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대공국

 


'''모스크바 대공국'''
'''Великое Княжество Московское'''

''Velikoye knyazhestvo Moskovsko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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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1]
[image]
'''1283년 ~ 1547년
킵차크 칸국의 속국(1283~1480)
'''
'''성립 이전'''
'''성립 이후'''
'''노브고로드 공화국'''
'''루스 차르국'''
'''블라디미르-수즈달'''
<colbgcolor=#A71E22> '''위치'''
동유럽
'''수도'''
모스크바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벨리키 크냐즈(대공)
'''주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
이반 3세
이반 4세
'''언어'''
중세 러시아어
'''종족'''
루스인(러시아인)
'''국교'''
러시아 정교회
'''통화'''
루블
1. 개요
2. 역사
2.1. 다닐 1세: 몽골로부터의 도망시기
2.2. 유리: 칸과의 협력시기
2.3. 이반 1세: 칸과의 협력시기, 세금을 중간에 거둬들임
2.4. 흑사병 이후, 드미트리 돈스코이: 동방정교회의 협력시기 칸에게 대항해서 승리 후, 다시 패배
2.5. 바실리 1세: 칸에게 대항
2.6. 바실리 2세
2.7. 이반 3세: 타타르로부터의 독립, 제3의 로마, 차르 선포
2.8. 바실리 3세, 이반 뇌제
3. 군주
4. 몽골 제국과의 관계
5. 관련 문서

언어별 명칭
러시아어
Великое княжество Московское
(''Velikoye knyazhestvo Moskovskoye'')
중세 러시아어
Московь / Русь
(''Moskovĭ / Rusĭ '')
중세 몽골어
ᠣᠷᠤᠰ (''O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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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말기에 설립된 키예프 공국 계열의 제후국 중의 하나.
키예프 공국에서 갈라져 나온 수많은 제후국들 중 상대적으로 열악한 북동쪽에 위치한 제후국이었던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 그 중에서도 가장 가치없던 모스크바 지방에서 출발해 다른 제후국들에 비하면 비교적 후발주자에 해당하는 제후국이었지만 몽골-타타르의 멍에 시기에 세력을 크게 키워 제후국들 중 최종 승리자가 되어 타타르의 멍에 시기를 종식하고 동북부의 루스 지역을 통합[2], 루스 차르국을 세우면서 모스크바 대공국-루스 차르국-러시아 제국으로 이어지는 현대 러시아의 기틀을 닦은 국가이다.

2. 역사


원래 모스크바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일부분이었으며 러시아 내에서도 그다지 비중없는 도시 중에 하나였다. 몽골 제국의 키예프 루스 침략과 붕괴 이후 많은 루스인 난민들이 오카 강과 볼가 강 사이의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숲이 우거진 이런 오지들은 우크라이나 평야지대보다는 타타르인들로부터 훨씬 안전했다.
1263년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지배자이자 블라디미르 대공[3]이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인 야로슬라프 3세가 그 뒤를 잇게 되면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아들이자 2세에 불과했던 다닐 1세에게 가장 가치없는 모스크바의 땅을 수여하면서 내쫓았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모스크바에도 당시 키예프-루스 계열에서도 왕가로 불리던 류리크 왕조의 인물이 모스크바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모스크바 공국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생 모스크바 공국은 도시주민의 비중은 매우 낮았던 반면 농촌 인구는 난민 인구 증가에 힘입어 빠르게 증가했다. 이 지역은 인구가 매우 적어서 공후들이 난민들을 초청하여 자신들의 영토의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잉여 생산물을 킵차크 칸국에 다 갖다바치는 형편이 되면서 키예프 공국 시절과 다르게 상업은 거의 비중이 없었으며 자급자족 경제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2.1. 다닐 1세: 몽골로부터의 도망시기


다닐 1세의 40년 통치기 동안에는 딱 한 차례 콜롬나 지역을 공격한 것을 제외하면 대외적인 활동이 없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기 모스크바는 1238년 몽골제국의 침공으로 한 번 불탔고 1293년에는 아예 도시 전체가 탈탈 털리는 사태까지 빚어져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바쁜 시기였기 때문이다. 결국 몽골군의 위협을 피해 숲에 보호를 받고 강을 끼고 있는 조금 더 안전한 지역으로 도시를 옮기면서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2.2. 유리: 칸과의 협력시기


다닐 1세 사후 그의 아들인 유리가 모스크바 공작위를 계승하면서 본격적으로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공작위를 계승한 유리는 서쪽으로 세력 확장을 꾀하면서 동시에 모든 러시아 제후들의 종주권을 지니고 있던 킵차크 칸국의 우즈베크 칸과 친하게 지내면서 러시아 제후들 사이에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하였다. 심지어는 우즈베크 칸의 여동생과 혼인을 맺기까지 했는데 때문에 칸은 유리에게 블라디미르 대공이란 작위를 인정해주었다. 그 결과 유리는 노브고로트 공화국을 비롯한 북서부 지역의 키예프-루시 계열 제후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입지를 얻게 되었다.

2.3. 이반 1세: 칸과의 협력시기, 세금을 중간에 거둬들임


유리의 뒤를 이은 이반 1세도 아버지를 따라 칸에게 열심히 비비면서 대공작위를 계속 유지하였고, 더불어 모든 러시아 제후국들이 칸에게 바치는 공물과 세금을 걷어들일 수 있는 권리를 따냈다. 덕분에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 공물과 세금을 '''적당히 삥땅'''치면서(…) 한층 더 자신들의 세력을 키울 수 있는 밑거름으로 삼았다. 이후 이반 1세의 계승자들은 동슬라브권 통합에 힘썼다. 한편 이 시기부터 역시 같은 지역에서 세력확장을 꾀하던 리투아니아 대공과 라이벌 관계를 세우게 되었다.

2.4. 흑사병 이후, 드미트리 돈스코이: 동방정교회의 협력시기 칸에게 대항해서 승리 후, 다시 패배


하지만 잘나가던 모스크바 대공국도 1350년 흑사병의 창궐로 기세가 한 풀 꺾이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공작가가 직격탄을 맞는 바람에 타격이 더 컸다. 결국 9세의 나이로 드미트리 이바노비치가 모스크바 공작위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대공위도 수즈달 공작에게 빼앗겼고, 리투아니아와 무슬림 유목민 등에 둘러싸여 자칫 잘못하면 멍석말이를 당할 위기에 처하였다.
이에 드미트리는 러시아 정교회와 적극 협력하면서 세력을 안정화시켰고 킵차크 칸국에 대항하여 러시아의 독립을 꾀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드미트리는 러시아 정교회의 공권력(…)을 자청하고 있었는데,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이 적극적으로 러시아 제후들을 설득하였고 그 결과 결성된 러시아 제후 연합군이 쿨리코보 전투에서 마마이 칸이 이끄는 킵차크 칸국을 관광태우는 쾌거를 얻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칸에게 종속된 관계를 청산할 수 있고 드미트리는 돈스코이별명을 얻으며 러시아의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하지만 1382년 토흐타미쉬 칸이 병력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침공하여 역관광당하는 바람에 다시 칸에게 예속된 위치로 돌아갔다.

2.5. 바실리 1세: 칸에게 대항


이 사태로 인해 러시아의 독립이 다소 늦춰지게 되었지만 러시아인들에게 몽골과 맞서 싸워서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세워주웠다. 게다가 킵차크 칸국이 티무르 제국에게 털리고 국가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하자, 드미트리의 뒤를 이어 모스크바 대공국을 계승한 바실리 1세는 대놓고 칸에게 바칠 공물과 세금을 쌩까기 시작했다.
더불어 리투아니아 대공의 사위가 되어 스몰렌스크를 흡수하면서 발생할지 모르는 마찰을 방지하였고, 동쪽의 니즈니 노브고로트와 북쪽의 볼로그다를 흡수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게다가 다른 강력한 경쟁자였던 제후국들이 계승권 투쟁 등으로 분열되어 가면서 모스크바 대공국은 손쉽게 러시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해나갈 수 있었다.

2.6. 바실리 2세


바실리 1세를 계승한 바실리 2세가 반란으로 폐위되어 잠시 대공위를 놓고 혼란기를 겪기도 하였고, 카잔 칸국과의 싸움에서 패배해 포로로 끌려가 장님이 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굳건히 대공위를 지키면서 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

2.7. 이반 3세: 타타르로부터의 독립, 제3의 로마, 차르 선포


그리고 바실리 2세의 아들인 정치, 군사, 외교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이반 3세가 대공위를 물려받았고, 노브고로트 공국을 비롯한 다른 러시아 제후들을 갈아버리거나 복속시키면서 통합하였다. 더불어 명목상이긴 해도 지속되고 있던 타타르와의 예속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여, 통일되고 독립된 러시아의 국가를 완성시켰다. 더불어 이반 3세는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인 조에 팔라이올로기나와 혼인하면서 교황청으로부터 제3의 로마라는 명예를 받게 되었다. 이후 스스로를 독립국가의 수장인 차르라 선포하여 모든 러시아령의 군주임을 선언하였다.

2.8. 바실리 3세, 이반 뇌제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이란 명칭은 이반 3세의 계승자인 바실리 3세와 이반 뇌제 통치기까지 이어졌으나, 이반 뇌제가 1547년 모스크바 대공국이 아닌 차르국 러시아(루스 차르국)를 선포하면서 러시아란 이름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3. 군주



4. 몽골 제국과의 관계


'솔까말 몽골 제국 덕분에 러시아가 통일되어 거대한 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라는 주장이 보편적으로 알려져있으나,'''[4] 실제로는 러시아/역사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몽골의 정복을 너무 좋은 쪽으로 해석한 주장'''이다. 몽골이 러시아에게 가져다 준 영향 중에는 좋은 것이 거의 없고 반대로 나쁜 것은 차고 넘친다. 키예프-루시 계열 공국과 동슬라브 문화권의 중심지로 인구가 4~5만에 달했던 키예프만 봐도 '''죽은 사람을 위해서 울도록 열려진 눈은 아무 곳에도 없었고 200여채의 집들만이 남았으며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철저히 파괴당하거나 학살당했으며, 이후 240년에 이르는 몽골의 지배로 이전까지 러시아를 지배하던 도시국가 연합체는 아예 소멸해버렸다. 애초에 키예프 루시 국가 중에서 후발주자인 모스크바 대공국이 두각을 드러내고 러시아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몽골 제국이 다른 러시아 공국을 초토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때 몽골 제국의 세금 수취 대리를 자처함으로써 어느 정도 세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몽골의 지배가 남긴 피해가 막대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고, 일단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면 몽골의 침입 이전에 러시아는 동로마 제국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등의 서유럽 국가보다 더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8세기를 이후로 해서 수백년 후의 소빙하기까지 유럽은 꽤나 온난한 기후였기에, 모스크바가 위치한 북부 루스와는 달리 키예프 등이 위치한 남부 루스는 사람이 살기에 매우 적합했다. 프랑스 왕 앙리 1세와 결혼한 키예프 대공녀 안나(1024~1075)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만 보더라도 '''프랑스의 집은 음침하고, 성당은 초라하며, 풍습은 혐오스러운 야만적인 나라'''라 평가했을 정도. 설령 키예프의 공주라서 주관적인 평가를 내뱉은 것에 불과하다고 받아들여도 만약 러시아가 프랑스보다 현저히 떨어졌으면 감히 저런 말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몽골 제국에 의해서 철저하게 갈려나간 이후 러시아는 격심한 퇴보를 겪었으며, 이 시기 서유럽에게 추월당한 문화적 흔적은 18세기쯤 이르러서야 그럭저럭 만회할 수 있었다.
정치적인 부분에서조차 몽골 제국에게 정복당한 후유증은 상당했다. 러시아가 동방(시베리아)으로 확장한 이유 자체가 겨우 수습한 국력 따위로 서쪽의 폴란드-리투아니아스웨덴 제국을 상대하기에는 어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강력한 경쟁자가 없는 빈 땅을 향해서 확장한 것이라 봐야 한다. 이전 시대까지 러시아의 영향권이었던 루테니아 지역도 몽골의 정복 이후 자연스럽게 이탈했다.
루테니아는 서방 가톨릭 국가의 영향권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러시아의 발상지인 키예프 역시 반쯤은 서유럽의 영향권으로 들어갔다. 간단히 말하면 루스족의 정착 이후 수백년에 걸쳐 개발했던 알토란 같은 영역을 전부 날려먹고 대신 동쪽에서 새로운 영역을 확보해야 하는 처지가 된 셈인데... 이를 두고 단순히 영토 크기가 넓어졌으니 몽골 덕분에 대제국 러시아가 탄생했다고 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루스 지역이 다시 열강으로써 모습을 드러낸 것은 독립 직후가 아니라 17세기 후반 표트르 1세 시대의 일이다.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났음에도 그 후유증에 200년간이나 허덕거리다가 표트르 대제라고까지 불리는 유능한 왕이 등장해서 겨우 체제와 국가를 정비한 것. 타타르의 멍에에서 벗어난 시점이 아니라 아예 몽골의 침입 시점으로 년도를 계산하면 몽골 때문에 러시아가 발전하지 못하고 허덕거린 기간만 무려 '''500년'''이다.
보다시피 500년 동안 최악의 암흑기를 보낸 다음 걸출한 명군의 등장으로 겨우 강대국이 되었는데 이걸 과연 몽골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리하자면 몽골의 정복 이후 러시아의 권력구조가 한 차례 박살나고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현재에 이르는 대제국 러시아의 기틀이 생겨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개편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를 수습하는데 걸린 수백년의 기간 동안 러시아는 유럽 국가들이 별 관심을 기울일 가치도 없는 시시한 국가로 전락했었다.''' 이를 두고 '몽골 '''덕분에''' 러시아가 통일되어 대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아니냐'고 말하는 것은 몽골이 아니었으면 러시아가 5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중앙집권 체제를 겸비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정작 타타르의 멍에 이후에도 러시아는 이슬람 국가였던 킵차크 칸국과 달리 정교회 국가였고, 중동 국가와 대조되게도 끝끝내 유목민 사회를 멀리했으며, 무엇보다 러시아의 중앙집권적 요소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물려받은 '''임페라토르'''의 권위가 훨씬 막강하였다.
애초에 전제군주의 막강한 권력이 없으면 강대국이 될 수 없다는 것부터 잘못된 전제다. 당장 동시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입헌군주제 군가로써 동유럽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흩뿌렸고, 아예 루스 차르국을 격파했음은 물론 당시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마저 잠깐이지만 정복하여 지배했다. '''즉, 몽골 덕분에 중앙집권적 요소를 받아들이고 강대국이 되었다는 러시아가 입헌군주제 국가에게 처발렸다.''' 결국 러시아가 강대국이 되기 위해선 다름 아닌 표트르 대제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보다시피 강대국 진입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바로 뛰어난 인물이다. 그런데 러시아 역사에서 러시아를 강국으로 이끌만한 뛰어난 인물이 없었냐고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10세기쯤 등장하는 정복군주 스뱌토슬라프는 동로마 제국에게 패배하긴 했으나 그 동로마 제국조차 몰아붙였던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전성기를 끝장냈다. 참고로 이때 프랑스는 제대로 된 국가도 성립되지 않은 봉건제 쪼가리였다. 그렇다고 프랑스가 이후에도 중앙집권을 세우지 못하는 공국으로 남아 있던가? 11세기 키예프 루스를 이끈 명군 야로슬라프는 러시아 최초의 법전을 편찬했고, 더불어 영토를 어느 정도 확장했으며, 곳곳에 학교와 교회도 많이 세웠다. 야로슬라프 시기에는 유럽 국가와 혼인 횟수만 40회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키예프 루스가 망해가던 12세기 때조차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란 걸출한 왕이 등장, 분열되었던 러시아 공국을 통일하고 빈민구제에 나섰을 정도였다.
요컨대 러시아는 몽골이 나타나지 않았어도 충분히 강대국이 될만한 역량을 지니고 있었으며, 즉, 러시아는 몽골 덕분에 강대국이 된 것이 아닌, 몽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대국이 된 것이다.

5. 관련 문서



[1] 동로마 제국의 쌍두독수리 문양으로 1472년부터 사용.[2] 남서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18세기 말까지 차지한다. 이를 계기로 동슬라브족은 러시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로 정체성이 갈라지게 된다.[3] 당시 러시아 제후들 중에서도 킹왕짱이란 의미를 지녔던 작위이다.[4] 이것은 리그베다 위키시절의 주장이다. 문서 역사의 r8번째 버전에서 확인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