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쿠벨릭
풀네임은 라파엘 예로님 쿠벨릭(Rafael Jeroným Kubelík). 체코의 지휘자 겸 작곡가.
1914년 6월 29일 ~ 1996년 8월 11일
1. 생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이었던 보헤미아(체코어로는 체히)의 비호리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얀 쿠벨릭은 당대 최고 수준의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어머니는 헝가리의 백작 부인인 화려한 배경의 부모 밑에서 자라났다. 이 때문에 어릴 적부터 음악을 자연스럽게 익히기 시작했는데, 심지어 쿠벨릭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읽고 쓰는 것보다 악보 읽는 것을 먼저 배웠다고 한다.
본격적인 음악 교육은 아버지에게 바이올린 교습을 받는 것으로 시작했고, 이후 프라하 음악원에 입학해 바이올린과 작곡, 지휘 세 개 분야를 동시에 전공하는 충공깽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1933년에 졸업할 때도 어느 하나 포기하지 않고 졸업 연주회를 치러 세 분야에서 모두 학위를 따며 주목받았을 정도. 정식 전공은 아니지만 피아노 실력도 수준급이어서, 종종 아버지의 공연 때 반주자로 같이 무대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바이올린은 이미 넘사벽인 아버지가 존재했던 탓도 있어서, 지휘와 작곡으로 영역을 바꾸어 활동하게 되었다. 이미 열네 살 때 프라하를 방문한 두 레전설 지휘자들인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브루노 발터의 공연을 직접 보고 지휘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프라하 음악원을 졸업한 지 1년이 채 안된 1934년에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지휘자로 공식 데뷰했다.
이후 체코 필을 비롯한 체코 각지의 관현악단과 오페라극장에서 객원 지휘를 맡으며 경험을 쌓아갔고, 1939년에는 브르노 오페라극장의 음악 감독에 부임했다. 하지만 2년 뒤인 1941년에 나치 독일이 극장을 강제 폐쇄하면서 해임되었다. 이듬해인 1942년 바츨라프 탈리히가 나치에 의해 강판당하면서 공석이 된 체코 필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다.
하지만 쿠벨릭도 탈리히와 마찬가지로 나치에 동조하지 않았고, 체코 총독으로부터 나치식 경례와 바그너의 음악 지휘를 강요받았지만 모두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점차 높으신 분들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 결국 1944년에는 게슈타포의 체포령을 피해 시골 마을에서 은거하며 전쟁 후반기를 보내야 했고,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음악계에 복귀했다.
1946년에는 프라하의 봄 국제음악제 창설에 참가해 개막 콘서트를 지휘했고, 영국의 HMV(이후 EMI)나 체코 국영 음반사인 수프라폰 등에서 녹음 활동도 재개했다. 하지만 1948년 2월에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여 조국이 공산화되자 결국 그는 고국을 탈출하여 자유 세계로 망명하기로 결심했다.
1948년 9월 쿠벨릭은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가족들과 출국한 후 곧바로 영국에 망명을 요청했다. 이후 미국과 서유럽을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아 활동했다. 이미 뉴비 시절에 체코 필을 이끌고 유럽 순회 공연을 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에, 망명 직후 BBC 교향악단과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동시에 러브콜을 보내는 등 일찌감치 주목받기 시작했다.
1950년 쿠벨릭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원래 푸르트벵글러가 맡을 예정이었지만 미국 내 유대인 음악인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대신 천거되는 식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부임한 직후 쿠벨릭은 푸르트벵글러가 천거해준 인물이라며 푸까 성향의 음악 평론가들에게 디스 당하기 시작했고, 현대음악을 너무 자주 공연한다면서 보수적인 후원자들과 경영진들로부터도 까이는 등 순탄치 못한 역정을 보여주다가 1953년에 사임해야 했다.
시카고에서 물러난 이후 1955년부터 1958년까지는 영국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재임했고, 여기서는 야나체크의 '예누파' 등 모국의 오페라들을 상연해 화제가 되었다. 1957년에는 상연에 네 시간 이상이 걸리는 베를리오즈의 오페라 '트로이 사람들' 을 무삭제로 전곡 공연하는 등 대규모 오페라의 지휘에도 숙련된 실력을 보여주었다.
1961년에는 전년도에 퇴임한 오이겐 요훔의 뒤를 이어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부임했고, 여기서 1979년까지 거의 18년 동안 장기 재임하며 악단 입장에서나 자신의 입장에서나 리즈시절을 누렸다. 특히 이 시기 동안에는 말러의 교향곡 전곡을 공연하고 도이체 그라모폰에 녹음도 했으며, 이외에도 야나체크와 드보르자크, 스메타나, 마르티누 등 고국의 작곡가들이 남긴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해 이들 작품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1971년에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 신임 극장장으로 부임한 스웨덴 출신 음악 행정가 요란 옌텔레의 요청을 받아 음악 감독으로 부임할 예정이었는데, 불과 1년 뒤 옌텔레가 이탈리아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면서 큰 충격을 받고 부임을 미뤘다.[1] 여차저차해서 1973년 가을 시즌에 임기를 시작했지만, 결국 6개월을 간신히 채운 뒤인 이듬해에 바로 사임했다.
1970년대 후반 들어서는 지병인 만성 관절염으로 인해 지휘 활동에 불편함을 겪기 시작했고, 결국 1979년에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직책을 사임한 뒤 객원 지휘 위주로 활동하면서 조금씩 스케줄을 줄여나가다가 1985년에 공식 은퇴 선언을 했다. 이후 작곡 활동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려고 했지만, 1989년에 고국 체코에서 벨벳 혁명이 일어나 공산당 정권이 붕괴되자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의 초청을 받았다. 쿠벨릭은 1990년에 이 초청을 수락했고, 42년 만에 귀국해 체코 필과 프라하의 봄 음악제에서 스메타나의 6부작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 전곡으로 복귀 콘서트를 개최했다.영상
1년 뒤인 1991년에도 같은 음악제의 개막 공연 무대에 올라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38번과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제9번 두 곡을 지휘했고, 음악제 종료 직후에는 체코 필의 일본 순회 공연에도 동행해 오사카와 도쿄에서 '나의 조국' 전곡을 재차 무대에 올렸다. 이 공연을 끝으로 쿠벨릭은 완전히 지휘 무대에서 은퇴했고, 귀국 후 자작곡 두 곡을 스튜디오 녹음한 뒤 스위스의 카스타니엔바움 자택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96년에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화장되어 프라하의 비셰흐라드 묘지에 있는 아버지 얀의 묘소에 같이 안장되었다.
2. 수상 경력
- 덴마크 소닝상 (1983)
- 영국 로열 필하모닉 협회 명예 회원 (1990)
- 체코슬로바키아 토마시 가리구에 마사리크 훈장 1급 (1991)
- 영국 로열 필하모닉 협회 금메달 (1995)
3. 음악 성향
전반적인 음악 스타일은 악보를 존중하면서도 성부 별로 균형있게 울리는 음향을 추구해 이전 시대 지휘자들보다 좀 더 화려하고 단단한 느낌의 연주를 끌어내는 것으로 유명했고, 이 때문에 비록 이후 대세가 되는 시대연주와 비교하면 좀 구티가 나지만 헨델 같은 바로크 작품에서도 당시 기준으로 산뜻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쿠벨릭 사후에는 유족들의 동의를 얻어 그 동안 바이에른 방송국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의 방송국에서 실황 녹음된 테이프들이 오르페오나 타라 등의 음반사를 통해 속속 정발되고 있어서, 그 동안 주로 스튜디오 녹음으로만 들을 수 있던 쿠벨릭의 라이브 연주를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쿠벨릭의 음반은 DG 스튜디오 음반과 오르페오 라이브 음반 모두 퀄리티가 훌륭하지만 스튜디오 정규 음반은 근거리 마이킹으로 인해 잔향이 적고 고음 성향의 선명한 음질을 추구한 반면 바이에른 방송국의 음원은 실황 녹음의 특성상 원거리 마이킹으로 인해 선명함은 덜하지만 대신 바이에른 방송향의 상주홀인 헤르쿨레스잘 특유의 풍부한 잔향이 잘 살아있기 때문에 정규음반과는 또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다민족 거주지였던 보헤미아 출신답게 상당히 광범위한 레퍼토리를 다뤘는데, 물론 그 중심에는 체코 음악이 있었다. 망명 후에도 이들 체코 음악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제작한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전집 녹음으로 그 동안 좀처럼 듣기 힘들었던 7번 이전의 교향곡들을 재조명할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스메타나의 경우에도 무려 여섯 번이나 전곡 녹음했던 '나의 조국'[2] 외에 다른 관현악 작품들도 적극적으로 공연하고 음반화하는 등 열성적으로 보급에 힘썼다.
물론 정통 독일/오스트리아계 레퍼토리에도 정평이 나 있었다. 모차르트, 베토벤, 슈만, 브람스, 브루크너, 차이콥스키, 말러의 교향곡들을 음반으로 들을 수 있다. 그의 평가에 보면 항상 고향인 체코 음악과 연관지어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그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중심이 된 것은 독일 오스트리아의 정통 레퍼토리들이었고 이 정통 레퍼토리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지휘자로 성공가도를 걷게 된 것이다.[3]
특히 말러 교향곡 전곡은 당시 최초의 말러 교향곡 전곡 가운데 하나였는데, 작곡가와 같은 보헤미안 동향 출신으로서의 동질감이 깊이 묻어 나오는 명연으로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베토벤 교향곡 전집의 경우 도이체 그라모폰에 '각 아홉 곡마다 세계 유수의 관현악단 하나씩을 배정해 녹음하고 싶다' 는 의향을 전달해 그대로 실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4]
슈만의 교향곡은 베를린 필과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바이에른 방송향과 콜럼비아(CBS, 현 소니 BMG)에서 두 차례 전집을 만들었다.
브람스 교향곡 전집도 각각 빈 필(데카), 바이에른 방송향(오르페오)에서 한 개씩 제작했다.
브루크너 교향곡도 전곡은 다루지 않았지만, 3번과 4번, 6번, 8번, 9번 다섯 곡의 스튜디오 녹음과 실황 녹음들을 들을 수 있다.
차이콥스키는 후기 교향곡인 4번과 5번, 6번 세 곡을 빈 필과 EMI에서 취입한 스튜디오 녹음을 비롯해 이런저런 실황 녹음들이 있다.
정통 콘서트 레퍼토리들 외에 오페라도 여러 편 다뤘는데, 바그너의 오페라들은 나치 점령 시절에는 정치적 반감 때문에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가 망명 이후에 다시 다루기 시작해 로엔그린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파르지팔의 전곡 녹음을 만들기도 했는데 모두 수연으로 꼽힌다.
이외에 베버의 마탄의 사수와 오베론도 전곡 녹음을 했고, 베르디의 리골레토도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단과 녹음한 바 있다. 근현대 오페라들 중에는 피츠너의 팔레스트리나와 힌데미트의 화가 마티스의 녹음이 있다.
활동 초반 부터 현대음악을 적극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도 여러 녹음을 남겼는데, 힌데미트와 쇤베르크, 베르크, 하르트만 등의 작품을 특히 많이 공연했다. 망명 전에는 쇼스타코비치나 프로코피에프 같은 소련 작곡가들의 작품도 이따금 공연했지만, 망명한 이후에는 공산당 독재에 대한 강한 반감 때문이었는지 거의 무대에 올리지 않았다.
지휘 외에 피아노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녹음도 수가 매우 적지만 존재하고 있는데, 스튜디오에서 남긴 본격적인 녹음은 스위스 출신의 테너 가수 에른스트 헤플리거와 협연한 야나체크의 연가곡집 '어느 사라진 이의 일기'뿐이다. 그 밖에도 바흐의 3~4대의 클라비어를 위한 협주곡들을 동료 지휘자들인 프리츠 리거, 루돌프 켐페, 볼프강 자발리슈와 함께 연주한 진귀한 녹음도 있는데, 아직 정발판은 없고 해적판만 발매되어 있다.
4. 작곡 활동
비록 지휘 활동에 가려 지금은 존재감이 별로 없지만, 쿠벨릭도 선배 푸르트벵글러처럼 자신을 작곡가로도 여기고 있던 만큼 꽤 여러 작품들을 남겼다. 아직 미출판 작품들도 많아 정확하게 집계되고 있지는 않지만, 대표작을 모아 보면 다음과 같다.
(U: 우니베르잘 에디치온(오스트리아) 출판작, P: 에디치온 페터스(독일) 출판작)
'''관현악곡'''
- 단악장의 교향곡 (Sinfonie in einem Satz) P
- 현악 합주를 위한 네 가지 형식 (Quattro forme per archi) U
- 관현악 모음곡 '코르넬리아(Cornelia)' P (같은 이름의 오페라에서 편집함)
- 연속 (Sequenzen) P
- 오르피콘 (Orphikon) P
- 오르간과 관현악 '교향 급전환(Sinfonische Peripetie)' P
- 현악 4중주 제2번 P
- 현악 4중주 제6번 P
- 피아노 소나티나 P
- 혼성 합창, 어린이 합창, 대화 합창과 관현악 '우리(Libera nos)' U
- 바리톤 독창, 어린이 합창, 혼성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진혼곡 '아내를 기억하며(Pro memoria uxoris)' U
- 혼성 합창과 관현악 '초혼(Invocation)' P
- 혼성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무언의 칸타타(Kantate ohne Worte)' P
- 소프라노와 남성합창을 위한 미사 P
- 소프라노 독창, 혼성 합창과 실내 관현악 '슬픔의 성모(Stabat Mater)' P
- 코르넬리아 (Cornelia) P
5. 사생활
1943년에 바이올리니스트 루드밀라 베르틀로바와 첫 번째 결혼을 했고, 3년 뒤에 아들 마르틴이 태어났다. 망명 후에는 스위스에 거처를 마련했는데, 1961년에 아내 루드밀라가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하는 뼈아픈 시련을 겪었다. 작품 목록에 있는 '아내를 기억하며'도 첫 번째 아내에게 바치는 진혼곡이었고, 2년 뒤인 1963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소프라노 가수 엘지 모리슨과 재혼했다.
성품은 기본적으로 온화한 편이었지만, 음악에 관해서는 다소 완고한 면도 있었고 반관료적인 사고관도 지니고 있었던 탓에 종종 보수적인 악단과 극장의 행정가들과 심한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상임 시절에도 대규모 편성의 작품이나 현대곡을 너무 많이 넣는다며 방송국 측으로부터 볼멘소리를 듣자 때려치겠다고 강경하게 나가 데꿀멍시킨 전력도 있었을 정도였다.
1973년에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고, 이후에도 계속 스위스에서 살았지만 '내 육신은 외국에 있을 지언정 마음은 체코에 있다'고 할 정도로 애향심이 강했다. 다만 체코가 공산당 독재 하에 있었을 때는 정부의 온갖 회유 공작에도 불구하고 귀국을 완강하게 거부했고, 1968년에는 프라하의 봄이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의해 무력 진압되자 자신이 창설한 음악제인 프라하의 봄 음악제를 보이콧하는 시위에 참가하기도 했다. 물론 민주화 혁명 이후에는 그 음악제에 다시 초빙되었고, 유해도 체코에 묻혀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완전히 귀환했다.
6. 여담
- 지휘를 할때 연미복이 흔들리지 말라고 옷깃 끝부분을 핀으로 고정시키고는 했다. 이유야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지휘를 함으로써 연미복이 흔들리는걸 방지하기 위함일 가능성이 높다.
- 지휘동작을 보면 역동적이다. 물론 앞의 설명과 같이 옷깃을 핀으로 고정시킨 탓으로 그의 지휘동작이 유연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 고향이 체코라서 그런지 체코와 관련된 곡을 많이 연주했다.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나 모차르트의 교향곡 38번 "프라하"가 대표적. 특히 나의 조국이나 프라하 교향곡은 쿠벨릭의 장기로 꼽혔다.
[1] 사생활 항목에도 언급되겠지만 쿠벨릭은 첫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었고, 그 때문에 이 비보를 듣고 멘붕 지경까지 갔다.[2] 1952년에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머큐리), 1958년에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데카), 1971년에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DG), 1984년에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오르페오. 실황), 1990년과 1991년에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각각 수프라폰과 알투스. 모두 실황)와 녹음했다. NHK에서 녹음/녹화한 1991년 실황은 쿠벨릭 사후에 출반되었고, DVD로도 구할 수 있다.[3] 반면 체코 음악에는 쿠벨릭 만큼 정통하지만 주류 독일-오스트리아 음악에서 그만큼 성공적이지 못해서 쿠벨릭 만큼의 명성을 얻지 못한 로컬 지휘자들도 적지 않다.[4] 차례대로 1번-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2번-로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 3번-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4번-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5번-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6번-파리 오케스트라, 7번-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8번-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9번-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