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법

 

1. 개요
2. 배경
3. 폐해
4. 비슷한 사례
5. 관련 문서


1. 개요


복수법이란 고려시대에 실존했던 법으로 말 그대로 '''복수를 허용하는 법'''이다. 고려 제5대 왕인 경종이 제정했던 법으로 당시 고려를 복수의 피바람으로 만들었다. 악법의 끝판왕이자 고려 시대의 흑역사 중 하나로, '''국가 차원에서 사적제재를 허용하거나 방치하면 무슨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 알려주는''' 법이다.

2. 배경


이 법이 제정된 배경은 고려를 탄생시킨 왕건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왕건은 지방 호족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그들의 딸과 혼인을 하여 가족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왕비가 수십명 단위가 될 정도로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거기에 비례하여 '''왕자들이 너무나도 많이 태어나게 된다.''' 당연히 뒤에서 치열한 정권다툼이 일어났고, 개경은 왕건이 세상을 떠난 후, 끝이 없어 보이는 왕위쟁탈전이 벌어졌다.
그 뒤 광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에 항상 위협이 되던 호족세력들의 권력과 재산(구체적으론 노비들)을 분산, 소멸시켰으며 반발하는 호족들은 무차별적인 숙청을 통해 후일 나라가 분열되는 정권다툼의 씨앗들을 정리하게 된다. 호족들은 이러한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음에는 뭉쳤을지 몰라도 나중에 가서는 서로를 모함하고 왕 앞에서 최대한 비위를 맞추는 등, 말 그대로 살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숙청의 회오리 속에서 살아남지 못한 호족 가문은 몰락했고, 그 후손들은 고려라는 나라와 자신들을 모함했던 호족들에게 끝을 알 수 없는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이 가득찬 고려사회에 광종은 공포정치를 통해 그 불만을 억눌렀으나, 광종이 승하하고 경종이 즉위하게 되자 상황이 바뀌게 된다. 경종 또한 선왕의 공포정치로 자주 목숨의 위협을 느꼈었기 때문에 호족들을 동정하였고, 즉위하자마자 광종의 탄압으로 쥐 죽은 듯 살아가던 구세력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물론 일반 형사 범죄자가 아닌 정치범에 한해서긴 했지만 유배갔던 사람들을 모두 돌아오게 하고 갇혀있던 사람들도 모두 풀어주었다. 또한 흉흉한 나라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효도를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성이 안 차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 중 한 명인 왕선(王詵)과 그 세력이 경종에게 선대에 입은 조상들의 원한을 갚기 위해, '''복수를 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자 경종은 본인의 추구 이념이 효도이기도 했고, 호족들의 처지를 동정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3. 폐해


물론 경종 본인이야 진짜 피에 사무치는 원한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에서 도입했을 것이다. 광종 대의 숙청으로 피붙이를 잃거나 온 가족이 몰살당한 사례는 너무 많아서 멀쩡한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였고 이중에는 억울한 이들도 다수 있었기에 복수를 원하는 사람은 많았다. 심지어 경종 자신도 광종의 의심을 받아서 후계자 자리가 위태로운 적도 있었으니 선왕의 법도가 지나쳤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었기에 의도는 나쁘지 않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는 게 문제였다.
어쨌거나 복수법은 왕의 허가에 따라 시행되면서 서기 975년에는 호족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원한을 가진 상대에게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복수의 범위 또한 지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갑자기 때려 죽여도''' 복수라고만 하면 모든 게 용서되는 정신 나간 상황으로 치달았다. 또한 원한만 있다면 OK라는 정신 나간 기준 때문에 '''복수를 빙자한 살인까지 흔하게 벌어졌다.''' 당연한 일인 게, 상대와 싸우다가 주먹으로 얻어맞기만 했어도, 집안의 재산을 조금 털리기만 했어도 사형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정신 나간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여러 곳에서 이유 없이 사람을 살해하는 일이 많았으며, 그 정도 또한 점점 심해져만 갔다. 호족들의 복수전은 약 1년간 지속되었다가 점차 가열되면서 급기야 976년에는 집정(재상) 왕선이 복수를 빙자하여 태조(왕건)의 아들이자 경종의 삼촌뻘인 '''천안부원낭군(효성태자)과 진주낭군(원녕태자)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 물론 합당한 복수였다면 모르지만 사실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복수를 빙자해 저지른 살인극에 불과했다. 정말 원통한 사건이 있었다고 해도 '''현직 조정 최고신료가 태조의 아들이자 금왕의 숙부들을 탄핵이나 상소도 아니고 말 그대로 칼 뽑아 냅다 찔러버린'''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못해 엽기적인, 고려 역사에 남을 초대형 사건이 터진 것이다.
사건이 이 정도로 심각해지고 왕선이 막나가게 되자 경종은 그 심각성을 뒤늦게 깨닫고는 왕선을 파직시켜 귀양보냈으며, 복수법을 통해 살인을 저지른 자들을 모조리 처벌했고 복수법도 즉시 없애버렸다. 또한 경종도 이 시기에 복수의 광기를 허용한 것에 대한 회한과 인간 혐오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후 제대로 된 일을 하지 못한 채 향락에 빠져 살다가 981년 세상을 떠났으며 그 뒤에도 최승로가 시무 28조에서 경종의 복수법을 대놓고 비판하면서 까였다.
조상들도 이런 사적 복수를 법으로 허용한 시대가 있었다는 걸 매우 부끄럽게 여겼던지 그 시대에 공식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2], 호족들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전국적으로 자행된 광기의 복수극을 보면 '''상당히 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건 확실하다.'''

4. 비슷한 사례


세간에는 함무라비 법전이 이것을 허용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인데, 사실 함무라비 법은 오히려 사적제재를 제한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내 눈을 파냈으면 나도 상대방의 눈만 파내야지, 때려죽여서는 안된다"식으로 이 복수법과 정 반대의 역할을 했다. 인권 따위 안중에도 없던 당시에 정해진 법을, 현대적인 잣대를 들이대 판단하니 오해가 생긴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는 여성인권운동의 선구자였다는 해석도 있다. 당시 여성은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취급되기보다는 동시대의 노예처럼 소유물로 취급되고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따라서 공식적인 자리에서 여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꺼렸었는데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여성의 지위와 남성들의 보호 의무를 언급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이혼불가, 여성 범죄자에 대한 용서 등이 있었다. 이점에서는 무함마드도 유사하다.
고대 스파르타에서는 노예 계층에 해당하는 헤일로타이들의 인구 조절과 폭동 예방을 위해 매년 가을마다 헤일로타이들을 죽이는 것을 합법화한 사례가 있다.
현대에서의 비슷한 사례로는 알바니아에서 공산체제가 붕괴된 뒤 카눈이 법의 역할을 하면서 복수극이 횡행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른 바가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 동네에서 한 번 피해를 입은 사람의 복수가 이뤄지면 그걸로 원한관계를 청산하는 게 아니라 또 남은 가족이 다시 복수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살인 같은 중범죄의 피해가 아니라 단순히 얻어맞은 것만으로도 죽여야 할 원한 운운할 정도로 지나치니 더 문제.
물론 법으로는 금지되어 있고 발각되면 엄벌이 기다리고 있지만 애시당초 사회 분위기 자체가 그런 판에 먹힐 턱이 없다. 현재도 수많은 복수가 이뤄지며 수많은 복수범이 교도소행 열차를 타는 중이다. 물론 납득이 되는 동기일 경우에는 어느정도 감형이 이루워지긴 한다.

5. 관련 문서



[1] 한편 이러한 점을 근거로, 천안부원낭군과 진주낭군 등은 아마도 광종의 호족숙청에 지원을 했거나 왕권강화정책에 지지했을 거라는 견해가 나왔다.[2] 사실 여요전쟁으로 사초같은 고려 초기의 기록물들이 많이 날아간 이유도 있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