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1. 개요
'독일통일'이라는 용어는 크게 2가지 사건을 가리키는데 하나는 1871년에 독일계 국가들이 독일 제국이라는 하나의 나라로 통일한 사건(Deutsche Einigung)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1990년의 동서독 통일을 말한다. 양자를 구분하여 부를때는 1871년의 통일은 그냥 '독일 통일', 1990년의 동서독 통일은 '(독일) 재통일((Deutsche) Wiedervereinigung)'이라고 부른다.
본 문서는 1871년 독일 제국에 의한 통일을 다루고 있으므로 1990년의 동독과 서독의 통일에 대한 내용은 독일 재통일 문서를 참고할 것.
2. 통일 이전
독일은 통일 이전에 하나의 국가가 아닌 특정 지역과 민족을 의미할 뿐이었다. 유럽 중부의 도시들과 게르만족들은 신성 로마 제국에 의해 느슨하게나마 묶여있는 상태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의 통일 국가가 아니라 제국이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진 사실상의 연합일 뿐이었다. 성장하는 각 지역과 도시들의 세력에 의해 제국은 점점 불안해졌고 유럽 중부의 분열은 심화되었다. 결정적으로, 30년 전쟁과 그 결과 이루어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각 제후국들의 주권이 인정되어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력은 거의 사라졌다. 그나마 명목상 유지되던 제국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완전히 해체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해체 이후 유럽 중부의 도이치 민족은 분열된 상태가 지속되었다. 특히, 빈 회의의 결과 탄생한 빈 체제는 통일 국가 독일이 아니라 35개의 군소 국가와 4개의 자유시로 이루어진 가진 국가연합 '독일 연방(Deutscher Bund)'의 탄생시켰다. 독일 연방은 구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를 바탕으로 하는 국가연합이기는 하였으나 이 역시 명목상의 느슨한 연합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회원국들은 구심점도 없이 군대, 경찰, 관세를 모두 따로 가졌다. 그래서 부르주아 계층은 상공업 활동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통일 국가가 부재하다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컸다.
3. 통일을 위한 움직임
3.1. 소독일주의와 대독일주의
1830년대 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자연스럽게 통일 문제로 거론되기 시작되었다. 특히 당시 빈 체제를 이끌던 두 강대국 즉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서로의 주도 하에 독일을 통일하고자 하였고, 자연스럽게 두 나라를 각각 중심으로 두는 통일방안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두는 통일 방안을 대독일주의,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두는 통일 방안을 소독일주의라 부르게 된다.지정학상, 독일이라고 부를 만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지역에는 독일인에 의하여 세습되며, 각각의 체제와 주권을 바탕으로 개별적으로 통치되는 왕국, 대공국, 공국'''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지만 하나의 국가로서 단일한 수반에 의하여 통치되는 독일을 향한 민족주의 사상과 통일을 향한 경향 역시 수면 밑에서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There is, in political geography, no Germany proper to speak of. There are Kingdoms and Grand Duchies, and Duchies and Principalities, inhabited by Germans, and each separately ruled by an independent sovereign with all the machinery of State. Yet there is a natural undercurrent tending to a national feeling and toward a union of the Germans into one great nation, ruled by one common head as a national unit.)
- 뉴욕 타임스, 1866년 7월 1일자 기사.
이 두 방안을 둘러싼 갑론을박을 놓고 보통 '독일 문제(Deutsche Frage)'라고 부른다. 문제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독일민족의 국가 중 가장 크고 강하면서도, 오스트리아는 독일민족뿐 아니라 슬라브인과 헝가리인 등 여러 이민족까지 통치하는 다민족국가였다는 점이었다. 이 오스트리아를 통일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배제해야 하는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 소독일주의 :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독일인 단일민족 위주의 통일을 하고 다민족국가인 오스트리아는 배제하는 통일 방안.
- 대독일주의 : 다민족국가인 오스트리아 제국까지 포함한 통일 방안.
3.2. 관세동맹
1834년 연방의 단결 증진을 위해 프로이센이 주도로 관세 동맹을 체결시킨다. 프랑스에 대한 경제적 간섭을 줄인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10년 정도가 지나면서 독일연방 내 거의 모든 국가가 참가할 정도로 강력한 동맹으로 성정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관세동맹으로 인해 그동안 독일 내에 혼재되어 있던 여러 경제적 요소들이 통일성을 이루게 되어서 이후 30여년후 진행될 독일 통일 완성에 상당한 도움을 주게 된다.
3.3.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의 통일 논의
1848년에서 1849년에 걸쳐서 열린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서는 독일 통일이 논의되었다.
국민회의는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독일 황제로 추대하려 했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폭도들의 황제 따위는 필요없다"'''라며 거부하였다. 과거 독일 지역에서 황제란 로마 제국의 정통성과 더불어 기독교적 신성이 더해진 무언가로 여겨졌으며 신성 로마 제국 시절 선출을 통해 황제를 옹립하던 때에도 선거권은 민중 나부랭이나 도시 상공인들 '''따위'''가 아니라, 독일 지역의 강력한 대영주들과 대주교들만이 갖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에서 황제란 민중이 수여하는 것이 아닌 귀족들이 추대하고 기독교적인 신성이 더해져 정통성을 얹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민중들의 집단인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의 추대를 거절한 것이다. 훗날 독일 제국의 제위에 오르는 빌헬름 1세 또한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귀족들, 군주들의 추대를 통해 제위에 오른 것이지 결코 민중의 추대로 오른 것이 아니었다.
결국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의 통일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으며,[1] 독일 통일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에 의해 이루어진다.
4. 통일 전쟁
독일의 통일은 프로이센에 의해 무력과 외교로 달성되었다. 이는 크게 2가지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번째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보오전쟁)과 북독일 연방의 창설이고 두번째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과 독일 제국의 출범이다.
이 두 단계는 모두 프로이센이 독일 지역 내외부의 경쟁자들을 무찌르고 독일 지역에 대한 자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작업이었다. 첫번째 단계인 보오전쟁은 프로이센의 경쟁자였던 오스트리아를 독일 지역에서 축출하고 프로이센의 주도권과 지배권을 확고히 하는 작업이었다. 두번째 단계인 보불전쟁은 독일의 통일을 반대하던 프랑스를 유럽 중부에서 축출하고 남독일 4개국까지 독일 영토로 포함시키는 작업이었다. 그리하여 프로이센 국왕은 각 지역 영주들과 연방 의회의 승인을 받아 독일 전체의 군주가 되었다. 무수한 독일계 군소국가들도 모두 통일되어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 제국으로 승격했다.
4.1.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발발
프로이센 왕국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휘하 수뇌부는 무력을 통해서만 통일이 달성될 수 있다고 결론짓고 곧 그를 위한 움직임을 개시했다. 그 시작이 비스마르크가 재상으로 취임한 1862년부터 실행한 '''철혈 정책'''이었다. 철혈 정책은 프로이센의 산업화를 추진하고 대규모로 군비를 확장하는 정책이었다. 이는 산업력과 군사력으로 프로이센이 독일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고 프랑스 등의 외적을 몰아내기 위함이었다. 프로이센 의회의 권한을 억압하는 형태를 통한 정책의 일관성을 통해 프로이센을 강력한 군대의 나라로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천천히 통일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의 전쟁 방식은 전쟁만이 아닌 외교까지 더해지는 그야말로 합리적인 계산 하에 이루어지게 된다.
독일의 통일을 향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발단은 1864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영유권을 놓고 덴마크 왕국과 전쟁을 펼친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으로부터 시작된다. 사실 이 지역의 영유권 문제는 1848년부터 있어왔던 것이었다. 이 때는 영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으로 인해 그대로 덴마크 왕국에 영유권이 남게 되었지만, 1864년에 펼쳐진 전쟁에서는 영국과 러시아가 전혀 신경을 쓸 수 없는 시기였고, 애국적인 움직임이 혁명적인 움직임으로 돌변하는 것에 경계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전쟁에 적극 가담하게 되면서 결국 덴마크 왕국의 패배로 마무리 된다.
그리고 해당 지역은 1864년 10월 덴마크 왕국이 포기하게 되고, 1865년 8월 프로이센이 슐레스비히, 오스트리아가 흘슈타인을 갖는 것으로 협상이 마무리 되었으나 본래 독일연방 구성원이 아니었던 슐레스비히의 연방 가입안을 두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대립하게 되고,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연방에서 제외하는 개편안을 내놓게 되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본격적으로 전쟁을 펼치게 되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1866년 6월 펼쳐진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은 프로이센을 제외한 주요한 독일 연방 구성국 대부분이 오스트리아에 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의 외교로 인해 이탈리아가 반 오스트리아 편으로 전쟁에 참전하고, 프랑스의 중립 선언, 러시아 역시 친프로이센 정책을 펼침에 따라 오스트리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또한 프로이센의 막강한 군사력에 비해 오스트리아쪽의 군사력은 형편 없었기 때문에 결국 전쟁은 불과 7주만에 오스트리아의 패전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결국 해당 전쟁으로 대독일주의는 완전히 소멸되게 되고, 소독일주의가 그야말로 대세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소독일주의가 대세가 됐을 뿐 오스트리아 내의 독일인이 다수인 지역들에 대한 통일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이것이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이 해체되면서 결국 안슐루스로 이어지게 되고 최종적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나 결론이 나게 된다.
4.2. 패전국 병합과 북독일 연방의 성립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편에 서는 나라들은 주권과 국체를 보장해 줄 것이지만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가담하거나 중립을 지킨 나라들은 국체와 주권을 보장해줄수 없다며 엄포를 놓았다.
그 말대로 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가담한 나라들 중 프로이센군이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바이에른군과 오스트리아군의 지원군을 차단해 고립시켜 독 안에 든 쥐 신세로 만들어놓은 하노버 왕국과 나사우 공국, 그리고 아예 수도를 점령해버린 헤센-카셀과 프랑크푸르트 자유시는 아예 완전히 프로이센의 영토로 합병해버렸다. 합병당한 나라들의 왕실들은 당연히 반발했는데, 헤센-카셀과 나사우의 왕실은 비스마르크한테 돈을 받아먹고 입을 다물었지만 합병당한 나라들 중 가장 규모가 컸던 하노버 왕국의 왕실은 병합에 가장 극심하게 반발하여 비스마르크의 뇌물도 끝까지 거절하고 아예 프랑스로 망명가서 망명자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모집해 복위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역시 오스트리아 편에 가담하여 프로이센과 싸운 바이에른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바덴 대공국, 헤센 대공국(헤센-다름슈타트) 등의 남독일 4개국 또한 프로이센군에 연전연패하고 일부 영토를 점령당하긴 했지만 앞서 말한 나라들처럼 프로이센이 완전히 굴복시킨 것은 아니기에 프로이센은 이들에게서 일부 영토와 전쟁 배상금을 뜯어가는 선에서 그치고 이들의 독립국 지위는 인정해주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바이에른 왕국은 독일 영방국가들 중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이은 3인자로서 어느정도 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전쟁에서 지긴 했지만 여전히 프로이센이 맘대로 꿀꺽할 수 있는 나라는 아니었고 당연히 독립국 지위를 유지했다. 오히려 이런 바이에른의 3인자 위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던 비스마르크는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로 바이에른의 반감을 키우기보다는 화해의 제스쳐로 영토 할양과 전쟁 배상금에서 상당히 가벼운 처분을 내렸다. 뷔르템베르크 왕국, 바덴 대공국, 헤센-다름슈타트 또한 프로이센군에 연패하고 일부 영토를 점령당하긴 했으나 프로이센이 완전히 점령하거나 항복을 받아낸 것은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합병당한 마인강 이북의 하노버 등과는 다르게 이들은 오스트리아의 세력권인 마인강 이남에 위치해 있어서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의 지원을 여전히 받을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들 남독일 4개국은 전쟁에서 졌지만 프로이센이 이들을 병합하지는 못해서 보오전쟁 이후로도 독립국으로 존속할 수 있었고 마인강 이북에 한해서만 프로이센이 북독일 연방을 창설할 수 있다는 종전협정에 따라 북독일 연방에서도 배제되었다. 다만 이들 중 헤센-다름슈타트의 경우 나라 전체가 아닌 일부 지역(마인강 이북 지역)만 북독일 연방에 가입하는 식으로 어정쩡한 상태가 되었는데 자세한 사항은 아래 단락에서 후술한다.
작센 왕국 또한 오스트리아 편에서 프로이센과 싸웠는데 당시 작센 국왕 요한은 군대의 주력을 모두 보헤미아에 보내서 자기 나라의 방어도 내팽겨치고 오스트리아를 도왔다(...) 당연히 프로이센군은 작센을 손쉽게 점령했고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에 철저히 충성한 작센을 하노버 등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병합하려고 했지만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자기 나라도 내버리고 오스트리아를 도와준 작센 왕국의 충성심에 감명을 받았는지 비스마르크에게 자신의 명예를 걸고 다른 나라는 몰라도 작센만은 병합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고 또 프로이센의 세력이 지나치게 확대되는 걸 경계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도 작센만은 살려둘 것을 요구해서 결국 작센은 프로이센에 병합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물론 작센 왕국은 국체를 보존할수는 있었지만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북독일 연방에 가입해야 했다.
보오전쟁에서 프로이센 편에 섰던 여러 작은 나라들도 상술한 비스마르크의 약속에 따라 국체는 보존할수 있었지만 그들 또한 북독일 연방에 가입해야 했다. 이렇게 남독일 4개국과 오스트리아만을 제외한 모든 독일 영방국가들을 통합한 북독일 연방은 전쟁을 통해 생겨난 만큼 이전의 독일 연방과는 달리 외교권과 군사 행동권 등 구성국의 주권을 상당부분 제약했다. 물론 구성국의 주권을 제약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유럽연합과 같은 국가 연합 형태였던 독일 연방과는 달리 북독일 연방은 미국과 같은 연방제 국가에 더 가깝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북독일 연방에 후일 남아있던 나머지 남독일 4개국이 가입한 것이 독일 제국의 기반이 되고 북독일 연방 헌법을 살짝 손봐서 만들어진 것이 독일 제국 헌법이기 때문에 북독일 연방은 사실상 통일된 독일 국가의 직접적인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4.3. 비스마르크의 외교전과 보불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1867년 독일 연방은 해체가 되었다. 그리고 독일은 프로이센 중심의 북독일 연방과 남부에 독립국으로 남게 된 뷔르템베르크 왕국, 바이에른 왕국, 바덴 대공국, 헤센 대공국[2] 으로 재편되고, 오스트리아는 완전히 독일에서 이탈하게 된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프로이센 입장에서는 꽤나 불합리한 상황이었는데 사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둬 독일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완전히 일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3세가 이끌던 프랑스 제국이 여기에 개입하면서 그야말로 프로이센의 독일 통일 정책에 장벽이 하나 생겨버린 것이다. 프로이센의 영토 확장도 막혔고, 상술한 남독일 일대 4개국의 독립도 프로이센 입장에서는 여간 껄끄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남독일 4개국은 가톨릭이 강세였기 때문에 사실상 당시 가톨릭을 이끌던 선도 국가였던 프랑스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어려웠던 상황이었기에 불합리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이들 남독일 4개국은 어디까지나 친오스트리아라고 할 순 있어도 친프랑스는 아니었다. 당장 남독일의 맹주격인 바이에른 왕국의 경우 나폴레옹 3세가 과거 나폴레옹 전쟁의 패전으로 잃어버린 영토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드립을 치며 당시 바이에른의 영토였던 팔츠 지역에 집적거리기 시작하자 프랑스를 상당히 경계하게 되었고 보불전쟁이 일어났을때는 자신들의 영토인 팔츠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아예 프로이센에게 알자스-로렌을 점령할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결국 프로이센은 언제가 펼쳐지게 될 프랑스와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여러 외교적인 정책들을 펼친다. 당시 내부문제로 정신 없던 오스트리아와 강화를 하고, 러시아-이탈리아와는 군사적인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영국과는 사돈 관계를 통해 지속적으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적대 관계를 형성하면서 중부 유럽에서의 불리한 외교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나폴레옹 3세의 여러 외교적 실책이 더해지며 대외적 위기가 고조되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스페인 내전에서의 왕위 계승 문제로 나가게 된다. 스페인에서는 보르본 왕조가 무너지고 프로이센 왕가인 호엔촐레른 가문의 방가였던 레오폴트 왕자에게 왕위를 제의하나 이를 호엔촐레른 왕가의 수장이었던 빌헬름 1세가 반대하고, 적이 양쪽으로 둘러쌓일 위기에 처한 프랑스 제국이 반대하면서 자연스럽게 없던 일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외교 감정을 이용하게 되고 그 유명한 엠스 전보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사실 당시 프랑스의 외교력과 국력으로는 프로이센에 승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음에도 비스마르크의 엠스 전보 사건으로 프랑스 조야가 그야말로 들끓게 되자 혁명 발생 가능성을 두려워 한 나머지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참전하며 1870년 7월 프로이센과 전쟁을 펼치게 된다. 하지만 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 군은 프로이센 군에게 상대가 될리가 없는 상황이었고, 남부 독일의 군주국들은 비스마르크의 여러 뇌물과 민족 감정으로 인해 프로이센을 도와 프랑스에 대항해 참전한다. 프로이센군은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제압하면서 파리를 포위하게 된다.
4.4. 11월 조약과 연방헌법
파리 포위로 인해 프로이센이 이끄는 북독일 연방이 승기를 굳혀감으로써 프랑스가 더이상 독일계 국가들의 문제에 간섭하거나 방해할 수 없게 되자 이제 독일의 통일에 남은건 남아있는 남독일 4개국들(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헤센-다름슈타트)의 선택 뿐이었고 남독일 4개국과 북독일 연방은 통일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당시 남독일 4개국 각각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 바덴 대공국은 4개국 중 가장 적극적으로 통일에 찬성했다. 대공과 총리 모두 북독일 연방에 가입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사실 바덴은 보불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인 1867년에 이미 북독일 연방에 가입신청을 했으나 당시 외교적으로 눈치를 보고 있었던 비스마르크가 가입을 아직 허락하지 않아서 가입을 못하고 있던 것 뿐이었으니 얼마든지 가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경우 본래 오스트리아 주도의 대독일주의를 지지하고 있었으나 독일 민족주의 성향의 독일인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입장을 선회하여 북독일 연방과 통일 협상에 들어갔다.
- 헤센 대공국(헤센-다름슈타트)은 당시 상당히 특이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보오전쟁 후 종전협정을 체결하면서 프로이센은 새로 결성할 북독일 연방의 영역을 마인강 이북에 한정하기로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합의했고 이에 따라 헤센 대공국은 나라 전체가 아닌 대공국의 마인강 이북 지역만 가입한다는 괴랄한 협정을 맺어 나라의 절반은 북독일 연방에 속해있으나 나머지 절반은 독립국이라는 희한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당시 헤센의 대공 루트비히 3세는 오스트리아 주도의 대독일주의를 지지하고 있었지만 세자 루트비히 4세가 프로이센 주도의 소독일주의를 지지하고 상술했듯이 북독일 연방에 절반만 가입돼 있다는 어정쩡한 상황이 겹쳐 결국 루트비히 3세도 마음을 돌려 연방에 아예 완전하게 가입하기로 하는 협상을 시작하게 된다.
- 이 4개국 중 가장 세력이 컸던 바이에른 왕국은 다른 3개국보다 더 내부의 통일 반대 세력이 상당했다.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부터 북독일 연방과의 통일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독일의 나머지 3개국이 통일 협상을 시작하여 바이에른 혼자 남아 고립되게 될 상황에 처하자 마지못해 북독일 연방과 통일 협상을 시작하게 된다. 결국 바이에른은 프로이센으로부터 독자적인 재정과 군사, 철도, 우편 체제를 유지하는 등의 자치권을 포함한 특별대우를 보장받고 나서야 북독일 연방에 가입하게 된다.
4.5. 루트비히 2세의 친서와 빌헬름 1세의 황제 즉위
11월 조약으로 연방국가가 출범했지만 비스마르크는 단순히 연방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고 이제는 아예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를 황제에 등극시킴으로써 새로운 독일을 사라진 신성 로마 제국을 계승할 제국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가지 난관이 있었는데 첫번째는 빌헬름 1세 본인의 거절이었고 두번째는 새로 가입한 남독일 4개국 군주들의 반발이었다. 빌헬름 1세의 선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3월 혁명 당시 자신은 오직 독일 군주들의 추대로만 황제로 즉위할 것이며 폭도들이 준 왕관은 받을 수 없다며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가 바친 황제의 왕관을 거절한 적이 있었다. 이에 따라 빌헬름 1세 또한 단순히 신하들이나 의회의 추대로 황제가 되는 것은 위신이 서지 않는다고 여겼고 독일 군주들의 추대가 없다면 황제로 즉위하지 않겠다며 황위 등극을 거부하고 있었다. 남독일 4개국의 군주들 또한 프로이센 왕이 독일 황제가 되어 자신들이 황제의 신하가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므로 빌헬름 1세의 황제 등극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 두가지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 당시의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가 쥐고 있었다. 당시 바이에른 왕국은 강대국인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여러 독일 영방국가들 중 가장 규모가 큰 나라였기 때문에 사실상 중소규모 영방국가들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런 바이에른의 국왕이 가장 먼저 대표로서 빌헬름 1세의 황제 등극을 촉구하는 친서를 써서 보낸다면 다른 독일 영방국가들도 대세를 거스를 수 없음을 알고 황제 즉위에 찬성할 것이며 빌헬름 1세 역시 신하나 의회가 아닌 바이에른 국왕과 독일 군주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한다면 황제 등극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황위의 존엄함을 드높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위에서도 말했듯이 루트비히 2세 자신이 독일 통일에 부정적이었다는 것이다. 루트비히 2세는 친 오스트리아 성향으로서 본래 오스트리아 중심의 대독일주의를 지지하여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주의를 반대했고 바이에른이 독일에 통합되어 독립성을 상실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보오전쟁 당시 프로이센에게 참패했던 것에 대한 앙금도 여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친서를 써줄리 만무했다
그러나 루트비히 2세에게는 약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금전 문제였다. 루트비히 2세는 리하르트 바그너 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후원자로서 유명했고 또한 노이슈반슈타인 성 등의 대규모 건축물을 여럿 지었는데 예술을 후원하고 건축물을 짓는데 돈을 탕진한 덕분에 루트비히 2세의 내탕금은 바닥을 드러낸지 오래이고 사실상 파산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루트비히의 열악한 재정 상태를 알아낸 비스마르크는 홀른슈타인 백작을 통해 루트비히가 황제 추대를 독려하는 친서를 써준다면 금전적 대가를 지급할 것을 약속했고 돈이 궁했던 루트비히는 결국 비스마르크의 제안을 수락하여 독일 제후들에게 빌헬름 1세를 독일 황제로 추대할 것를 촉구하는 친서를 써주게 되니 이를 Kaiserbrief라고 한다. 그 대가로 비스마르크는 스위스 은행을 통해 일시불로 600만 마르크, 그 후로도 매년 30만 마르크씩 루트비히의 내탕금 계좌에 꽂아주었다. 물론 빌헬름 1세는 루트비히가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의 황제 즉위에 찬성한 것으로 믿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황제에겐 돈을 준 것을 비밀로 해야 했기 때문에 루트비히에게 준 돈의 출처는 프로이센의 국고가 아니라 보오전쟁에서 하노버 왕국을 병합한 후 강탈한 하노버 왕가의 재산을 몰래 빼돌린 것이었고(...) 황제에게는 루트비히에게 돈을 빌려준 것일 뿐이라고 보고되었다. 당연히 루트비히가 그 돈을 갚는 일은 영원히 없었다(...)
어찌보면 뇌물이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루트비히는 그후로도 비스마르크에게서 받은 돈으로 예술가들을 후원하여 바그너와 같은 거장들이 탄생했고 그 돈으로 지은 건축물들은 지금도 바이에른의 관광자원으로 수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바이에른에게 있어 루트비히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던 셈이다.
어쨌든 루트비히의 친서까지 받아 황제 등극의 정당성까지 확보한 빌헬름 1세는 독일 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수락했고 프랑스에서는 제정이 무너지고 파리 시민을 중심으로 국민 방위정부가 수립되지만, 프로이센군은 파리의 포위를 풀지 않아 결국 1871년 1월 국민 방위정부의 항복을 받아낸다. 마침내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빌헬름 1세는 독일 황제로 즉위하게 되고 1871년 3월 1일 파리에서 개선식을 펼쳤다. 동년 5월 4일 기존의 연방헌법을 황제국 체제에 맞게 수정한 독일 제국 헌법이 발효되면서 마침내 신성 로마 제국을 뒤이은 제2제국, 독일 제국이 출범하게 된다.
5. 의의
독일 지역은 고대 로마 때에는 대부분 지역이 로마의 영역 밖에 있었고, 프랑크 왕국 시기 때는 카롤루스 대제 때에 가서야 그럭저럭 라인강 일대가 편입되었다. 이후 동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 시기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국가적인 모습을 갖출 수 있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태생적인 한계와 단명한 왕조들의 문제들로 인해 분립 상태의 국가로 나아가게 되었다. 중세 후기의 혼란기를 거쳐 종교개혁으로 인한 30년 전쟁은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을 껍데기만 남겨 놓게 되고, 독일 일대는 그야말로 분립된 상황이 되고 만다.
그리고 독일은 호엔촐레른 왕가의 프로이센 왕국과 다시금 부활을 꿈꾸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 제국이 서로의 영향력을 확대해가며 강대국으로 자리 잡게 되고, 이 두 나라의 영향력을 둘러싼 독일 통일의 방안들이 논의가 된다. 이전에 있었던 나폴레옹 전쟁 역시 독일의 민족성에 불을 지핀 작업이라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뿌리 깊은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나폴레옹 전쟁으로 더 격앙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과정을 통해 통일을 이루게 된 독일의 통일이 중요한 이유는 유럽 내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로 대표되던 강국의 대열에 독일에 끼어들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그동안 중부 유럽에 자리 잡으면서 여러 나라의 영향력 하에서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독일이지만, 많은 인구와 풍부한 자원을 통해 통일을 기점으로 눈부신 산업화를 이루게 되면서 무려 두 차례나 되는 세계 대전을 사실상 혼자서 치뤘을 정도로 급성장하게 된다. 이후에 다시 분열되지만 독일이 한 번 통일되었던 점은 이후에 분열된 독일이 다시금 통일되는데에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고, 재통일 이후 독일 역시 유럽 연합을 이끄는 양대 축으로 자리 잡고,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국가로 다시금 성장하는 것만 봐도 독일 통일의 의의는 세계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강국이 나왔다는 점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할 수 있겠다.
6. 독일 통일과 지역주의
이렇게 통일이 되긴 했지만 독일의 각 지방들은 통일 이전까지만 해도 독자적인 국가로 유지되어왔던 시절이 길다보니 지금 현대까지도 독일은 각 지방마다 고유의 향토색과 지역주의가 강한 편이고 사투리도 차이가 크다. 특히 바이에른 등 남독일 지역은 자신을 독일인이라고 하는 것 보다 바이에른인 등 그 지방 사람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흔하며, 표준 독일어는 학교, 관공서, 공적인 업무에서만 사용하고 일상생활에서는 토착방언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이런 남독일 지역의 강한 지역주의 때문에 간혹 바이에른을 비롯한 남독일이 독일 통일 당시 프로이센에 의해 강제로 병합된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위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했듯이 강제로 병합된 쪽은 오히려 마인강 이북 북독일의 하노버, 나사우, 헤센카셀, 프랑크푸르트이고 오히려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를 비롯한 남독일은 통일당시 내부의 치열한 논의를 거쳐 협상을 통해 스스로 통일 독일에 가입한 것이다.
상술했듯이 특히 바이에른의 경우 통일 당시 남독일의 다른 나라들보다도 통일 찬성파와 반대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던건 맞지만 어디까지나 내부의 치열한 찬반논쟁 끝에 스스로 통일을 선택했다. 무엇보다도 독일 제국은 엄연한 연방제 국가로서 바이에른 등 지방 구성국의 왕실과 정부는 통일 이후 독일 제국에서도 그대로 존속했고 군사력의 보유와 독립적인 재정과 철도, 우편 등 자치권을 가졌다. 오히려 강제로 병합된 북독일의 하노버, 나사우 등은 아예 프로이센의 일개 주로 편입되어 이런 자치권을 누리지도 못했으니 더 억울한 쪽은 남독일보다는 북독일의 하노버(현재의 니더작센)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현대 독일의 지역주의는 북독일보다는 남독일 쪽이 더 강한데 이런 남독일의 지역주의는 비슷하게 내부의 논의를 거쳐 자발적으로 영국(연합왕국)에 통합된 스코틀랜드의 지역주의에 비견할 수 있겠다. 스코틀랜드와 마찬가지로 바이에른의 지역주의는 프로이센(베를린)이 우리를 탄압하고 있다는 식의 피해의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프로이센(베를린)보다 못할 게 없다는 식의 자존심의 발로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