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월튼

 


[image]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No. 32'''
'''윌리엄 시어도어 "빌" 월튼 3세
(William Theodore "Bill" Walton III)
'''
'''생년월일'''
1952년 11월 5일 (71세)
'''출신지'''
미국 캘리포니아 주 라 메사
'''출신 학교'''
UCLA
'''신장'''
211cm (6' 11")[1]
'''체중'''
95kg (210 lbs)
'''포지션'''
센터
'''후원사'''
아디다스
'''드래프트'''
'''1974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지명'''
'''소속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1974~1978)'''
샌디에이고 클리퍼스/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1979~1985)
보스턴 셀틱스 (1985~1987)
'''등번호'''
'''32''', 5[2]
'''수상내역'''
'''NBA 챔피언 2회 (1977, 1986)'''
'''NBA 정규시즌 MVP (1978)'''
'''NBA 파이널 MVP (1977)'''
NBA 올스타 2회 (1977-1978)
'''올-NBA 퍼스트 팀 (1978)'''
올-NBA 세컨드 팀 (1977)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2회 (1977-1978)'''
NBA 올해의 식스맨 상 (1986)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93]'''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영구결번 '''
No. 32
'''1978년 NBA 정규시즌 MVP'''
카림 압둘자바

'''빌 월튼'''

모제스 말론
'''1977년 NBA 파이널 MVP'''
조 조 화이트

'''빌 월튼'''

웨스 언셀드
'''1986년 NBA 올해의 식스맨상'''
케빈 맥헤일

'''빌 월튼'''

리키 피어스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image]
'''빌 월튼'''
헌액 연도
1993년
1. 개요
2. NBA 입성 전
4. 샌디에이고/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시절, 그리고 트레이드
6. 개인사
7. 플레이스타일


1. 개요


'''BIG RED'''
전직 NBA 선수이자 해설자. 마찬가지로 전직 NBA 선수이자 현재 새크라멘토 킹스의 감독인 루크 월튼의 아버지.
부상의 악령에 시달리면서도 레전드가 된 농구선수. 건강했다면 카림 압둘 자바의 라이벌이 됐을 가능성이 높은 선수.

2. NBA 입성 전


월튼은 1952년에 샌디에이고 카운티의 라 메사 시에서 윌리엄 씨어도르 월튼 2세와 글로리아 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만 17세이던 1970년에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미국 대표팀으로 뛰었는데, 당시 그는 팀내 막내였으며 유일한 고등학생이었다. 그만큼 초고교급 선수였다는 말.
그는 이후 UCLA 대학으로 진학해 전설적인 감독 존 우든 밑에서 1972년, 197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고, 1972~74년 3년 연속으로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다. 대단한 것은 당시엔 1학년들은 공식전 출장이 금지되어 있었다는 것. 즉, 월튼은 '''대학시절 내내 최고였던 것이다.'''[3][4]
드디어 공식전에 출장하게 된 월튼은 한을 풀듯이 팀을 2년 연속 30전 전승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특히 2학년 때는 평균 득실점 차가 30점이 넘었다. 월튼은 73년에 NCAA 결승전에서 멤피스 주립대를 상대로 필드골 22개 중 21개를 넣으며 44점을 득점했는데, 이 경이적인 성공률은 아직까지 NCAA기록으로 남아있다. 월튼이 재학 도중에 UCLA는 88연승을 기록했는데, 월튼 개인으로는 고등학교 3학년 시절부터 대학4학년 시즌 중반까지 거의 5년간 '''단 한번도 패배를 겪지 않았다.'''[5]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월튼과 UCLA는 74년 준결승에서 데이빗 톰슨[6]이 이끄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에게 연장접전 끝에 패배하면서 UCLA 왕조가 끝나고 만다.
비록 유종의 미는 거두지 못했지만 NCAA를 완벽하게 지배한 월튼은 졸업 후 NBA드래프트에 신청서를 내게 된다.[7]
월튼이 대학시절 남긴 기록은 세 시즌동안 평균 20.3점 15.7리바운드 필드골 성공률 65.1% 자유투성공률 64.2%였다. 그러나 당시는 어시스트/스틸/블럭이 기록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최강급인 그의 수비력과 센터 수준을 뛰어넘던 패싱 센스 등이 적용안된 부분.

3.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시절


대학 최고의 선수였던 월튼은 너무 당연하게 1974년 전체 1순위로 지명되었고, 프랜차이즈의 구세주가 될 것으로 기대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부상. 대학 시절 매 시즌 거의 전경기를 뛰었던 월튼은 데뷔와 동시에 부상에 '''무지막지하게''' 시달리게 된다.
월튼은 처음 두 시즌동안 그를 고질적으로 괴롭히게 되는 발 뿐 아니라 코, 손목, 다리가 번갈아가며 부러지면서 루키시즌 35경기 출장, 2년차 시즌 51경기 출장에 그치게 된다. 그는 신인시절에 12.8점 12.6리바운드에 4.8 어시스트 2.7블록을 기록했지만 14.2점 8.2리바운드 2.2어시스트 1.3스틸로 그보다 기록은 훨씬 떨어지지만 82경기 전경기 출장한 자말 윌크스에게 신인왕을 내준다.[8]
반전이 찾아온 건 3년차이던 1976-77시즌, 월튼은 건강하게(?) 65경기를 소화하면서 커리어하이인 평균 34.8분을 뛰게 되고, 18.6점 14.4리바운드 3.8어시스트 3.2블록이란 좋은 기록을 내면서 카림 압둘자바에 이은 올-NBA 세컨드 팀[9]이자 올스타에 선정된다. 리바운드왕과 블록왕 동시 석권은 덤. 추가로 역대 최고의 블러커 중 하나이자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5회에 빛나는 카림 압둘 자바를 제치고 디펜시브 퍼스트팀에 선정된다. 이때 최초로 올스타에도 선정되었지만[10] 정작 다쳐서 경기는 못 뛰었다.
원래 포틀랜드는 76시즌에 고작 37승 45패에 그치는 등 그리 강호가 아니었다. 그러나 76-77시즌부터 팀을 맡은 잭 램지 감독의 지도력, 오랜만에 풀시즌을 소화한 월튼의 활약에 힘입은 블레이저스는 49승 33패를 거두며 서부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 시카고 불스와[11], 덴버 너겟츠를 꺾고 컨퍼런스 결승에서 카림 압둘자바가 이끄는 서부 1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맞붙게 된다. 이때 월튼은 대학선배이자 당시 MVP이던 카림 압둘자바와 대등하게 매치업을 하면서 레이커스를 4전 전승으로 스윕해버리고 팀의 사상 첫 결승 진출을 이끌게 된다.[12]
결승 상대는 동부 1위였던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당시 식서스는 ABA에서 NBA로 넘어가면서 재정난에 시달리던 뉴욕 네츠[13]로부터 거금 6백만달러를 들여 ABA최고의 슈퍼스타였던 줄리어스 어빙을 사온 상태였다. 게다가 이 팀에는 득점기계이자 슈퍼스타였던 조지 맥기니스, 올스타 슈팅 가드였던 덕 콜린스[14] "초콜릿 썬더"란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폭발적인 운동능력과 화려한 덩크 실력을 자랑했던 대럴 도킨스까지 화려한 플레이어들이 즐비한 스타군단이었다.[15] 반면 포틀랜드에는 월튼 외에는 강력한 수비력의 파워 포워드 모리스 루카스[16]가 버티고 있었지만, 스타 파워보다는 조직력과 허슬플레이로 승부하는 팀이었다.
판이하게 다른 스타일의 두 팀이 붙은 1차전에서 월튼은 28점 20리바운드를 기록하지만 어빙이 33점, 덕 콜린스가 30점을 기록한 식서스에게 107대 101로 석패하고 만다. 이어진 2차전에서 27점을 기록한 콜린스의 활약에 밀려 107대 89로 패배, 시리즈는 원사이드하게 흘러가는 듯 했다. 그러나 2차전 막판에 필라델피아의 데릴 도킨스와 포틀랜드의 밥 그로스가 시비가 붙었다가 포틀랜드의 터프가이 모리스 루카스가 도킨스에게 달려들어 루카스와 도킨스간의 싸움이 붙는다.[17] 아무튼 둘은 이 싸움 이후 2,500달러 벌금을 각각 물고 퇴장당했지만, 이 싸움으로 인해 포틀랜드 선수들은 "허무하게 탈락해서 망신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되며 이 사건은 시리즈의 분수령이 된다.
포틀랜드에서 열린 3차전부터 블레이저스 선수들은 달라졌다. 이들은 4쿼터에만 무려 42점을 기록하는 폭발적인 공격력으로 129대 107로 압승을 거뒀다. 당시 승부처였던 4쿼터에서 월튼은 아직도 회자되는 멋진 플레이를 해내는데, 밥 그로스의 앨리웁 패스를 받아서 덩크를 성공시킨 직후 동료 데이브 트워직이 스틸을 해서 다시 앨리웁 패스를 해준걸 받아서 2번 연속으로 덩크를 성공시킨 것.[18] 이어진 4차전에서도 포틀랜드는 130대 98로 식서스를 완전히 발라버리는데, 이는 역대 파이널 4차전 중 최대 득점차. 홈으로 돌아온 필라델피아는 5차전에서 반전을 노린다. 전반에만 파울 22개를 할 정도로 피지컬한 경기를 펼치고 어빙은 37점을 기록하며 분전했지만 결국 110대104 포틀랜드의 승리. 월튼은 5차전에서 수비 리바운드만 20개, 총 24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막강한 존재감을 뽐낸다.
시리즈 전적 3대2로 포틀랜드가 앞선 상황에서 벌어진 6차전, 식서스의 슈퍼스타 어빙이 40점을 기록하며 분전했지만 월튼은 20점 23리바운드 7어시스트 8블록[19]을 기록하는 괴력을 발휘하며 접전끝에 포틀랜드가 109대 107로 승리. 2패 후 4연승으로 우승을 거머쥔다.
파이널 MVP는 당연히 경기당 18.5점 '''19리바운드''' 5.3어시스트 3.7블록 1스틸 필드골 성공률 54.5%를 기록한 월튼의 몫이었다. 그러나 비록 월튼의 활약이 압도적이었지만 팀내 최다인 19.7점을 기록한 모리스 루카스, 17.3점을 기록한 밥 그로스, 16점을 넣은 라이오넬 홀린스 등 포틀랜드의 선수들은 득점 면에서 고르게 활약했고[20], 램지 감독이 구축한 아름답기까지 한 패스 위주 농구, 월튼이 중심이 된 강력한 수비로 "팀플레이의 포틀랜드"란 아이덴티티를 제대로 구축한다.
물론 이 중 으뜸은 단연 월튼으로 식서스의 공격수들이 골밑으로 파고들때마다 족족 슛을 찍어버리고, 리바운드를 그야말로 쓸어담으며 골밑을 단단히 지켰다.
무엇보다 그는 강력한 리더쉽으로 포틀랜드를 이끌었다. 월튼은 경기 이후 자신의 유니폼을 팬들에게 던져주었는데, 루카스는 이를 두고 "제가 그 셔츠 잡았으면 아마 먹어버렸을 겁니다. 빌은 제 영웅입니다"라고 말했고, 라이벌 어빙은 월튼이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라고 칭찬했다.
잭 램지는 당시 포틀랜드 라커룸에서 "제가 코치한 어떤 선수들보다도, 어떤 경쟁자보다도, 어떤 인물도 빌 월튼이 더 뛰어납니다.(I've never coached a better player. I've never coached a better competitor. And I've never coached a better person than Bill Walton.)라고 그를 극찬했다.[21]
최고의 시즌을 보낸 포틀랜드는 그 다음 시즌 첫 60경기 중 50경기를 승리로 이끌 정도로 승승장구[22] 하지만 월튼이 발이 부러지는 부상[23]을 당하며 잔여 경기에서 8승 14패에 그치고 만다. 이 때 월튼은 비록 58경기 출장에 그쳤지만 너무나도 뛰어난 실력과 존재감, 그리고 팀성적으로 인해 '''카림 압둘 자바를 제치고''' 생애 최초로 MVP 및 올-NBA 퍼스트팀(역시 처음)에 선정된다.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명인 카림을 전성기 때 제치고 명실상부 그 해 최고의 센터로 인정받은 셈. 또한 전 시즌에 다쳐서 못 나간 올스타전에서 드디어 뛰는 쾌거를 거둔다. 이 해에 거둔 성적은 18.9점 13.2리바운드 5어시스트 2.5블럭 1스틸 필드골 성공률 52.2% 자유투성공률 72%로 리바운드와 블럭은 좀 떨어졌지만 득점과 어시스트에서 커리어하이를 기록한다.
부상으로 정규시즌 막판 4분의 1 정도를 날린 월튼은 시애틀 슈퍼소닉스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 복귀한다.[24] 그러나 시리즈 2차전에서 월튼은 다시 부상을 당하고, 팀의 기둥을 잃은 포틀랜드는 허망하게 소닉스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리고 당시 만 25세였던 월튼의 전성기는 4년차였던 77-78시즌을 기점으로 끝난다.''' 비유가 아니고 진짜로.
월튼은 오프 시즌 중에 포틀랜드의 팀 의료진이 실력이 없고 자신을 포함한 다른 부상선수들을 제대로 케어해주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트레이드를 요구한다.[25] 그러나 블레이저스 프런트는 이 요청을 묵살했고, 월튼은 항의하는 의미에서 1978-79시즌을 통째로 출장거부한다. 이후 자유계약 선수 신분을 얻은 월튼은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의 전신인 샌디에이고 클리퍼스와 계약한다.

4. 샌디에이고/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시절, 그리고 트레이드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월튼의 농구 커리어는 행복하지 못했다. 그는 첫 시즌은 1979-80시즌에 고작 14경기만 뛰고 또 다쳤고, 그 다음은 '''2년 연속으로 시즌아웃을 당했다.''' 83시즌엔 33경기, 그 다음엔 55경기, LA로 연고를 옮긴 85시즌엔 67경기를 뛰었지만 이미 평균 출장시간은 24.6분까지 떨어졌고 37경기밖에 주전으로 못 나온 상황. 그러면서 그의 생산성은 점점 하락하기 시작했다. 한때 20점에 가까웠던 득점력은 14점, 12점, 10점으로 점점 떨어져갔으며 리바운드 역시 포틀랜드 이후로 다시는 두 자리수를 기록하지 못했다.
물론 그의 실력은 건재했다. 그는 20분대를 출장하면서도 9개 정도의 리바운드를 기록했고 36분으로 환산한 기록은 비록 전성기엔 못 미치지만 더블더블은 훌쩍 넘는 수치였다. 게다가 그의 블럭슛능력은 1차스탯 그대로 보더라도 83시즌에 3.6개[26]를 기록하고 출장시간이 24분대에 불과했던 80, 85시즌에도 무려 2.7개, 2.1개를 기록해 여전히 사기적인 수비수라는 걸 증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뛰지 못하면 말짱 꽝...만신창이가 된 월튼에 클리퍼스는 점점 지쳐갔고 월튼 역시 만년 하위권이던 클리퍼스에서 뛰는 것에 진저리를 냈다.[27] 결국 85시즌이 끝나고 월튼은 당시 리그를 양분하고 있던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보스턴 셀틱스에 입단 의사를 타진했다. 당시 레이커스의 GM 제리 웨스트는 의사의 의견을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지만, 보스턴은 래리 버드를 포함한 선수들이 월튼이 오겠다는 소식을 환영하자 바로 영입하기로 했다. 보스턴은 당시 팀의 주전 포워드였으나 식스맨 케빈 멕헤일에게 완전히 밀려났던 세드릭 맥스웰[28]과 1라운드 지명권을 주고 월튼을 영입했고 월튼은 센터 로버트 패리시와 파워 포워드 케빈 맥헤일의 뒤를 받쳐주는 풀타임 후보생활을 처음으로 하게 된다.

5. 보스턴 셀틱스 시절


포틀랜드 시절 NBA 최고의 조직력 농구를 이끌었고, 역대 최강의 빅맨 패서 중 하나였던 월튼에게 구성원들이 득점욕심을 전혀 내지 않고 최강의 팀워크를 자랑했던 셀틱스는 최적의 조합이었다. 게다가 셀틱스의 프런트코트는 각각 멤버가 명예의 전당급이라 역대 최강으로 불리는 버드-맥헤일-패리쉬 라인업이었고 월튼은 주축으로 활약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전혀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생애 가장 많은 80경기에 출장하며 평균 19.3분 동안 7.6점 6.8리바운드 2.1어시스트 1.3블록 필드골 성공률 56.2%로 알토란같은 활약을 하며 "올해의 식스맨 상"을 수상한다. 이로서 그는 파이널 MVP, 정규시즌 MVP, 올해의 식스맨 상을 모두 수상한 NBA 역사상 유일한 선수가 된다.
어쨌건 86셀틱스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역대 최고의 팀 중 하나로 67승을 거두며 플레이오프에 진출, 하킴 올라주원과 랠프 샘슨이라는 젊은 센터 듀오가 이끌던 휴스턴 로키츠와 파이널에서 붙게된다. 경험, 실력, 뎁쓰 등 모든 것에서 앞서던 셀틱스를 상대로 의외로 2패를 안기며 선전하던 로케츠였지만 결국 시리즈 평균 트리플 더블에 가까운(24점 9.7리바운드 9.5어시스트) 기록을 남긴 버드, 후보생활 탈출한 한이라도 푸려는지 팀내 최고인 평균 25.8점을 기록한 맥헤일 등의 활약에 6차전만에 무너지고 만다. 월튼은 스타급은 아니었지만 8점 6.7리바운드 1.7어시스트 0.7블럭을 기록하며 쏠쏠히 활약, 우승에 공헌한다.
그러나 이미 월튼의 몸은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시점까지 이른 상태였고 그는 1987시즌에 또다시 부상에 시달리며[29] 고작 10경기에만 출전하게 된다. 이때 그가 기록한 필드골성공률은 '''38.5%''', 통산 52.1%일 정도로 확률높은 공격을 하던 그에겐 어색한 수치였고 플레이오프에서도 평균 8.5분밖에 못 뛰며 2.4점 2.6리바운드란 초라한 수치를 기록하며 사실상 그의 선수생활은 끝나고 만다.
이듬해 전체를 부상자 명단에서 보낸 월튼은 포기하지 않고 1990시즌 도중에 다시 복귀를 시도하지만, 부상으로 좌절되고 결국 은퇴를 선언한다.

6. 개인사


은퇴 후 그는 TV해설자로 변신하게 된다. 사실 선수 시절의 월튼은 70년대에 20대를 보낸 미국인답게 밴대나를 머리에 하고 치렁치렁한 장발과 수염을 기르고 괴짜스러운 행동을 하는 '''히피'''였다.[30] 그러나 해설자로서 그는 점잖은 행동과 말투로 차분하게 경기 전력을 분석하는 스타일이 된다. 이와 별개로 입담은 상당하다. 그는 2005년 당시 론 아테스트의 관중 폭행 사건이 터진 경기를 중계한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한데, 월튼은 이 추악한 사태를 보며 "정말 부끄러운 일이군요!(Absolute disgrace!)"라고 일갈했다.
아들 루크 월튼이 소속된 레이커스가 2009, 2010년 우승을 차지하자 신나서 "루크가 나보다 훨씬 뛰어난 선수다"라고 극찬을 했는데, 당연하지만 아무리 팔불출이라도 지나친 무리수라는게 중론. 실제 루크 월튼은 커리어 평균 4.7득점 2.8리바운드 2.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평범한 후보 선수로 선수 시절을 보냈다. 오히려 은퇴 후 젊은 나이에 골든스테이트 어시스턴트 코치와 레이커스 감독을 거쳐 새크라멘토 감독으로 선임되며, 지도자로는 각광받는 중.
선수생활에 워낙 부상을 많이 당하고 재활을 많이 했는데, 당시 그를 담당한 의사는 진통제를 무지막지하게 많이 투여를 해서 은퇴 후에 고생을 엄청나게 했다.[31] 이 부상으로 인해 노년에 어찌나 고생을 했는지 그는 2010년에 한 인터뷰에서 한동안 자살을 고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채식주의자다. 동물을 죽여서 얻는 식품들을 먹지 않았다고 하는 걸 보아 락토 베지테리언으로 추정된다.#
포틀랜드와 UCLA는 그의 등번호 32번을 영구결번시켰으며, 그는 1993년에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과 오레건 주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동시에 헌액되었다. 물론 UCLA 명예의 전당에도 당당히 헌액되었으며, 1996년에 NBA가 선정한 "역대 가장 위대한 50인"에도 포함되었다.
여담이지만 UCLA 재학 시절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정부 시위에서 당시 대통령 리처드 닉슨과 FBI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가 체포된 적이 있다. 체포된 이후 월튼은 "당신들의 세대는 세계를 망쳐놨습니다. 내 세대는 이걸 고치려고 하는 거예요. 돈은 제게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돈은 행복을 살 수 없어요. 난 행복해지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7. 플레이스타일


'''당대 최강의 수비력과 리바운드 능력, 동급 최강의 패스실력과 준수한 득점력을 겸비한 다재다능한 센터'''
사기급의 운동능력은 없지만 큰 체구[32]에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플레이를 하는 선수. 여기에 전술 이해도가 높고 머리도 좋아 소위 말하는 "센스"가 탁월하다.
득점의 경우 카림 압둘 자바나 윌트 체임벌린처럼 고득점을 하는 선수는 아니다. 하지만 훅슛/중거리슛/포스트업 무브 등이 모두 훌륭해 확률높은 득점을 올려줄 수 있는 선수였다. 득점력 자체도 전성기 때 18.9점까지 넣었는데, 그는 자기 기록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선수였기 때문에 원한다면 충분히 더 높은 득점을 올릴 수 있었다는게 중론.
루크 월튼은 현역시절 "실력은 형편없지만 센스만은 대단하다"란 평을 얻었는데, 이건 전적으로 아버지 빌 월튼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그는 현역시절 어시스트를 평균 5개까지 기록한 적이 있는데, 현재는 포지션 파괴가 이뤄지면서 센터가 가드처럼 플레이하고 2,3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들이 넘쳐나지만 70년대만 해도 빅맨/가드들 사이의 역할이 명확히 분담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는 대단한 수치다. 패스 뿐 아니라 전체적인 팀플레이가 엄청나게 뛰어났다.
리바운드의 경우 그는 50경기 이상을 풀로 뛰었던 세 시즌동안 13.4, 14.4, 13.2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했으며 그 중 한번은 리그 1위였다. 80년대를 풍미한 센터 모제스 말론이 역대 최고의 공격리바운더라면 월튼은 역대 최고수준의 수비리바운더였다. 그는 탄탄한 체구와 기본기를 바탕으로 한 박스아웃의 고수였으며 강력한 수비력으로 슛실패를 유도한 다음 리바운드를 잡는데 능했다. 이러한 리바운드와 패스능력의 조합이 콤비네이션으로 빛난 결과가 그의 아웃렛 패스였는데[33] 전성기 때 포틀랜드는 강력한 팀수비[34] 때문에 상대방이 놓치면 월튼이 수비리바운드를 잡고, 이미 달리기 시작한 외곽의 가드들에게 빨레줄같은 롱패스를 해주면 이들이 속공을 재빠르게 성공시키는 것이 주요 공격패턴 중 하나였다.
수비력의 경우 당대 최고였다. 빌 월튼은 1977년과 78년에 올디펜스 퍼스트팀에 올랐는데, 즉 디펜시브 퍼스트팀 5회에 올랐고 역대 블록 순위 3위인 카림 압둘 자바를[35] '''건강했을 때는 두 번 다 제쳤다는''' 얘기다. "올해의 수비수" 상 자체가 83년에 생겨났는데, 당시에도 있었다면 월튼이 최소 한번은 수상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그의 경쟁자로는 포워드 바비 존스, 놈 반 리어 등이 있었지만 반 리어는 수비수상에서 굉장히 불리한 포인트 가드였고[36] 존스의 덴버의 경우 포틀랜드보다 팀수비력이 확연히 떨어진다는 걸 생각하면 월튼이 수상할 확률이 더 높다. 사실 이런저런 거 따질 것 없이 그냥 월튼은 당대 최고의 수비수였다. 일단 당대 최고 수준의 블러커였던 만큼 골밑을 단단히 잠갔고 팀 수비에 대한 이해도도 대단히 높아서 상대 팀 전체에게 압박감을 주었다.
그는 플레이오프에서도 강력한 모습을 보였는데, 1977년에는 18.2점 15.2리바운드 5.5어시스트 3.4블록 1.1스틸을 기록하며 대부분 항목에서 정규시즌보다 더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아쉽게도 전성기에 그가 플레이오프에서 제대로 뛴건 이게 전부다. 그 전까지는 플옵에서 아예 못 뛰었고 이듬해에는 부상으로 2경기만에 빠른 퇴장을 했고, 86,87시즌에는 완전 말년이었으니...
월튼에 대해 감독 잭 램지는 "빌 러셀은 위대한 샷블러커였습니다. 윌트 체임벌린은 위대한 공격수였죠. 하지만 월튼은 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평을 내렸다. 물론 자기 선수에 대한 편애가 있었겠지만...
종합적으로 보면 월튼은 건강했던 시절만큼은 NBA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인 카림 압둘 자바에게도 뒤지지 않는 어마어마한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긋지긋한 부상으로 인해 출장경기수가 반토막 이하로 떨어지고, 전성기의 엄청난 수치들을 계속 깎아먹으면서 누적치/평균치 모두 실력에 비해 처참한 수준까지 폭락한 불운한 선수.
[1] 그러나 케빈 가넷과 마찬가지로 실제론 신장이 더 크지만 7피트로 표기되는게 싫어서 이렇게 표기되었다는 소문이 유력하게 돌았다. 소문에 따르면 '''최소한 7피트2인치(218cm)로''' 카림 압둘 자바와 같았다고 하며, 실제로 카림과 둘이 나란히 서면 비슷했다. 월튼이 보스턴에서 뛰던 1986년에 셀틱스는 파이널에서 휴스턴 로켓츠와 붙었는데, 당시 213cm로 표기되었던 하킴 올라주원보다 프로필상 1인치 작은 월튼이 훨씬 크자 기자들이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월튼은 짜증스럽게 "바닥이 뒤틀렸나보죠"라고 대답했다고. 훗날 하킴은 자신의 키가 208cm에 가깝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218cm에 가깝던 월튼이 훨씬 컸던 것은 당연한 일.http://www.nytimes.com/1994/06/08/sports/on-pro-basketball-feet-of-dancer-touch-of-surgeon-and-a-shot-too.html[2] 보스턴 셀틱스로 이적할 당시 원래 등번호인 32번은 파워 포워드 케빈 맥헤일이 사용 중이라 5번을 사용했다.[3] 월튼이 포함된 UCLA 1학년 팀은 비공식전에서 20승 무패를 기록했다.[4] 그의 대학 선배인 카림 압둘자바 역시 동일하게 3년연속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심지어 3년 연속 우승까지 차지했으며 두 선수 중 누가 역대 최고의 대학 선수냐는 아직까지도 현지에서 치열한 떡밥이다. 여담이지만 이런 괴물들이 거쳐갔던 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 UCLA는 7년 연속 우승이라는 말도 안되는 기록을 세웠다.[5] 추가 설명이 좀 필요한데 미국 공립은 대부분 4년제이고 월튼은 위에 설명됐다시피 UCLA 1학년때는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고로 공식전만 따지면 고3, 고4, 대2, 대3, 대4까지 해서 5년.[6] 당대 최고의 득점기계 중 하나이자 최고의 덩커 중 하나였다. 마이클 조던의 우상.[7] 월튼은 3학년이던 1973년 당시 NBA의 라이벌 격이던 ABA의 샌디에이고 콘퀴시타도르스에 1라운드 지명되지만 대학에 남는다. NBA보다 규모가 작았던 ABA는 공격적인 선수 영입을 시도했고, 고졸 선수를 최초로 영입하기도 했으며 릭 베리같은 슈퍼스타들을 두고 NBA팀들과 법적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8] 사실 월튼은 워낙 결장이 많아서 올 루키 퍼스트팀은 물론 세컨드 팀에도 못 올랐다.[9] 해당 시즌의 베스트 5에 해당하는 올-NBA 퍼스트 팀에 이은 두번째 베스트 5. 해당 시즌에 퍼스트팀이자 MVP에 오른 카림 압둘자바 다음으로 뛰어난 시즌을 보낸 센터라고 인정받은 것이다.[10] 그 전까진 실력은 충분했지만 부상 때문에 선정되지 못함.[11] 당시만 해도 불스는 동부가 아닌 서부 컨퍼런스 소속.[12] 당시 포틀랜드의 선전은 팬들 사이에서 신드롬에 가까운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는데, 이 팬들을 "Blazermania"라고 흔히 부른다.[13] 현 브루클린 네츠.[14] 마이클 조던 원맨팀 시절에 불스를 감독한 그 콜린스 맞다.[15] 다만 도킨스는 덩크 실력 덕분에 매우 화려하고 유명한 선수였지만 스타급은 아니었다. 여담이지만 이때 라인업을 두고 맥기니스는 "팬들은 우리의 레이업 라인(경기 시작전에 단체로 레이업하며 연습하는 것. 운동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은 여기서 화끈하게 슬램덩크를 팬서비스로 보여준다)을 보러 몰려들곤 했었죠"라고 이들의 인기를 설명했다.[16] 올스타 4회. 굉장히 피지컬하고 터프한 선수였으며 월튼과 매우 친했다. 월튼의 아들 "루크 월튼"의 이름이 루카스에서 따온 것이다. Luke는 Lucas의 애칭이다.[17] 당시 루카스가 복싱을 하듯 자세를 제대로 잡고 달려드는 장면은 꽤 유명하다. 한편 식서스의 콜린스는 도킨스가 날린 펀치에 팀킬당해(...) 네 바늘이나 꿰멨다고...[18] 워낙 유명한 영상이라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지금 기준으로 보면 두 덩크 모두 뻣뻣한 덩크에다 월튼이 살짝만 점프하면 림에 손이 닿을 정도로 키가 커서 덩크 자체는 멋이 없다. 그러나 이때의 연속 득점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포틀랜드 쪽으로 넘어간데다가, 두번 다 덩크를 하고 넘어질 정도로 스타였던 월튼이 몸을 던지는 상징적인 플레이라 당시 경기 중에는 엄청나게 극적인 순간이었다. 게다가 덩크 자체가 희귀하던 70년대라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19] 당시 파이널 신기록이었다. 훗날 패트릭 유잉이 94파이널 5차전에 타이기록을 내며, 드와잇 하워드가 2009년 파이널 4차전에서 9블록으로 새 기록을 세운다.[20] 블레이저스는 두 자리수 득점을 5명, 그 중 네 명이 15점 이상을 넣을 정도로 고르게 활약했다. 한편 식서스는 팀 득점의 절반 가까이가 어빙-콜린스 콤비(각각 30.3점 19.7점)에게 몰려있었다.[21] 어이가 없지만 당시 경기를 중계했던 CBS는 골프 경기 중계가 잡혀 있었기 때문에 위에 언급된 램지 감독의 멘트까지만 보여주고 재빨리 중계를 끊었다. 이 때문에 당시 트로피 전달식 및 라커룸 뒤풀이의 영상은 위에 언급된 램지 감독의 멘트밖에 남아있지 않다. 보통 뒤풀이 영상에서 선수들이 감격하는 모습이 많이 담겨있다는 걸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빌 러셀의 경우 1969년 파이널에서 압도적인 전력의 LA 레이커스를 꺾고 기자가 "첫번째 우승이 달콤했다는 거 알고 있어요, 빌. 이번 우승은 얼마나 더 달콤한가요?"라고 묻자 "글쎄요, 이건..."하고 감정이 복받혀 말을 잇지 못했다. 러셀이 달변가로 유명했다는 걸 생각하면 특히 더 감동적인 장면.[22] 당시 승률은 전체적으로 낮아서 전체 1위 포틀랜드가 58승, 동부 1위 필라델피아가 55승에 그쳤고, NBA 통틀어 50승을 넘긴 팀들이 단 세 팀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60경기에서 50승은 엄청난 페이스[23] 이 부상과 이어지는 발목 부상은 그의 커리어 내내 그를 괴롭힌다.[24] 다행히 당시 각 컨퍼런스 1,2위 팀은 2라운드에 자동진출이어서 회복 기간을 더 벌 수 있었다.[25] 일방적인 주장이긴 하지만 지금까지도 포틀랜드 출신 선수들 중에 유독 부상으로 젊은 나이에 커리어를 마감한 선수들이 많았다는 걸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팬들 사이에선 농담삼아 "부상수맥" 얘기가 나올 정도로...반면 다른 곳에서 부상에 시달리는 선수들 중 피닉스 선즈에 가서 커리어를 연장한 선수들이 있는 걸 보면 분명 팀 의료진들 사이에 수준 차이는 존재한다.[26] 그러나 33경기만 출장해서 NBA에서 요구하는 최소 요구치에 못 미쳐 공식 순위엔 못 오름.[27] 월튼은 위에 언급했다시피 프로 데뷔 전까지 패배란 걸 거의 경험해보지 못한 선수다.[28] 멕헤일은 1984-85시즌을 벤치에서 시작했으나 곧 주전으로 올라와 플레이오프 내내 주전으로서 40분에 가까운 출장시간을 기록하는 등(맥스웰은 10분 좀 넘게 뛰었다) 주전 파워 포워드로 올라와서 버드와 전설의 포워드라인을 이루게 된다. 그는 이후 87년에 올NBA퍼스트팀에 선정되는 등 역대 최고의 파워 포워드 중 하나이자, 올스타도 한번 못 뽑힌 맥스웰과는 비교도 안 되게 훌륭한 선수로 성장한다. 당시 셀틱스는 이미 맥스웰이 쓸모없어진 상황.[29] 여담이지만 이때 셀틱스는 유독 부상이 잦은 팀이었다. 케빈 맥헤일은 77경기를 소화했지만 시즌 중후반에 당한 부상을 '''그냥 참으면서''' 플옵까지 뛴 결과 다시는 이때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그 외에 주축 선수들도 상당히 부상을 안고 뛰었다. 셀틱스 선수들은 유독 이런 부상투혼이 잦았는데, 이는 "Celtic Pride"라고 불리는 이들의 전통과 팀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분위기 덕분이었다.[30] 다만 노장시절엔 머리와 수염을 짧게 깎고 비교적 점잖게 변한다.[31] 월튼은 "진통제를 처방한 의사만큼이나 이를 받아들인 나도 잘못이 있다"라고 여러번 말한 바 있다.[32] 공식적으로 211cm이지만 이걸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216~218cm 정도는 될거라는게 중론. 게다가 팔도 엄청나게 길다.[33] outlet pass 빅맨이 리바운드를 잡은 뒤 밖으로 빼주는 걸 의미한다.[34] 포틀랜드는 78시즌에 월튼을 포함해 무려 세명이 디펜스 퍼스트팀에 오를 정도였다.[35] 3위이긴 하지만 그의 초창기 네 시즌에는 NBA에서 블록 자체를 집계 안 했기 때문에 실제론 순위가 더 높을 수도 있다.[36] NBA역사상 포인트 가드가 상을 탄 적은 96년의 게리 페이튼뿐이다. 아무래도 1선 수비를 담당하는 가드들보다는 본인 매치업 외에 팀수비 전체의 축 역할을 하는 빅맨들이 유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