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먼 래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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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지휘자로, 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이며,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2. 생애
2.1. 2000년대 이전
영국 머지사이드주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타악기를 배워 열다섯 살 때 동네에 있던 머지사이드 청소년 오케스트라에 타악기 주자로 입단하여 활동했다.[1][2]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리버풀 칼리지(Liverpool College)에 진학하여 다니다가 런던의 왕립음악원(Royal Academy of Music)에 편입하여 타악, 바이올린, 피아노, 지휘 등을 배웠다. 졸업학년인 1974년에는 본머스에서 열린 존 플레이어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 참가하여 우승을 차지했고, 덕분에 본머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가 되었다. 1975년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지휘자로 데뷔했다. 이후 1977년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부지휘자가 되었다.
1980년 버밍엄 시티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로 부임하면서 지휘자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60여 명이나 되는 단원을 해고한 뒤 새로운 단원을 뽑아 사실상 악단을 재창단했다. 이렇게 기량이 일취월장하게 된 악단과 함께 차츰 영국에서 명성이 높아졌으며 EMI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 현대음악과 특히 1988년 말러 교향곡 2번 음반이 영국 그라모폰지 '올해의 음반상'을 받으면서 본격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1990년에는 동 악단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지휘자로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87년 CBE 훈장을, 1994년에는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았다.
2.2. 2000년대 이후
1999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차기 선출되어 2002년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래틀이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뒤를 이은 베를린 필의 지휘자 후보로 오른 것에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었지만, 마땅한 경쟁자가 없는 관계로 최종투표에서 별 어려움 없이 당선되었다. 이때 유력하게 언급되었었던 경쟁자인 마리스 얀손스는 당시에 심장마비 수술을 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건강 문제로 후보군에서 배제되었다. 1989년 당시 마젤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후보였던 다니엘 바렌보임은 역시 많은 나이가 걸림돌이 되었고,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상임지휘자와 음악감독을 겸임하고 있기 때문에 베를린 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는 점이 단점으로 꼽혔다. 파이낸셜 타임즈 등에 의하면 사이먼 래틀은 43%의 지지율을 얻었다고 한다.
래틀이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가 된 결정적인 요소는 나이와 비즈니스 감각이었다. 아무리 세계적인 지명도가 있는 베를린 필이어도 그 유지비가 엄청난 만큼 굉장히 하드한 스케줄을 소화하고, 그만큼 많이 공연하고 앨범을 내면서 오케스트라를 유지한다. 때문에 정기음악회 뿐만아니라 순회공연, 음반녹음 등 수많은 일정을 함께 소화하며 악단을 발전시킬 젊은 지휘자를 원했다. 그래서 1989년 카라얀 사후 강력한 후보 중 한명이었던 로린 마젤이 당시 상임지휘자 자리가 클라우디오 아바도에게 넘어가자 예약된 공연은 물론 12장에 달하는 음반 녹음 스케줄을 모두 취소했는데 이로 인해 상당한 경제적 대미지를 입은 베를린 필 단원들은 격분했다. 이후 마젤과 베를린 필의 관계는 매우 소원해졌고, 1999년에는 고령을 이유로 차기 지휘자로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그정도로 베를린 필은 젊고 계약 잘 따오는 비즈니스 감각이 있는 지휘자를 원했고 그게 래틀이었던 것이다. 래틀 본인이 직접 베를린 필의 재단법인화 계획서를 작성해서 베를린 필에 제출했는데 이것이 당선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래틀이 젊은 나이인 것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30대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40대에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었으며, 50대에 베를린 필에 취임한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나이가 많은 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카라얀 사후 바렌보임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후보로 꼽힌 것은 40대라는 나이가 크게 작용했다. 로린 마젤, 리카르도 무티, 오자와 세이지 등 다른 후보들도 당시에 40~50대였으며, 60대 이상이었던 지휘자들은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전임 지휘자이자 레전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그를 차기 지휘자로 점찍었다는 썰은 있으나 공식적인 언급은 없다. 공식적으로 1989년 4월에 베를린 필을 사임한 이후에도 카라얀은 베를린 필의 후임자 선출에 전혀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1986년 래틀이 베를린 필 객원 지휘로 말러 교향곡 6번을 지휘하는 것을 보고 다음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로 래틀을 점찍었다고 하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카라얀이 공식적으로 래틀을 후계자로 언급한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카라얀은 래틀 말고도 여러 젊은 지휘자들을 자신의 후계자감으로 언급했었다. 대표적으로 세이지 오자와와 세미온 비쉬코프가 있다. 누구보다도 카라얀이 자신의 후계자로 자주 언급한 이는 오자와 세이지였다. 70년대말과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오자와는 베를린 필을 맡기에는 경륜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카라얀이 많이 밀어주기도 했고 오자와 본인의 기량도 출중했기 때문에 80년대 후반 세이지 오자와는 베를린 필과 함께 해외순회 공연을 다닐 정도로 베를린 필과 호흡이 잘 맞았고 진지하게 베를린 필의 차기 지휘자 후보로 널리 언급되었다. 1985년 처음 베를린 필을 객원 지휘한 세미욘 비쉬코프는 카라얀의 격찬을 받고 베를린 필의 후계자로 급부상한 바 있다. 카라얀은 비쉬코프와 베를린 필과 음반 녹음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1975년 카라얀과 DG가 파격적인 재계약을 맺은 이후 카라얀 이외의 지휘자가 베를린 필과 음반 녹음을 남긴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세미온 비쉬코프 이외에는 84년 당시 자비네 마이어 사건으로 카라얀이 음반 녹음을 취소하자 베를린 필 단원들의 요청으로 리카르도 무티가 녹음 세션을 가진 바 있었다. 하지만 무티 역시 이내 카라얀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추가 녹음을 고사했다. 그 밖에 다니엘 바렌보임 역시 당시 베를린 필 단원들의 요청으로 비공식 녹음을 남겼지만 역시 카라얀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음반사들이 녹음 발매를 고사하여 수년 후에야 발매되었다. 그리고 비쉬코프 이후 80년대 말에야 세이지 오자와, 로린 마젤 등이 베를린 필과 음반 녹음을 가질 수 있었다.
래틀에 대해서는 카라얀이 직접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래틀을 초청한 적이 있고, 여기서 래틀이 피가로의 결혼으로 성공을 거두었다는 예를 들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지휘하는 무수한 모든 지휘자는 음악감독인 카라얀의 초청으로 지휘한다. 카라얀은 특히 자신과는 아직 경쟁이 되지 않은 많은 젊은 지휘자들을 과감하게 중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덕분에 클라우디오 아바도, 리카르도 무티 등이 아직 이름이 알려 지지 않은 시인 시절부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지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젊은 지휘자에 대한 립서비스에도 불구하고 정작 카라얀 자신은 어느 누구도 후계자로 키우려는 실질적인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후계자가 일찍 결정되어 자신의 권력에 레임덕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자신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끊임 없는 구설수에 대해 젊은 뉴비 지휘자들을 이용해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간접적으로 표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 편 독설의 대가 세르주 첼리비다케 역시 뮌헨필에서 래틀이 객원지휘를 하는 것을 보고 극찬했고 이에 첼리비다케 사후 뮌헨필에서 사운드를 살릴 만한 유일한 지휘자로 래틀이 지목되었으나, 래틀은 이를 고사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첼리비다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푸르트벵글러를 제외한 사실상 모든 지휘자들에게 독설을 날린 첼리비다케가 래틀에게 호감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음악을 좀 들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래틀은 첼리비다케가 극히 싫어하는 스타일이었다.
래틀은 임기 중에 한 차례 계약을 연장하여 2018년 상반기까지 베를린 필에 재임했다.
래틀은 재임 기간 동안 단원들이나 젊은 관객들에게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래틀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디지털 콘서트홀[3] 이 말 그대로 대박을 거두면서 베를린 필의 재정 상태를 크게 개선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베를린 필의 재단법인화도 한 몫을 했다. 여러 모로 베를린 필하모닉을 발전시킨 지휘자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독일 정통 레퍼토리 헤석을 이유로 보수적인 단원들과 관객들은 박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선출 때부터 단원 내부적으로 의견이 엇갈려 과반 이상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만큼, 그러한 비판은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오케스트라 내에서 압도적인 권한을 행사하지는 못했으며,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베를린 필 단원들이 종종 지휘자의 지시에 반발해 당혹스러웠던 경험도 제법 있었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베를린 필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며 악단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지휘자기도 했지만, 오케스트라의 글로벌화를 위해 독일적인 색채를 희석시켰다는 비판 역시 공존하는 지휘자다. 베를린 시기의 여담으로 장기 재임을 했음에도 독일어 구사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는데 오케스트라와 소통하는데 있어서 약점으로 본인도 인정하고 있다. 다만 비판적인 언론에서 독일 레퍼토리 해석과 세트로 묶어서 까는데 자주 써먹는 소재였기 때문에 독일어 지적에 대해서 아주 질색을 한다.[4]
2015년 3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차기 상임지휘자로 내정되었다는 보도가 발표되었다. 관련기사 2017년 9월부터 공식적인 임기를 시작했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으로 취임한 이후, 고국을 중심으로 지휘 활동을 계속 이어나가나 했더니 2021년 1월, 느닷없이 2023년 9월부터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한다는 기사가 오피셜로 떴다. 런던 심포니에서는 2023년 상임 지휘자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계관 지휘자 예우를 받는다고. 래틀은 틴에이저 시절 리버풀에서 라파엘 쿠벨릭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베토벤 교향곡 9번 실황을 듣고 지휘자로서 꿈을 꾸게 되었다고 밝히며, 이 교향악단이 본인에게 얼마나 각별한 의미가 있는지를 취임 소감으로 밝혔다. 이로써 마리스 얀손스가 세상을 떠나며 공석이 된 이 유서 깊은 교향악단의 지휘봉을 래틀이 이어받게 되었다. 오이겐 요훔, 라파엘 쿠벨릭, 콜린 데이비스, 로린 마젤, 마리스 얀손스와 같은 기라성같은 전임자들을 계승하여 여섯 번째 상임 지휘자로 취임. 사이먼 래틀이 표면적으로 언론에 밝힌 사유는 '베를린에 거주하는 가족들과 자유로운 왕래를 위해서'라고 한다. 브렉시트로 인해 영국과 독일간 이동 차질이 생겼기 때문. 이전부터 브렉시트가 '영국 음악 산업의 큰 실수'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꾸준히 반대 의사를 밝혀 왔기에, 이번 결정의 원인이 브렉시트에 있음을 거의 직접적으로 내비친 셈. 뿐만 아니라 영국 정부의 미진한 코로나 19 대처, 그로 인해 좌초가 거의 확실해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전용 홀 신축 계획 등[5] 이래 저래 영국 정치권에 대한 강한 실망이 이번 결정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수 있다.
더불어 독일 시민권을 취득 신청을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확인 사살..... 기사 작위까지 수여받은 영국의 거장이기에, 독일 시민권 신청 소식은 영국 음악계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브렉시트로 인해 유럽 내 활동이 불편해질 것으로 예상해 “꼭 필요한” 절차로 본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3. 기타
1월 19일이 생일인데, 2011년 1월 19일 베를린 필 공연 때 관객들과 단원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줬다.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영국 영화산업에 대한 경의의 차원에서 연주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불의 전차>를 지휘했...는데 연주 중에 정신줄 놓은 미스터 빈을 보고 경악했다.(...)
팀파니를 연주하는 사이먼 래틀.
4. 평가
현대음악에 능하다.[6] 래틀이 상임지휘자를 맡은 이후 베를린 필에서 현대음악 래퍼토리가 상당히 늘었다. Late Night at Philharmonie처럼 현대음악으로만 꽉 채운 연주회도 인기 있는 편이다. 그러나 다른 지휘자들이 잘 다루지 않는 현대음악을 다룬다는 사실만으로 래틀의 역량을 최고로 평가하는 것에는 무리수가 있다. 취임 초기에는 현대음악을 많이 다루는 래틀의 성향에 대해 베를린 청중이 반발하기도 하였고 언론도 이를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래틀은 이러한 여론을 수렴하여 현대음악의 비중을 줄이고 독일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 레퍼토리를 확대하며 본인 스스로 이러한 레퍼토리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브루크너 교향곡 해석은 시간이 지날 수록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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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레퍼토리인 독일 낭만주의 음악 해석엔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편이다. 연주에 대한 평가는 워낙 거장들의 시대가 먼치킨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나쁘진 않지만, 과거의 명연에 비하면 아쉽다는 평을 받기도. 고전주의 이전의 레퍼토리에 있어선 평범하다고도 하고 뽕끼가 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독일 낭만주의 음악에 대해서는 베를린 필이라는 천의무봉의 악기를 가지고 연주한 것치고는 아쉬움이 많다는 평을 받기도 하다.
래틀이 취임 후 2005년 베를린 필이 RCO에 밀렸으나.[9][10] 10년 뒤 2015년 최고의 오케스트라 1위를 탈환했다.[11] 래틀은 리카르도 샤이에게 3표 차로 밀리며 근소한 차이로 지휘자 랭킹 2위를 차지했다.
베를린 필 음악감독 당선 이전엔 객원 지휘를 많이 했다. 베를린 필 객원으로 연주를 소화했고, 빈 필과도 연주횟수가 꽤 많다. 미국에선 LA 필과 가장 친근했으며, 이 외에도 보스턴 심포니, 시카고 심포니와 종종 연주했다. 신기하게도 런던 심포니와는 그리 친밀한 관계는 아니다.
버밍엄 시절 말러 교향곡 2번이 레퍼런스 중 하나로 꼽히며 명성을 날렸고, 베를린 필 취임후 취입한 말러 5번, 8번[12] , 9번, 10번 교향곡은 레퍼런스 급으로 유명하다.[13] 빈 필과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취향을 심하게 타는 연주로, 많은 사람에게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그밖에도 구스타프 홀스트의 행성, 이모겐 홀스트에게 헌정된 음악으로 구성된 음반, 바흐 마태수난곡과 요한수난곡, 올리비에 메시앙과 죄르지 쿠르탁의 음반, 스트라빈스키 아폴로, 카롤 시마노프스키 작품집, 베를린 필과 함께한 브람스 교향곡 전집, 하이든 교향곡집(베를린 필, 버밍엄 둘 다 우수하다)[14] , 스트라빈스키와 신빈악파 음악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15]
2000년대 클래식 업계 불황으로 메이저 음반사들도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하게 되는데 엔지니어와 같은 유능한 인력들이 전부 사라버려서 이후 녹음들의 음질이 좋지 못하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녹음도 시대값을 못하는 녹음상태 때문에 아쉬운 녹음들이 많은데, 래틀의 녹음도 2000년대 이전의 CBSO와의 녹음과 비교해 이후 녹음의 음질이 좋지 못한 편이다.
4.1. 비즈니스 수완
사업적 수완이 매우 뛰어나다. 지휘자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비즈니스맨으로 성공했을 것이다. 이러한 경영가로서의 면모가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선임되는 것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카라얀은 음악이라는 콘텐츠와 신기술에 의한 매체, 그리고 자신의 타고난 외모와 이미지를 잘 활용해 비즈니스맨으로 성공을 거두었다.[16] 반면 래틀은 조직 전략을 기획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며 조직을 관리하고 바이어들과 협상하는 능력이 뛰어나, 말 그대로 탁월한 비즈니스 재능이 있다.
래틀은 베를린 필이 국가 보조금을 받는 상황에서 벗어나 재단으로 독립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상임지휘자가 되기 전에 베를린 필의 재단화 기획안을 제시했고, 이것이 그가 상임지휘자가 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상임지휘자가 되기 전부터 베를린 필 재단화 작업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베를린 필의 디지털 콘서트홀을 오픈하는 등 악단의 비즈니스에 크게 관여했다. 이로 인해 악단의 재정이 개선되었기 때문에 단원들의 지지도도 높은 편이다. 하지만 정작 악단의 가장 큰 수입원이었던 음반 수입은 급감했다. 허나 이는 변명의 여지가 있는 것이 절대 다수의 지휘자가 2000년 이후 음반 수입이 급감했다.[17] 이는 2000년대 이후 한국 가요 음반판매량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래틀은 대부분의 지휘자들이 크게 꺼리는 후원자 접대와 같은 비즈니스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내한공연 때 지휘대에서 후원자였던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에 대한 헌사를 자주 표하여 청중들이 어색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래틀은 훗날 베를린 필의 21C 경영 모델을 체계화한 인물로 이름이 남을 것이다.
일본의 드라마 CD 호두까기 인형에 베를린 필이 참여한 것도 래틀 시절이다(2010년). 참고로 참여한 성우는 이시다 아키라와 쿠기미야 리에.
[1] 타악기 주자 출신이라 그런지 칸타빌레에 약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2] 그가 직접 팀파니를 치는 모습이 영상으로 있다. *영상[3] 인터넷을 통해서 베를린 필의 공연을 생중계해주는 베를린 필하모닉 공식 웹사이트. 때로는 해외 공연도 생중계를 해주며 아카이브를 통해서 예전에 했던 공연 영상들도 볼 수있다.[4] 전임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20대 초반에 빈에서 유학해 이탈리아 출신임에도 독일어가 유창했고, 현직 키릴 페트렌코는 18세에 러시아에서 오스트리아로 이주했기 때문에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같은 외국인임에도 독일어 구사에 현격한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두 사람에 비해서 비교가 되는것은 어쩔수 없는 부분[5] 공교롭게도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전용 콘서트홀 건립 계획이 잡혀있다.[6] 현대음악중에서도 난해하고 난이도 괴랄스러운 피에르 불레즈 곡을 불레즈 본인보다 더 잘한다는 평도 있다.[7]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8] 요하네스 브람스의 교향곡 1번.[9] 왕립 콘서트허바우 관현악단(RCO)은 2005년 복수의 랭킹에서 1위를 차지했다.[10] 다만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여러 오케스트라의 실력이 상향 평준화되기도 했고, 녹음 기술 또한 과거에 비해 크게 발달했기 때문이지 베를린 필의 연주력이 떨어졌기 때문은 아니라는 지적이 있다. 베를린 필 정도의 역사가 있는 악단이 지휘자가 바뀐다고 해서 갑자기 연주력이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11] RCO는 2위를 차지했다.[12] 다만 음반 작업은 버밍엄 시티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하였다.[13] 래틀의 말러 교향곡같은 경우 장난끼가 있는 편인데 이게 곡 분위기와 잘 맞으면 좋은 녹음, 공연이라는 평이 많고 그렇지 않으면 깬다는 평이 많다.[14] 사이먼 래틀의 하이든 교향곡 EMI 녹음은 CBSO시절 둘, 베를린 필 시절 하나 밖에 없다. CBSO와의 녹음은 그 중 교향곡 22번 철학자가 들어간 녹음이 GAOC를 통해 재발매 되고 나머지 한장과 함께 CBSO years라는 박스셋으로 다시 재발매 되었다.[15] 카라얀, 아바도, 래틀 모두 신빈악파에 능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푸르트뱅글러는 현재 시점에서 신빈악파를 잘한다고 하기에 무리가 있지만, 상당히 이른 시기에 많은 신빈악파 음악을 소화했다. 카라얀은 신빈악파에서 낭만성을 진하게 뽑아내었고, 아바도의 경우 맑은 사운드로 이해하기 쉽게, 래틀의 경우 그야말로 구조전체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신빈악파 음악을 소화해 냈다. 다음 베를린 필 상임도 신빈악파에 능한 지휘자가 될것인가 지켜보자.[16] 이는 부정적인 소리를 들을 일이 아니며, 상임지휘자로서 아주 뛰어난 덕목이다.[17] 2000년대 이후 음반사가 수익 문제로 녹음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악단의 재정은 점점 어려워지는데 수익은 내야했기 때문에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많은 악단들이 자체 레이블을 두고 실황 녹음을 판매한다. 베를린 필의 경우 비교적 최근에 자체 레이블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