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직
1. 개요
일반적인 의미로는 공무원이나 관리가 국가로부터 위임받은 직무나 직책을 뜻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공무원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지만, 고대~근대 이전 시기의 국가 공직을 이르는 표현으로는 관직이 일반적이었다. 한국의 경우, 조선 시대까지 관직의 토속어로서 벼슬 또는 사또라는 말이 많이 쓰였다.
아무리 뛰어난 군주라도 혼자서 나라의 모든 업무를 감당할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보다 효율적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관리를 뽑아 그에 걸맞은 관직을 부여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국가운영의 기본이었다. 관직 하나를 놓고 보더라도 해당 관직에 배정할 업무와 봉록의 책정, 부임 기간 등등 고려할 요소가 적지 않은데, 큰 나라일수록 자연히 관리의 수가 많아지고 그에 따라 관직의 종류와 등급도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기 마련이니 이러한 관직의 체계와 제도를 잘 정비하는 것이야말로 그 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 무능하거나, 혹은 부패하여 딴 마음을 먹는 바람에 끝내 나라의 멸망을 초래한 역사적 사례도 있는 만큼 관직을 부여할 인재를 고르는 지도자의 안목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2. 관직의 구분
보통 옛 시대의 관직이라 하면 학문을 익혀 내정과 외정을 하는 문관직과 군사적 업무를 전문으로 담당하는 무관직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무관 대신 문관이 군의 최고 지휘권자로 임명되어 전쟁을 수행하거나, 반대로 무관직 출신이 문관직으로 옮기는 경우도 존재했기에 문·무관직이 확연히 분리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은 약간 애매하다.
3. 관직에 따른 대우
한반도의 경우, 시대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 문관직이 무관직보다 높은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의 문관직은 종1품까지[1] 있었지만, 무관직이 오를 수 있는 최고 품계는 정3품까지[2] 였고 조선 시대에도 과거 제도 중 무과는 문과보다 격이 낮았던 데다가 고려와 마찬가지로 무반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품계는 정3품까지였다.[3]
고려에서는 전시에 삼군을 통솔하는 총사령관에 문관을 임명했기 때문에 무관직 출신의 장수들은 항상 문관의 지휘를 받으며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논공행상에서는 당연히 총사령관이 가장 높은 공을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그 밑에서 전쟁을 수행한 무관직 장수들은 아무리 뛰어난 공을 세워도 기껏해야 3품 상장군까지 출세하는 게 고작이었다.
게다가 현종 시절에는 백관의 녹봉 지급을 위해 경군의 영업전을 회수하여[4] 녹봉으로 지급하자 최질 등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 있었으며, 의종 시절에 이르러 무관직에 대한 차별대우 때문에 불만이 폭발한 장수들이 반기를 들어 무신정변이 일어나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을 정도였다. 무신정변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이소응 사건은 당시 고려 시대의 공직 사회에서 무관직에 대한 인식과 대우가 어떠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조선은 고려보다는 무반에 대한 대우가 나은 편이었으므로 차별대우로 인해 무신정변과 같은 극단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학문을 중시했던 조선의 양반들은 과거 시험에서 무과보다는 문과를 높게 여겼고, 무과는 상대적으로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4. 국가별 관제
아래 설명은 정확히는 '''관직이 아닌 품계'''에 대한 설명이다. 실제 임명 될 땐 관품에 따른 품계칭호를 받고 뒤에 실제 관직명을 붙이는 게 정식 명칭이다.
ex)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ㅇㅇㅇ 이런 식으로 붙인다.
4.1. 한반도
4.1.1. 고조선
기록이 적은 탓에 고조선의 관직 제도는 자세히 알 방도가 없지만 대부(大夫), 박사(博士), 상(相), 대신(大臣), 경, 비왕, 장군 등의 관직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고대 국가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관제 정도는 존재했으리라 추측된다.
4.1.2. 고구려
초기 고구려는 국왕 밑에 상가(相加)와 대로(對盧) 등의 여러 관직을 두어 국정을 다루다가 점차 나라가 발전하면서[5] 12관등, 14관등의 체계적인 관제가 정립되기에 이른다. 초기 고구려의 최고 관직으로는 현대의 수상에 해당하는 국상(國相)이 있었으며, 그 외에 중외대부(中畏大夫)와 주부(主簿) 등 나라의 내정을 담당했던 문관직이 있었다. 고구려의 무관직으로는 최고위직인 대모달(大模達)과 대모달 다음가는 고위 무관직인 말객(末客) 등이 확인된다.
국상은 후에 대대로(大對盧)와 막리지(莫離支) 등으로 개편되었으며 고구려 말기에는 나라의 군권과 행정을 모두 총괄하는 최고 관직인 대막리지(大莫離支)가 신설되었다.
4.1.3. 백제
백제는 초기에 좌보(左輔)와 우보(右輔)를 각각 군정과 내정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여 나라의 대소사를 다루었다가 고이왕 대에 우보와 좌보가 폐지되고 6좌평 16관등의 관제가 자리잡게 된다. 최고 관직인 제1품 좌평(佐平)은 수상격인 내신좌평을 필두로 국정의 전반을 다루었으며, 좌평 밑에는 2~6품 솔(率)과 7~11품 덕(德) 등의 하위 관등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무관직에 대해서는 병마권을 관장하는 좌장(左將)이라는 관직 외에는 뚜렷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사항은 알 수가 없다. 백제의 장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계백의 관직이 2품 달솔(達率)이었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백제의 문관직이 군정를 겸하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라 추측될 뿐.
4.1.4. 신라
신라는 법흥왕 때 17등급의 관위를 정하고 골품제에 따라 관리가 오를 수 있는 관등에 제한을 엄격히 두었다. 골품제에 따라 진골은 최고 관직인 1등급 이벌찬(伊伐湌)을 비롯한 신라의 최상위 관직을 독점하여 정권을 주도하였고, 그 이하의 6두품은 6등급 아찬(阿飡), 5두품은 10등급 대나마(大奈麻), 4두품은 12등급 대사(大舍)까지가 승진의 한계선이었기 때문에 신라의 공직 사회에는 관위에 따른 철저한 차별 대우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무관직 또한 관리의 관등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었는데, 장군과 같은 군의 요직에는 오직 진골 신분을 가진 5등급 관위 이상의 관리만이 임명되었다. 이를 보아 신라의 무관직도 문관이 임명되어 군정을 수행했으리라 추측된다. 고구려의 대모달이나 백제의 좌장처럼 군사 분야를 전담하는 무관직이 존재했는지는 불명.
고구려의 대막리지처럼 최상위 관직으로 대각간(大角干), 태대각간(太大角干)이 있었는데, 각간(=이벌찬)에 클 대, 클 태를 붙인 것. 중국의 상국처럼 상설직이 아닌 임시직이었다. 신라 천 년 역사상 태대각간은 김유신과 김인문 두 명밖에 없었다.
통일 후 통일신라 때도 쓰였고, 태봉과 후백제도 신라의 관직체계를 가져다 썼다. 고려도 초기에 잠깐 신라의 관등체계를 조금 변형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4.1.5. 고려
고려의 품계는 종1품이 일반신하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품계였다. 정1품은 명예품계로서 현직에 있을 때 받는 품계가 아니었다. 명목상 문반과 무반 모두 종1품 이하의 품계가 정해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무신정변 이전까지 무반의 최고 품계는 정3품이 한계였다. 물론 고려시대 중앙의 무관과 문관 모두 문산계를 받았다. 무산계은 말만 무산계이지 노병들 말고는 무관하고는 상관없는 지방향리와 그 자손, 대장장이 같은 장인, 탐라 왕족 같은 이들이 받는, 말만 무산계였다.
4.1.6. 조선
4.1.7. 대한민국
공무원이 곧 관직이며 총 9개의 등내등급과 별정직이라는 등외등급이 존재한다.
[1] 중서문하성 소속 문하시중.[2] 응양군 소속 상장군.[3] 다만 조선에서 정2품부터는 문·무반의 구분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무반이 문반보다 낮은 대우를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조선은 설립 배경 자체가 쿠데타인지라 조선왕조와 사대부들은 제2의 이성계가 나오는 것을 굉장히 히스테리적으로 경계를 했고 이순신 장군이 당시 조정에 천대를 받고 견제를 받은 것도 이러한 사상이 이어져 온 것이다보니 무반의 인물이 너무 잘해도 조정에서는 위험하게 생각하는 약간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기는 했다.[4] 경군은 고려의 중앙군을 이르는 말이고 영업전은 고려 시대에 국가에서 양반과 군인 등에게 지급했던 토지였는데 경군의 영업전 회수는 경군을 지휘하는 고려의 고위 무관직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5] 통상 율령을 반포한 소수림왕 때로 본다.[6] 충렬왕 원년(1275년)에 황제국의 제도를 전부 고치는 때까지 적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