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시험/비판

 


1. 개요
2. 상세
2.1. 대표적인 비판들
2.2. 해설
2.2.1. 과도한 기회비용
2.2.2. '시험공부만 잘하는' 사람일수록 법조인이 되기에 절대적으로 유리
2.2.3. 가성비 부족
2.2.4. 사회적 손실


1. 개요


법학전문대학원의 도입 자체가 사법시험에 대한 비판에서 말미암은 것이기는 하지만, 법학전문대학원 도입론과 무관한 비판도 적지 않았다.

2. 상세


서울 법대 출신 50년 고시 폐인.

2.1. 대표적인 비판들


수험생들이 [사례형 큰 문제 하나 약술형 문제 둘이 출제되는] 이러한 출제 방식에 맞추어서 시험 준비를 하다 보니까, 어려운 사례문제를 잘 푸는 것은 운에 맡기고 기본점수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에서, 득점은 약술 문제에서 하겠다는「작전」을 세우는 경향이 생겼다. 법학 공부는 우선 기본적인 제도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체계적으로 하여야 하는데, 이러한「작전」때문에 수험생들이 이를 소홀히 하고 교과서나 문제집의 구석까지 파고들어 외기에 급급한 것이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한 편으로 학생들은 기본 원리를 강의하는 대학 강의를 소홀히 하고 답안지 쓰는 기술을 가르치는 고시학원으로 몰려가며, 다른 한 편으로는 두꺼운 교과서가 잘 팔리고 그에 따라 교과서 두껍게 쓰기 경쟁이 벌어지고, 쓸데도 없는 외국 이론, 특히 일본 이론까지 마구잡이로 교과서에 퍼다 넣는 현상이 생겼다. 수험생들로서는 불안하여 이처럼 두꺼워진 교과서를 안 볼 수가 없어 부담만 늘어나고, 일본의 특정 이론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이 마치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정하여 통용되는 법률용어인 것처럼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본래 교과서란 학생들이 그 과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 강의 교재이므로 기본적인 것만 이해시키면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인데, 우리 법률교과서들은 그 목적이 무엇인지 불분명해졌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고시촌에는 각 과목마다 온갖 저서를 체계도 없이 종합하여 백과사전적으로 편집한 정체불명의 서적들이 수험생들을 유혹하여 날개돋힌 듯 팔리고 있다'.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는 첫걸음이 사법시험에「좋은 문제」가 출제되는 것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좋은 문제란 각 법분야의 기초적인 지식을 두루 잘 갖추고 있는지, 기본적인 개념과 제도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시험하는 문제이지 날로 두꺼워져 가는 교과서를 구석 구석까지 잘 외고 있는지를 시험하는 문제가 아니다.

대학입시 제도가 우리 중고등학교 교육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법시험 제도가 우리의 법학 교육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현재의 사법시험제도가 특히 대학원 교육을 형해화하여 법학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통탄할 현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호문혁(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1]

일정한 시험요강이 주최측에 의해 발표되면 합격을 원하는 수험생들은 모든 사고의 중심이 어떻게 그 시험을 통과할 것인지에 집중된다. 시험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고 자신을 시험에 적합한 상태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밟게 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수험생들의 사고,생활과 나아가 인격의 형성에 심각한 장애를 형성하게 된다. 합격에 따르는 이권이 크면 클수록,또 경쟁이 치열하면 할수록 수험생들의 정상적인 사고와 생활 리듬은 깨지고 오로지 합격이라는 결과에 집착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길어질수록 자연스레 인격적인 면에서도 결함이 생겨나게 된다. 과도한 집착증, 경쟁 스트레스, 이기심과 공격적 성향, 결과지상주의, 창의력의 마비, 피해의식과 보상심리, 실패에 대한 불안감 등등.#

(전략) 사법시험이 정말로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미래의 유능한 법조인력을 선발해내는가도 의문이다. 시험이란 모름지기 단지 '시험적합성' 만을 지닌 자를 선발할 수 있을 뿐이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오히려 정형적인 시험대비 훈련을 받은 자들이 유리하다. 대학입시에서 고품질(?)의 과외훈련을 받은 부유층 자제들이 일류대학 입학을 독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험준비에 있어서도 경제력의 요소가 더 커지고 있다.

(중략)

시험이란 단지 승복의 기제일 뿐이다. 일정한 게임으로 승자와 패자를 갈라 패자의 입을 다물게 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사회의 한정된 재화와 기회의 배분에 있어 시험제도에 과도히 의존하는 사회일수록 아직 미성숙한 사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후략)#

김동훈(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2]

흔히 범하는 오해 중의 하나[가], 실력과 성적이 비례한다는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그렇지 않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성적이 나쁜 경우가 많고, 또 실력은 별로 없지만 시험만 치면 항상 고득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시험 문제가 수험생들의 실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험문제 출제와 채점의 편의성을 위해서 시험을 출제하는데 실력이 없어도 얼마든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 지금 출제되는 문제는 오로지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이다. 누가 실수를 하고 누가 잡다한 것을 세세하게 외웠는지를 테스트하는 것이다. 시험을 잘 치기 위해서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라. 시험 잘 치는 공부만 하면 된다.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수험생이 공부를 하는 것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지 실력을 쌓거나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공부를 할 때는 항상 시험을 생각하면서, 시험에 필요한 것은 공부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필요 없다. 실력이 아니라 점수 잘나오는 공부가 필요하며, 얍삽하게 공부하여야 한다. 한정된 시간에 효율적인 시험공부를 위해서는 중요한 내용의 단순암기 방법이 상책이며 깊이 있는 공부는 사치일 뿐이다.

최규호(변호사), 《불합격을 피하는 방법》 저자가 위 주장을 한 맥락은 사법시험을 비판하느라고 한 이야기가 전혀 아니지만, 내용만 놓고 보면 저자의 의도와 달리 상당히 심한 비판에 속한다(...).[3]

의사, 건축사, 회계사, 한의사 등의 전문직 인력 선발 과정과 비교하면, 한국의 법률가 선발은 ‘교육과 훈련’을 전혀 요구하지 않으며 오로지 ‘시험 합격’만을 요구하는 특이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의사고시 등의 경우에도 응시자격에 대한 규율을 철폐하여 누구든지 지필고사만 합격하면 의사가 되도록 보장한다면 의사고시 등에도 엄청난 응시자가 몰려들 것이고, 고시촌은 의사고시 준비생으로 가득찰 것이며, 의과대학의 교육은 순식간에 엉망으로 될 것이다.

김기창(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법률교육의 국제경쟁력 확보", 서울대학교 법학 제47권 제4호(2006. 12.), 186면

[법학교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판사출신의 민법교수로부터 사법시험 1차 민법문제를 시험삼아 풀어 보았는데 정해진 시간 내에 도저히 풀 수가 없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판례를 외우고 있지 않으면 긴 지문을 읽고 정답을 찾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 교수는 법원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는데 그런 사람도 풀 수 없는 것이 사법시험이라니 보통 문제가 아니다.

구본진(변호사. 전 검사)#

사법부 밖에서 압력이 올 때 법관들이 저항해야 하는데,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 제가 보기엔 법률적 지식과 더불어 지성적인 판단과 용기에서 나온다. 그런데 그게 하루아침에 길러지겠나. 특히 사법부 구성원들의 경우, 머리가 좋은 학생들이 바로 고시 준비 시작하고 그 다음부터는 신분이 급상승한다. 아주 특별한 사람 아니면 이런 덕성을 갖출 기회는 거의 없다.

한홍구(역사학자)#

저는 주위에서 출중한 법학실력에도 불구하고 사법시험에 연달아 낙방하는 여러 동기 선후배들을 보아왔습니다. 그들이 과연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들보다 실력이 떨어지는가? 변호사로서의 역량이 부족한가? 저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봤습니다. 지독히 시험운이 없는 경우도 있고, 또 단 번에 승부를 겨루는 시험이라는 평가방식에 끝내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봤습니다. 다만, 일정한 경향 – 시험 잘 본 사람이 대체로 실력도 좋다 – 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사법시험 1등한 사람이 5등 한 사람보다 낫다고 하거나, 1000등으로 합격한 사람이 1001등으로 불합격한 사람보다 우수하다고 보기는 어려워도, 1등한 사람이 불합격한 사람들보다 실력이 뛰어날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재밌는 실험을 하나 제안해 보고 싶어요. 과거 사법시험 2차 답안지를 채점했던 채점위원에게 다시 채점해 보라고 해보는 거에요. 과연 얼마나 비슷한 결과가 나올까? 제 추측으로는 유사하게 나오긴 하겠지만, 당락을 뒤엎을 정도의 오차도 꽤 많을 겁니다. 60점 짜리 답안지에 38점(과락)을 다시 부여하진 않겠지만, 58점, 59점을 부여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죠. 그런 미세한 차이가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좌우한다면 과연 이 채점이 공정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해보려는 것이죠.

홍성수(숙명여자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관악을의 어느 후보신림동 고시촌을 청춘들의 꿈과 희망이 넘치는 곳으로 묘사, 계속 사법시험 유지를 주장하던데, 거기 살아본 제 입장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100명 중 99명을[4]

고시낭인 만드는 잔인한 제도입니다.

변희재(!)#

이제는 사법시험이 인생역전을 보장하는 기회가 되기는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여기에 무슨 기회균등이니 사회정의니 하는 잣대를 들이대는 행위는 또 하나의 시대착오가 아닐까?

우태영(조선일보 기자)#

대학 재학 중 사법고시 합격, 사법·행정 양시 패스, 고시 수석 등은 대다수 한국인이 부러워하는 일이었다. 합격자는 고향 네거리나 출신 학교 정문에 이름 석 자 드날리는 영예를 누린다. 그들의 노력과 의지에는 존경을, 능력에 대해서는 부러움을 가질 만하다.

그런데 ‘가문의 영광’이 국가나 사회의 영광이었을까? 최근 진경준, 우병우, 홍만표 등의 드러난 행태를 보면서 ‘시험 귀재’가 ‘사익 추구 귀재’가 되어 반사회적 행태를 저지르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사실을 씁쓸하게 확인한다.

(중략)

이게 개인 탓일까, 제도 탓일까? 나는 제도 탓이라 본다. 고시 제도가 일종의 특권 지위를 보장해 주는 국가 공인 특허권 획득 경쟁이기 때문에 지망자들의 사적 욕망이 공공심을 압도하며, 결국 국가를 사익 추구의 장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단 한 번의 단답형 ‘정답이 있는’ 시험 자체에 있다. 현행 고시나 입시로는 사람의 잠재력, 탐구심, 그리고 공인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덕성을 평가할 수 없다. 엄격히 등수를 매겨서 승자와 패자를 냉혹하게 가르는 시험은 그 게임이 더 치열하거나 반복 횟수가 많을수록 참가자는 더욱 경쟁적 인간이 된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자신이 얻은 자격이 본인 능력으로 얻은 소유물이라 생각한 나머지 권력과 부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공조직을 사익의 수단으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특권 의식, 엘리트 의식을 갖는 그들은 과거에는 총칼을 쥐고 있는 자에게 복종하여 권력과 자리를 얻는 데 능숙했고, 오늘날에는 최고 부자들의 입 노릇을 하면서 부를 챙기는 ‘재주’에 능하다.

요즈음 세상의 지탄을 받는 ‘고위 공직자’들은 바로 고시 제도가 만들어 낸 ‘괴물’이자 어쩌면 이 제도의 희생자일지 모른다. 그 어려운 ‘시험’에서 1등의 성적을 거두었으니, 돈 버는 일에도 1등을 하려 하다가 1등 범죄자가 된 꼴이라고나 할까? 나향욱 교육부 기획관의 ‘국민 99% 개돼지’ 발언도 결국은 “나는 행시 출신이니 너희들과 다른 세계에서 살 자격이 있다”는 고위 공직자들의 평소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김동춘(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고시·입시에 능했던 어떤 사람들”[5]

제가 볼 땐 어렸을 때부터 공부 잘한다고, 시험 잘 치는 사람을 시험 한 번으로 선발하고, 다른 과정 없이 판사나 검사를 시켜서 엄청난 권력을 주니까 생기는 문제인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인격 형성 과정도 없으니, 윗사람한테 충성은 잘하고 권력 행사 잘하고, 폼은 잘 잡는데 큰 틀에서 생각을 못 하는 거죠. 우리 법조인들이 공부 잘한다고 똑똑한 건 아니거든요. 사회, 인문학적으로 공부하고, 책도 읽어야 하는데 그런게 부족한 거죠.

이재동(변호사. 전 대구변회장)#

그런데 우리 사회가 높게 평가해온 사시의 공정성은 ‘형식적’ 측면에서의 공정성에 불과할 뿐, 공정성의 모든 면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형식적 공정성이 실질적 공정성을 위한 하나의 조건임은 분명하지만, 형식적 공정성이 달성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실질적으로 공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략) 사시는 누구나 자유롭게 공부하고 시험장에 입실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형식적 공정성을 극대화하지만, (중략) 생업을 중단하고 수년간 시험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꽤 위험성이 높은 시간과 비용의 투자가 필요하다. 이것을 감당하기 위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시험에 뛰어들기 어렵지만, 사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는 무관심한 제도다.

시험제도 자체가 형식적으로 공정한지도 문제가 된다. ‘시험’이라는 제도가 정말 훌륭한 법률가를 '순서대로' 가릴 수 있는지도 의문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시험'이 '선발'과 동일한 의미로 쓰이고, 선발에 시험 이외의 요소가 끼어드는 것을 공정하지 못하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시험은 선발을 위해서 사용하는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사시는 시험을 유일한 요소로 활용하는 제도다. 물론 시험성적과 실제 실력 사이의 연관성은 있겠지만, 그것이 정확히 비례한다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시험방법이나 채점위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홍성수, "한국 로스쿨 입학제도의 문제점 : 공정성과 다양성을 중심으로", 법학논총(조선대학교), 제23권 제2호(2016. 8.), 86~87면.

권리와 의무, 나아가 헌법적 가치가 빠진 맹목적 법교육과 법조인 양성은 마치 교조주의와도 같다. 법조문을 외우고 판례를 암기하고 학설을 정리하는 것만으로 법조인이 되기에는 우리사회가 너무나 복잡다기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자는 법조인력양성과정에서 법철학, 법제사, 형사정책 등의 교육도 내실있게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성진(법률저널 기자)# 위 시론은 실제로는 사법시험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로스쿨에 대한 비평이지만, 정작 위 지적은 사법시험에 더 잘 들어맞는다.

시험이 절대악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과잉 보상과 능력에 대한 과대 포장, 배제된 사람들을 쓰레기처럼 버리는 신화가 지나치다. 시험 결과로 내가 과도하게 좌절했거나 지나친 오만을 부린 건 아닌지, 시험을 통해 일분일초를 다투며 살게 된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경숙(교육학자. <시험국민의 탄생>의 저자)# 대한민국의 시험 문화 일반에 대한 비평이지만, 내용 자체는 사법시험에 정말 잘 들어맞는다.

‘사시폐인’, ‘고시낭인’ 같은 말이 보여주듯 고시를 준비하다 망가진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다.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위험부담이 큰 길을 택했을까? 단순히 ‘입신출세욕’ 같은 단어로 이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고시광풍의 배경엔 그런 것보다 훨씬 음울한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다. 합격기에는 모종의 공통된 정서와 인식이 드러난다. 바로 억울함(resentment)과 몰사회성이다.

(중략) [합격기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바, 합격자들이 사법시험에 응시한 이유는] “고시는 열등감·패배감으로 가득 찬 내 인생의 딜레마를 해결해 줄 수 있”고 “이 과정의 승패에 내 인생의 승패가 걸려 있”는 까닭이다.

학벌위계 최상위인 서울대 법대 출신의 합격기에서 억울함의 정서는 도드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다른 글처럼 개인 차원에 매몰되어 있을 뿐, 고시제도를 포함한 사회 모순에 대한 사고는 정지되어 있거나 괄호 쳐져 있다.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훌륭한 법조인이 되겠다’는 식의 천편일률적 다짐으로 사회적 인식을 대체하고 있을 뿐이다.

박권일(사회비평가)#

오랜 세월 우리나라 법률가들은 권력·명예·부가 오직 능력에 의해 분배되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의 상징처럼 행세했지만, 그런 세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늘구멍의 시험제도는 우수한 인력을 길들이는 유용한 방편이었다. 판검사나 변호사 업무가 갖는 공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출세는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출세의 개인성'은 고시와 연결된 한국 법조계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김두식, 《법률가들》, 607~8면.


2.2. 해설



2.2.1. 과도한 기회비용


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시켜야 한다. 환언하면, 그것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사람만이 합격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히 합격률만 놓고 보면 사시보다 더 경쟁률이 높고 붙기 어려운 시험도 많다[6]. 하지만 공부량과 소요시간, 이로 인한 기회비용 면에서 사시에 비견할 수 있는 시험은 없다. 따라서 이 시험을 준비하거나 합격한 사람들에게 매우 높은 수준의 보상심리가 간취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제는 그 희생의 대상이 단순히 기회비용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2.2. '시험공부만 잘하는' 사람일수록 법조인이 되기에 절대적으로 유리


훌륭한 법률가가 되기 위해 알아야 할 것 내지 아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비단 '기본3법', '후4법'(사법시험 2차 과목)이나 '민형검'(사법연수원의 주요 과목)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험과목은 아니지만 법률가로서 알아야 하거나 알면 좋은 것을, 알고자 하면 할수록, 알면 알수록 합격에서는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그것이 그렇게 된다.
사법시험만 있고 로스쿨 같은 것은 없는 상황을 전제로 비근한 예를 들어 보자. 두뇌와 노력이 비슷한 두 사람이, 한 사람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김기춘, 우병우 등의 전횡에 분개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런 것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치자. 사법시험 합격에는 후자가 훨씬 유리하다. 아니, 실제로는 '노력' 면에서조차 후자가 훨씬 유리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 잘나가는 사람은 아마도 장차 제2의 김기춘, 제2의 우병우가 될 것이다(...).
불합격자가 다 정의감 따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머리 좋고 '노오력'을 열심히 한다 하더라도 정의감 같은 것은 분명히 사시 합격에 장애물이다.''' 사시 합격기를 보더라도 립서비스로 사회정의를 운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의감이 있었기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라고 하는 인사는 단 한 명도 없다. 설마 싶겠지만, 정말로 없다.
'''정의감 없는 법조인은 짠 맛 잃은 소금 같은 것인데도''' 다른 조건이 같으면 '''정의감이 없을수록 오히려 법조인이 되기에 더 유리하다는 것은 섬뜩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사정이 그런데도 "노오력이 부족하다", "합격을 지상과제로 생각하는 게 뭐가 나쁘냐"라는 말만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자신이 시험공부 외에는 법률가다워지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해 본 적이 없고, 할 줄도 모르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아래 반론에서는 '에이, 설마 수험공부 시작하기 전에 아무 노력도 안 했으려고?'라고 하고 있지만, 설마가 아니다.
실제로, (대개는 서울 법대 출신들인) '모범적인' 합격자들의 합격기를 보면, 서두에 '별 생각 없이 법대 진학해서 탱자탱자 학교 다니다가 고학년 되자 아차 싶어서 정신 차리고 수험공부를 시작했다'라는 이야기가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나온다. 전혀 자랑할 이야기가 아닌데도 이들이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비법대 출신들 역시 시험에 도움이 안 될 법공부를 수험에 뛰어들기 전에 한 적이 없기는, 법대생들보다 못하면 못했지 나을 것이 없다.
그리고 그 반례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은 그것이 일종의 자연 선택임을 의미한다.
또한, 법대 출신의 경우 학점과 사시 합격의 상관관계가 매우 낮다는 것은 법대를 졸업한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는 시험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공부가 마이너스가 되면 되었지 절대로 플러스가 되는 바 없다는 사실의 또 다른 방증이다. 실제로 사시 존치론자들 역시 "사시가 존치되어야 대학 때 말아먹은 학점을 만회할 '찬스'가 주어진다"라고 주장하고들 있는 터이다.
법과대학 재학 중에 법학 교양 서적 한 권 안 읽을 리가 없다고 하는데, 이를 읽게 되는 이유는 대부분 수업에서 이를 읽으라고 시켜서, 다시 말해 법과대학 '교육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사법시험 존치론자들치고 교육을 통한 법조인 양성을 개풀 뜯어 먹는 소리로 치부하지 않는 이가 없다. 이는 단순히 시험 공부만 한다고 그런 것 하나 안 읽을 리가 없다라는 주장은 환상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험에 붙고 나서도 사정은 나을 바 없다. 사법연수원에 갖은 교양수업이 있지만 그걸 성의 있게 듣는 연수생은 아무도 없다.
온갖 난해한 법적 지식을 그렇게 정확히 외워대는 연수생들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법조인인 초대 대법원장 함자가 무엇이냐?"라고 묻는 시험문제(수업시간에 버젓이 알려 주는 사항이다)를 다수가 틀린다는 사실은, 이들이 '점수를 잘 받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의 허구성을 웅변해 준다.
"수험이 끝난 이후에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읽을지 비판측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라는 반론은 정말 화룡점정에 가까운 코미디이다. 저 책을 진짜로 읽어 본 사람이라면, 사법시험 수험이 끝난 후에 그 책을 읽을 확률은 물리적으로 0에 가깝다고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 책은 분량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참고로 유명한 삼권분립론은 읽다 읽다 지칠 쯤 되어서야 나온다(...). 게다가 배경지식이 없으면 매우 읽기 힘든 책인데, '시험공부만 열심히 한' 모범적인 수험생이 그런 사전지식이 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7]
김두식 교수는 저서 '헌법의 풍경'에서 "좋은 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라는 논리를 절묘하게 비웃은 바 있는데('하지만 그 나중은 언제까지고 오지 않는다'), 그 원맥락은 사법시험 체제를 염두에 두고 한 비판이 아니지만, 논리 자체는 사법시험 체제에도 잘 들어맞는다. 왜냐하면, 박준영 변호사의 명언대로 "사람은 살아온 대로 살아간다."[8]
아래 반론에서는 '공부만 잘하는 게 뭐가 문제냐?'라고 강변하고 있으나, 이는 '김기춘, 우병우가 뭐가 문제냐?'라는 강변과 별로 다르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해당 반론이야말로 사법시험 체제의 문제점을 웅변해 준다. 그게 뭐가 문제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하지 않는데 법조인이 되는 데 아무 지장이 없고 심지어 훨씬 유리하기까지 하다. '''시험점수를 잘 받는 것만이 능사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밖의 알아야 할 것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도, 심지어 그것을 자신들이 모르고 있지 않다고 착각한다. 이게 문제가 아니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2.2.3. 가성비 부족


'''그러면 그렇게 다른 것을 희생해서 실력만이라도 최고가 되면 그나마 다행이겠는데, 그조차도 꼭 그렇지만도 않다.'''
소위 법실력에서 긴요한 것은 기본적인 사항을 정확히 아는 것인데(아래 인용문 참조), 기본적인 것을 테스트해서는 시험이 변별력 유지가 안 되기 때문에, 가면 갈수록 시험경향이 정작 기본적인 것에서 이탈하게 된다.

근자에 법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민법을 공부하는 방식이 많이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학생들의 말을 들어보면 교과서를 착실하게 읽어 기초를 차근차근 다져나가지 않고, 처음부터 사법시험 준비용 단권서를 익히고 또 그것을 익히는 것만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책이라는 것을 보면, 그것은 민법의 이런저런 문제를 체계없이 정리하고 언필칭「최신」이라는 판례와 정체 모를 학설들을 늘어놓은 그야말로 雜書에 불과하다. 자신의 머리로 민법의 체계를 종합적으로 구상·조감하면서 밀고간 것이 아니어서, 문제의식이 단발적·즉흥적일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도대체 문제 자체가 어떠한 관련에서 제기되어서 어렵게 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남의 문제제기와 그에 대한 대응의 결론을 요약해 놓은 것이다. (중략) 무엇보다 장래의 법을 떠매고갈 학생들이, 가장 중요한 「법적으로 사고하기」를 수련함에 있어서 항상 선봉을 차지하였고 또 차지하고 있어야 할 민법의 공부에서, 이러한 잡서에 그리고 그것만에 의존하고 있다면 이는 우려할 일이 아닐 수 없다.

- 양창수 대법관, 제41회(1999) 사법시험 채점평 중에서[9]

옛날에 교과서도 얇던 시절에 공부한 중견 법조인들이, 후배 법조인들이 사실 수험기간도 길고 공부도 오래 했는데도 후배들의 실력이 더 좋다고는 전혀 인정해 주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더욱이 실무에서 주어지는 문제는 사법시험 문제와는 차이가 있고(예컨대, 그 어떤 법실무도 '학설의 검토, 판례의 검토, 소결' 따위의 괴이한 짓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변호사시험 문제가 더 실무적이다.
사시 합격자들이 로스쿨 출신들보다 실력이 있다고 큰소리를 치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취직이나 수임에서 사시 합격자이기 때문에 특별히 득을 보는 예가 드문 것은 이 때문이다. 적어도 그들이 자평하는 만큼 실력의 차이가 월등하지는 않다는 것이, 법조시장의 평가인 것이다.
법학전문대학원의 수업연한이 부족하다는 우려의 목소리(로스쿨에 우호적인 사람들조차도 '3년이면 떡을 친다'라고 하는 사람은 드물다)가 많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로 인한 실력 부족의 정도가 사법시험의 평균적으로 긴 수험기간에 비례하느냐 하면, 별로 그렇지 않다. 이는 사법시험-사법연수원 체제가 '실력' 양성 면에서 그만큼 '가성비'가 떨어진다는 증거이다.[10]

2.2.4. 사회적 손실


'가성비'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사법시험 체제에서는, 사람들이 실제 비용의 기댓값을 과소평가하게 되기 때문에,''' 고시 낭인이 필연적으로 대량 발생하고, 이로 인한 사회적 손실을 면할 수 없다.
사법시험의 높은 리스크 때문에, 수험생들은 가능한 경우의 수 중 최상의 경우를 가정하고 수험에 뛰어들게 되는데, 문제는 그러한 기대가 확률적으로는 매우 비이성적이라는 것이다.
흔히 "고시낭인이 문제라면, 합격자 수를 늘리면 그만이다"라고들 하는데, 이미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듯이, 실제로는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합격자 수를 늘리더라도 경쟁률은 별로 떨어지지 않고 도리어 고시낭인 현상만 심화된다.'''
이에 대해서는 '경쟁률 높은 일에 뛰어들면 다 낭인이냐' 반문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이 예로 드는 어떤 경쟁도 사법시험 수험만큼 그 자체가 갖는 의미가 적은 대신 매몰비용이 큰 것은 없다. 가령, 논자들이 흔히 예로 드는 올림픽 같은 것은 참가과 경쟁 자체에도 의의가 있기 때문에 참가하고 경쟁하는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메달 획득 가망이 전무한 선수들이 왜 참가하겠는가). 이에 반해 법조인 자격은 취득하지 않아도 좋으니 참가와 경쟁 자체에 의의를 두고 사시 수험에 뛰어들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정신건강의학과에 가 보아야 할 것이다.[11]
그리고 사람의 심리상 매몰비용이 큰 일에 대해서는 그만큼 더 발을 빼기도 어려운 법이다.
[1] 오늘날에는 호문혁 교수가 로스쿨 옹호의 괴수가 되어 있지만, 호 교수가 1997년에 기고한 위 시론은 사법시험을 개선하면 된다는 낙관적인 전망에서 개진하였던 내용이다. 논지는 민법 배점을 100점에서 150점으로 늘리고 사례문제만 내는 등의 개선을 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해 본 결과는 과연 어떠하였던가?[2] 얼핏 보기에 고시도 못 붙은 법학교수가 아니꼬워서 한 말같지만, 김동훈 교수는 특이하게도 외무고시 합격자이다.[3] 그러나 반론을 제기하자면, 이것은 대한민국의 수험생들이 보는 모든 시험(심지어 가장 많은 응시율을 자랑하는 수능조차도)에 대한 방법론적인 제시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수능을 폐지하자는 이야기는 안한다. 심지어 성적에 따라 (대한민국에서는 어쩌면) 인생을 좌우할 대학을 구분짓는 것에 대해 모두 암묵적인 동의를 한다. 정당하다고는 할 수는 없으나 딱히 다른 기준을 제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4] 이 문서에 나온 공식 합격률만 보아도 알겠지만 합격률은 5%대를 유지하고 있어서, 100명 중 99명이 불합격이라는 소리는 사법시험을 비판하기 위해 부풀려서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5] 사법시험을 거론한 발언은 아니지만, "돈도 능력도 충분하지만 주로 부정과 비리에 연루되어 범법자가 되는 엘리트의 타락은 우연일까요, 필연일까요."라는 발언에 대해 "그런 경우 대부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신들이 지불한 만큼 우리 사회가 대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 같습니다. 건강한 동기를 가지고 성공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부심보다는 특권의식이 강하죠. 결국 성공한 엘리트들의 부도덕한 인성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한 답변은,엘리트의 타락한 인성은 투자로 전락한 상류층 교육 때문 사법시험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6] 대표적으로 5급 공채 재경직렬.[7] 2009년도에 사법연수원에서 '사법연수생이 꼭 읽어야 할 10권의 책'으로 '법의 정신', '목민심서'(역시 분량이 엄청나다) 등을 추천하자, 어느 변호사가 사법연수원 익명게시판에서 "솔까말. 교수님들, 본인들은 저 책들 읽어 본 적도 없으면서 추천하시는 것, 아니 '읽어 본 적이 없으니까' 추천하시는 거이죠?"라고 비웃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8] 지연된 정의, 328면.[9] 다만 이 발언은 말이 수험가 분위기 비판이지 사실상 특정 교재 저격이며, 기존의 교과서들이 쓸데없이 두껍고 교수들의 강의가 상당히 비합리적이며 권위적이었다는 점은 쏙 빼놓은 지적이다. 어렵게 글을 썼지만 따지고 보면 '나 때는 말이야~' 하는 내용이다.[10] 사실 사법연수원도, 특히 4학기는 정말 하는 것 없이 국민 세금을 축내는 기간이기 때문에, '2년이나 되는 연수기간은 너무 길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11] 옛날에는 실무보다 학문에 뜻이 있는 사람의 경우에 순전히 배운 것을 총정리한다는 생각으로 시험을 보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고 하나, 이는 이미 옛날에도 이례적인 일이었고, 더욱 실무경험이 있어야 교수가 되기도 유리한 오늘날에는 더더욱 정신나간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