장시키며 불순한 용도로 이용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소련을 침공했던 나치 독일군이 소련군의 역습에 밀려 동프로이센을 빼앗기게 되었을 때, 말보르크 성은 동프로이센의 나치군 최후의 저항 거점 중 하나로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장이 되었다. 100년에 걸친 독일 정부의 보존 노력이 무색하게도 전투 기간 동안 성의 절반 이상이 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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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말보르크를 포함한 동프로이센 남부지역은 폴란드에 돌아갔고 폴란드 인민 공화국은 심각하게 파괴된 이 성을 완전히 철거하기로 했다. 하지만 폴란드인의 역사에도 매우 중요한 이 성을 함부로 철거하는 건 아니라는 의견이 많아 폴란드 인민정부는 결국 성을 복원하기로 결정을 바꾸었다. 1962년부터 진행된 복원의 결과 말보르크 성은 현재 거의 완벽에 가깝게 복원되어 있다. 하지만 그 복원 작업의 방대함 때문에 인테리어 일부는 아직까지 정교한 복원이 진행중이다. 1997년 유네스코는 성 자체의 예술성, 독일 기사단국이라는 독특한 국가의 중심이었다는 점 등을 인정해 말보르크 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3. 관광


그단스크가 관광의 중심이 되며 그단스크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약 40분 쯤 가면 말보르크 역에 도착한다. 말보르크 역에서 나와 우회전 한 뒤 조금 걸어가면 대로와 로타리가 나오는데, 이 로타리를 건너면 나오는 보행자 거리를 따라 약 10분 쯤 걸어간다. 거리가 끝나는 지점에 어떤 왕의 동상이 나오는데 이 왕은 1457년 말보르크 성을 정복한 야기에우워 왕조의 카지미에시 4세이다. 여기서 길이 갈라지는데 성이 보이는 쪽, 그러니까 맥도날드가 있는 쪽으로 가면 된다. 조금 더 가면 성의 매표소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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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지미에시 4세의 동상. 여기서 맥도날드가 보이는 길로 가자.
입장료는 2020년 기준 45즈워티(약 13700원, 10.5유로.)로 전체적으로 입장료가 저렴한 폴란드에서는 비싼 축이다.(물론 서유럽에 비하면 여전히 저렴하다.) 입장권에 위치 기반으로 작동하는 오디오가이드가 포함되어 있다. 7, 8월에는 11시 반부터 영어 가이드투어를 하는데, 가이드 투어 포함 성 내 외부를 넉넉히 다 둘러보는데 서너 시간 정도가 걸린다. 그단스크 왕복까지 고려하면 한나절을 꼬박 잡아먹지만 그단스크까지 올라온 배낭여행객에겐 절대 빼 놓을 수 없는 여행지다. 주의할 점은 '''월요일엔 내부 박물관이 문을 닫는다.''' 외부와 인테리어 일부만 개방하고 때문에 입장료는 무료(다만 8즈워티짜리 오디오 가이드가 필수)지만, 성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면 월요일은 되도록 피하는 것이 좋다.
외부는 전형적인 고딕 건축 기법이 녹아들어가 화려한 듯 담백하다. 기사단장의 궁전이면서도 일대 최강의 요새로 기능했기 때문에 튼튼하고 강인한 인상을 주며, 아름다운 성의 대명사인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반대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내부에는 당시 쓰이던 기사단의 군기와 무기, 가톨릭 포교를 위해 사용하던 성상, 그리고 옛날 폴란드 왕국군이 쓰던 무기와 갑옷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인테리어도 화려하기보단 담백한 편이다. 성에 입장하던 방향 반대 쪽에는 강이 흐르는데, 이 강에는 보행자 다리가 놓여 있다. 이 다리를 건너 강 반대편으로 가면 사진 찍기 좋은 구도가 나오는데, 말보르크 성을 소개하는 사진 대부분은 여기서 찍힌다. 날씨 좋은 날 정오 쯤 방문한 관광객이라면 여기서 사진을 찍을 때 엄청난 역광에 고통받게 될 텐데 알아서 잘 찍어 보자.
여름에 운이 좋다면 기사단과 폴란드 왕국군이 대결하는 리인액트 행사를 볼 수 있다는데, 보고 싶은 사람은 사이트에서 일정을 참고하자.
http://www.zamek.malbork.pl/warto-wiedziec/the-siege-of-malbork-7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기사단의 성'이란 뜻으로 독일 기사단이 자신들의 영역 곳곳에 지은 성을 일컫는 말이다.[5] 이는 궁전으로 분류되는 건축물들은 빼고 순수하게 성으로 분류되는 건축물 중에서 면적이 가장 넓다는 의미다. [6] 이하 현재의 이름인 말보르크 성으로 통일[7] Pomerelia. 동쪽으로는 동프로이센, 서쪽으로는 서 포메라니아, 남쪽으로는 헤움노와 접하며 동 포메라니아, 그단스크 포메라니아(Pomorze Gdańskie, 포모제 그단스키에)라고도 한다. 포메라니아는 좁게 정의할 경우, 보통 슈트랄준트에서 스웁스크에 이르는 발트해 연안지역과 그 내륙 일부를 칭하는 서 포메라니아만을 의미하나, 넓게 정의할 경우 포메렐리아까지 포메라니아로 인식된다. 한편 독일은 프로이센 왕국, 독일제국 시절 이 지역에 서프로이센 주를 설치해 이 지역을 프러시아의 일부로 보았다. 반면 폴란드는 연방 당시 포메렐리아 지역에 말보르크, 바르미아, 헤움노 지역을 묶어 왕령 프루시로 설정했고 포메렐리아 지역에 왕령 프루시의 하위 행정구역인 포모제 주(포메라니아의 폴란드어 명칭)를 설치하여 이 지역을 프러시아, 포메라니아에 함께 속하는 구역으로 인식했다. 현재 이 지역은 폴란드의 포모제 주에 속한다.[8] 호흐마이스터(Hochmeister)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