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1. 소개
2. 성향
2.1. 김일성 관련 발언
3. 저서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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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사학자,교수. 대한민국 근현대사 연구가 주 분야이다.
2019년 2월부터 유튜버 활동을 시작했다. 채널명은 한홍구 TV, 역사 ‘통’.
1959년 7월 16일 서울에서 태어났고, 서울대 국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후, 1999년 미국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이나 훗날 북한 독재 권력 수립의 단초가 되었던 것으로 평가되는 민생단 사건을 다룬 <상처받은 민족주의-1930년대 간도에서의 민생단사건과 김일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에 소설가 김연수가 해당 사건을 다룬 소설 <밤은 노래한다>를 집필하고 단행본을 출간했을 때도 후기 형식으로 민생단 사건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2000년부터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 한씨 집안이 참으로 대단한데 일단 한홍구의 직계 14대조가 인조 비 인렬왕후 한씨의 백부이며 동국지리지를 쓴 실학적 역사학의 기초를 다진 한백겸이다. 그리고...
  • 할아버지 한기악(韓基岳, 1898년 1월 14일 ~ 1941년 6월 20일) - 독립운동가. 동아일보 창립멤버, 조선일보 편집국장.
  • 아버지 한만년(韓萬年, 1925년 10월 29일 ~ 2004년 4월 30일) - 대한민국 출판역사의 출발점이라고 할수 있는 출판사 일조각 대표.
  • 큰아버지 한만춘(韓萬春. 1921년∼1984년) - 연세대 공대 학장.
  • 작은아버지 한만청(1934년~) - 서울대병원장. 본인의 간암 투병 경력을 바탕으로 <암과 싸우지 말고 친구가 되라>라는 저서를 펴내기도 했다.
형제자매들은
  • 한성구 (서울대 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내과학 전공)
  • 한경구 (서울대 졸,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인류학 전공)
  • 한준구 (서울대 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영상의학 전공)
  • 한승미 (서울대 졸,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문화인류학 전공)
  • 사촌 ㅡ 한민구 (서울대 졸, 서울대학교 교수, 전 공대 학장)
거기에 외할아버지는 한국 헌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전 고려대 총장인 유진오 박사이며 외할머니의 아버지, 즉 유진오의 장인은 한국에서 제일 오래되었고 지금까지도 고약으로 유명한 이명래 고약의 창시자 이명래다. 또한 이모부는 박정희 정권기에 외무부 장관을 지냈던 박동진이다. 독립운동가들과도 인연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임시정부 요인이자 김구의 최측근 중 한 명이었던 엄항섭은 외할머니의 사촌동생이다.[1] 구성원들이 하나같이 후덜덜하다... 혼자 성공회대 교수인 건 운동권에서 구른데다 현대사 전공 및 연구를 하면서 높으신 분들한테 찍혀서 그나마 학풍이 자유로운 성공회대에 겨우 임용이 된 것이라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연구성과가 변변치 않아서다. 아버지 한만년의 한홍구에 대한 평 참고 #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민간위원을 역임했고, (사) 평화박물관 건립 추진위원회 상임이사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대한민국사』, 『지금 이 순간의 역사』, 『특강』, 『독설』, 『유신』 등이 있다.
유시민과 대학 동기 친구사이다. 대학시절 서울의 봄 당시 유시민 관련 회고글. #
2020년 8월 권재희와 결혼했다.

2. 성향


민족주의, 반전쟁&평화주의 성향이 있다.
좌익에 가깝다는 평도 있으나, 철저한 우익 민족주의자 백범 김구 선생이나 구한말 조선의 대표적 보수주의자였던 최익현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평가[2][3]를 본다면 단지 좌익으로 규정하기는 힘들다. 즉, 민족주의적인 성향과 반전쟁&평화주의적인 성향이 섞였다고 볼 수 있다. 본인은 스스로를 '진보적 역사학자'로 평한다.
한홍구 교수가 대중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바로 김일성에 대한 평가. '''김일성은 20세기형 민족주의자'''라는 평을 남긴 적이 있다. 그리고 김일성의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은 그 이후 남북전쟁, 우상화 및 독재를 떠나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글을 남긴 적이 있다.
태극기의 태극 및 건곤감이 문양은 사실 중국의 책인 「 주역 」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태극기나 인공기가 아닌 남북한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통일국기가 필요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 저서 < 대한민국史 > 1권에서.
2001년 강정구 동국대 교수가 8.15 평화축전 기간 김일성의 생가인 만경대를 방문해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평화 통일 이룩하자"라고 글을 남기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당한 사건이 일어난 무렵, 강정구 교수의 행동을 칭찬하며 진정한 평화통일을 이루려면 남한 사람들은 북한의 김씨 왕조 체제를 찬양해야 하고, 북한사람들은 남한의 투표민주주의 체제를 찬양해야 한다는 글을 남긴 적이 있다. 그러나 이후 강정구 교수가 "광복 후 공산주의를 선택했어야 한다" 라거나 "미국이 6.25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으면 한 달 안에 전쟁은 끝나고 인명피해는 1만명 이하였을 것"이라는 심히 종북주의자스러운 말을 남기자 한홍구 교수는 강정구 교수를 비판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 -
그리고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당시 전두환에게 한 평가를 보면 종북보다는 극단적인 평화주의 성향으로 보인다. 한홍구 교수는 아웅산 테러 사건 당시 전두환의 행동을 이렇게 평가했다.

(북한의 아웅산 테러 이후)

해설:

전두환 대통령은 버마에서 귀국하자마자 전방부대로 향합니다. 그리고 보복이라는 독단적인 행동을 할 경우 반역행위로 간주하겠다는 강경한 뜻을 군에 전달합니다. 그는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한홍구:

"전쟁을 했을 때 피해가 두려웠던 거겠죠. 전두환은 군인입니다. 사실 지금 현재 '''제일 두려운 거는 민간에서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깐 실제 전쟁이 일어났을 때……저도 겁 없이 여러가지 활동을 했지만 제가 평화운동을 하면서 제일 두려웠던 순간은 이명박 대통령이 전쟁기념관에 가서 '''전쟁이 무섭지 않다고 할 때''' 그리고 '''군대를 가 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청와대 지하 벙커에 모여갖고 전쟁을 논의하고 있을 때.''' 저는 민주진영이기 때문에 전두환을 그렇게 비판하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전두환이 집권 기간 동안 가장 잘한 일이 아웅산 사태를 평화적인 무드로 갖고갔고 더 이상 확산시키지 않은 부분은……'''지나놓고 보면은 그래도 전두환 정권에 점수를 줘야할 대목입니다'''.」

KBS 다큐멘터리 "아웅산 테러 그리고 2013" 中

당시 아웅산 묘소 테러는 국제적으로 큰 비난을 받았으며[4]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강경자세를 보이던 레이건 대통령이 북한 폭격을 검토하고 주한미군을 증파했고 김일성은 아웅산 테러를 실시한 김정일을 비판하며 중국과 소련에게 중재를 해달라며 필사적으로 매달렸지만 소련은 '''한국과 미국의 제한적 공습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주소련 미국대사관에 전달하였고, 중국만이 김일성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국에게 공습 반대의견을 전달하였다. 하지만 당시 중국의 군사력은 냉전의 한 축이었던 미국에게 비할 바 없었기에 김일성의 불안감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는데, 전두환은 그 시점에서 전방 사단을 일일이 돌면서 "'''내 명령 없이 움직이면 반역자로 간주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군 장성들을 모아 같은 취지로 발언하면서 진정시켰다.[5] 이러한 시점에서 제5공화국 정부가 '''북침을 하지 않았으니 북한으로서는 고마웠음은 틀림없지만''', 그 시점에서 한반도 내에서의 남북간 전면전으로 퍼지는 것을 막고 대신 외교적으로 북한을 고립시키자는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한홍구의 말마따나 북한은 급한 불을 피한 대신 국제사회로부터 막장 국가로 낙인이 찍히다시피 했고 결국 2020년 현재 중국 및 일부 친북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국제적으로 거의 고립된 상태에 놓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한홍구의 저 발언도 군사적인 충돌도 일어날 수 있었던(그리고 그것이 누가 봐도 당연해 보였던) 급박한 상황에서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방법 대신 끝까지 외교적인 대응 방법을 모색했던 전두환 정부의 선택에 점수를 주면서 더불어 '''민간에서는 전쟁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기 위한 취지이기도 하다. 군사독재정권의 수괴이고 '''그 자신이 군인인''' 전두환도 전쟁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저렇게 신중하게 접근하려고 애썼는데 정작 민주정부의 수장이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전쟁이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있냐는 뉘앙스라고 할 수 있다. 한홍구를 두고 종북이냐 아니냐를 평가하자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인데, 흔히 종북이라 분류되는 이들 가운데 북한에 대한 강경한 군사 행동에 반대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전쟁을 피하려는 발상이 무조건적으로 종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고(그래서도 안 되고) 이런 점에서 한홍구를 딱 잘라서 종북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극단적인 평화론자'''로 보면서 그에 대한 비판을 행해야 할 것이다. 강정구 교수를 칭찬하면서 "진정한 평화통일을 이루려면 남한 사람들은 북한의 김씨 왕조 체제를 찬양해야 하고, 북한사람들은 남한의 투표민주주의 체제를 찬양해야 한다"한 발언은 어찌 생각하면 참 순진한 이상론에 가깝달까...
한홍구를 종북이라고 보기 어려운 또 한 가지 근거로는 북한 내 친일파 청산의 한계를 언급한 기사를 들 수 있다. 링크 종북 세력이라면 북한이 만악의 근원인 친일파를 뿌리 뽑았다며 칭송해야 하는데, 한홍구는 '''그렇다고 북한이 아무런 문제가 없느냐'''며 도리어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분명 친일파 청산의 좌절은 우리의 현대사에서 잘못 끼운 첫 단추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를 친일파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연 친일파만 제대로 청산하였으면 모든 문제가 다 풀렸을 것인가? 그렇다면 친일파 청산에서 남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했던 이북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할 것 아닌가?

그리고 한홍구는 해방 후 대한민국의 권력 상층부를 구성한 친일파에 대해서도 민족문제연구소 계열의 진보 학자들보다는 더 너그러운 견해를 보인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동아일보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도, 민족문제연구소등은 거의 항상 비시 프랑스 치하에서 친 나치 보도를 해 처형당한 언론인의 예를 들며 아주 강력히 비판하지만, 한홍구는 일제 하 합법 공간에서의 한계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예를 들어 보천보 전투를 보도할때 동북항일연군을 비적이나 마적으로 표현한 것을 갖고 동아일보의 친일 사례로 매도할 수 있지만, 한홍구는 그런 표현 하나하나까지 항일적으로 사용하면 신문 보도 자체가 이뤄질 수 없고, 오히려 이런 사건을 보도한 것 자체가 독자들에게 일제에 대한 자신감이나 저항 의식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그래도 중일전쟁당시의 지원병 독려와 같은 몇몇 친일행위는 명백한 잘못이며, 광복 후 재발간시 이러한 잘못에 대해 확실히 사죄했으면 좀 더 바람직한 언론으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김일성이나 일제시대 친일반민족행위자에게도 조금 너그러운 시선을 갖고 공은 인정하자는 태도로 미뤄보아, 한홍구는 민족주의와 평화주의의 틀 안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이나 이념을 포용하자는 견해를 가진 것 같다.[6]
한편 흔히 진보파라고 불리는 역사학자들 경우 진짜 진보적 성향은 드물고 민족주의를 위시하는 NLPDR계열이거나, 친일반민족행위자개발 독재에 비판적이어서 상대 진영에게 좌파라고 몰이당한 것과 달리 한홍구 교수는 학자로서의 실력이 있어서인지 이승만이나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정식 교수도 한홍구를 '선생'이라 부르며 존중한다.[7][8]

2.1. 김일성 관련 발언


문서 상단에 기재된 저러한 발언에 대해, TV 조선 기자가 "김일성이 얼마나 훌륭한 독립운동가인가에 관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한홍구는 이것이 허위 사실이라며 기자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2017년 7월 3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5부 부장판사 이흥권은 "칼럼에선 김일성에 대해 '민족의 태양, 형제들의 수령, 자수성가한 전형적인 민중영웅' 등의 어휘를 사용했다"며 "중립적 용어 선택이라고 보긴 어렵기에 보도가 내용을 심하게 왜곡한 건 아니다"고 판시했으나, "김일성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강의했다고 허위로 보도했다"며 기자가 한홍구에게 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3. 저서


  • 대한민국史: 2003, 한겨레출판[9]
  • 한홍구의 현대사 다시읽기: 2007, 노마드북스
  • 1%의 대한민국: 2008, 철수와영희. 강수돌, 김진숙, 이철기, 배경내, 윤구병과 공저.
  •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2008, 철수와영희. 전쟁없는세상, 박노자와 공저, 절판.
  • 특강, 한홍구의 한국 현대사 이야기: 2009, 한겨레출판
  • 감시사회: 2012, 철수와영희. 엄기호, 최철웅, 홍성수, 한상희와 공저, 절판.
  • 장물바구니, 정수장학회의 진실: 2012, 돌아온산, 절판
  • 지금 이 순간의 역사: 2013, 한겨레출판
  • 유신,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세대: 2014, 한겨레출판
  • 역사와 책임: 2015, 한겨레출판
  • 사법부,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2016, 돌베개
  • 광장, 민주주의를 외치다: 2017, 창비
  • 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 2020, 창비, 이영채와 공저.

[1] 할아버지 한기악이 임시정부 의정원을 역임했기 때문에 임정계열 인물들과 직간접적으로 연이 있다.[2] 현재의 보수 진영을 "진정 버려야 할 것들은 안간힘으로 사수하려 들고, 지켜야 할 것들은 내다버리려는 가짜 보수"라고 비판하면서, 김구와 최익현을 제대로 지켜야 할 것을 지킨 "진짜 보수주의자"로 일컬었다.[3] 다만, 대한민국의 진보, 좌파 성향의 인사들은 민족주의와 좀 더 친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고 하지만 민족주의가 우파만의 전유물이라고 보기 힘들며 호찌민의 사례가 있듯이 좌파 성향의 민족주의자도 은근히 많다. 사상과 체제는 섞이기 마련이다. 전체주의 문서만 해도 대문에 양쪽의 대표주자 사진이 나온다.(...)[4]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항목에서도 보이듯 이건 정말 '''남한에 대한 북한의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국가원수에 대한 암살 및 암살 시도는 그 국가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되는 것이 국제법이며, 더군다나 테러 장소로 택한 곳도 하필 미얀마의 국부로 대접받는 아웅산 장군의 묘소였으니 미얀마 입장에서도 자국의 성역에서 이딴 테러 짓을 벌이는 북한을 결코 좋게 봐줄 수가 없다. 적국에 대한 참수작전을 벌여도 하필 그런 곳에서 한건 당시 북한의 최대 악수라고 볼 수 있다. 이건 마치 미 대통령이 중국의 자금성을 방문했는데 갑자기 대만이나 하다못해 인도도 아니고 갑자기 러시아의 요원이 나타나서 거길 폭파시키는거랑 똑같다. [5] 여담으로 전두환은 1988년 3월 영국서독 의원들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정식 추천되었는데 그때 언급된 전두환의 평화 수호를 위한 업적(?)이 KAL기 폭파 사건과 이 아웅산 묘 테러 사건 때 전두환이 보여준 대처 때문이었다.# [6] 다만 종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주동인물이라는 점에서 그 여파가 너무도 크다는 점을 들어 김일성에 대한 재평가 자체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당장 일제하 공간에서 초창기 실력양성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민족운동에 투신했던 수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결국 친일, 부일로 돌아섬에 따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고 이들에 대한 재평가를 놓고도 2020년 현재까지 한국에서 좌우, 또는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주장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일성에 대한 평가 역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일제강점기에 대한 재평가, 이승만, 박정희의 공과에 대한 논쟁 이상으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7] 이정식-한홍구 대담: 이정식이 걸어온 학문의 길, 로버트 스칼라피노, 이정식 저, 한홍구 역, 돌베개, 2015[8] 다만 이정식은 좌파 성향의 여운형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바가 있으며 박정희에 대해서도 산업화의 성취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독재에 대해선 혐오했고 미국에 있던 시절에는 아예 박정희의 유신을 반대한 전적이 있기 때문에 주류 우파와는 조금 거리가 멀며 주류 우파가 한홍구를 인정한다는 것을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출처1출처2출처3출처4 [9] 대한민국史 만화는 2004에 이끌리오에서 출간했으나 절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