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로디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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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디노 전투'''
'''날짜'''
1812년 9월 7일
'''장소'''
'''러시아 보로디노'''
'''교전국'''
'''러시아 제국'''
'''프랑스 제1제국'''
나폴리 왕국
바르샤바 공국
이탈리아 왕국
라인 동맹
'''지휘관'''
'''미하일 쿠투조프 대공'''
바클라이 드 톨리
표트르 바그라티온
'''나폴레옹 황제'''
'''병력'''
'''106,000~160,000명'''
'''115,000~190,000명'''
'''피해 규모'''
'''사상자 및 포로
40,000~45,000명'''
'''사상자 및 포로
28,000~40,000명'''
'''결과'''
'''프랑스군 승리'''
'''영향'''
'''피로스의 승리''', 모스크바 점령 및 후퇴
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3.2. 러시아군
4. 전투 경과
4.1. 스몰렌스크 전투
4.2. 쿠투조프, 러시아군 총사령관이 되다
4.3. 보로디노 전투
5. 결과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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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어: Bataille de la Moskowa
러시아어: Бородинская битва
영어: Battle of Borodino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812년 9월 7일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이 모스크바 서쪽 보로디노 마을 근처에서 맞붙은 전투. 프랑스군이 러시아군을 패퇴시켰지만 엄청난 희생자를 양산했고 적을 괴멸시키는 데 실패했다. 이 전투 후 프랑스군은 모스크바에 입성했지만 러시아의 항복을 얻어내는 데 실패했고 뒤이은 혹한으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입은 채 패주했다.

2. 배경


1812년 6월 24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60만 대군을 동원하여 러시아 국경에 배치시킨뒤 그 중 42만여 명을 이끌고 네만 강을 건너 러시아령 폴란드를 침공했다.[1] 나폴레옹의 목표는 속전속결로 러시아 주력을 일시에 섬멸하고 빠른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병사들에게 3주의 보급품만 지급하고 나중에 부족해지면 현지에서 조달하기로 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나폴레옹이 바라는 대회전에 응하지 않기로 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군을 가능한 빨리 격퇴하기를 원했지만, 러시아군 제1군 사령관 바클라이 드 톨리는 적의 수가 워낙 많아서 지금 당장 결전을 벌이는 건 자살행위라고 판단하고 동쪽으로 철수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이 싸워보지도 않고 철수하자 그 뒤를 추격했지만 그 과정에서 극심한 비전투 손실이 발생했다. 강행군이 시작된 지 며칠 만에 라스푸티차가 발생해 땅이 진창으로 변했고 군마의 먹이인 건초와 귀리가 부족해 군마 2만여 마리가 강행군을 시작한 지 며칠만에 굶어죽거나 탈진했으며, 병사들은 발진티푸스 등 온갖 전염병에 걸려 러시아에 침입한 지 첫 2주 만에 13만 5천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사망하거나 전투 불가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고생해가며 러시아 내륙에 깊숙이 진군하고 있던 나폴레옹에게 표트르 바그라티온 왕자가 이끄는 러시아군 제2군이 근방인 모길레프에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나폴레옹은 좌익의 다부 휘하 제1군단과 우익의 제롬 보나파르트 휘하 3개 군단(포니아토프스키의 제5군단, 반담의 제8군단, 레이니에의 제7군단)에게 모길레프에 주둔한 러시아군의 양 측면을 협공해 포위섬멸하는 계획을 세웠다. 빌나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다부의 군단과 기병 지원이 딸린 2개 사단을 민스크로 진격시켰고 제롬에게는 바그라티온의 군대와 접전을 벌이면서 적을 물고 늘어지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제롬의 병사들이 진격에 나섰을 때 격렬한 폭우로 인해 도로가 거의 통행 불능 상태가 되어버려 나폴레옹의 지시를 따르기 힘들어졌다. 게다가 제롬은 나폴레옹에게 진격 상황을 꾸준히 보고하지 않았고 휘하 군단장 반담과 언쟁을 벌이다가 그를 해고해 버렸다. 이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격한 어조의 서신을 보내 제롬을 꾸짖었고 루이 니콜라 다부에게 밀서를 보내 바그라티온과의 전투가 임박해질 경우 그가 지휘권을 인수하도록 했다. 그러나 제롬은 무기력증에 빠졌는지 1주일 동안 그로드노에 주저앉아 나폴레옹의 추가 명령만 기다렸다.
나폴레옹은 빌라에서 2주일이 넘도록 머물며 새로운 공세를 계획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슈바르첸베르크에게 그의 부대를 이동시켜 제롬을 지원하게 했고 제롬 휘하 군단장 레이니에에게는 별도로 소규모 병력을 토르마소프의 러시아군 제3군을 견제하는데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그후 나폴레옹은 전투 결과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편 북쪽에서는 자크 마크도날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리가를 향해 서서히 진격했다. 그들은 코사크 기병의 습격 외에는 이렇다할 저항을 받지 않았지만 라스푸티차에 시달리느라 비전투 손실이 막대했다. 마크도날의 남쪽에서는 니콜라 우디노 원수가 드리나 강을 향해 진격했다. 미셸 네 원수는 우디노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숲이 우거진 지역을 지나느라 우디노와의 접촉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 무렵, 러시아군 총사령관 톨리는 요새화된 주둔지 드리사에서 적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드리사에 도착한 그는 드리사의 방어 상태가 엉망인 걸 보고 경악했다. 그는 이 곳을 지키려 들었다간 프랑스군에게 괴멸될 게 뻔하다고 판단해 며칠간 병사들을 휴식시킨 뒤 보급선을 따라 후방으로 철수하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바그라티온, 쿠투조프 등 여러 원수들은 더이상 한 뼘의 러시아 영토도 내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톨리를 비롯한 '외국인' 고문들과 아락체예프와 바그라티온을 따르는 '러시아 국수주의자'들은 러시아 황제에게 저마다 진언과 중상모략이 담긴 상서를 올려댔다. 또한 러시아군은 지휘권 통합 문제로 골치를 앓았다. 톨리와 바그라티온이 이끈 두 주력군이 어떻게든 침공군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공동작전이 필요했지만 총사령관이 존재하지 않아서 여의치 않았다. 일단 이론상으로는 전쟁대신인 톨리가 바그라티온을 지휘하는 게 맞았지만, 바그라티온은 연공서열에서 앞선 데다가 이전의 전쟁에서 톨리의 상급자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내심 톨리에게 통합된 지휘를 맡기기를 원했지만 국수주의자들의 원성을 사지 않고 싶어서 결코 이를 공식화하지 않았다. 바그라티온은 급기야 톨리가 자신을 음해하고 제2군이 궤멸되게 놔둔다고 여기고 그와 갈등을 빚었다. 이런 상황을 우려하던 아락체예프 등 일단의 장군들과 외무대신 시시코프 등 정치인들은 러시아 황제에게 전선을 떠나 온 나라에 전쟁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라고 권유했다. 이에 러시아 황제는 7월 19일에 전선을 출발하여 모스크바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7월 9일, 나폴레옹은 러시아군 제1군과 제2군 사이에 병력을 집결시켜 적을 양분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7월 12일, 제롬과 다부 사이에 연락이 재개되었고, 두 군대는 바그라티온을 협공하기에 좋은 위치에 섰다. 다부는 지금이 기회라고 판단하고 제롬에게 나폴레옹의 밀서를 내밀었다. 그러자 제롬은 굴욕감을 느끼고 마르샹에게 지휘를 맡긴 뒤 군대를 떠났다. 마르샹은 사전에 아무런 지시도 받은 적이 없었기에 이 소동을 수습하는 데만 며칠을 허비했다. 그렇게 프랑스군이 지휘권 문제로 허우적거리던 7월 23일, 바그라티온이 살타놉카에서 다부의 선봉대에게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을 격파할 수는 없었고, 바그라티온은 후퇴해서 다부의 남쪽 측면으로 돌아나가려 했다. 한편, 톨리는 바그라티온과 연계해 나폴레옹과 모스크바 사이를 가로막기로 했다. 그는 그러한 연계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 남동쪽의 비텝스크로 향했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고자 비트겐슈타인 장군을 남겨 리가의 에센 장군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때 나폴레옹은 러시아 제1군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드리사로 진군했지만, 정찰대가 드리사는 텅 비었고 비텝스크로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를 뒤늦게 전하자 군대를 되돌려 비텝스크로 진격했다. 그러면서 우디노에게 연락선의 방어를 맡겼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우디노를 공격했고, 양측은 수차레에 걸쳐 접전을 벌였으나 승부를 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우디노는 나폴레옹의 본대와 긴밀한 공조를 할 수 없었다.
톨리는 프랑스군보다 먼저 비텝스크에 입성한 후 프랑스 대군이 자신에게 몰려오고 있다는 급보를 접하자 다시 스몰렌스크로 후퇴했다. 7월 25일, 오스트로브노에서 러시아군 후위 기병대를 패퇴시킨 조아킴 뮈라 원수는 러시아군 포로로부터 톨리의 최종 목표가 스몰렌스크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폴레옹은 즉각 추격하려 했지만 군의 태세가 흐트러지고 병사들이 탈진했다는 걸 깨닫고 7월 29일부로 진군을 멈추고 병사들을 휴식시키면서 아군의 합류와 뒤쳐진 보급부대의 도착을 기다렸다. 한편 바그라티온 역시 다부의 추적을 뿌리치고 스몰렌스크로 향했다. 그러던 중 나폴레옹은 토르마소프의 러시아군 제3군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았던 레이니에의 소규모 부대가 격파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슈바르첸베르크 장군의 군대를 되돌려보내 레이니에를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그후 1주일간 병사들을 휴식시킨 나폴레옹은 스몰렌스크로 진격했다. 이리하여 프랑스군과 러시아군 간의 대규모 일전이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총병력: 13만 ~ 16만 명, 보병대대 214개, 기병대대 317개, 포병대 587개.

3.2. 러시아군


  • 바클라이 드 톨리 장군의 제1군
  • 표트르 바그라티온 장군의 제2군
  • 콘스탄틴 대공의 예비군
  • 플라토프 장군의 카자크 기병대
총병력: 10만 ~ 15만 명, 180개 보병대대, 164개 기병대대, 20개 코사크 연대, 55개포대, 640개 포.

4. 전투 경과



4.1. 스몰렌스크 전투


8월 14일, 13만 ~ 16만에 달하는 프랑스군은 스몰렌스크로 진군하던 중 네베롭스키 장군의 러시아군 사단과 크라스노이에서 마주쳤다. 네베롭스키 장군은 크라스노이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퇴해 스몰렌스크로 퇴각한 후 본대에 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톨리는 독투로프 장군의 기병대를 구원 병력으로 급파했고, 프랑스군은 돌격을 구상하기 위해 멈춰 섰다. 8월 17일 정오 직후, 프랑스군은 스몰렌스크로 진격했다. 진두지휘에 나선 미셸 네 원수는 시가지를 둘러싼 교외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냈고, 몇 차례나 드네프르 강 다리의 함락을 목전에 뒀으나 번번이 러시아군의 항전으로 무위에 그쳤다. 나폴레옹은 4시 30분에 일단 공격을 중지시키고 다음날 공격을 속개하기 위해 추가로 병력을 동원했다.
8월 17일 밤, 러시아 전쟁협의회에서는 톨리, 콘스탄틴 대공, 바그라티온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콘스탄틴 대공과 바그라티온은 스몰렌스크를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톨리는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몰렌스크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바그라티온은 드네프르 강 서쪽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을 후퇴시키는 과정에서 강 여울을 허술하게 놔두는 실수를 저질렀다. 네는 다음날 아침에 이 사실을 눈치채고 휘하 병력 상당수를 강 건너편으로 이동시켰다. 톨리는 황급히 역습을 가해 이들을 몰아내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제1군의 보급물자 대부분을 포기하고 8월 18일 밤에 후퇴했다.
8월 19일 아침, 네의 병력이 스몰렌스크에서 5km 남짓 벗어난 톨리의 후위대를 덮쳤다. 이때 네는 자신이 톨리의 본대를 따라잡아 그 후위로 파고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발루티노에서 적과 교전했다. 이 전투에서 더 많은 프랑스군이 몰려들었고, 양 측은 하루 종일 밀고 당기기를 거듭했다. 오후 4시, 나폴레옹이 전장에 도착해 다부 군단 소속 귀댕 사단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그들은 이 공격으로 러시아군의 전선을 돌파했고, 러시아군은 동쪽으로 물러나 새로운 진지를 구축했다. 이에 네는 사전 포격을 개시하면서 저녁 즈응에 공세를 개시하기로 했다. 한편, 쥐노의 제8군단이 전장에 도착하여 톨리의 측면 및 후방과 대치했다. 쥐노는 드네프르 강을 건넌 뒤 나머지 군대의 도하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8월 19일 저녁, 미셀 네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쥐노가 이 공세에 가담해 러시아군을 몰아붙였다면, 톨리의 제1군은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쥐노와 동행하던 뮈라는 아군을 도와야 한다며 공세를 독촉했지만 쥐노는 "나는 폐하로부터 군대의 도하를 지원하라는 명렴만 받았지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며 거부했다. 뮈라는 스스로도 기회를 확신하지 못해 쥐노를 더이상 몰아붙이지 못하고 휘하 기병대의 기동에 적합한 지형을 물색하러 말을 몰고 나갔다. 결국 프랑스군은 전과 확대에 실패했고 러시아군은 유유히 스몰렌스크를 빠져나갔다. 또한 프랑스군에서 가장 뛰어난 사단 지휘관이었던 귀댕 장군은 이 전투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이후 닷새 동안 폭우가 내리자, 나폴레옹은 군대를 휴식시키면서 8월 24일에 모스크바를 향한 공세를 개시하기로 했다. 그는 슈바르첸베르크가 8월 12일 고로테쉬나에서 토르마소프의 러시아군을 격퇴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이로써 남쪽 측면의 위협을 던 나폴레옹은 공격 태세를 유지했다. 만약 나폴레옹이 스몰렌스크에서 다가올 겨울을 나기로 결정했다면, 러시아 원정의 참상을 그나마 덜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당장 적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고 자꾸만 빠져나가는 러시아군을 어떻게든 섬멸하고 싶어했다. 결국 그는 참사를 피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뿌리치고 파멸이 기다리고 있는 모스크바로 진군한다.

4.2. 쿠투조프, 러시아군 총사령관이 되다


프랑스군이 스몰렌스크를 공략했다는 소식을 접한 알렉산드르 1세는 진노했고, 군대를 이끌 러시아인 적임자를 세울 것을 호소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결전을 주장하는 이들이 득실거렸고 알렉산드르 1세는 이들의 주장을 무시했다간 아버지 파벨 1세처럼 암살당할 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이에 총사령관 선임에 나선 그는 미하일 쿠투조프를 선택했다. 쿠투조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만, 알렉산드르 1세는 그를 음험하고 도덕적으로 해이한 인물로 여겨 싫어했다. 하지만 그는 병사들과 귀족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으니 알렉산드르 1세로서는 그를 뽑을 수밖에 없었다.
1812년 8월 29일, 쿠투조프는 러시아군 진영에 도착했다. 그는 수차례 회의를 열어 모스크바까지 밀리기 전에 일전을 치른다는 자신의 결의를 피력하는 한편, 전투를 벌일 적절한 장소를 찾을 때까지는 당분간 후퇴를 계속한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이에 바그라티온이 보로디노에서 결전을 치를 것을 제의했고, 쿠투조프는 이를 수락하고 경사지에 군대를 배치하며 몇 곳의 언덕에 보루를 구축했다.

4.3. 보로디노 전투


8월 24일, 프랑스군은 스몰렌스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그후 9월 5일, 프랑스군 선두 부대가 보로디노에 당도했다. 그들은 셰바르디노 마을 인근에서 러시아군 포대와 이를 엄호하는 사단 규모의 보병대가 경보병과 기병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지키고 있는 보루에 부딪쳤다. 정오가 지났을 때 이 사실을 보고받은 나폴레옹은 보루에서 2.5km 뒤쪽에 도사린 러시아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보루를 점령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다부의 제1군단 소속의 콩팡의 제5사단에게 2개 기병군단의 지원을 받으며 보루를 공략할 것을 명령했다. 이와 동시에, 포니아토프스키의 폴란드 군단에게도 남쪽으로 우회해 측면에서 목표를 공략하라고 명령했다. 산병전 대형으로 접근한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에게 매서운 사격을 퍼부었고, 러시아군은 온힘을 다해 응사했고 보루에 설치된 포대는 상대에게 포화를 퍼부었다.
콩팡은 아군이 보루에 근접하자 57연대를 출격시켜 측면의 수비 병력을 몰아내게 했다. 이에 57연대는 러시아군을 격퇴하고 보루로 난입해 마침내 점거했다. 해가 저물 무렵, 바그라티온이 친히 기병대를 이끌고 보루로 돌격해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보루를 탈환했지만 어둠이 이미 깔렸기 때문에 추격에 나서지 못했다. 그후 춥고 습한 밤이 깊어지는 가운데, 나폴레옹은 밤을 지새다시피하며 후속 군단등르 이동시켜 적절한 전투 위치에 배치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이튿날, 양측은 상대의 진영을 정찰하며 전투 계획을 세웠다. 쿠투조프는 자신의 병력을 남북 축으로 전개해 북쪽으로 톨리의 제1군을 콜로차 강 후방에 배치하고, 견고하게 축성된 일련의 보루들이 있는 남쪽으로는 바그라티온의 제2군을 배치했다. 바그라티온의 전선에는 사실상 러시아군 전선 전체의 구심점인 대보루가 있었다. 이 곳에서는 보로디노 시가지 북쪽의 도하 지점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보루의 남쪽 측면은 그로부터 좌측 수백 미터 지점에 있는 '첨탑'이라고 불리는 소규모 보루 3개가 막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적의 전선을 살핀 후 적이 퇴각할 조짐이 있는지 살폈다. 그 후 그는 몸상태가 좋지 않다며 숙소로 돌아가 쉬었다. 그는 숙소에서 병사들에게 아들 나폴레옹 2세의 초상화를 보여주고는 자신의 아들이 "전장의 살육을 목격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다."고 말했다. 바로 그 무렵 스페인 살라망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군이 오귀스트 마르몽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패퇴시켰다는 비보가 전해지자 나폴레옹은 침울해졌다. 이후 그는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숙소에 틀어박혀 지냈다.
한편 쿠투조프는 자신의 사령부에서 참모들과 어울려 술과 담소로 시간을 보냈다. 최종적인 세부사항을 결정하는 것은 대부분 참모장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의 몫이었다. 그는 상관의 계획을 망치는 줄도 모르고 자신의 독자적인 구상대로 몇 곳의 병력을 재배치했다. 그 중 투치코프의 군단을 은폐된 예비 진지에서 끌어내 우티차 마을 인근의 개활지로 옮긴 것은 실로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이었다. 이는 다음날 펼쳐질 포니아토프스키 휘하 폴란드군의 공격 앞에 투치코프의 군단이 훤히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9월 7일 아침 6시, 프랑스 진영의 야포들이 포문을 열자 대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 역시 자신들의 야포로 이에 맞섰고, 전장은 이내 짙은 청회색 연기로 덮였다. 수천 발의 포탄이 지면을 쓸며 앞에 놓인 모든 것을 강타했다. 나폴레옹은 외젠의 제4군단에게 보로디노 시가지를 공격하게 했다. 포연을 헤치고 나간 프랑스군은 러시아 근위엽병들에게 쇄도했다. 이들 엽병들은 포격에 시달리던 터라서 순순히 물러났다. 그러나 무모하리만치 추격전을 펼친 프랑스군 역시 격퇴되었다. 그래도 외젠은 시가지를 장악한 채 이를 거점으로 포대를 전개했고, 측면에서 대보루를 포격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다부의 제1군단 소속 3개 사단을 3개의 첨탑으로 출격시키고 포니아토프스키의 제5군단에게 그 남쪽의 우티차 주위를 공략하도록 했다. 여기에 쥐노의 제8군단에게 아군의 두 공세를 지원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포니아토프스키는 포연으로 시야가 흐려진데다 익숙하지 않은 지형 탓에 길을 헤매느라 공세가 약 2시간 정도 지연되는 걸 막지 못했고, 나폴레옹 역시 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투치코프는 당분간 전방의 위협이 사라지자 휘하 사단 중 하나를 북쪽으로 돌려 첨탑을 지키던 보로즈딘의 제8군단을 지원했다. 그리고 자신의 병력이 나폴레옹의 공세에 휘말리게 된 바그라티온은 전선을 누비며 예비대의 신속한 증원에 온 힘을 쏟았다.
다부의 선봉을 맡은 콩팡 사단은 대규모 러시아 포대가 펼친 무시무시한 탄막 속으로 뛰어들었다. 콩팡의 정예 57연대는 첫번째 첨탑을 점령하고 재편성을 마친 후 드새 사단의 증원을 기다렸다. 그러나 드새 사단은 투치코프가 파견한 병력에 가로막힌 탓에 도착할 수 없었던 데다 드새가 우티차 숲 경계의 격전에서 치명상을 입자 동요한 병사들이 퇴각해버렸다. 결굯 콩팡 사단은 고립무원에 빠졌다. 그러던 중 콩팡이 부상으로 쓰러지자, 다부가 직접 지휘를 맡았으나 그 역시 가벼운 부상을 입고 바그라티온의 척탄병 예비대에 의해 진지 밖으로 내몰렸다. 그 광경은 지켜본 바그라티온은 자신의 지원 기병대를 추격에 투입했고, 기병대는 도망치는 보병대를 베며 다부의 예비대로 남은 프리앙 사단의 방진까지 이르렀다. 이때 구원에 나선 뮈라의 기병대가 이들을 격퇴했고, 뮈라는 뒤이어 흐트러진 러시아군의 대열에 구멍을 내며 그들을 몰아냈다.
나폴레옹은 이제 네의 제3군단으로 다시 공격에 나섰다. 네는 다부의 북쪽 측면을 돌아 다부의 부대에게 큰 피해를 입혔던 탄막 속으로 진격했다. 네는 검을 움켜쥔 채 선두에 서서 병사들과 함께 돌진하며 적군을 유린했다. 그 결과 첨탑 셋이 모두 프랑스군에게 공략되었고 지원 포대 역시 제압되었다. 바그라티온은 대규모 흉갑기병대를 풀어 역습에 나섰다. 기병대는 네의 병사들을 몰아냈고 뮈라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에 뮈라는 뷔르템베르크 보병대대의 대열로 뛰어들어서 독일 병사들을 추스려 흉갑기병대의 공격을 막아내 겨우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한편, 포니아토프스키와 폴란드군은 2시간 동안 헤멘 끝에 마침내 우티차 교외를 지척에 뒀다. 그들은 조국을 유린한 러시아군과 맞붙는다는 투지에 불타올랐다. 투치코프는 이들에 맞설 정예 척탄병 사단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지근거리까지 다가선 폴란드군은 사격을 개시했지만 러시아군은 결연히 진지를 고수했다. 포니아토프스키가 수적으로 우세한 그의 병력을 동원하여 척탄병 사단의 측면을 포위하자, 투치코프는 그의 병력에게 우티차에 불을 놓은 뒤 배후의 숲까지 퇴각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문에 폴란드 군단은 매캐한 연기 때문에 추격을 중지하고 재편성했다.
한편, 러시아 제1군 사령관 톨리는 좌익의 프랑스군 병력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바그라티온의 지원 요청이 들어오자, 그는 바가부트의 제2군단을 이동시켜 바그라티온을 지원하는 동시에 더 많은 휘하 병력을 중앙으로 이동시켰다. 바가부트의 제2군단이 이동하기까지는 2시간이 걸렸고, 유효한 위치를 잡는 데 또다시 1시간이 걸렸다. 그 직후 포니아토프스키의 폴란드 군단이 재편성을 마친 후 바가부트의 군단을 공격했다. 그는 휘하 군단의 야포를 집결시켜 우티차 뒤편의 언덕에 자리잡아 포격을 퍼부었다. 폴란드군의 공격으로 투치코프의 군대가 괴멸되기 직전에 도착한 바가부트의 포병대는 적의 돌격을 잠시나마 저지했다. 그러나 폴란드군은 곧바로 보병대를 전진시켰고, 러시아군 포대는 뒤로 물러나야 했다. 이후 폴란드구군 2개 사단과 러시아군 정예 척탄병들이 서로에게 매서운 사격을 가했다. 이 격렬한 접전 도중, 투치코프는 친히 병사들의 선두에 서서 적을 향해 돌격했다. 이에 폴란드 군단 전체가 우티차 너머로 되밀려났다. 바로 그순간, 한 발의 총탄이 투치코프의 머리를 꿰뚫었다. 투치코프는 치명상을 잃고 쓰러졌고, 러시아군의 역습은 차츰 기세를 잃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 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쥐노의 베스트팔렌 병사들을 투입시켰다. 진격에 나선 쥐노는 숲으로 진입했다. 그는 그곳에서 포니아토프츠키와 합류했고 러시아군을 몰아냈다. 그 덕분에 압박을 던 폴란드군은 공격 태세를 재정비했다. 이 무렵, 다부와 네는 다시 한번 첨탑들을 장악했다. 바그라티온은 곧바로 역습에 나서 첨탑들을 탈환했다. 그런데 포탄 파편이 바그라티온의 다리에 박혔다. 그는 전장에 머물며 러시아군이 첨탑을 공략하고 깃발을 올리는 걸 지켜본 후 후송 길에 올랐다. 그는 이 상처 때문에 7일 뒤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가 전장을 떠난 직후, 네와 다부는 다시 공세를 개시, 오전 11시 30분에 첨탑 3개를 완전히 점령했다.
이 시기, 북쪽에서는 전력을 정비한 외젠이 대보루 앞을 흐르는 하천을 강습도하하려 하고 있었다. 그는 앞서 오전 9시경부터 브로시에 사단으로 탐색전을 펼쳤다. 이 공격은 러시아군에게 별 효과가 없었지만, 보다 본격적인 공략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줬다. 본격적인 돌격을 맡은 것은 모랑 사단이었다. 이들은 언덕을 밀고 올라가 야포 18문에 매달린 포병들을 덮쳤다. 처절한 육박전 끝에 포병들 대부분이 전사했고, 프랑스군은 이 요충지를 장악했다. 이에 톨리의 참모장 예르몰로프 장군은 달아나는 병사들을 되돌려 세운 뒤 모든 인접 부대에게 지원을 호소하며 보루를 향해 돌진했다. 여기에 여러 러시아군 병사들이 가세했고, 모랑 사단은 그들의 기세에 눌려 밀려났다. 특히 포병 예비대 지휘관 쿠타이조프 장군은 부대기를 움켜쥔 채 1개 보병연대를 이끌며 대단한 활약을 선보였다. 그러나 그는 전사했고, 이후 전투에서 제1군 포병의 상당수는 그의 부재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외젠은 추가 공세를 가하고자 했지만, 러시아의 대군이 북쪽에서 밀려내려온다는 외침이 들려오자 경악했다. 이 러시아군은 플라토프의 카자크 기병대와 우바로프의 전열 기병들이었다. 사실 플라토프는 쿠투조프에게 자신과 대치한 적병이 전무하니 탐색전을 벌여본 후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하겠다고 제의했다. 쿠투조프는 이 제안에 동의했고, 플라토프는 자신의 진영으로 되돌아가 전장을 빙 돌아갔다가 외젠의 측면을 공격했다. 플라토프와 우바로프가 이끄는 기병대는 외젠의 군대를 향해 진군했다. 외젠의 병사들은 서둘러 방진을 짜서 이들의 공세를 막아냈지만, 엄청난 공황에 빠져 더이상 공세를 펼치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이 소식을 접하자 예비대의 일부를 그쪽으로 투입했다. 외젠은 적의 위협이 사라진 것이 확인될 때까지 일체의 공세를 중지했고, 이 떄문에 전선 북쪽의 프랑스군은 2시간 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다.
러시아군은 외젠의 병사들이 공황에 빠진 사이에 전선을 재정비하며 자신들과 대치하고 있는 프랑스군에게 가차없는 포격을 가할 시간이 주어졌다. 이 화력은 대보루에 대한 공격을 위해 집결한 기병대가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제2예비기병군단 지휘관 몽브뢴 장군은 배에 포탄이 관통하자 상처를 내려다 보고 "제법인걸" 이란 말을 남기며 안장에서 떨어져 숨졌다. 하지만 러시아군 남쪽 전선의 상황은 심각했다. 첨탑 3개가 프랑스군에게 함락된 이상 바가부트의 측면이 위험해졌다. 더구나 포니아토프스키와 쥐노의 새로운 공격마저 바가부트를 위협했다. 결국 바가부트의 병사들은 패주하여 구스몰렌스크 도로에 접한 1.6km 후방의 전선으로 퇴각했다.
이제 대보루를 제외한 러시아군의 마지막 남은 거점은 작은 마을 세묘놉스카야였다. 네는 첨탑 공략에 성공한 뒤 이 마을을 공략하려다가 격퇴당했다. 이에 뮈라의 기병대가 나섰다. 뮈라의 지시를 받은 낭수티와 라투르-모부르의 기병들이 마을을 향해 투입되었다. 하지만 마을의 남쪽 지형이 기병들이 활약하기엔 좁고 경사졌기 때문에, 남쪽으로 침입한 낭수티의 기병대는 적 보병대를 격퇴시키지 못했다. 한편 세묘놉스카야의 북쪽에서는 라투르-모부르의 기병들이 개활지에서 적 척탄병 연대들을 유린했다. 그후 그들은 러시아 기병대에게 역습당해 진격을 멈췄지만, 그들의 뒤를 따라온 프리앙 사단이 적 기병대를 격퇴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러시아 야포들의 포격에도 굴하지 않고 공세를 퍼부은 끝에 마침내 세묘놉스카야를 공략했다.
톨리는 이제 세묘놉스카야를 탈환하기 위해 자신의 제4군단을 투입했다. 이에 나폴레옹이 친히 모습을 드러내 근위기마포병대에게 제4군단을 향한 짙은 탄막을 펼치도록 명령했다. 최초의 포격으로 러시아군의 진격이 저지되었고, 거의 500문에 달하는 포가 세묘놉스카야와 대보루 사이의 지역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 지역에 있던 대부분의 러시아군은 엄청난 열기에 고통받아야 했다. 결국 톨리의 반격은 실패로 끝났고, 오후 2시가 근접할 무렵 프랑스군의 대보루 공략을 위한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브로시에와 모랑, 제라르의 3개 보병사단이 정면 공격을 펼치자, 몽브륀의 기병대와 라투르-모부르의 기병대가 러시아군의 측면을 가격했다. 이윽고 라투르-모부르 군단 소속의 차슈트로브 흉갑기병들이 대보루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들은 프랑스군의 신속한 증원에 힘입어 포병들을 도륙했다. 저항하던 러시아군은 궤멸되었고 콜랭쿠르는 보루의 배후로 돌아 들어가 포위망을 완성하기에 앞서 전방의 러시아 지원 기병들을 추격했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적을 추격하던 중에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뒤이어 에마뉘엘 그루시가 이끄는 기병대가 러시아군의 잔존 병력에게 쇄도했다. 톨리는 이들을 저지하고자 근위기병대를 투입했고 약 800m 후방의 능선에 남은 평력을 재편성했다. 그러나 러시아군 전선은 이제 총체적인 붕괴 상태에 빠져서 그가 남은 병력을 투입한들 소용이 없었다. 이때 몇몇 프랑스 원수들이 근위대를 투입시켜 승기를 굳히라며 나폴레옹에게 간청했다. 나폴레옹은 한동안 망설였지만 끝내 거절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자신에게는 근위대야말로 생존의 보증수표였다. 게다가 러시아군을 완전히 패배시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몸이 안 좋았고 무기력증에 빠진 상태였기 때문에 단순히 이겼다는 사실에 만족했고 적을 괴멸시키려 들지 않았다.
9월 7일 밤, 쿠투조프는 러시아 황제에게 대승을 알리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휘하 장군들로부터 후퇴를 요청받고는 처음에는 노여움을 내비쳤지만 나중에는 러시아군의 피해가 엄청난 데다 포탄마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자 어쩔 수 없이 퇴각을 명령했다. 다음날인 9월 8일, 나폴레옹은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는 병에 걸려 있던 데다 이번 전투의 끔찍한 살육 탓에 기운을 잃고 의기소침해졌다. 그가 다시 군대에게 모스크바를 향한 진군 준비를 명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5. 결과


최소 20만, 최대 30만 명에 달하는 양군이 맞붙은 보로디노 전투는 양 측에게 참혹한 손실을 입혔다. 러시아군은 44,000 - 58,000명 전사, 부상 및 포로가 발생했고, 프랑스군은 35,000 - 60,000명 전사, 부상 및 포로가 발생했다. 쿠투조프도 검토 결과 새로운 지원 병력으로 전력이 증강되기 전까지는 나폴레옹과 대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모스크바를 방어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9월 14일, 러시아군은 수도를 통과하며 가져갈 수 있는 모든 것을 챙겨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날 저녁, 프랑스군은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그토록 숱한 역경을 강요했던 목표는 이제 나폴레옹의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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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프랑스군이 들어온 날 모스크바 곳곳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나폴레옹은 불길이 잡힌 뒤 말을 타고 도시로 입성해 크렘린으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또 다른 장소에서 불길이 솟는 것을 목격했고, 러시아인들이 의도적으로 불을 놓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나폴레옹은 불을 놓으려다 잡힌 자들을 모조리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한동안 크렘린에 남아 있었다가 참모진의 거듭된 간언에 못이겨 그곳을 잠시 탈출했다. 이 불길은 나흘 간 지속되며 도시의 4분의 3을 파괴했다. 이제 뼈대만 앙상한 도시를 재점령한 프랑스군은 진을 친 채 확신을 품고 러시아 황제의 항복을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러시아군의 공격에 대비해 군대를 시 외곽에 원형으로 배치했다. 그러나 모스크바와 인접한 병력은 정기적인 식량 공급을 받았지만 외곽부대는 그렇지 못했다. 이때문에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흩어졌다가 적의 습격으로 소모되어갔다.
나폴레옹은 수차례 화평을 촉구하는 사자들을 파견했지만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로리스통 장군을 쿠투조프에게 보냈다. 로리스통이 쿠투조프를 만나보고 와서 러시아 황제에게 연락이 갔다고 알리자, 나폴레옹은 기뻐했다. 나폴레옹은 곧 바림직한 전쟁 종식이 이뤄질 거라고 확신하고 회신이 도착할 때까지 후퇴에 대한 생각을 접어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러시아 황제는 화평을 맺을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황제는 쿠투조프가 프랑스 사절을 만났다는 것에 분노해 그에게 "적과 화친하려 했다." 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이런 황제의 강력한 전투 의지 때문에 프랑스 사절단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고, 카자크 기병대는 프랑스군의 보급로를 매번 습격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결국 나폴레옹은 화평의 희망이 사라졌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10월 19일에 모스크바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프랑스군은 러시아를 빠져나오는 내내 엄청난 추위와 러시아군의 추격으로 인하여 괴멸되었다. 결국 러시아 국경을 넘어 폴란드에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병력은 9만 2천 명에 불과했다.

6. 여담


보로디노 전투는 훗날 우리는 인민의 군대라는 러시아 군가의 가사가 된다. 자세한건 해당 문서 참조.
[1] 일부에선 20만이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