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포레 고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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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포레 고후'''
'''Ventforet Kofu'''
'''정식 명칭'''
ヴァンフォーレ甲府
'''라이선스'''
J1
'''구단 형태'''
시민구단
'''리그'''
J2리그
'''창단년도'''
1965년
'''연고지'''
야마나시현 고후시
'''홈 경기장'''
야마나시 중앙은행 스타디움 (17,000명 수용)
'''구단주'''
우미노 가즈유키
'''감독'''
이토 아키라
'''킷 스폰서'''
미즈노
'''애칭'''
Ventforet
'''홈페이지'''
http://www.ventforet.jp
1. 개요
2. 역사
3. 선수단
4. 우승
5. 주요 선수
6. K리그 시민구단의 롤모델?


1. 개요


반포레 고후는 야마나시현 고후를 연고로 하는 J리그 축구팀이다. 1999년에 J리그에 가입했다. 홈 경기장은 야마나시중앙은행 스타디움이다. 등번호 12번은 서포터 번호로서 영구결번이다.
2004년 평균관중 600명대에서 2014년 12,000명대로 상승했다.
'''반포레 고후 영구결번'''
No.12 서포터
팀 이름은 프랑스어에서 바람을 뜻하는 반(Vent)과 숲을 뜻하는 포레(forêt)의 합성어다. 이 말은 유명한 사자성어인 다케다 신겐풍림화산(風林火山)에서 따왔다.

2. 역사


1965년에 고후제일고교 축구부 OB인 카와테공업소 사장 카와테 요시카즈(川手良萬)가 실업팀인 고후 축구클럽으로 창단하여 실업축구인 일본 축구 리그(JSL)에 참가하였다. J리그가 출범하기 직전인 1992년, JSL의 일반 시민 클럽은 교토 시코(현 교토 상가 FC)와 이 고후 클럽이 유이했다.
J리그 개막 이후 야마나시현 축구협회와 OB들에 의해 J리그 가입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어 1995년에 팀 이름을 반포레 고후로 개칭하였다. 1997년에 지역 기업 등이 출자하고 운영 법인 반포레 야마나시 스포츠 클럽을 설립하여 프로화 하였다. 1998년은 리그 2위를 차지하는 31득점을 올린 바론의 활약으로 JFL 4위를 차지하였다.
1999년에 발족된 J리그 디비전 2(J2) 참가가 결정됐다. 시즌 종료 후 바론은 이치하라로 이적했다. 2005년 J2리그 3위를 기록하여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가시와 레이솔을 꺾고[1] J1리그로 처음 승격하였으나 2007년 17위를 기록하여 다시 J2리그로 강등되었다. 2010 시즌 J2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여 승격을 확정하여 4년만에 J1로 복귀하였다. 이듬해 16위를 기록하여 다시 강등되었다. 그러나 2012 시즌에 J2리그 우승을 하며 다시 1부리그로 복귀하였다가, 2017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베갈타 센다이에게 승리하고도 함께 강등 위기에 있던 시미즈 S펄스비셀 고베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승점에서 밀려 J2리그 강등이 확정되었다. #
2018시즌부터 J2승격 플레이오프 우승팀이 J1의 16위팀과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루게 되었다. 1년만 일찍 제도가 바뀌었다면 고후 입장에선 잔류의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이후 J2리그에서는 중위권에서 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승격에 실패하고 우에노 감독과의 계약도 연장하지 않았다.
2019시즌은 5위로 마치면서 승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4위 도쿠시마와 1대1로 비겼고 리그 순위가 밀려서 다음 라운드 진출에 실패했다.

3. 선수단




4. 우승


  • J리그 디비전 2 : 2012

5. 주요 선수


  • 일본
    • 마이크 하프나[2] : 2010-2011
    • 미치부치 료헤이 : 2017-2018

6. K리그 시민구단의 롤모델?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K리그에 시민구단이 많이 생겨나고, 개별 시민구단들의 내실을 꾀하는 과정에서 반포레 고후가 유력한 롤모델로 거론되고 있다. 자체 인구 20만, 주변 도시권 인구를 모두 합쳐도 40만도 안되는 고후 지역에서 2000년 평관 619명으로 해체 위기에까지 몰려 있던 구단이, 미칠듯한 지역밀착을 통해 평관 12,000명이라는 엄청난 흥행과 14년 연속 흑자로 재정자립이라는 축구팬들에게는 꿈같은 목표를 이뤄낸 곳이기 때문이다. [현지르포] ‘시민구단의 완성’ 반포레 고후가 들려주는 이야기
반포레 고후는 이전부터 지역밀착의 대표사례로 유명했지만, 본격적으로 K리그에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2014년 경남 FCK리그 챌린지 강등과 이로 인한 해체 논란부터다. 지자체장의 말 한마디에 구단의 존립이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타파하고 자립능력을 키우는 방편으로 지역밀착이 중대 화두가 된 것이다. 2016년 안산시시민구단 창단을 준비하면서 시장을 비롯한 프런트 전원이 반포레 고후에서 1개월간 연수를 받기도 했다.
문제는 환경이 전혀 다른데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 반포레 고후는 원래 고후제일고교라는 현내 제일의 명문교 OB들이 주축이 된 클럽이고 이 때문에 원 구단주였던 카와테가 사망한 이후에도 고후일고 OB들을 중심으로 후원이 지속되었다. 프로 출범 이후로는 야마나시현의 경제적 불황으로 인해 한동안 죽을 쑨 것도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경영진의 아마추어리즘 탓이 컸고[3] 이런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산니치YBS그룹[4] 출신의 경영전문가인 우미노 카즈유키 현 회장이 취임하자 극적으로 경영상태가 개선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한국은 지역별 축구명문학교 네트워크도 미약한 상황에서 리그가 출범한데다가 상당수의 시민구단 연고지들이 역사가 짧은 수도권 위성도시들인 탓에[5] 반포레 고후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며 단기간에 지역 사회의 후원을 이끌어내기도 어렵다. 이 때문인지 2017년 이후 언급하는 빈도가 줄었으나 여전히 언급이 끊이지는 않고 있다.
다만 2010년대 후반 들어서는 DGB대구은행파크를 통한 대구 FC 붐을 통해 한국에서 시민구단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성공 사례들이 생겨나면서, 이미 한국에 적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 알려진 반포레 고후는 예전만큼 관심받진 못하고 있다.
[1] 이당시 바레의 전설의 한경기 6골이 터졌다.[2] 네덜란드 계통이지만 1993년 가족 전원이 일본으로 귀화했다.[3] 초대 사장이었던 후카자와 타케오는 원래 고교 체육교사였다가 야마나시현 축구협회 부회장이라는 이유로 사장이 된 사람이었다.[4] 야마나시현 지역미디어그룹[5] 성남, 안산, 부천, 안양 등. 각 지역의 타이틀 명문고 중 그나마 역사가 오래된 부천고가 1974년 개교이며 안양고 1983년, 성남 서현고 1991년, 안산 동산고 1995년이다. 그나마도 다들 축구에는 관심도 없는 학교들. 4개 도시들을 기준으로 그나마 축구 명문으로 꼽히는 학교들을 찾아보면 그나마 1967년에 축구부가 창단된 안양공고 정도가 조금 역사가 있는 편이며 안산 초지고(2002년), 성남 풍생고(1980년) 등 야구에 비해 하나같이 네트워크 같은 게 생길 시간이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