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소설가)

 

[image]
'''이름'''
'''박태원(朴泰遠)'''
'''본관'''
밀양 박씨
'''출생'''
1910년 1월 17일
대한제국 한성부
'''사망'''
1986년 7월 1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학력'''
일본 호세이대학 법정학과 중퇴
'''호'''
구보(丘甫, 仇甫, 九甫), 몽보(夢甫),
박태원(泊太苑)
1. 개요
2. 생애
2.1. 일제강점기
2.2. 월북
3. 기타
4. 관련 문서


1. 개요


한성부 다방골(현 서울특별시 중구 다동)에서 태어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호세이대학 법정학과를 다니다가 중퇴했다.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대표 작가이나, 2002년에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명'에 이름이 등재된 친일 문학인이자 남로당과 김일성 정권에 부역한 친북 문학인이라는 불명예 역시 가지고 있다.[1]

2. 생애



2.1. 일제강점기


경성제일고보 시절인 1926년에 시 "누님"으로 등단했고, 1930년 단편소설 「수염」을 통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대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 의식의 흐름을 제대로 살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2]과 <천변풍경> [3],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방란장 주인>등이 있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에도 꽤 모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경향문학이 주류였던 당대 문단에서 꽤 독한 비판을 받았다. 박태원은 <내 예술에 대한 항변-작품과 비평가의 책임> 등의 글에서 이런 비판에 대해 항변한 적이 있지만, 이후로도 비판은 계속 되었다. 카프와 박태원과의 불화는 후일 있을 월북의 이유를 더욱 알 수 없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일제의 압력이 심해진 193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친일 문학인으로 전향하여, 「아세아의 여명(1941.2)」, 「군국의 어머니(1942)」, 「원구(1945.5-8)」 등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친일 작품들을 발표했다. 이 시기의 박태원의 대표작 중에 하나인 「채가」에서는 일본인 와나나베에게 진 빚을 갚을 길이 막막해 전전긍긍하던 주인공 조선인 남성이 결국 솔직하게 사정을 털어 놓으려 와타나베를 찾아가자, 와타나베가 조선인과 일본인은 배다른 형제라면서 통 크게 빚을 탕감해주고, 이에 감동을 먹은 주인공은 와나타베 앞에서 울면서 고개를 조아리며 서투른 발음으로 '고멩나사이'를 반복하여 외치고, 여지까지 찝찝한 마음에 미뤄 두었던 창씨개명을 기쁜 마음으로 하러 간다는 결말로 스토리를 맺는다.
박태원이 쓴 수필에 의하면, 저 바가지머리는 억센 직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헤어 스타일이라고 한다. 결혼하고 나서도 머리 관리가 귀찮아 저 머리를 고수했다고 한다.[4]

2.2. 월북


6.25 전쟁 때 아내와 자식을 두고 홀로 월북하는데 월북 사유가 가장 미스테리한 작가다. 경향주의 문학하던 이기영, 한설야, 임화가 북한 넘어간 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백석처럼 고향이 이북이라서 고향에 있다 어어하다보니 북한에 남게된 케이스도 의혹이 없다. 하지만 박태원은 왜 해방전후로 갑자기 친소좌익으로 탈바꿈해 제발로 북한 정권에 투신했는지 알길이 없다. 고향은 남쪽이고 일제강점기에 경향문학 작가들과 사이가 매우 나빴으며, 북에 힘있는 지인도 없으며, 가족들도 남쪽에 두고 올라갔다.
남로당에 투신해 월북한 박태원은 평양문학대학에서 1955년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하지만 남로당 계열이라는 이유로 숙청당하고 4년 간 평안남도 강서 지방의 한 집단농장에서 강제 노동을 하며 지내다가[5] 1960년에 다시 대학교수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강제 노동의 후유증으로 영양실조를 겪은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1965년에 망막염으로 실명하고, 1975년에 전신불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1977년부터 3부작 대하 역사소설인 "갑오농민전쟁"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마지막 3부를 지을 때는 구술 능력까지 상실하여 후처 권영희[6]가 자료를 가지고 작성한 원고를 불러 주면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만 할 수 있었기에 공동 저작으로 발표되었다. 결국 이 소설의 완간을 보지 못한 채 1986년 7월 10일고혈압으로 타계했으며[7], 이듬해인 1987년에 마지막 3부가 완간됐다. 정인택의 차녀이자 정인택의 사후 박태원 슬하에서 자란 북한 소설가 정태은의 글을 통해 월북 후 행적이 조금이나마 알려져 있다.
갑오농민전쟁의 집필 전인 1964년에 발표한 소설 『계명산천은 밝아 오느냐』는 갑오농민전쟁의 도입부 성격이라고 한다.

3. 기타


영화 감독 봉준호가 그의 외손자다. 정확히는 6.25 전쟁대한민국에 남겨진 첫 번째 부인에게서 나온 차녀의 아들이 봉준호. 박태원은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두고 있었는데, 전쟁 중 그가 월북하고 나서 얼마 후에 장녀도 월북했다.[8]
봉준호가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4관왕에 오른후 출판업계에선 이 관계를 거론하며 박태원 작품 홍보에 활용했는데, 정작 봉준호 본인은 외할아버지를 거론하기 꺼려했으며, 박태원에게 재능이나 영향을 받았냐는 질문에도 그래픽 디자이너인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대답했다.
평가원수능 출제위원들이 유독 좋아하는 작가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천변풍경은 수능에 2번 이상 출제된 몇 안되는 작품 중 하나다.

4. 관련 문서




[1] 참고로 북한정권에 가담해 문학적으로 진일보 혹은 문명을 유지한 작가는 이기영 정도를 제외하면 없다. 이기영을 제외하면 처음부터 제대로 된 작품을 쓰지도 못했던 카프문인들은 물론이려니와 박태원, 이태준백석 조차도 김일성, 김씨일가 찬양만을 요구하는 김일성 정권의 요구앞에 기존의 문학성을 잃어버렸다.[2] 중편 소설로, 1938년 출간된 단편집의 표제작이다. 단편집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은 <성탄제>, <옆집 색시>, <5월의 훈풍>, <사흘 굶은 봄달>, <피로>, <딱한 사람들>, <전말>, <거리>, <길은 어둡고>, <비량>, <진통>, <방란장 주인> 등 12편이 수록되어 있다.[3] 청계천변 주민 삼십여 명의 일상사를 다루는 개별 삽화 형식의 소설로 한국 현대문학의 리얼리즘 걸작이라 평가받는다. 1938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4] 여담이지만 외손자인 봉준호 감독은 동양인 치고는 상당히 심한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는데, 유전이라고 한다.[5] 공산주의 체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한 노동자라는 이념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지식인 계층을 노동 현장에 보내는 '하방' 조치를 내리고는 한다.[6] 6.25 전쟁 때 같이 월북한 작가 정인택의 아내로, 정인택이 휴전을 앞두고 1952년에 사망한 뒤 1956년에 박태원과 재혼하였다. 참고로 정인택은 박태원과 고교 동창이자 절친했던 사이로, 대표적인 친일 문학인으로 악명이 높은 소설가이다. 정인택은 특이하게도 일본제국 뿐만 아니라 히틀러까지 찬양하는 작품을 썼다.[7] 1998년 애국열사릉에 이장.[8] 월북 후 장녀는 평양기계대학에서 영문과 교수로 재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