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석

 



李景奭
1595년 ~ 1671년
1. 개요
2. 생애
3. 평가
3.1. 문장가로서의 평가
3.2. 수이강 사건
4. 미디어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 이씨 덕천군파, 정종의 후손이다. 자는 상보, 호는 백헌(이하 백헌), 시호는 문충이다. 현재의 충청북도 제천시에서 태어났으나 이는 당시 지방관이었던 아버지의 치소에서 태어난 것이고 실질적인 고향은 경기도 광주시(지금의 성남시)로 그의 묘지도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위치해 있다.

2. 생애


정종의 후예이며 서인의 거두 김장생에게 배웠다. 1613년(광해군 5년) 진사시, 1617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북인이 주도하는 인목대비 폐비론에 반대하다 취소되었다. 1623년 인조 반정 후 알성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에 들어갔다.
예문관 검열·봉교 등으로 진출하여 핵심 관직을 두루 거쳤고, 1632년 가선대부에 올라 재신에 들었다. 병자호란 끝에 인조가 척화신들을 배격하는 상황에서 도승지를 맡았는데 이때 예문관제학을 겸하여 아무도 맡지 않으려는 자리였던 청나라의 승전을 기념하는 대청황제공덕비의 비문을 쓰게 된다. 이 때 백헌 외에 이경전, 장유, 조희일에게도 비문을 쓸 것을 명했는데, 이경전은 병 때문에 빠지고 조희일은 채택되지 않으려고 일부러 거칠게 지었다. 결국 장유와 백헌의 글만 남았는데 청측에서는 장유의 글은 인용이 온당치 않고 백헌의 글은 첨가할게 있다며 그의 글을 약간 수정하는 것을 전제로 채택했다. 이렇게 되자 인조는 이런 말로 백헌에게 간청했다고 한다.

"저들이 이 글로 우리의 향배를 시험하고자 하니, 이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일이다. 구천이 회계에서 신첩 노릇을 하다가 끝내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적을 이루었으니, 다른 날 힘을 기르는 것은 오직 나의 할 일이다. 오늘의 일은 단지 문자로만 저들의 마음에 들게 지어서, 사태가 악화되지만 않게 해 다오." ─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 난후시사

백헌은 할 수 없이 비문을 고쳐 쓰게 되었다. 하지만 백헌 역시 엄청난 심적 고통을 겪었는지 형 이경직에게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입니다"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고 "차라리 어계강에 몸을 던져 죽고만 싶다"는 시를 지어 한탄하기도 했다.
1637년 예문관과 홍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 이조 판서를 거쳐 1641년 이사가 되어 청나라로 가서 소현 세자를 보필하였다. 이때 평안도에 명나라의 배가 왕래한 전말을 사실대로 밝히라는 청제의 명령을 어겼다 하여 청나라에 의해 등용이 금지되었다.
이후 1644년(인조 22년)에 이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1650년(효종 1년) 효종 재위 후 권력을 잃은 김자점이 청나라에 조선의 반청 정책을 꼰질러 청나라에서 파견된 조사관이 국왕과 백관을 협박하는 상황에서 백헌은 영의정으로서 목숨을 걸고 책임을 전담하여 위기를 넘겼다. 사실 이 협박은 어느 정도 블러핑이 있었고, 청나라의 실권자인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의 혼인 문제를 위한 점이 더 컸다. 그래서 국혼을 수용하고 이경석이 책임을 전담하겠다고 자청하자 위기를 넘길 수 있던 것. 이후 백헌은 국왕의 간청으로 처형은 면해서 의주 백마 산성에 감금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653년 이후 중추부영사에 올랐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국왕의 특별한 존경과 신임의 표시인 궤장을 하사받았다.
이후 말년에는 고향인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석운리 (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으로 돌아갔으며, 죽은 이후에 그곳에 묻혔다.

3. 평가


'''영중추부사 이경석의 졸기'''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이경석은 집에서 효도하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일찍부터 문망(文望)을 지녔었는데 드디어 정승에 올랐다.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늙도록 게을러지지 않았으나, 친분이 두터운 사람에게 마음 쓰는 것이 지나쳤고 친지나 당류를 위하여 상의 은혜를 구하되 구차한 짓도 피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평하였다.

'''현종 실록 12년 신해(1671년) 9월 23일(신미) 기사'''

'''영중추부사 이경석의 졸기'''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죽었다. 경석의 자는 상보(尙輔)이다. 집안에서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는 청렴 검소하였다. 아랫 관리에게 겸공하였고 옛 친구들에게 돈독하였다. 문형(文衡)을 잡고 태사(台司)에 올라서는 나랏일을 근심하고 공무를 받드는 마음이 늙도록 해이해지지 않았다. 경인년 청나라가 성을 내어 말할 때에 수상으로서 앞장서서 일을 맡아 먼 변방에 유배되었으므로 사론(士論)이 대단하게 여겼다. 세 조정의 대신으로서 은혜와 예우가 시종 바뀌지 않았고 궤장 등 늙은 신하를 우대하는 은전을 입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겸손 순종함이 지나쳐 기풍과 절개에 흠이 있었으니, 이 때문에 하찮게 평가되기도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77세였다.

'''현종 개수 실록 12년 신해(1671년) 9월 23일(신미) 기사'''

현종 실록은 남인, 현종 개수 실록은 서인이 쓴 실록이라 그런지 두 사관의 평이 미묘하게 다르다. 현종 실록의 경우 '친분이 두터운 사람에게 마음 쓰는 것이 지나쳤고 친지나 당류를 위하였다'라고 평했는데 이는 백헌이 서인 산림의 후원자로서 송준길, 송시열 등을 추천하고 이들과 매우 친하게 지내며 인조 반정의 공신들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면서 중앙 정계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남인 입장에선 이런 부분을 껄끄럽게 여길 수밖에 없었을것이다. 반면 개수 실록은 서인의 입장에서 백헌의 장점을 좀 더 세밀하게 쓰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건 기록까지 기록해 그의 충정을 더 돋보이게 했다.
두 사론의 공통점이라면 백헌은 집안에선 효도를 다하고 관리로선 청렴결백한 인물이었으며[1] 문장에 능하고 나랏일을 처리함에 있어 끝까지 성실하게 열심히 일한 충성스러운 신하였다는 점이다. 적어도 당시엔 당파를 불문하고 백헌의 명망이나 성실함은 다들 인정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또 '상의 은혜를 구하되 구차한 짓도 피하지 않았으므로','겸손 순종함이 지나쳐 기풍과 절개에 흠이 있었으니'라는 평가는 백헌 평생의 한인 삼전도비문 작성에 대해서 우회적으로 언급하고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당대 조선 선비들에겐 당파를 막론하고 숭명 배청이 당연시 되었으니 선비의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구차하게 오랑캐에게 항복문을 썼다는 여론 역시 당파를 불문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듯 백헌은 청나라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에서 국가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송시열 등 명분론자들에 의해 삼전도비문 작성과 같은 현실적인 자세가 비판받기도 했다. 이념과 정책은 숙종 대의 소론으로 연결된다.
거기에 그는 관직 생활에서 당색을 배제한 정책들을 펴고 당에 상관없는 공정한 인사 관리로 많은 인재들을 발탁했는데 그가 발탁한 인재 가운데 10명의 정승과 4명의 대제학이 배출되었기도 했고 앞에서 설명했듯이 보통 나라에 공이 많은 원로 대신들에게 수여하는 궤장을 현종에게 받기도 했다. 또 청의 간섭을 최대한 막아내려 했던 명신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백헌의 시호인 문충(文忠)부터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시호가 아니다. 文이 들어가는 시호는 선비들에게 매우 큰 영광이었는데, 개중에서도 문충은 최고로 높이 기리는 시호였다.
실학자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에 보면 ''''백헌은 조정에서 벼슬한 지 50년 동안 한 번도 다른 사람과 다툰 적이 없었던 분''''이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면은 그가 지은 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는 기질적으로 지위를 가지고 남을 억누르거나 문장으로 뻐기는 유형의 인물이 아니었다.

3.1. 문장가로서의 평가


문장가로서 백헌은 일찍부터 조찬한(趙纘韓)에게 문장을 배웠고 문형을 맡아와 저작이 상당한 분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생전에 수습하지 않아 흩어져 없어진 것이 많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분량의 시문이 남아 있었고 특히 시록(詩錄)은 본인의 정리를 거친 흔적이 많다. 다만 연보에 의하면, 본인 스스로 "문장이 전해지고 안 전해지는 것은 후세 사람들의 공의(公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만일 드러내는 데 뜻을 두어 미리 자편(自編)해 둔다면 단점을 감추고 장점만 자랑하게 될 것이다. 또 나의 글은 남길 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며 스스로 문장가로서 자처하지 않았다고 하니, 본인이 직접 쓴 글들을 정리하는 단계까지는 가지 않은 듯하다.
백헌은 변려문(駢儷文, 네 글자로 된 구와 여섯 글자로 된 구를 기본(基本)으로 하여 대구(對句)를 써서 지은, 수사(修辭)가 화려(華麗)한 문장(文章)) 이름난 조찬한에게 고문을 배우고 또 김장생에게 수학하여 시문에 고루 뛰어났지만 문장가로 자처하지 않아서인지 특별히 회자되는 작품은 없다. 문집을 편정한 최석정에 의하면 그의 글은 규칙에 얽매이지 않아 여유롭고 넉넉했으며 글을 어렵게 쓰거나 기묘하게 짓지 않았고 당나라의 한유(韓愈)와 송나라의 소식(蘇軾)의 글을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 장자를 읽는 것이 유행이었으나 백헌은 성리서와 주자의 서적인 근사록(近思錄)에 치중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문집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관각문(館閣文, 임금의 사명(辭命)이나 사대교린(事大交隣)의 표전(表箋)을 전담하는 홍문관·예문관 등 문학지관(文學之館)에서 이루어지는 일체의 문장, 장식미에 치중하는 변려문(騈儷文)이 주로 씌어졌다.)을 짓기에 알맞았던 듯하다.
문집은 백헌의 손자인 이우성이 시 5000여 수, 문장 800여 편을 모아 당시 좌의정 최석정에게 산정(刪定)과 편차를 부탁하였다. 최석정은 이를 시 1800여 수와 문 500여 편으로 정리, 편차하여 1698년에 간행하려다가 이우성이 급사하는 바람에 그의 아들들이 이어 1700년에 간행했다고 한다.[2] 발문에 따르면 간행시 비용 등의 문제로 몇 질 인행하지 못하였고, 수록하지 못한 글이 많은데 물론 백헌의 평생 한이었던 삼전도비문은 수록하지 않았다.

3.2. 수이강 사건


그와 관런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수이강(壽而康)" 사건이 있다. 백헌은 본래 송시열과 잘 지냈었고, 애시당초 송시열을 조정에 추천한 이가 백헌이었다.[3] 송준길과 송시열이 재야 시절에 서울에 오면 하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백헌의 집을 찾아 서로 즐겁게 담소하는 것이었다고 할 정도였다.관련 기사
그런데 이후 송시열은 윤선도 처벌에 대하여 백헌과 의견이 갈린 탓인지 자신의 은인이었던 백헌을 비방하려는 마음을 몰래 가졌고, 한편으로는 삼전도비문을 적은 일을 고깝게 생각하여[4] 백헌이 궤장을 받을 때 시열에게 글을 구하니 시열은 "오래 살고 건강했다(수이강/壽而康)"라고 몰래 써주었다. 처음엔 그냥 좋은 표현인 줄 알았지만, 현종이 온천 여행 갈 때 조정 중신 중에서 아무도 환송을 안 가자 낙향해 있던 백헌이 이들을 까는 상소를 올렸고. 송시열이 반박 상소를 올리면서 '수이강'의 정체가 드러난다.[5]
사실 수이강은 송나라금나라에 끌려가서 아첨한 후에 살아남은 손적이란 자의 고사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당시 손적은 금나라 황제에게 항복문을 지어바치면서 온갖 미사여구로 금을 찬양하고 송을 깎아 내렸는데, 이를 들은 주위 사람들이 "너는 그렇게 아첨을 하니 참 오래 살고 건강하겠구나(壽而康)"라고 비아냥 거린 것이다.
다음은 송시열이 쓴 문제의 영부사 이공 궤장연 서(領府事李公几杖宴序)의 일부분을 가져온 것이다. 이는 송시열의 문집이라고 할 수 있는 송자대전 137권과 백헌의 문집인 백헌집 52권에 동시에 기재되어 있다.

공이 관직에 있는 동안의 시말(始末)에 대해서는 성상(聖上)의 교서(敎書)에 이미 갖추어져 있지만, 오직 경인년(1650년, 효종 1년) 2월에 있었던 일은 은미(隱微)하여 명확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때는 종사(宗社)의 존망(存亡)이 순간에 결정되는 판이라, 비록 임시로 국란을 모면하는 방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이해(利害)를 따지는 사람들은 모두가 수수방관하여 아무런 상관도 하지도 않았으니 그 표정이 마치 진(秦) 나라 사람이 월(越) 나라 사람 보기보다 더 심하였다. 그런데 오직 공만이 한 몸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두려움도 흔들림도 없이 꿋꿋하게 소신을 수행함으로써 나라가 끝내 무사하게 되었다.[6]

그리하여 이로부터 주상(主上)께서 공을 알아주는 마음이 더욱 융숭해졌고, 선비들의 마음이 더욱 공을 붙따르게 된 것이니, 그 하늘의 도움을 받아 '''장수하고 또 건강하고(壽而康)''' 마침내는 우리 성상에게 그런 융숭한 은례(恩禮)를 받은 것이 이유가 있다 하겠다. 내가 이 때문에 앞에서 이미 성덕(聖德)을 칭송하고 끝에 와서는 곧 훌륭함을 공에게 돌렸으니, 아, 여기에서 군신(君臣)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 훌륭하다.

숭정 무신년(1668년, 현종 9년) 계동일(季冬日)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즉 이와 같은 유사한 사례를 끌어들여, "(오랑캐에게 아첨해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자기 몸 혼자 편하게) 오래 살고 건강했다"라는 엄청난 인격 비난을 한 것이었다. 송시열이 굉장히 악질적인 비방을 썼다는 것이 명백히 보이는 부분인데, 겉으로는 백헌의 훌륭한 공을 한껏 칭찬하면서 문장 중간에 정정당당히 비판하지 않고 교묘하게 비방문을 쓴 셈이다. 오늘날로 치면 나라에서 훈장 수훈자를 위한 축사를 써준답시고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하도록 대각선 패드립 같은 걸 친 셈이다. 실제로 이 사건은 송시열 일파인 노론과 박세당[7] 등의 대립을 불렀고, 훗날 사문난적 논란 등으로 노론과 소론간의 분열 양상으로 흐르게 되는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사실 조정은 비문에 새겨넣을 글을 청으로부터 받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당신들이 쓰라"는 청의 요구 때문에 백헌 등 3명이 선택되었을 뿐, 백헌 등은 마지못해 비문을 썼으니, 백헌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이런 조롱을 받으면서도 백헌은 별 다른 반응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8] 어쩌면 그 자신도 별로 떳떳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백헌이 이 사건을 가지고 얼마나 대인 군자의 자세를 보였는지는 백헌의 이후 대처에도 나오는데 그의 문집인 백헌집 52권의 내용중 하나인 사궤장식감록(謝几杖識感錄)에 따르면 1668년 11월 27일 백헌이 궤장을 하사받는 그림을 그리고 교서(敎書)와 제가(諸家)들의 축시(祝詩), 화시(和詩)를 모아 첩(帖)으로 만들어서 잔치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보내고 한 부는 집안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는 주석이 있다. 이때 은인을 수이강으로 조롱한 송시열의 비방문은 주변 사람들이 넣지 않으려 했는데 '''백헌이 특별히 없애지 말라고 하여 붙여두었다고 한다.''' 참으로 군자의 자세였다. 그의 문집인 백헌집에 송시열의 비방문이 그대로 남은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이런 백헌의 대처가 송시열을 비판하던 이들이 백헌을 동정하는 여론에 더욱 불을 지피는 데 큰 역할을 했다.[9] 그래서인지 그의 형인 이경직의 고손인 이진유는 김일경과 대노론 강경파였고 신임사화를 주도했다. 너무 강경하게 노론을 족쳐 그 보복으로 영조가 즉위후 노론 준론을 숙청하는데 매타작 맞아 장독으로 죽었고 그 조카인 이광사 또 한 벼슬도 못하고 노론의 탄핵으로 유배를 왔다 갔다하였다.
한국 외대 교수 이은순은 "현실론으로 나라를 구한 이경석이나, 주자학적인 숭명 의리론으로 국가를 재건하고 민생을 회복하자는 송시열이나 모두 평가돼야 한다"고 논문에서 주장하였다. 즉 이 싸움은 양란 이후 새로운 질서 수립을 위한 이념 투쟁이자 시국 인식 차이에 따른 정론 대립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은순의 주장은 어폐가 있다. 이 사건이 '논쟁'이나 '노선 차이'로 인한 비판이 아닌, 송시열의 졸렬한 돌려까기에서 시작했다. 일단 송시열이 무슨 근거를 대며 논리적으로 비판한 것이 아니다. '수이강'이라는 말을 쓴 것은 단지 인격 모독에 불과하다. 그 방법도 공식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치졸한 뒷담화에 가깝다. 이것을 과연 시국 인식 차이로 보아야 할 문제인지는 의문이 든다. 정 이념이 맞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공식 석상에서 비판했어야 한다. 애초에 척화파인 김상헌, 조온, 그리고 삼학사 등도 최명길 등을 조정에서 직접 탄핵하고 비판할지언정 뒤에서 까진 않았다. 게다가 백헌은 송시열보다 나이가 12세나 많았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친교를 다진 지가 오래였는데 그런 사람을 상대로 이딴 짓을 한 것이다.[10]
게다가 당시 상황에서 당장 백헌이 청의 비위에 맞는 글을 바치지 않았다면 당연히 병자호란 시즌 2 시작이고[11], 게다가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자신이 죽을 각오를 하고 모든 책임을 떠맡아서 국왕과 조정 중신을 보호한 적도 있다. 이런 이를 폄하하는 글을 썼으니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 송시열은 정치적, 학문적 성과와 별개로 대인 관계에선 상당히 속좁은 처신을 왕왕해서 빈축을 사고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될 적을 만들었는데 수이강 사건이 송시열의 그러한 대인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당시 실록의 기록을 보면 식자들 역시 그르다고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해당 기사 사관의 평은 '정승으로서 딱히 한 것도 없는 경석을 그르다고 여길 수는 있는데, 그럴 거면 궤장에 글을 써 달라는 요청 자체를 거절하는 게 맞고, 기왕 글을 쓰기로 했으면 성의 있게 써야지 돌려까기는 옳지 못하다'라는 요지로 되어 있다. 실록 [12]

4. 미디어


드라마 추노의 악역인 이경식의 이름은 이 사람에게서 따온 듯하다(마침 또 좌의정으로 재직하던 시기도 같고 이름도 획수 하나만 다르다). 물론 야심에 가득찬 권신인 이경식과 시대의 흐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폄하된 명신인 백헌은 그 성격이 확실히 다르므로 주의할 것.
오히려 백헌의 경우에는 현실주의적 성격이 강했던 정치가로서 소현 세자를 보필하며 청에 다녀올 정도였고 원손이었던 소현 세자의 큰아들 석철을 가르치고 인조가 원손을 폐하려할 때도 반대하였으며 민회빈 강씨를 사사할 때도 최명길 등과 함께 최대한 시간을 끌기도 했고, 또 상소를 올려 강씨의 일가 친척을 보호하려 하였다.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김자점이 이경식의 모티브일까 생각이 들 정도로 김자점의 행위와 이경식의 행위는 비슷하다. 다만 유능하긴 한데 인조에 달라붙어 권신으로서 모습을 보이다 매국노질과 역적질에까지 손을 댄 김자점과는 달리 이경식은 국왕에 대한 충심도 있고 개인의 능력은 뛰어난 편이다. 그리고 스텐스도 반청인 걸 봐서는 김자점보다는 김상헌에 약간 가까운 편인데, 이경식의 모티브는 김상헌의 안 좋은 면을 콕 집어서 만들기도 한 듯하다.
[1] 실제로 백헌이 명색이 재상을 지냈으면서도 살림이 궁핍하니 나라에서 보태주는게 어떻겠냐는 실록 기사도 있다.[2] 백헌 가문의 사정이 좋지 않았던지 그의 문집을 간행할때도 가산을 팔아 비용을 마련해야 했을 정도고 소장처가 매우 드문데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3] 일찍부터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던 김집이나 십여세나 아래인 서인 산림들인 송시열, 송준길 등을 만나 나이를 떠나 고담준론을 펼쳤던 백헌은 인조 반정 이후 자신들이 임금을 세웠다는 말을 공공연히 입에 담는 등 공신들의 특권과 전횡을 보고 분개하여, 김집, 송시열, 송준길의 학문과 덕행을 인조에게 알리고 적극 천거하여 관직에 등용하게 했다. 이로써 송시열, 송준길 등은 반정 공신들의 전횡과, 인조의 뜻에 영합하려는 일(정원군의 원종 추숭론 등)에 적극 반대하고 소현세자민회빈 강씨의 복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반정 공신들의 반격과 반발에 대비해 백헌은 산림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후견해주었다.[4] 송시열은 호란 때 가족을 잃어 청나라를 증오하는 마음이 강했다.[5] 당시 송시열은 온양 근처에 살았는데 백헌이 자기를 깐 줄 알고 쓴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백헌은 그냥 불특정 다수를 깠는데 송시열은 굳이 자신일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6] 위에서 말한 효종 1년(1650년)에 역신 김자점의 밀고로 효종의 북벌 계획이 청나라에 알려져 추궁 당하자, 이경석이 스스로 책임질 것을 자청하여(당시 남한산성과 평양성의 수리와 세폐를 감해달라는것 때문에 추궁을 받았는데 이경석이 전자 조경이 후자를 책임졌다.) 청나라에 의해 백마성(白馬城)에 감금 당했던 일을 가리킨다.[7] 박세당이 후일 이경석의 비문을 쓰면서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두고 백헌은 봉황(군자)이며 송시열은 그를 모함하는 올빼미(소인)이라며 대놓고 디스했고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탄되기도 하였다. 나중에 집권 노론이 박세당을 사문난적이라 탄핵하고 쓴 비문과 저서인 사변록을 불태우고 머나먼 벽지로 유배보내라고 숙종에게 청하였다. 숙종은 비문 철거와 사변록은 소각했지만 삭탈관직으로 끝내고 유배를 보내지 않았다. 소론 대신들과 박태보를 구원해주던 노론의 온건파인 이인엽이 숙종이 인현왕후의 폐비를 반대하다 죽은 아들인 박태보의 충정과 70이 넘은 나이를 고려하여 유배를 보내지 말라고 변호하자 삭탈관직의 건으로 끝냈다.[8] 자신의 사직을 청한 것도 있긴 하다.[9] 그도 그럴게 송시열이 노답 북벌론자면 노답 북벌론자 다운 태도라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송시열은 이미지와는 달리 현실적이었다. 현실적으로 조선이 청을 치는건 불가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렇게 치졸하게 했으니 뭐...[10] 간단히 말해서 앞에서는 웃고 친하게 지내면서 뒤로는 비웃고 마음을 두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것.[11] 가도 정벌과 명 정벌에 필요한 군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고 질책받았는데 글을 바치지 않았다간 청에서 '이것들이 살려준 은혜도 모른다' 하며 또 군사를 끌고 왔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고, 백헌 본인이 한번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직을 지켰다.[12] 물론 남인의 송시열 비판 시각이 강한 현종실록의 기록이다. 그렇지만 서인 측에서 서술했기에 송시열을 옹호하는 관점이 강한 현종개수실록에서도 이 수이강은 기록 자체가 없는데 왜곡 목적도 있겠지만 서인측에서도 달리 변명의 여지가 없는 행동이었기에 아예 넣지 않았다는 추측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