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제스 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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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NBA의 전 농구선수.
2. 상세
원래 ABA 출신으로 센터 치고는 단신이었으나 70~80년대 NBA에서 최고의 센터로 활약했으며 올타임 센터 랭킹에서 샤킬 오닐, 하킴 올라주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괴수였다. 말론이 활약했던 시기가 NBA의 인기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지명도는 저 둘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고졸 출신 슈퍼스타의 원조격이기도 하다.
1955년 3월 23일, 버지니아 주의 작은 도시인 피터스버그의 빈민가정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모제스는 어렸을 때부터 밤새도록 혼자 농구 연습을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고 피터스 고교 재학 시절 팀을 50연승으로 이끄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몇 년 앞서 UCLA로 진학한 빌 월튼의 뒤를 잇는 전국구 고교 스타가 되었다.
2.1. ABA 시절
모제스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1974년에는 미국 프로 농구 리그가 NBA와 ABA로 양분되었다. 1969년 미국 아마추어 농구계 최대의 화두는 UCLA 출신의 슈퍼 루키 카림 압둘 자바가 어느 팀으로 가느냐를 놓고 벌이는 치열한 경쟁이었다. 이때는 한 리그가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지 못했기에 NBA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인 25만 달러를 1년차 연봉으로 제시하며 자바를 유혹했고, ABA는 한 술 더 떠서 아예 백지 수표를 던졌을 정도. 때문에 카림은 드래프트 픽에 상관없이 어느 팀이든 선택할 수 있었으며, ABA는 일단 입단 후 카림의 연봉은 ABA의 모든 팀이 같이 부담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까지 내걸었지만 카림은 결국 NBA 밀워키 벅스를 택했다.
자바를 뺏긴 것에 자극받은 ABA는 아예 유망주들을 고교 시절부터 입도선매해 버리기로 결심했고, 그 첫 번째 주자로 빨리 프로가 되어 돈을 벌고 싶었던 모제스 말론이 이를 받아들여, 1974년 드래프트 3라운드에서 유타 스타스에게 고교 선수로는 사상 최초로 지명되었고, 유타는 그의 몸값으로 5년 간 무려 300만 달러의 거액을 제시해 입단했다. 당시 말론이 받던 평균 60만 달러는 카림의 루키 시즌 연봉보다도 한참이나 높을 정도로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는데, 말론과 팀은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검증되지 않은 고졸 루키에게 큰돈을 썼다는 맹렬한 비판을 받았으며, 말론은 ABA따위는 금방 제패할 수 있다는 기고만장한 인터뷰로 팬들과 전문가를 자극했다.
그런 논란거리를 남긴 뒤 말론이 등장 대망의 첫 시즌, 말론은 3라운더임에도 평균 18.8득점과 14.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자신이 리얼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말론에게 거액을 지불함에도 재정 상태가 악화된 유타는 이듬해 파산했고, 말론은 팀의 에이스인 론 분과 함께 ABA의 세인트루이스 스피릿으로 팔려가야 했고, 이듬해에는 ABA 리그 자체가 파산하면서, 말론은 ABA팀 선수들을 NBA로 받아들이는 파산 드래프트를 통해 NBA에 입성하게 되었다.
사실 ABA가 당시 NBA에 뒤지지 않는 슈퍼스타들도 있고 (물론 인원수는 훨씬 밀린다) 인기가 꽤 많았음에도 선수수급에 애를 먹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일반적으로 선수들은 몸값이 실력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어 일단 몸값을 띄워야 하는 경우 등 특이한 경우가 아니면 장기계약을 선호한다. 몸이 재산인 선수들 입장에선 부상 등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므로... 근데 신생리그의 경우 아직 수익구조가 확고히 자리집지 못해 팀들이 재정난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아 팀들이 파산하고, 이 경우 새로 인수할 사람을 찾지 못해 공중분해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NBA도 60년대에 8개 팀 체제로 안정화되기 전까지 수많은 팀들이 생겨났다 사라졌다. 공중분해되면 그 계약을 살 팀이 나타나지 않으면 낙동강 오리알이 되기 마련. 물론 말론이나 카림같은 대형 유망주들은 뛸 팀이 못 찾는 경우는 없어도, 팀이 사라지면 기껏 맞춰둔 전술이나 팀워크도 물거품이 되고 일부 가난한 팀들은 거액계약을 해놓고 급여 지급이 밀리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상당수 스타들은 ABA를 기피하곤 했다. 물론 그래도 급여나 실력 수준이 어느 정도 비슷했기 때문에 릭 베리같은 슈퍼스타들은 자기 필요에 따라 ABA와 NBA를 오가며 밀당을 하기도 했다. 다만 신생리그가 이미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NBA와 경쟁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고 결국 10년을 못 채우고 흡수합병되고 만다. 이 과정에서 NBA는 말론, 줄리어스 어빙, 조지 거빈, 데이빗 톰슨 등 ABA 스타들을 얻게 된다.]
2.2. NBA 시절
2.2.1. 휴스턴 로키츠
의외로 말론의 NBA 입성은 순탄치 않았으며 데뷔하기도 전에 여러번 유니폼을 갈아치워야 했다.
1975~76시즌을 마치고 파산 드래프트의 전체 5순위[2] 로 말론을 지명한 팀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였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센터이던 빌 월튼을 보유하고 있던 포틀랜드는 굳이 말론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말론은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의 전신인 버펄로 브레이브스의 1978년 1라운드 지명권과 트레이드되어 브레이브스에 입단하나, 브레이브스는 상태가 너무나 막장이었기 때문에(...) 2게임만에 말론은 다시 휴스턴 로키츠로 팔려간다. 자세한 내용은 LA 클리퍼스 문서 참조.[3]
우여곡절 끝에 말론은 휴스턴에서 본격적인 NBA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휴스턴은 팀을 이끌던 '미스터 디펜스' 포워드 루디 톰자노비치(前 휴스턴 로키츠,LA 레이커스 감독)와 원조 마이티마우스 캘빈 머피를 비롯하여 등이 뛰던 리그의 중위권 팀이었다. 당시 주전 센터이던 케빈 커넛과 함께 골밑을 책임지게 된 말론은, 시즌 평균 13.4리바운드를 기록하며 금세 휴스턴 골밑의 수호신으로 자리잡았다.
말론은 1978~79 시즌 평균 24.8득점 17.6리바운드로 생애 첫 MVP를 차지했으며, 1980~81시즌에는 팀을 파이널로 이끌었으나 아쉽게 래리 버드의 보스턴 셀틱스에 패한다. 1981~82 시즌에는 평균 31.1득점, 14.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래리 버드를 제치고 두 번째 MVP를 수상했다. NBA 첫 해에 리그 3위를 기록했던 그의 리바운드 순위는 이듬해 2위, 그 다음 해에는 다시 1위로 올라갔다.
2.2.2.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휴스턴 로키츠에서 6시즌을 뛴 말론은 제한적 자유계약선수가 되는데, 샐러리캡 제도하에서 200만달러에 육박하는 연봉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휴스턴은 말론을 트레이드 할 수 밖에 없었다. 말론을 영입한 팀은 전년도 파이널에서 카림 압둘 자바의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패배한 줄리어스 어빙이 이끌던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였다. 원래도 프로 입성때부터 카림 압둘 자바에 라이벌 의식을 강하게 가졌던 말론은 '보스턴과 레이커스? 우리가 최고다'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말론의 장담대로, 마지막 퍼즐을 찾은 필라델피아는 ABA를 대표할 콤비이자 MVP인 줄리어스 어빙,모제스 말론이 인사이드에 자리잡고, 명예의 전당 포인트가드 모리스 칙스가 팀을 조율하고, 슈팅가드 앤드류 토니와 NBA 최초의 식스맨 어워드 수상자인 바비 존스, 파워포워드 마크 아이바로니,클린트 리차드슨과 클레몽 존스등의 실력있는 식스맨까지 갖추면서 동부 최강팀인 보스턴 셀틱스와 자웅을 겨룰만 한 팀이 되었다. 말론은 식서스 입성과 함께 시즌 MVP에 선정됐고, 각기 다른 팀에서 2년 연속 MVP를 수상한 유일한 선수가 되었으며, 65승 17패의 성적으로 동부 컨퍼런스 1위를 차지하고 파이널에서 LA 레이커스를 꺾고 커리어 첫 파이널 우승 트로피를 들게 되었다.
2.2.3. 워싱턴 불리츠 이후
식서스에서 4년을 뛰며 1번의 우승을 거둔 말론이지만, 30대 중반이 된 어빙의 노쇠화를 시작으로 점차 하락세에 접어든 식서스는 팀 리빌딩을 위해 말론을 워싱턴 불리츠에 트레이드 했다. 워싱턴에서 말론은 리그 최장신 센터 마누트 볼과 같이 뛰면서 20-10을 기록하는 빅맨으로 꾸준히 활동했다.
1988~89 시즌, 자유계약선수가 된 33세의 말론은 애틀랜타 호크스에 입단하여 휴먼 하이라이트 필름 도미니크 윌킨스와 한 팀이 되었지만, 이때 리그는 패트릭 유잉[4] ,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같은 신예 센터들이 치고 올라오면서 말론의 실력은 이제 완연한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결국 계약 만료 시즌인 1990~91 시즌에는 존 콘캑에 밀려 식스맨으로 강등되었는데, 정작 콘캑은 1984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는 했지만 선발로 뛰면서도 말론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성적을 기록했기 때문에 말론은 팀에 애정이 사라졌고 자유계약으로 풀린 말론은 미련없이 이적을 결심했다.
그리고 말론은 밀워키 벅스에 이적해서 91~92시즌을 뛰지만 92시즌 이후에는 주전 센터로써 경쟁력을 잃고 친정팀 식서스에서 잠깐 뛰기도 했는데, 그가 복귀하게 된 이유는 당시 신인이던 숀 브래들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94~95시즌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잠깐 뛴 뒤 시즌 초반이던 1994년 12월 27일에 39세의 나이에 21년의 농구 커리어를 마감한다.
NBA 역사상 가장 특이한 방식 중 하나로 커리어 마지막 득점을 장식한 선수인데, 그는 생애 마지막 경기이던 샬럿 호네츠 전에서 종료 직전에 '''80피트(24.4미터) 거리에서 던진 버져비터를 적중시키면서 마지막 득점을 했다!'''
중거리슈팅력이 있긴 했지만 골대 근처에서 대부분 득점을 하던 정통센터였던 말론은 당연히 삼점슛을 거의 쏘지도, 넣지도 못하는 선수였는데 어차피 경기 끝나는 마당에 그냥 던져보는 초장거리 슛이 림에 빨려들어가면서 생애 '''8번째''' 삼점슛을 성공시켰다. 당시 강력한 우승후보이던 스퍼스는 홈에서 제법 강한 팀인 샬럿 호네츠를 119대 108로 꺾은 뒤였는데, 기분 좋게 승리를 만끽하던 샌안토니오 관중들은 커리어를 마무리하는 노장 레전드의 깜짝 활약(?)에 기립박수로 답했다. 당시 말론은 7분을 뛰며 6점 1리바운드 1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유일한 야투 성공이 바로 이 3점슛이었다.
3. 플레이 스타일
첫 파이널 진출해인 1981년 보스턴 셀틱스와의 경기 총집판.
고교생 유망주로 유명인이 된 말론이 럿거스 대학교의 서머 캠프에 초청받아 대학 선수들과 함께 연습을 하게 될때, 다른 선수들이 점심 먹으러 간 뒤에도 말론은 혼자 체육관에 남아 볼을 백보드에 여러 각도로 튀겨가며 점프를 계속했고, 가끔 연습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럿거스 대학의 코치 딕 비테일은 모제스에게 왜 공격리바운드 연습만 하고 있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모제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코치를 바라보며 "코치님, 일단 공을 잡아야 슛을 하잖아요."라는 말을 했다.
말론의 '''공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일화로 말론은 골밑에서 전투적으로 플레이하고 공격리바운드를 잡기 위해 거세게 달려드는 투쟁심과 공격리바운드를 따내기 위한 공을 쫓는 감각과 점프 타이밍, 박스아웃 등의 기본기에 충실한 플레이를 보여주었으며 어느 정도 중거리 슛도 갖춘 골밑의 지배자였다. 또한 이런 감각을 살려서 센터로서 큰 신장은 아니지만 블록슛등 제공권 장악도 탁월했다.
단점이라면 덩치에 비해 작은 손이었다. 오래 전 선수고 현재 고인이라 정확한 수치는 알려져있지 않은데 널리 퍼져있는 말로는 "175cm인 사람 손과 비슷하다"고 한다.[5] 손 크기도 문제지만 더욱 치명적인 것이 (손바닥 기준) 손 너비가 좁은데다가 손가락이 좁고 손바닥이 넓었다. [6] 이런 손 구조는 동양인들에게 주로 찾아볼 수 있는데, 실제로 흑인들은 180대 사람들 중에서도 농구공을 한 손으로 잡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동양인은 190대인데도 한 손으로 잘 못 잡는 경우도 있다. 서장훈은 207cm 거구인데도 예능에서 한 손으로 공을 못 잡는다고 밝힌 바 있다. [7] 이게 빅맨으로선 좀 치명적인데, 이 때문에 공을 자주 흘려 빅맨치고 좀 실책이 많았으며[8] 의외로 이지레이업을 놓치는 경우가 좀 있었다. 말론의 경기를 보면 자기가 놓친 슛을 몇번이나 공격리바운드해서 넣는 경우가 있는데, 그의 엄청난 리바운드 능력과 볼에 대한 투지도 보여주지만 사실 살짝 아쉬운 골밑 마무리 능력도 보여준다.[9]
힘도 샤크급 이라 불도저 같은 포스트업으로 휴스턴 시절에는 평균31득점을 기록했다
4. 은퇴 후
은퇴 후 코치활동은 많이 하지 않았으며, 식서스가 한참 리빌딩한다고 막장의 길로 빠졌던 2015년 때 식서스에 쓴소리를 하며 후배들을 돕겠다고 나섰던 적이 있었다. 그 후 2015년 9월 13일 호텔 방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0세.
찰스 바클리가 자신의 선수 시절 은인이자 스승으로 삼는 두 인물 중 한 명.[10] 필라델피아 시절, 패기는 넘치지만 고민도 많았던 신인이었던 바클리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바클리는 휴스턴 레이크우드 교회[11] 에서 열린 모제스 말론의 장례식에도 참가해 그를 추억했다.[12]
다음 스포츠에서 연재되고 있는 배준걸의 NBA 카툰에 의하면, 아프리카에서 막 미국으로 왔고, 농구력이 짧았던 신인 시절의 하킴 올라주원을 맡아 농구를 가르쳤다고 한다. 바클리와의 일화도 그렇고, 후에 올라주원이 어떤 평가를 받는 선수인지를 돌이켜보면, 교육자로서도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었던 듯 하다.
사망 후 시간이 흐른 2019년 필라델피아 구단이 말론의 2번을 영구결번하기로 발표했다. 2월 9일 덴버전에서 그의 영구결번식이 치뤄졌고 많은 식서스팬들은 너무 늦게 영구결번식을 했다며 기뻐하면서도 슬퍼했다. 영구결번식 자리에는 그의 영혼의 파트너였던 줄리어스 어빙과 그의 제자 찰스 바클리가 참석했다.
[1] NBA.com에는 260파운드라 기재된 사이트와 230파운드라 기재된 사이트가 둘 다 존재한다. 230파운드는 초창기 몸무게, 260파운드는 말년 몸무게로 추정된다. 그가 70년대에 데뷔해 90년대까지 뛴 선수라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70년대엔 지금보다 전체적으로 선수들이 훨씬 가벼웠으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체격이 상향화되어 (평균 키는 별 차이가 없다) 90년대 선수들은 2000년대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 덩치였다. 어쨌거나 그는 당시 리그에서 가장 떡대가 좋은 빅맨 중 하나였으며 당대 최고의 파워센터였다.[2] ABA 파산 드래프트현황.[3] 결과적으로 보면 월튼의 커리어가 77-78시즌 이후 사실상 끝났기 때문에 포틀랜드가 데려왔다면 좋았을 것이다. 또 하나 우연은 브레이브스가 연고지 이전한 샌디에이고 클리퍼스에 월튼도 나중에 트래이드됐다는 것.[4] 유잉과는 재밌는 인연이 있는데, 패트릭의 프로 커리어 첫 득점이 바로 말론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당시 닉스는 홈인 매디슨 스퀘어가든에서 필라델피아를 상대로 개막전을 치렀는데, 유잉이 동료가 놓친 슛을 큼직한 풋백덩크로, 그것도 당대 최고의 센터인 말론 위로 작렬하며 홈관중들을 열광시켰다. 다만 유잉이 훗날 이에 대해 회고하면서 웃으며 "그 다음에 모제스가 절 발라버렸죠 (Then Mosess kicked my butt)"라고 한 것처럼 말론은 35점 13리바운드 야투율 50%를 기록한 데 비해 유잉은 18점 6리바운드 야투율 38.1%에 그치고 팀도 지면서 신고식을 혹독하게 치렀다.[5] 물론 동양인보다 일반적으로 손발이 큰 흑인 175를 얘기하는 것.[6] 조던같은 선수들은 손 길이보다 너비가(손바닥을 쫙 폈을때 엄지부터 새끼까지 길이) 4cm 가깝게 더 길고, 손가락이 손에 비해 긴 편인데, 공을 잡는데 힘이 들어가는게 손가락 부분이기 때문에 이래야 공을 잘 잡을 수 있다. 라존 론도나 카와이 레너드처럼 덩치에 비해 유달리 왕손인 선수들도 손가락이 엄청나게 길다.[7] 다만 보통 "공을 손으로 못 잡는다"고 하면 자유자재로 못 잡는다는 소리다. 손에 공을 딱 맞추고 힘을 줘서 악력으로 들어올리는 건 웬만한 남자들은 다 된다.[8] 보통 공을 오래 들고 있는 가드들이 턴오버가 많은데, 말론은 한창 때 평균 실책이 네개에 육박했다. 포인트 가드로 쳐도 많은 수준. 말년에 많이 내려와서 커리어 평균 3.1개다. 그의 라이벌이면서 공격가담이 말론보다 높았던 카림의 경우 가장 많을 때가 3.5개, 커리어 2.7개 수준.[9] 실제로 말론은 골밑에서 주로 득점하는 선수치고 야투율이 높지 않다. 그는 커리어 통산 야투율이 49% 정도이며 전성기 때도 4할대 후반~5할대 초반 정도였는데, 카림 압둘자바가 통산 55%에 전성기 때 득점왕급으로 득점하면서도 5할대 후반이었다는 점, 말론과 비슷하게 전투적으로 골밑에서 득점하던 찰스 바클리가 25점/6할대를 기록하기도 했다는 걸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10] 나머지 한 명은 줄리어스 어빙. 사실 강력한 리바운드가 아이덴티티였고 자존심이었던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별명이 Round Mound of Rebound라고 밝혔다) 바클리는 말론으로부터 골밑에서의 투지를 배웠다는 걸 생각하면 플레이스타일상 영향을 더 준 것은 말론이었다. 어빙으로부터는 프로로서의 자세를 배웠다고(어빙은 안티도 거의 없고, 전 NBA의 선수와 팬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정도로 모범적인 선수였다.).[11] 교회가 되기 전에는 '더 서밋'이라고 불린 휴스턴 로켓츠의 홈구장으로 쓰이던 건물이었다.[12] 피자를 너무 좋아해 리즈시절엔 쟤는 뱃 속에 냉장고가 들었나라는 소리를 듣던 바클리가 방에서 몰래 피자를 먹을 때마다 어떻게든 알고 못 먹게 했다고 한다(너무 살이 찌면 NBA에서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