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일본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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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일본시리즈는 센트럴리그 우승팀 한신 타이거스와 퍼시픽리그 우승팀 치바 롯데 마린즈 간의 대결로 10월 23일부터 10월 26일까지 진행되었다. 결과는 위의 짤방에도 드러나있듯이 치바 롯데가 4:0이라는 시리즈 스코어로 한신을 떡실신시켰다.
일본에선 이 사건을 비꼬아 스코어인 33-4[1] 나, '''하얀 안개 사건(白い霧事件)'''이라고 부른다. 1970년대 일본프로야구에 충격을 몰고온 승부조작 사건인 검은 안개 사건의 오마주며 이 시리즈를 하얀 안개 사건이라고 부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치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열린 1차전 경기가 구장에 짙게 깔린 하얀 바다 안개로 인해 더 이상 경기 진행이 불가능해진 관계로 7회 '''농무(濃霧, 짙은 안개)''' 콜드게임 처리가 되었기 때문. 안개 때문에 1승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한 한신 팬들에 의해서 이렇게 불리게 되었다.
2005년, 창단 70주년을 맞았던 한신 타이거스는 '''승리의 방정식'''이라고 불리던 필승조 트리오, 제프 윌리엄스(「'''J'''」eff Wiliams), 후지카와 큐지(「'''F'''」ujikawa Kyuji), 쿠보타 토모유키(「'''K'''」ubota Tomoyuki), 일명 JFK를 거느리고 센트럴 리그를 정복했다. 그러면서 2년만에 또 다시 일본시리즈에 진출, 2년 전에 실패한 일본시리즈 우승에 재차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에 오사카 지역의 스포츠 매체와 팬들은 승리의 방정식 JFK가 있는 한신 타이거스는 무적이라며 금방이라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고, 그렇게 퍼시픽 리그 우승팀 치바 롯데 마린즈와의 최종 결전을 맞이하게 되었다.[2]
그도 그럴 것이 상대팀인 치바 롯데는 정규시즌에서 퍼시픽 리그 2위 팀으로 플레이오프를 거쳐[3] 우승한 팀이었고, 이때까지만 해도[4] 플레이오프 제도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일본 야구의 풍토상 롯데는 그저 '''제도의 맹점으로 운좋게 일본시리즈에 올라온, 리그 최강자라고는 할 수 없는 팀'''이었다.[5][6] 게다가 롯데의 포스트시즌 진출 자체가 1981년 이 후 24년만[7] 이고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은 1974년 이후[8] 31년 만이라서 사실상 포스트시즌 초짜나 다름 없는 팀이었다. 이에 반해 한신은 불과 2년 전 길고 긴 암흑기를 마감하고 18년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일본시리즈에서 12개 구단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졌던 2003년 당시 멤버들을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시리즈 우승이라는 목표 달성에 가장 껄끄러운 걸림돌이며,[9] 여전히 12개구단 최강의 전력을 과시하던 소프트뱅크가 롯데와의 플레이오프에서 패하면서 탈락한 덕분[10] 에 이번 시리즈는 한신의 입장에서는 '''경험이 없는 비교적 쉬운''' 팀과의 대결이었다.[11] 그래서 한신의 관계자와 팬들은 이번에야말로 20년 동안 쌓인 울분을 풀 수 있는 최적의 기회라고 모두들 확신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일이 벌어질 때는 항상 따라오는 '''불안한 징조'''도 없지는 않았다. 보통은 개방형 구장을 쓰는 홈구장의 특성상 장마철과 여름을 거치면서 우천 취소된 경기들 때문에 10월 중에 열 경기 안팎으로 추가로 편성이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다만 이 해에는 유난히 비가 타이거즈를 비껴가면서 일정 소화가 차질없이 진행됐고, 예년보다 빠른 10월 초순에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시리즈 개최까지 약 2주 반 동안 스케줄이 비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경기감각 유지를 걱정하는 의견도 일부에서 나왔다. 실제로 메이저리그에서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를 4연승으로 돌파한 팀이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한 경우는 고작 12.5%(1/8)에 불과한데, 이에 대해선 '상대팀에 비해 경기감각이 떨어져서 월드 시리즈에선 패배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분석이 많다.
하지만 페넌트레이스 우승 자체도 우승을 확정짓기까지 똥줄을 태웠던 2년 전[12] 과는 달리 2005년에는 비교적 여유있게 경쟁팀들을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 때문에 한신팬과 오사카지역 미디어는 이것이 한신 선수들이 한단계 성장한 증거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서 앞서 제기된 스케줄 공백에 따른 경기감각의 저하라는 불안한 징조를 크게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13] 게다가 롯데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거쳐 2라운드에서 소프트뱅크와 최종전까지 가는 혈전을 치르느라 전력과 체력을 많이 소비한 상태였다. 당초 2연승을 거둔 상태에서 3차전도 9회까지 4:0으로 앞서 가볍게 일본시리즈 진출 일보직전까지 갔지만, 롯데의 마무리투수 고바야시 마사히데가 믿을 수 없게 거대한 불을 질러 4:4 동점을 허용하고 결국 연장전에서 패한 뒤, 4차전까지 내주고 최종 5차전은 그야말로 모든 힘을 쥐어짜 간신히 1점차 역전승을 거둘 정도로 많이 고전한 상태였다. 이 또한 한신에게 있어선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 때까지는 한신 타이거스도, 타이거스 팬들도, 심지어는 상대팀인 치바 롯데 마린즈도 몰랐을 것이다. 이것이 한신 팬들에게 '''일본 야구사에 길이 남을 악몽의 서막이란 것을'''...[14]
▲ 승리투수: 시미즈 나오유키
▲ 패전투수: 이가와 게이
▲ 홈런: 이마에 토시아키 1호(1회 1점) 이승엽 1호(6회 1점) 사토자키 토모야 1호(7회 3점) 베니 아그바야니 1호(7회 2점)
이날 경기는 바닷가에 있는 구장의 특성상 경기가 시작되는 6시 무렵부터 구장에 안개가 살살 끼기 시작했다. 경기를 시작할 무렵에는 그렇게 큰 지장을 줄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기에 그대로 경기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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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회말 롯데 공격, 사토자키의 쓰리런 직후 맷 프랑코의 타석.
하지만 이놈의 안개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짙어지기만 할 뿐 도무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6회 들어올 무렵부터는 경기 진행이 가능할지가 우려될 정도로 안개가 짙어지기 시작했고, 어떻게든 7회까지 경기를 진행시켰건만 상황은 더 악화되어 투수자리에서 포수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7회말 롯데의 대량득점으로 더 이상 한신이 경기를 뒤집기 힘든 점도 고려되어 7회말 1사 후 짙은 안개에 의한 콜드게임이 선언되었다. 안개 때문에 일본시리즈 경기가 콜드게임이 선언된 것은 사상 최초.
저 위의 사진이 뽀샵 처리된 게 아니냐고 의심할 사람들을 위해서 그날 경기의 하이라이트 동영상도 붙여둔다. 동영상을 보면 저 사진이 뽀샵 처리된 게 아니라 진짜로 안개가 저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 승리투수: 와타나베 슌스케
▲ 패전투수: 안도 유야
▲ 홈런: 오오무라 사부로 1호(6회 2점), 맷 프랑코 1호(6회 1점), 이승엽 2호(6회 2점)
그 뒤 한신팬들은 1차전 콜드게임을 불러온 안개가 롯데 측이 일부러 피운 연막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1차전의 석연치 않은 경기종료에 불만을 표시했다. 그리고 안개 같은 자연의 장난만 없었더라면 한신이 저렇게까지 대패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고로 2차전은 뭔가 다르겠지라고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안개가 완전히 걷힌 2차전도 1차전과 똑같은 양상으로 6회말에 5점을 내주면서 떡실신. 반면 한신의 물방망이는 경기 시작부터 종료까지 롯데 선발 투수 와타나베 한 명에게 철저히 농락당하면서 결국 0-10으로 완봉을 헌납했다.
여기까지만 와도 상대팀의 강함을 인정하는 게 정상이겠건만, 한신팬들은 여전히 생소한 상대팀 구장 탓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성지 한신 고시엔 구장'''에만 돌아오면 구장을 가득 메운 5만 열성팬들의 압도적인 응원이 있을 것이고, 이와 같은 압도적인 응원을 경험하지 못한 비인기팀 롯데 따위는 오금이 저려서 알아서 무릎을 꿇을 거라고, 그러면서 이 흐름이 바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참고로 한신팬들의 반응은 당시 한신 타이거스 공식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의 분위기다. 지금은 자유게시판이 없어졌지만, 당시 한신 공홈 게시판에는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롯데는 구단주가 자이니치라서 비열하게 구장에 연막을 피우고도 남을 팀"라는 헛소리를 하는 인간들도 있었다. 물론 그러다가 제정신인 팬들로부터 ' 우리팀 4번타자하고 프랜차이즈도 자이니치인데?'하고 역풍을 맞았다..
▲ 승리투수: 고바야시 히로유키
▲ 패전투수: 시모야나기 쓰요시
▲ 홈런: 후쿠우라 카즈야 1호(7회 4점)
그들의 믿음대로 홈인 고시엔에만 오면 5만 명이 들어찬 관중석을 본 적도 없을 비인기팀 롯데 정도는 홈팬들의 열성적인 응원을 등에 업고 가볍게 제압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마지막 희망을 걸은 '''성지''' 고시엔에서의 대결이라고 뭐가 달라진 것은 없었다. 4회에 2점을 내주며 리드를 내준 한신은 결국 7회초에 후쿠우라에게 만루홈런을 맞고 시리즈 3번째 빅이닝을 내주며 7실점을 허용하는 등, 또 다시 10실점을 하며 최종 스코어 1-10으로 떡실신당했다.
결국 이러한 사태의 원인은 선수들이 보여준 한심한 퍼포먼스가 날씨 탓도 아니고 구장 탓도 아닌, 돌대가리 감독의 멍청한 용병술과 수세에 몰린 상황을 타개할 능력이 없는 선수들의 기량 탓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선수도 팬도 모두 멘붕 모드로 돌입했고, 5만 명이 들어찬 고시엔에는 왼쪽 외야석 구석에 자리잡은 검은 유니폼을 입은 롯데 원정 응원단의 응원가 소리만 울려퍼지고 있었다.
▲ 승리투수: 댄 세라피니
▲ 패전투수: 스기야마 나오히사
▲ 세이브투수: 고바야시 마사히데
▲ 홈런: 이승엽 3호(2회 2점)
▲ 일본시리즈 MVP: 이마에 도시야키(치바 롯데)
▲ 우수 선수상: 와타나베 슌스케, 이승엽, 오오무라 사부로(이상 치바 롯데)
▲ 감투상[15] : 야노 아키히로(한신)
그리고 한신은 플래툰 취급이나 받던 한국 출신 용병에게 홈런과 적시타를 맞고 멸망했다. 이 경기에서 롯데가 낸 3점 모두 이승엽이 낸 것이다. 2회초 투런 홈런, 4회초 1타점 적시타.[16] 참고로, 4회초 적시타를 맞은 투수는 노우미 아츠시인데, 이 선수는 8년 후의 국제대회에서 메이저리거한테 거나하게 한 방 맞아주신다.
비록 실점을 최소화해 그나마 4경기 중 가장 경기다운 경기를 펼쳤지만 선취점을 내주면서 끌려가는 전개는 바뀌지 않았고, 게다가 막강 불펜을 보유하고 있던 건 한신만이 아니었다. 후지타 소이치-야부타 야스히코-고바야시 마사히데로 이어지는 롯데의 필승조는[17] 한신에게 더 이상의 추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뒤 롯데는 시리즈 전적 4승 무패로 압도적인 경기력의 차이를 과시하면서 31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치바 연고로써는 첫 번째 우승을 적지 고시엔에서 확정지었다. 고시엔의 마운드에는 적장 바비 발렌타인이 일본시리즈를 우승한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라는 영예와 동시에 헹가래를 받았다.[18]
엄밀하게 따지면 다이에의 오 사다하루가 1999년에 이미 일본시리즈에서 우승을 거두었지만 일본에서 오 사다하루를 외국인 취급하지 않는다. 1974년 롯데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가네다 마사이치가 최초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가네다는 그 당시 이미 일본으로 귀화한 상태였다. 다만 1974년 일본시리즈 때 롯데가 아니라 롯데의 상대팀 주니치 드래곤즈가 우승했다면 정말로 최초의 외국인 일본시리즈 우승 감독이 훨씬 더 일찍 나올 수 수 있었다. 당시 주니치 감독이었던 요나미네 카나메가 일본계 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일본팬들 모두가 두고두고 한신을 놀려먹는데 사용하는 일본시리즈 역사상 최흉최악의 관광패로 한신 타이거스는 '''3번이나 콜드게임급의 스코어를 먹고''' 장렬하게 침몰해버렸다. 3경기 연속 10실점에다가 그 중 한 경기는 머시 룰(Mercy Rule)이 아닌 기상악화가 원인이긴 했지만 진짜로 콜드게임이 발동되었다. 사실 경기가 1~2점 차라면 아무리 날씨가 좋지 않아도 어떻게든 계속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 것이고, 정 안되면 서스펜디드 게임을 진행하는 쪽으로 합의를 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0-1이라는 참혹한 스코어 앞에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다. 기상악화 뿐만 아니라 한신의 처참한 스코어까지 고려된 콜드게임인 셈.
물론 2위팀이 플레이오프를 통해 일본시리즈에 올라가서 우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바로 전년도인 2004년에 퍼시픽 리그 2위팀인 세이부 라이온즈가 당해 처음 실시된 플레이오프에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꺾고 파리그 우승해서 일본 시리즈에서 센트럴 리그우승 팀 주니치 드래곤즈를 꺾고 일본 시리즈를 우승했는데, 적어도 주니치는 7차전까지 끌고 가면서 대등한 승부를 펼쳤고 한신처럼 맥없이 털리지는 않았다.
이 참혹하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한 결과에 한신 구단과 팬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연고지에서 한신 타이거스의 인기, 그리고 1985년에 첫 일본시리즈를 우승했었을 때 오사카를 뒤집어 놓았던 열기를 생각해보면 폭동 안 난 게 신기할 정도로 떡실신을 당했으니 말이다. 정확하게는 폭동을 일으킬 기력조차 사라질 정도로 한신팬들의 넋이 나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만큼 시리즈가 시작하기 전에 한신팬들의 기대치가 높았고, 시리즈 중에 롯데와 한신이 보여준 경기력의 차이만큼 팬들에게 충격과 정신적 낙차가 컸던 시리즈였다. 실제로 한신은 이 시리즈에서 일본시리즈 사상 최악의 기록을 여러개 세웠다. 시리즈 '''팀 최소 득점'''(4점),[19] '''최악의 팀 평균자책점'''(8.63), '''최소 팀 홈런'''(0개)[20] 등등 한신이 보여준 경기력은 일본시리즈 역사상 최악의 경기력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이 시즌의 롯데는 비록 퍼시픽 리그에서 2위를 했지만 승률이 '''0.632'''였고 오히려 센트럴 리그 우승 팀인 한신 보다 승률이 훨씬 더 높았다.[21] 그럼에도 한신이 롯데를 꺾고 우승 할거라는 말이 나온 것은 당시 퍼시픽 리그에서는 2004 시즌부터 시행된 A클래스 팀만 참가 하는 플레이오프가 있었는데, 이 제도는 정규 시즌1~3위 팀이 토너먼트를 벌여 2~3위팀이 제 1스테이지를 치르고 제 1스테이지 승자와 정규 시즌 1위 팀이 제 2스테이지를 치뤄서 플레이 오프 승자 팀을 파리그 우승팀으로 만들고 일본 시리즈에 보내는 제도였다. 롯데는 당시 퍼시픽 리그 2위 팀이 였지만 세이부와 소프트뱅크를 차례대로 꺾고 퍼시픽 리그 우승 팀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전력과 체력을 많이 소비하였기 때문에[22] 센트럴 리그 우승팀인 한신이 전력도 전력이지만 체력적으로 우세여서 힘빠진 롯데를 손쉽게 물리치고 우승 할거란 말이 나온것이다.
스코어보드를 보면 알겠지만 경기 중반까지는 비교적 팽팽하게 진행되다가 6회 이후 빅이닝을 내주면서 단숨에 무너지는 패턴이 3경기 연속으로 벌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한신 팬들이 우주최강이라고 자부하던 필승조 트리오인 JFK를 보유한 팀의 경기 패턴이라고는 믿기 힘든 전개이다. 사실 이 3경기에서 JFK가 무너진 것은 아니다.[23] '''등판 기회가 없었을 뿐.''' 당시 한신 감독인 오카다 아키노부가 'JFK는 필승조'라는 명분에 너무 집착한 것이 패인이었다. 중반 이후 리드를 잡으면 6~7회부터 JFK를 투입해 확실하게 경기를 매조진다는 것이 오카다 감독의 기본 전략이었는데, 문제는 그 3경기 동안 한신이 한번도 중반 이후 리드를 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테이블 세터든 클린업 트리오든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삼진과 범타, 병살타를 양산하기 시작하면서 리드는 꿈도 꿀 수 없었고,[24] 도리어 경기 중반까지 롯데에게 근소하게 리드를 허용하는 예상 외의 전개에 JFK의 투입시점을 결정하지 못하고 일단 추격조부터 올리는 작전으로 나왔고, 그 추격조들이 롯데 타선에 털리면서 대량실점한 결과 JFK의 투입시기를 놓친 것이 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한신의 대참패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25]
시리즈 내내 한신은 JFK라는 훌륭한 카드를 보유하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전개로 진행되었다. 즉, 33-4라는 참사는 예상 외의 돌발사태가 일어났을 때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필승조니까 무조건 1점이라도 앞서는 상황에서만 등판시킨다는 플랜 A에만 집착하다가 리그 최강급의 불펜을 썩혀버리고 만 오카다 감독의 경직된 운용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26] 그 외의 패인이라면 초반에 리드를 잡거나 리드를 내줬을 때 점수를 내지 못해서 JFK의 투입시기를 잡지 못하게 만든 물방망이도 들 수 있다.
3차전마저 콜드게임급의 대패를 당하자 한신의 코칭스탭은 부랴부랴 투수운용계획를 변경했고 상황에 상관없이 필요하면 JFK를 경기 중반에 조기에 투입하기로 방침을 변경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조치였지만 이미 대세는 롯데에게 넘어가 있었고 3경기 연속으로 콜드게임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한신 선수단은 멘붕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나마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4차전은 최소 실점으로 버텼으나 플래툰 취급받던 오푼이에게 결승 홈런을 얻어맞으면서 '''한신은 멸망했다'''. 그야말로 단기전에서의 지휘관의 임기응변과 유연한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극명하게 드러낸 한판이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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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sgwzyvKwgM
시간이 흘러 2010년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 드래곤즈와 치바 롯데 마린즈가 대결하게 되었다. 그맘때쯤이면 늘 일본시리즈를 치르니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이 경기를 중계하는 NHK는 광고를 내보내지 않으므로 공수 교대시간같이 남는 시간을 각 팀의 옛 일본시리즈 대결모습을 리피트 하는걸로 대신했다. 헌데 그 과정에서 치바 롯데 마린즈의 경기를 돌아본다면서 하필이면 2005년의 33-4의 참사를 '''한신 팬들의 잊고 싶은 과거를 자꾸 리마인드시켜 고통받게 하려는 건 아닌지''' 착각할 정도로 계속해서 재생했다.
사실 이게 또 어쩔 수가 없는 게, 롯데가 구단을 인수한 뒤 우승은 이 해를 제외하면 1974년밖에 없었기 때문에 롯데의 옛 일본시리즈 모습이라고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우승이 아니라 일본시리즈 진출만으로 따져도 그 외에는 1970년이 유일했고[28] , 전신까지 합쳐봐야 일본시리즈 진출은 1950년 마이니치 오리온스, 1960년 다이마이 오리온스로서 진출한 게 전부다. 그러니 그나마 자료가 남아있는 2005년 일본시리즈 자료화면을 반복적으로 틀어줄 수 밖에 없는 것. 그와는 대조적으로 상대팀인 주니치는 불과 3년 전에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했었고, 일본시리즈 진출도 1980년대 이후로만 따져도 1982, 1988, 1999, 2004, 2006, 2007년, 무려 6회 진출의 풍부한 기록 덕분에 활용할 수 있는 자료화면이 풍부한 상태였다. KBO 리그로 비유하자면 KIA와 두산이 맞붙은 2017년 한국시리즈 기간에 2009년 SK를 상대로 7차전 끝내기 홈런을 날리는 KIA 나지완의 모습을 계속 틀어줘서 SK 와이번스 팬들이 고통받은 사건과 비슷하다. 심지어 3차전에 9회초 대타로 나지완이 나오자 방송국에서 타석에 들어설 때 2009년 7차전 끝내기 홈런 장면을 틀어줬는데 진짜로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코스로 홈런을 날리는 바람에 SK 팬들은 의문의 1패를 당해야만 했다.
어쨌거나 결국 이 때문에 인터넷 등지에서 2005년 일본시리즈가 재조명 받게 되었고, 2ch에서도 이 이야기로 스레가 대량 양산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를 보다못한 한신팬이 트라우마를 버틸 수 없었는지 이렇게 글을 남겼다.
참고로 구글에서 '33-4 意味'라고 검색어를 검색하면 '이것을 찾으셨나요?'에 '''자동으로 한신 타이거스가 검색되었으며''' 2015년 3월 이후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2016년부터 다시 검색어에 등재됨으로서 또 다시 고통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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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이 1, 2차전을 석패하고 3차전에는 선발 박명환이 '''노히트 패전'''을 기록, 4차전에는 시원하게 깨지면서 깔끔한 스윕패를 완성했다. 두산의 5점은 당시 기준 역대 한국시리즈 최소 득점 기록을 갱신했다. 참고로 이 당시 감독은 2016년 NC 감독이였던 김경문이다.
점수 차이는 위의 2005년보다 적지만, 이때는 당시 삼성 감독이였던 선동열 감독의 무기력한 경기 운용때문에 문제가 되었다.[39] 특히 2차전은 선취점 내고 역전패를 당하였다. 그나마 위와 달리 3,4차전에선 어느정도 대등하게 싸웠고, 이후 2011년과 2012년에 연속으로 복수혈전에 성공하였기에 어느정도 참작 요소가 있다.[40]
일명 20-2. 1차전을 접전 끝에 패한 NC가 이후 경기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지며 두산에 완패를 당했다. 종전에 두산이 보유했던 역대 한국시리즈 최소 득점 기록을 2점으로 갱신했다.
이후 4년 뒤 2020년 한국시리즈에서 NC가 두산을 상대로 '''25이닝 연속 무득점'''이라는 4경기 2득점에 그친 이 시리즈에서도 나오지 않은 역대 KS는 물론 PS 최다이닝 연속 무득점 기록을 경신하는 불명예를 안겨주며 복수에 성공했다.
스코어 자체만 놓고 보면 크게 특이할 건 없어보이지만 '''그 쿄진이 일본시리즈에서 스윕패'''를 당했다는 임팩트와[41] ,요미우리의 저조한 득점 기록등이 겹쳐서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참고로 요미우리와 소프트뱅크는 2020년 일본시리즈에서도 다시 만났는데 요미우리가 맥없는 경기력으로 3패를 먼저 적립하면서 많은 팬들이 벌써부터 '''이번에도 4:0으로 깨지는 거 아닌가''' 하며 관심을 보였고, 더욱 충격적인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일명 '''26-4'''. 33-4를 그렇게 비웃던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공교롭게도 15년만에 이 대굴욕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고 말았다. 세세하게 따져보면 일단 요미우리는 4차전에서 1점을 내면서 역대 일본시리즈 최소 득점 기록을 '''완벽하게 경신'''[42] 하는 굴욕은 피했다. 참고로 전년도 요미우리와 33-4의 한신은 시리즈 4차전 동안 총 22안타를 쳐서 최소 기록을 갱신했는데, 요미우리는 단 16안타를 치는데 그쳐서 최소 기록을 또 갱신했다.
그리고 한신과 달리 33-4까지 점수차가 벌어지진 않았지만[43] 그래도 4차전에서 어느정도 대등한 승부를 했던 한신과 달리 요미우리는 시종일관 끌려다니기만 했다. 그래도 위안이라면 한신은 한번도 경기 중 리드를 잡지 못했지만 요미우리는 경기를 리드했던 순간이 있었다. 4차전 1회초 선취점 1점을 내면서 경기를 리드했다. '''물론 1회말에 뒤집혔고 그 뒤로는 무기력하게 끌려가다 끝났다.'''
추가로 이 때의 스윕으로 인하여 요미우리는 일본시리즈 경기 9연패 + 같은 팀에게 2연속 피스윕이란 대굴욕을 쓰게 되었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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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일본시리즈는 센트럴리그 우승팀 한신 타이거스와 퍼시픽리그 우승팀 치바 롯데 마린즈 간의 대결로 10월 23일부터 10월 26일까지 진행되었다. 결과는 위의 짤방에도 드러나있듯이 치바 롯데가 4:0이라는 시리즈 스코어로 한신을 떡실신시켰다.
일본에선 이 사건을 비꼬아 스코어인 33-4[1] 나, '''하얀 안개 사건(白い霧事件)'''이라고 부른다. 1970년대 일본프로야구에 충격을 몰고온 승부조작 사건인 검은 안개 사건의 오마주며 이 시리즈를 하얀 안개 사건이라고 부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치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열린 1차전 경기가 구장에 짙게 깔린 하얀 바다 안개로 인해 더 이상 경기 진행이 불가능해진 관계로 7회 '''농무(濃霧, 짙은 안개)''' 콜드게임 처리가 되었기 때문. 안개 때문에 1승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한 한신 팬들에 의해서 이렇게 불리게 되었다.
2. 배경
2005년, 창단 70주년을 맞았던 한신 타이거스는 '''승리의 방정식'''이라고 불리던 필승조 트리오, 제프 윌리엄스(「'''J'''」eff Wiliams), 후지카와 큐지(「'''F'''」ujikawa Kyuji), 쿠보타 토모유키(「'''K'''」ubota Tomoyuki), 일명 JFK를 거느리고 센트럴 리그를 정복했다. 그러면서 2년만에 또 다시 일본시리즈에 진출, 2년 전에 실패한 일본시리즈 우승에 재차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에 오사카 지역의 스포츠 매체와 팬들은 승리의 방정식 JFK가 있는 한신 타이거스는 무적이라며 금방이라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고, 그렇게 퍼시픽 리그 우승팀 치바 롯데 마린즈와의 최종 결전을 맞이하게 되었다.[2]
그도 그럴 것이 상대팀인 치바 롯데는 정규시즌에서 퍼시픽 리그 2위 팀으로 플레이오프를 거쳐[3] 우승한 팀이었고, 이때까지만 해도[4] 플레이오프 제도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일본 야구의 풍토상 롯데는 그저 '''제도의 맹점으로 운좋게 일본시리즈에 올라온, 리그 최강자라고는 할 수 없는 팀'''이었다.[5][6] 게다가 롯데의 포스트시즌 진출 자체가 1981년 이 후 24년만[7] 이고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은 1974년 이후[8] 31년 만이라서 사실상 포스트시즌 초짜나 다름 없는 팀이었다. 이에 반해 한신은 불과 2년 전 길고 긴 암흑기를 마감하고 18년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일본시리즈에서 12개 구단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졌던 2003년 당시 멤버들을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시리즈 우승이라는 목표 달성에 가장 껄끄러운 걸림돌이며,[9] 여전히 12개구단 최강의 전력을 과시하던 소프트뱅크가 롯데와의 플레이오프에서 패하면서 탈락한 덕분[10] 에 이번 시리즈는 한신의 입장에서는 '''경험이 없는 비교적 쉬운''' 팀과의 대결이었다.[11] 그래서 한신의 관계자와 팬들은 이번에야말로 20년 동안 쌓인 울분을 풀 수 있는 최적의 기회라고 모두들 확신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일이 벌어질 때는 항상 따라오는 '''불안한 징조'''도 없지는 않았다. 보통은 개방형 구장을 쓰는 홈구장의 특성상 장마철과 여름을 거치면서 우천 취소된 경기들 때문에 10월 중에 열 경기 안팎으로 추가로 편성이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다만 이 해에는 유난히 비가 타이거즈를 비껴가면서 일정 소화가 차질없이 진행됐고, 예년보다 빠른 10월 초순에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시리즈 개최까지 약 2주 반 동안 스케줄이 비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경기감각 유지를 걱정하는 의견도 일부에서 나왔다. 실제로 메이저리그에서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를 4연승으로 돌파한 팀이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한 경우는 고작 12.5%(1/8)에 불과한데, 이에 대해선 '상대팀에 비해 경기감각이 떨어져서 월드 시리즈에선 패배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분석이 많다.
하지만 페넌트레이스 우승 자체도 우승을 확정짓기까지 똥줄을 태웠던 2년 전[12] 과는 달리 2005년에는 비교적 여유있게 경쟁팀들을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 때문에 한신팬과 오사카지역 미디어는 이것이 한신 선수들이 한단계 성장한 증거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서 앞서 제기된 스케줄 공백에 따른 경기감각의 저하라는 불안한 징조를 크게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13] 게다가 롯데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거쳐 2라운드에서 소프트뱅크와 최종전까지 가는 혈전을 치르느라 전력과 체력을 많이 소비한 상태였다. 당초 2연승을 거둔 상태에서 3차전도 9회까지 4:0으로 앞서 가볍게 일본시리즈 진출 일보직전까지 갔지만, 롯데의 마무리투수 고바야시 마사히데가 믿을 수 없게 거대한 불을 질러 4:4 동점을 허용하고 결국 연장전에서 패한 뒤, 4차전까지 내주고 최종 5차전은 그야말로 모든 힘을 쥐어짜 간신히 1점차 역전승을 거둘 정도로 많이 고전한 상태였다. 이 또한 한신에게 있어선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 때까지는 한신 타이거스도, 타이거스 팬들도, 심지어는 상대팀인 치바 롯데 마린즈도 몰랐을 것이다. 이것이 한신 팬들에게 '''일본 야구사에 길이 남을 악몽의 서막이란 것을'''...[14]
3. 경기 결과
3.1. 1차전
▲ 승리투수: 시미즈 나오유키
▲ 패전투수: 이가와 게이
▲ 홈런: 이마에 토시아키 1호(1회 1점) 이승엽 1호(6회 1점) 사토자키 토모야 1호(7회 3점) 베니 아그바야니 1호(7회 2점)
이날 경기는 바닷가에 있는 구장의 특성상 경기가 시작되는 6시 무렵부터 구장에 안개가 살살 끼기 시작했다. 경기를 시작할 무렵에는 그렇게 큰 지장을 줄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기에 그대로 경기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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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회말 롯데 공격, 사토자키의 쓰리런 직후 맷 프랑코의 타석.
하지만 이놈의 안개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짙어지기만 할 뿐 도무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6회 들어올 무렵부터는 경기 진행이 가능할지가 우려될 정도로 안개가 짙어지기 시작했고, 어떻게든 7회까지 경기를 진행시켰건만 상황은 더 악화되어 투수자리에서 포수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7회말 롯데의 대량득점으로 더 이상 한신이 경기를 뒤집기 힘든 점도 고려되어 7회말 1사 후 짙은 안개에 의한 콜드게임이 선언되었다. 안개 때문에 일본시리즈 경기가 콜드게임이 선언된 것은 사상 최초.
저 위의 사진이 뽀샵 처리된 게 아니냐고 의심할 사람들을 위해서 그날 경기의 하이라이트 동영상도 붙여둔다. 동영상을 보면 저 사진이 뽀샵 처리된 게 아니라 진짜로 안개가 저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3.2. 2차전
▲ 승리투수: 와타나베 슌스케
▲ 패전투수: 안도 유야
▲ 홈런: 오오무라 사부로 1호(6회 2점), 맷 프랑코 1호(6회 1점), 이승엽 2호(6회 2점)
그 뒤 한신팬들은 1차전 콜드게임을 불러온 안개가 롯데 측이 일부러 피운 연막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1차전의 석연치 않은 경기종료에 불만을 표시했다. 그리고 안개 같은 자연의 장난만 없었더라면 한신이 저렇게까지 대패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고로 2차전은 뭔가 다르겠지라고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안개가 완전히 걷힌 2차전도 1차전과 똑같은 양상으로 6회말에 5점을 내주면서 떡실신. 반면 한신의 물방망이는 경기 시작부터 종료까지 롯데 선발 투수 와타나베 한 명에게 철저히 농락당하면서 결국 0-10으로 완봉을 헌납했다.
여기까지만 와도 상대팀의 강함을 인정하는 게 정상이겠건만, 한신팬들은 여전히 생소한 상대팀 구장 탓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성지 한신 고시엔 구장'''에만 돌아오면 구장을 가득 메운 5만 열성팬들의 압도적인 응원이 있을 것이고, 이와 같은 압도적인 응원을 경험하지 못한 비인기팀 롯데 따위는 오금이 저려서 알아서 무릎을 꿇을 거라고, 그러면서 이 흐름이 바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참고로 한신팬들의 반응은 당시 한신 타이거스 공식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의 분위기다. 지금은 자유게시판이 없어졌지만, 당시 한신 공홈 게시판에는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롯데는 구단주가 자이니치라서 비열하게 구장에 연막을 피우고도 남을 팀"라는 헛소리를 하는 인간들도 있었다. 물론 그러다가 제정신인 팬들로부터 ' 우리팀 4번타자하고 프랜차이즈도 자이니치인데?'하고 역풍을 맞았다..
3.3. 3차전
▲ 승리투수: 고바야시 히로유키
▲ 패전투수: 시모야나기 쓰요시
▲ 홈런: 후쿠우라 카즈야 1호(7회 4점)
그들의 믿음대로 홈인 고시엔에만 오면 5만 명이 들어찬 관중석을 본 적도 없을 비인기팀 롯데 정도는 홈팬들의 열성적인 응원을 등에 업고 가볍게 제압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마지막 희망을 걸은 '''성지''' 고시엔에서의 대결이라고 뭐가 달라진 것은 없었다. 4회에 2점을 내주며 리드를 내준 한신은 결국 7회초에 후쿠우라에게 만루홈런을 맞고 시리즈 3번째 빅이닝을 내주며 7실점을 허용하는 등, 또 다시 10실점을 하며 최종 스코어 1-10으로 떡실신당했다.
결국 이러한 사태의 원인은 선수들이 보여준 한심한 퍼포먼스가 날씨 탓도 아니고 구장 탓도 아닌, 돌대가리 감독의 멍청한 용병술과 수세에 몰린 상황을 타개할 능력이 없는 선수들의 기량 탓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선수도 팬도 모두 멘붕 모드로 돌입했고, 5만 명이 들어찬 고시엔에는 왼쪽 외야석 구석에 자리잡은 검은 유니폼을 입은 롯데 원정 응원단의 응원가 소리만 울려퍼지고 있었다.
3.4. 4차전
▲ 승리투수: 댄 세라피니
▲ 패전투수: 스기야마 나오히사
▲ 세이브투수: 고바야시 마사히데
▲ 홈런: 이승엽 3호(2회 2점)
▲ 일본시리즈 MVP: 이마에 도시야키(치바 롯데)
▲ 우수 선수상: 와타나베 슌스케, 이승엽, 오오무라 사부로(이상 치바 롯데)
▲ 감투상[15] : 야노 아키히로(한신)
그리고 한신은 플래툰 취급이나 받던 한국 출신 용병에게 홈런과 적시타를 맞고 멸망했다. 이 경기에서 롯데가 낸 3점 모두 이승엽이 낸 것이다. 2회초 투런 홈런, 4회초 1타점 적시타.[16] 참고로, 4회초 적시타를 맞은 투수는 노우미 아츠시인데, 이 선수는 8년 후의 국제대회에서 메이저리거한테 거나하게 한 방 맞아주신다.
비록 실점을 최소화해 그나마 4경기 중 가장 경기다운 경기를 펼쳤지만 선취점을 내주면서 끌려가는 전개는 바뀌지 않았고, 게다가 막강 불펜을 보유하고 있던 건 한신만이 아니었다. 후지타 소이치-야부타 야스히코-고바야시 마사히데로 이어지는 롯데의 필승조는[17] 한신에게 더 이상의 추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뒤 롯데는 시리즈 전적 4승 무패로 압도적인 경기력의 차이를 과시하면서 31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치바 연고로써는 첫 번째 우승을 적지 고시엔에서 확정지었다. 고시엔의 마운드에는 적장 바비 발렌타인이 일본시리즈를 우승한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라는 영예와 동시에 헹가래를 받았다.[18]
엄밀하게 따지면 다이에의 오 사다하루가 1999년에 이미 일본시리즈에서 우승을 거두었지만 일본에서 오 사다하루를 외국인 취급하지 않는다. 1974년 롯데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가네다 마사이치가 최초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가네다는 그 당시 이미 일본으로 귀화한 상태였다. 다만 1974년 일본시리즈 때 롯데가 아니라 롯데의 상대팀 주니치 드래곤즈가 우승했다면 정말로 최초의 외국인 일본시리즈 우승 감독이 훨씬 더 일찍 나올 수 수 있었다. 당시 주니치 감독이었던 요나미네 카나메가 일본계 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4. 총평
일본팬들 모두가 두고두고 한신을 놀려먹는데 사용하는 일본시리즈 역사상 최흉최악의 관광패로 한신 타이거스는 '''3번이나 콜드게임급의 스코어를 먹고''' 장렬하게 침몰해버렸다. 3경기 연속 10실점에다가 그 중 한 경기는 머시 룰(Mercy Rule)이 아닌 기상악화가 원인이긴 했지만 진짜로 콜드게임이 발동되었다. 사실 경기가 1~2점 차라면 아무리 날씨가 좋지 않아도 어떻게든 계속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 것이고, 정 안되면 서스펜디드 게임을 진행하는 쪽으로 합의를 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0-1이라는 참혹한 스코어 앞에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다. 기상악화 뿐만 아니라 한신의 처참한 스코어까지 고려된 콜드게임인 셈.
물론 2위팀이 플레이오프를 통해 일본시리즈에 올라가서 우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바로 전년도인 2004년에 퍼시픽 리그 2위팀인 세이부 라이온즈가 당해 처음 실시된 플레이오프에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꺾고 파리그 우승해서 일본 시리즈에서 센트럴 리그우승 팀 주니치 드래곤즈를 꺾고 일본 시리즈를 우승했는데, 적어도 주니치는 7차전까지 끌고 가면서 대등한 승부를 펼쳤고 한신처럼 맥없이 털리지는 않았다.
이 참혹하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한 결과에 한신 구단과 팬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연고지에서 한신 타이거스의 인기, 그리고 1985년에 첫 일본시리즈를 우승했었을 때 오사카를 뒤집어 놓았던 열기를 생각해보면 폭동 안 난 게 신기할 정도로 떡실신을 당했으니 말이다. 정확하게는 폭동을 일으킬 기력조차 사라질 정도로 한신팬들의 넋이 나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만큼 시리즈가 시작하기 전에 한신팬들의 기대치가 높았고, 시리즈 중에 롯데와 한신이 보여준 경기력의 차이만큼 팬들에게 충격과 정신적 낙차가 컸던 시리즈였다. 실제로 한신은 이 시리즈에서 일본시리즈 사상 최악의 기록을 여러개 세웠다. 시리즈 '''팀 최소 득점'''(4점),[19] '''최악의 팀 평균자책점'''(8.63), '''최소 팀 홈런'''(0개)[20] 등등 한신이 보여준 경기력은 일본시리즈 역사상 최악의 경기력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이 시즌의 롯데는 비록 퍼시픽 리그에서 2위를 했지만 승률이 '''0.632'''였고 오히려 센트럴 리그 우승 팀인 한신 보다 승률이 훨씬 더 높았다.[21] 그럼에도 한신이 롯데를 꺾고 우승 할거라는 말이 나온 것은 당시 퍼시픽 리그에서는 2004 시즌부터 시행된 A클래스 팀만 참가 하는 플레이오프가 있었는데, 이 제도는 정규 시즌1~3위 팀이 토너먼트를 벌여 2~3위팀이 제 1스테이지를 치르고 제 1스테이지 승자와 정규 시즌 1위 팀이 제 2스테이지를 치뤄서 플레이 오프 승자 팀을 파리그 우승팀으로 만들고 일본 시리즈에 보내는 제도였다. 롯데는 당시 퍼시픽 리그 2위 팀이 였지만 세이부와 소프트뱅크를 차례대로 꺾고 퍼시픽 리그 우승 팀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전력과 체력을 많이 소비하였기 때문에[22] 센트럴 리그 우승팀인 한신이 전력도 전력이지만 체력적으로 우세여서 힘빠진 롯데를 손쉽게 물리치고 우승 할거란 말이 나온것이다.
스코어보드를 보면 알겠지만 경기 중반까지는 비교적 팽팽하게 진행되다가 6회 이후 빅이닝을 내주면서 단숨에 무너지는 패턴이 3경기 연속으로 벌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한신 팬들이 우주최강이라고 자부하던 필승조 트리오인 JFK를 보유한 팀의 경기 패턴이라고는 믿기 힘든 전개이다. 사실 이 3경기에서 JFK가 무너진 것은 아니다.[23] '''등판 기회가 없었을 뿐.''' 당시 한신 감독인 오카다 아키노부가 'JFK는 필승조'라는 명분에 너무 집착한 것이 패인이었다. 중반 이후 리드를 잡으면 6~7회부터 JFK를 투입해 확실하게 경기를 매조진다는 것이 오카다 감독의 기본 전략이었는데, 문제는 그 3경기 동안 한신이 한번도 중반 이후 리드를 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테이블 세터든 클린업 트리오든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삼진과 범타, 병살타를 양산하기 시작하면서 리드는 꿈도 꿀 수 없었고,[24] 도리어 경기 중반까지 롯데에게 근소하게 리드를 허용하는 예상 외의 전개에 JFK의 투입시점을 결정하지 못하고 일단 추격조부터 올리는 작전으로 나왔고, 그 추격조들이 롯데 타선에 털리면서 대량실점한 결과 JFK의 투입시기를 놓친 것이 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한신의 대참패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25]
시리즈 내내 한신은 JFK라는 훌륭한 카드를 보유하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전개로 진행되었다. 즉, 33-4라는 참사는 예상 외의 돌발사태가 일어났을 때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필승조니까 무조건 1점이라도 앞서는 상황에서만 등판시킨다는 플랜 A에만 집착하다가 리그 최강급의 불펜을 썩혀버리고 만 오카다 감독의 경직된 운용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26] 그 외의 패인이라면 초반에 리드를 잡거나 리드를 내줬을 때 점수를 내지 못해서 JFK의 투입시기를 잡지 못하게 만든 물방망이도 들 수 있다.
3차전마저 콜드게임급의 대패를 당하자 한신의 코칭스탭은 부랴부랴 투수운용계획를 변경했고 상황에 상관없이 필요하면 JFK를 경기 중반에 조기에 투입하기로 방침을 변경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조치였지만 이미 대세는 롯데에게 넘어가 있었고 3경기 연속으로 콜드게임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한신 선수단은 멘붕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나마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4차전은 최소 실점으로 버텼으나 플래툰 취급받던 오푼이에게 결승 홈런을 얻어맞으면서 '''한신은 멸망했다'''. 그야말로 단기전에서의 지휘관의 임기응변과 유연한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극명하게 드러낸 한판이었다.[27]
5. 우승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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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sgwzyvKwgM
6. 흑역사의 재발굴
시간이 흘러 2010년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 드래곤즈와 치바 롯데 마린즈가 대결하게 되었다. 그맘때쯤이면 늘 일본시리즈를 치르니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이 경기를 중계하는 NHK는 광고를 내보내지 않으므로 공수 교대시간같이 남는 시간을 각 팀의 옛 일본시리즈 대결모습을 리피트 하는걸로 대신했다. 헌데 그 과정에서 치바 롯데 마린즈의 경기를 돌아본다면서 하필이면 2005년의 33-4의 참사를 '''한신 팬들의 잊고 싶은 과거를 자꾸 리마인드시켜 고통받게 하려는 건 아닌지''' 착각할 정도로 계속해서 재생했다.
사실 이게 또 어쩔 수가 없는 게, 롯데가 구단을 인수한 뒤 우승은 이 해를 제외하면 1974년밖에 없었기 때문에 롯데의 옛 일본시리즈 모습이라고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우승이 아니라 일본시리즈 진출만으로 따져도 그 외에는 1970년이 유일했고[28] , 전신까지 합쳐봐야 일본시리즈 진출은 1950년 마이니치 오리온스, 1960년 다이마이 오리온스로서 진출한 게 전부다. 그러니 그나마 자료가 남아있는 2005년 일본시리즈 자료화면을 반복적으로 틀어줄 수 밖에 없는 것. 그와는 대조적으로 상대팀인 주니치는 불과 3년 전에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했었고, 일본시리즈 진출도 1980년대 이후로만 따져도 1982, 1988, 1999, 2004, 2006, 2007년, 무려 6회 진출의 풍부한 기록 덕분에 활용할 수 있는 자료화면이 풍부한 상태였다. KBO 리그로 비유하자면 KIA와 두산이 맞붙은 2017년 한국시리즈 기간에 2009년 SK를 상대로 7차전 끝내기 홈런을 날리는 KIA 나지완의 모습을 계속 틀어줘서 SK 와이번스 팬들이 고통받은 사건과 비슷하다. 심지어 3차전에 9회초 대타로 나지완이 나오자 방송국에서 타석에 들어설 때 2009년 7차전 끝내기 홈런 장면을 틀어줬는데 진짜로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코스로 홈런을 날리는 바람에 SK 팬들은 의문의 1패를 당해야만 했다.
어쨌거나 결국 이 때문에 인터넷 등지에서 2005년 일본시리즈가 재조명 받게 되었고, 2ch에서도 이 이야기로 스레가 대량 양산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를 보다못한 한신팬이 트라우마를 버틸 수 없었는지 이렇게 글을 남겼다.
2ch에선 이 발언을 얼씨구나 하고 네타화시켰고, 이후 인터넷 상에서 널리 츳코미의 필수요소로 쓰기 시작하였다. 용례는 뭔가 334랑 연관되는[30] 글이나 절망적인 상황, 뭔가 허탈한 상황에선 전부 33-4, 阪神算(한신산, 33-4=?), ち~ん(笑)(칭~(웃음)), なんでや!阪神関係ないやろ!(와들 이라노! 한신은 관계 없다 아이가!), な阪関無(와한관없) 등등으로 대답하는 것. 이로서 한신팬들은 일본 인터넷 상에서 끊임없이 고통받게 되었다. 그나마 2014년, 9년만에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여 이런 조롱을 만회할 기회를 얻었으나, 니시오카 츠요시의 거대한 삽질로 인해 조롱의 수명이 연장되는걸로 모자라 '''끝내기 수비방해 시리즈 패배'''라는 오명이 추가되었다. 추가로 그 끝을 장식한 니시오카는 '''2005년 롯데의 중심 선수였으며''', 2014년 일본시리즈 마지막 경기인 5차전의 경기시간이 우연히 3시간 34분 이였다는 점을 들어 새로운 네타거리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なんでや!阪神関係ないやろ!
(와들 이라노! 한신은 관계 없다 아이가!)[29]
참고로 구글에서 '33-4 意味'라고 검색어를 검색하면 '이것을 찾으셨나요?'에 '''자동으로 한신 타이거스가 검색되었으며''' 2015년 3월 이후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2016년부터 다시 검색어에 등재됨으로서 또 다시 고통받게 되었다.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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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키☆스타에 나타난, 30년간 우승 못한 팀의 비애가 드러난 짤로 이 때가 2004년이었다. 이게 나오고 나서 1년만에 우승함으로써 짤방의 유통기한은 1년으로 끝났다고 한다.[32] 이는 11년 뒤에 바다 건너 어느 구단의 유통기한 4년짜리 영상을 생각하면 된다. 2005년 우승 이후 러키스타 만화에서 롯데 팬인 쿠로이 나나코가 롯데 우승에 대해 언급하며 기뻐하는 에피소드가 실려있다.
- 2005년은 한신 타이거스의 모기업 한신 전기철도의 경영 문제[33] 가 발생한 해이기도 하다. 결국 무라카미 펀드의 대표가 구속되면서 한신 전기철도(+한신 타이거스)가 한큐에 인수되었다.
- 이 해에는 공교롭게도 한, 미, 일, 대만 4개국의 프로야구의 최종시리즈가 모두 4연승 스윕으로 끝났다. 그리고 1990년 이후 15년 만에 한국시리즈, 월드시리즈, 일본시리즈가 모두 4연승 스윕으로 끝났다.[34]
- 2005년 한국시리즈 - 삼성 라이온즈 4:0 두산 베어스
- 2005년 월드 시리즈 - 시카고 화이트삭스 4:0 휴스턴 애스트로스
- 2005년 일본시리즈 - 치바 롯데 마린즈 4:0 한신 타이거스
- 2005년 대만시리즈 - 싱농 불스 4:0 청타이 코브라스
- 이 시즌 끝나고 퍼시픽 리그의 플레이오프 제도를 손봤는데 당시 1위 팀과 2위팀이 5게임 이상 벌어져야 1승 어드밴티지를 주는 것이었는데 소프트뱅크 호크스(2004년에는 다이에 호크스)가 2004년과 2005년에 정규시즌 1위를 먹었는데 두 시즌 모두 2위와 4.5게임차로 마친데다가 플레이오프에서 모두 최종전에서 2승 3패로 떨어지자 2006년에 게임차와 상관없이 무조건 1위팀에게 1승 어드밴티지 넣는걸로 바꾸었다.
- 여담으로 이 해 개막 2번째 경기에서 롯데는 신생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경기에서 26:0이라는 기록적인 점수차로 승리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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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롯데는 라쿠텐과 개막전을 치르게 되었는데, 이와쿠마 히사시를 앞세운 라쿠텐이 개막전에서 3:1로 승리를 거두자 신생팀에게 개막전부터 첫 승을 헌납한 게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 다음 경기에서 와타나베 슌스케의 완봉과 타자들의 불꽃놀이로 라쿠텐을 씹어먹었다. 경기 후 발렌타인 감독이 사진처럼 팬들을 위하여 준영구결번으로 지정해 놓고 덕아웃에 걸어 놓았던 26번 유니폼[35] 을 들고 나와서 라쿠텐을 조롱하기도 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롯데가 일본시리즈까지 우승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이 기록적인 대승을 계기로 선수들이 각성하여 분위기를 타고 승승장구한 결과 결국 31년 만의 퍼시픽리그 우승에 이어 일본시리즈 우승까지 달성했다.
- 이승엽은 이 시리즈에서 4차전 결승홈런 포함 시리즈 최다인 3홈런을 때려내고 11타수 6안타 타율 .545에 시리즈 최다인 6타점을 기록하는 등 여느 시리즈였다면 충분히 MVP를 노릴법한 성적을 올렸으나 1~2차전 전타석 안타인 8연타석 안타 포함 .667의 타율을 기록한 이마에 토시아키의 포스가 너무 막강해서 MVP는 타지 못하고 우수선수상만 수상했다. 그리고 이승엽은 센트럴리그에서도 한신 킬러로서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이마에는 2010년 일본시리즈에서도 .444의 타율에 6타점을 얻는 활약을 보이며 롯데의 극적인 우승을 이끌었고 또 한 번 MVP를 탔다. 덤으로 이 시리즈로부터 10년 뒤인 2015년 일본시리즈에서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이대호가 시리즈 MVP를 차지하며 최초의 한국인 일본시리즈 MVP가 탄생했다.
- 특이한 기록으로, 이승엽은 시리즈 내내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모든 포지션으로 출장한 기록이 있다. 불과 4시합동안 1루수, 지명타자, 좌익수, 대타로 전 시합을 다른 포지션으로 출장하였다. 순서대로 1차전 지명타자, 2차전 1루수, 3차전 대타(후 좌익수), 4차전 좌익수 순.
- 이 시리즈로부터 9년 후, 한신은 자신의 최대 라이벌에게 이 시리즈에서 겪은 수모를 그대로 겪게 해줬지만, 그 후에 벌어진 일본시리즈에선...
- 2015 WBSC 프리미어 12의 일본 대표팀과의 대결에서 대한민국이 3:0으로 지고 있던 9회초 이대호의 역전 적시타로 4:3으로 역전승하게 되자 한 일본인이 트위터로 33:4으로 스코어를 합성한 사진을 올렸다. 이 패러디를 눈치챈 일본 야빠들의 리트윗은 なんでや! 로 홍수. 하얀 안개에 대해 잘 모르는 한국인은 불쾌할 수 있었겠지만, 실제로는 자기네들끼리 한신을 놀리면서 웃고 노는 수준이다. 이는 9회초 무사에서 6연타석 출루로 역전당하는 희대의 졸전 속에서 현실을 잠시 잊고 웃음을 찾으려는 모습으로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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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모 팀은 4월 14일-15일 단 이틀만에 35-4라는 이보다 더 충격적인 스코어를 냈다. 참고로 그 당시 35실점을 한 팀의 감독은 2005년 치바 롯데 소속으로 30홈런을 친 외국인 선수의 개인 인스트럭터를 맡았었다.
- 2016년 한국시리즈에선 이것보다 더 최악인 '20-2'가 나왔으며 단순히 2배 곱하면 40-4가 된다.
-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뛰었던 선수 중 한국과 연관 있는 선수로는 당연히 이승엽이 있기에 잘 알지만, 한신 타이거스 선수 중에도 한국과 인연이 있는 선수가 있다. 바로 2016년부터 2019년까지 키움 히어로즈 2군 감독이었던 셰인 스펜서. 3차전에 대타로, 4차전에 6번 타자 우익수로 선발출장했다.[37]
- 이 시리즈에서 롯데가 31년 만에 우승을 거두면서 2006년 일본시리즈엔 닛폰햄이 44년만에 우승, 2007년 일본시리즈에선 주니치가 53년만에 우승을 거두면서 2005-2007 3년의 시리즈에서 우승팀의 이전 우승 텀이 각각 30, 40, 50년이라는 진풍경을 보여줬다.
- 한신 타이거즈는 2015년 교류전에서 오릭스[38] 상대로 3경기에서 스윕 패배+2-26이라는 스코어를 기록하면서 33-4의 교류전 버전이라는 말을 들었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2.26 사건이 있다 보니 이 일화도 2.26 사건으로 종종 불린다. 근데 오릭스도 2016년에 소프트뱅크 상대로 22-6 패배를 당해서 이 날도 2.26 사건으로 불린다.
한신의 우승으로 왜곡한 짤방도 있다.
8. 유사 사례
8.1. 2005년 한국시리즈
두산이 1, 2차전을 석패하고 3차전에는 선발 박명환이 '''노히트 패전'''을 기록, 4차전에는 시원하게 깨지면서 깔끔한 스윕패를 완성했다. 두산의 5점은 당시 기준 역대 한국시리즈 최소 득점 기록을 갱신했다. 참고로 이 당시 감독은 2016년 NC 감독이였던 김경문이다.
8.2. 2010년 한국시리즈
점수 차이는 위의 2005년보다 적지만, 이때는 당시 삼성 감독이였던 선동열 감독의 무기력한 경기 운용때문에 문제가 되었다.[39] 특히 2차전은 선취점 내고 역전패를 당하였다. 그나마 위와 달리 3,4차전에선 어느정도 대등하게 싸웠고, 이후 2011년과 2012년에 연속으로 복수혈전에 성공하였기에 어느정도 참작 요소가 있다.[40]
8.3. 2016년 한국시리즈
일명 20-2. 1차전을 접전 끝에 패한 NC가 이후 경기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지며 두산에 완패를 당했다. 종전에 두산이 보유했던 역대 한국시리즈 최소 득점 기록을 2점으로 갱신했다.
이후 4년 뒤 2020년 한국시리즈에서 NC가 두산을 상대로 '''25이닝 연속 무득점'''이라는 4경기 2득점에 그친 이 시리즈에서도 나오지 않은 역대 KS는 물론 PS 최다이닝 연속 무득점 기록을 경신하는 불명예를 안겨주며 복수에 성공했다.
8.4. 2019년 일본시리즈
스코어 자체만 놓고 보면 크게 특이할 건 없어보이지만 '''그 쿄진이 일본시리즈에서 스윕패'''를 당했다는 임팩트와[41] ,요미우리의 저조한 득점 기록등이 겹쳐서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참고로 요미우리와 소프트뱅크는 2020년 일본시리즈에서도 다시 만났는데 요미우리가 맥없는 경기력으로 3패를 먼저 적립하면서 많은 팬들이 벌써부터 '''이번에도 4:0으로 깨지는 거 아닌가''' 하며 관심을 보였고, 더욱 충격적인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8.5. 2020년 일본시리즈
일명 '''26-4'''. 33-4를 그렇게 비웃던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공교롭게도 15년만에 이 대굴욕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고 말았다. 세세하게 따져보면 일단 요미우리는 4차전에서 1점을 내면서 역대 일본시리즈 최소 득점 기록을 '''완벽하게 경신'''[42] 하는 굴욕은 피했다. 참고로 전년도 요미우리와 33-4의 한신은 시리즈 4차전 동안 총 22안타를 쳐서 최소 기록을 갱신했는데, 요미우리는 단 16안타를 치는데 그쳐서 최소 기록을 또 갱신했다.
그리고 한신과 달리 33-4까지 점수차가 벌어지진 않았지만[43] 그래도 4차전에서 어느정도 대등한 승부를 했던 한신과 달리 요미우리는 시종일관 끌려다니기만 했다. 그래도 위안이라면 한신은 한번도 경기 중 리드를 잡지 못했지만 요미우리는 경기를 리드했던 순간이 있었다. 4차전 1회초 선취점 1점을 내면서 경기를 리드했다. '''물론 1회말에 뒤집혔고 그 뒤로는 무기력하게 끌려가다 끝났다.'''
추가로 이 때의 스윕으로 인하여 요미우리는 일본시리즈 경기 9연패 + 같은 팀에게 2연속 피스윕이란 대굴욕을 쓰게 되었다.
9. 관련 문서
[1] 3차전까지만 따지면 30-2다! 이때 치바 롯데는 꼬박 10점씩 냈다.[2] 여기에 도루왕 아카호시 노리히로가 밥상을 깔고, 리그 MVP 카네모토 토모아키와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역대 3위 기록인 '''147타점'''을 찍은 이마오카 마코토가 이끄는 중심타선을 갖춘 야수진 역시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담으로 이마오카의 저 147타점이 정말 변태스탯인 것이, '''타율 0.276/출루율 0.346/장타율 0.488, OPS 0.834, 29홈런'''의, 홈런을 제외하면 정말로 평범한 비율스탯으로 찍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역대 타점 기록자들은 타출장 3/4/5~6할에, OPS 1.0을 넘기는 MVP, 트리플 크라운급 비율스탯을 기록했다. 예를 들면 퍼시픽 리그 역대 기록인 146타점을 기록한 1985년 오치아이 히로미츠의 성적은 '''.367/.481/.763 52홈런 OPS 1.244'''였고 센트럴 리그 역대 2위인 153타점을 기록한 1999년 로버트 로즈의 성적이 '''369/.439/.655 37홈런 OPS 1.094'''였다. 이마오카는 이 해 득점권 타율 0.371을 기록했고, 특히 만루 상황에서는 타율 0.600, 만루홈런 4방을 때려내 49타점을 버는 경이적인 클러치 능력을 보였다. 하지만 이 역대급 시즌 이후에는 온갖 잔부상에 시달리며 급격하게 기량이 떨어져 주전 자리를 잃게 되었고, 2011년에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은퇴한다. 공교롭게도 이마오카는 2010년 백업 겸 대타 요원으로서 롯데의 극적인 일본시리즈 우승에 함께했다. 2018년 현재 이마오카는 치바 롯데 마린즈의 2군 감독으로 있다.[3] 1라운드 vs 세이부 라이온즈, 2라운드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당시엔 플레이오프 우승팀이 퍼시픽리그 우승팀이 되는 제도였다.[4] 지금도 이 제도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일본 야구인들과 야구팬들은 여전히 많은데, 주로 강팀 팬덤들쪽에서 이런 성향. 오릭스, 요코하마 등 하위권 팀의 팬덤에선 정반대의 성향이다.[5] 반면에 대한해협 건너에 있는 대한민국의 야구는 포스트시즌의 비중이 높아서(다만 그 포스트시즌 역시 정규시즌 성적이 안 좋으면 얄짤 없다), 그 곳에서 죽쑤면 정규시즌 우승은 그냥 묻혀버린다. 예를 들면 이 때의 삼성 라이온즈와 이 때의 두산 베어스.[6] 그래도 지바 롯데의 정규시즌 성적은 84승 49패 3무로 승패마진 +35에 승률이 무려 '''0.632'''였다. 단지 소프트뱅크가 너무 사기적인 승률(89승 45패 2무 승률 0.664)을 올려 1위를 못했을뿐... 사실 이 성적 인플레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창단 후 첫 시즌이라 라쿠텐이 38승 97패 1무 0.281의 승률을 기록하면서 나머지 5팀에게 승수를 마구 퍼준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만, 그래도 이해 3위 세이부가 67승 69패 승률 .493으로 5할에도 다다르지 못한 것도 생각해보면, 이 두 팀의 포텐이 거의 과다하게시피 터진 해라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이 해 피타고리안 승률은 롯데가 소프트뱅크보다 7리나 앞설 정도로 득점/실점 차는 마린건 타선을 앞세운 롯데가 더 유리했다. 그저 호크스가 의외로 잘 나가는 바람에 다소 운 없게 2위를 기록했던 것..[7] 당시 전후기리그 체제로 진행된 퍼시픽리그 페넌트레이스에서 전기리그를 우승하였으나 플레이오프에서 닛폰햄 파이터즈에게 패해서 리그 우승에 실패, 시리즈 진출이 좌절되었다.[8] 이때도 후기리그 우승 후 플레이오프에서 전기리그 우승팀 한큐 브레이브스를 꺾고 리그 우승. 이후 일본시리즈에서 교진군의 V10을 저지한 주니치 드래곤즈를 꺾고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9] 이 해의 소프트뱅크는 36게임 체제로 진행된 교류전에서 유일하게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한신을 상대로 3연전을 스윕한 팀이었다. 그리고 이 기록은 퍼시픽리그 유일의 코시엔 3연전 스윕기록이기도 하다. 한신 코시엔 구장에만 오면 퍼시픽리그 팀들이 알아서 오금이 저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한신 팬들은 한수 위의 기량으로 한신을 유린하는 소프트뱅크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으며, 그래서 소프트뱅크는 일본시리즈에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악몽과도 같은 상대였다.[10] 그리고 소뱅에게 찾아온 것은 가을야구 잔혹사였다. 이 이후에는 포스트시즌에서 계속 패퇴하다가(거기다 왕정치 감독 마지막 해인 2008년엔 후반기까지 3위하다가 막판 연패로 순식간에 꼴찌로 추락해버렸다.) 2011년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는데, 그 때마저 마무리가 안 좋았다.[11] 그 전 상대였던 다이에 호크스는 18년만에 처음으로 가을야구를 하는 한신과는 반대로 직전 5년동안 리그 우승 3번, 일본시리즈 우승 1번, 2위 2번을 기록한 강팀이었다. 20자리 비밀번호를 찍던 시절의 지리멸렬한 모습은 완전히 청산하고 강팀의 지위를 확고하게 굳혀가는 팀이었다. 즉, 2003년과 2005년의 한신은 입장이 완전히 반대였던 셈.[12] 막판에 연패를 좀 해서 그렇지 9월 15일에 우승을 확정지을 정도로 여유롭게 우승하긴 했다. 하지만 18년만의 우승도전이라 매직넘버가 켜진 이후로 간사이 지역의 팬들과 미디어의 조급증이 극에 달해서 한경기 한경기 결과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오죽하면 우승을 확정짓고 우승감독 인터뷰에서 철권으로 유명한 그 호시노 감독이 대놓고 힘들다고 할 정도에 시즌 종료 후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문제로 사임할 정도니.. 그 중압감은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었다.[13] 다른리그 이야기지만 매년 강팀이 오랜기간 휴식하며 하위라운드에서 올라오는 팀을 상대하는 KBO 한국시리즈의 경우 2001년 부터 2020년까지 정규리그 1위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에 실패한게 20번 중 고작 3번에 불과하다. 정규리그 1위팀이 애초에 전력이 강하기 때문에 업셋이 힘들지만 당시 한신과 지바롯데 역시 상술하였듯 전력차가 있다고 평가받았다.[14] 해당 문서를 참조해 보면 알겠지만 둘 다 설레발 친게 문제다.[15] 일본시리즈 패배팀 중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에게 준다.[16] 그리고 그다음해 한일통산 400호 조공은 덤.[17] 한신의 JFK(한신)에 대응해 YFK라 불렸다. 이 조합은 2010년 다시 등장하는데 이때는 후지타 소이치, 고바야시 마사히데가 요미우리 소속인 상황이라서 후루야 다쿠야-야부타 야스히코-고바야시 히로유키 조합으로 바뀌었다.[18] 아무리 일본인 취급이라지만 공식적으로는 중화민국 국적의 왕정치가 최초이다. 왕정치는 요미우리의 유이한 외국인 감독이었다. 요미우리 최초이자 느프브 최초는 다름 아닌 이팔룡. 다만 이팔룡은 625전쟁이후 귀화했다고 한다.[19] 참고로 한미 기록이자 세계기록은 NC 다이노스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2점.[20] 일본시리즈 팀 무홈런 최초. 참고로 한신은 이 기록을 9년 후에 한번 더 세운다.[21] 다만 이 해의 퍼시픽리그는 100패 3보직전까지 간 신생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덕분에 라쿠텐을 제외한 모든 팀들에게 승률 인플레이션이 있었던 것은 고려해야 한다.[22] 특히 소프트뱅크와의 2스테이지에서 롯데는 전력상 열세라는 예상을 뒤엎고 1, 2차전을 낙승한데 이어 3차전마저 9회초까지 4:0으로 앞서 3연승으로 가볍게 일본시리즈에 진출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9회말에 올라온 팀의 마무리 투수 고바야시 마사히데가 믿을 수 없게도 거대한 불을 지르며 4실점으로 4:4 동점을 허용하였고 결국 연장전에서 롯데가 패했다. 여세를 몰아 소프트뱅크가 4차전까지 가져가 시리즈 스코어는 2승 2패로 타이가 되었으며, 분위기를 탄 이상 최종 5차전도 가져갈 것으로 보였으나 롯데가 천신만고 끝에 1점차 역전승을 거두고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였다.[23] 후지카와 큐지는 3차전에서 털리긴 했다. 1이닝 4실점(3자책).[24] 참고로, 4번 카네모토 토모아키는 '''4차전이 되어서야''' 첫 안타를 쳐낸다. 그러나 4차전에서 한신은 9회말 번트 실패를 비롯한 병살을 4개씩이나 날려댔으니 이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카네모토의 2005년 일본시리즈 타율은 '''1할이 채 되지 않는다'''.[25] 허구연 감독 역시 일본야구의 맹점이 이러한 경직성이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즉, 임기응변에 약하다는 것. 교과서적인 정석 플레이를 고집한다는 점인데 이게 한국과의 경기에서도 이런 방식의 경기운영을 보이는 경직성을 보였다.[26] 위에서도 언급된 것이지만, 공격이 되지 않으니 무리를 해서라도 일찍 필승조를 투입해 경기를 내 주는 최악의 사태는 막아야 했다. 알겠지만 그 활화산 같았던 타선이 점수를 내지 못하는 물방망이로 전락했음에도 투수 운영이라도 현명하게 하여 최소 한 경기라도 살려야했는데 정석에만 집착한 경기운영이 시리즈를 망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27] 다만 유연한 지휘관도 2013년 한국시리즈때 오푼이에 대한 무한신뢰로 쌍욕쳐먹었다. [28] 이것도 네이밍 스폰서만 하던 시절이었으며 1970년 시즌 종료 후 롯데는 정식으로 구단을 매입했다.[29] 표준 일본어가 아닌 칸사이벤.[30] 그냥 3, 3, 4가 순서대로 있으면 무조건 なんでや가 달리는 수준이다. 저 갤러리가 털리는 이유들 못지않은 수준.[31] 칠판의 글은 오른쪽부터 "날 쏴라, 그게 자네 일 아닌가?"(체 게바라),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장 폴 사르트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존 레논)[32] 물론 이 짤은 그 뒤 한국으로 넘어갔다. 한국 롯데 역시 28년 동안 우승이 없다. [33] 무라카미 펀드가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인 사건.[34] 참고로 이듬해인 2006년에는 한국시리즈, 월드시리즈, 일본시리즈가 모두 5차전에 끝날뻔 했지만 한국시리즈가 6차전까지 갔었다.[35] 롯데는 1군의 25인 로스터에 1을 더한 26을 서포터즈 번호로 두고 거의 영구결번처럼 쓰고 있다.[36] 센트럴은 요코하마 디엔에이, 히로시마, 도쿄 야쿠르트, 한신 중 하나가 올라오면 되고, 퍼시픽은 치바 롯데나 도호쿠 라쿠텐이 올라오면 된다.[37] 스펜서는 시즌 중에는 좌투수 플래툰 위주로 나오던 선수였다. 플래툰으로 괜찮은 모습을 보였기에 재계약에 성공했으나 다음 해에 먹튀가 되어 방출당해 은퇴했다.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사실 스펜서는 음주운전으로 체포된 전적도 있고 폭행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는 등의 사생활 문제로 MLB 팀에 찍혀 2004년 이후로는 MLB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2005년부터 2년간 한신 타이거즈에서 뛰게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때 배운 것이 없었는지 2019년 한국에서의 감독직 경력을 음주운전으로 끝내버렸다.[38] 당시 오릭스는 퍼시픽리그에서 압도적인 꼴등이었다. 또한 한신-오릭스 경기는 오사카 더비인데 팬은 한신이 오릭스의 10배에 가까울 정도로 많기 때문에 어디서 하든 한신 팬들이 구장을 점령하는 상황이다.[39] 괜히 일부 삼성팬이 445가 아닌 4452를 제2 암흑기라 표현한 게 아니다. [40] 참고로 이후 양 팀 감독은 각각 한화 이글스와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 큰 논란을 일으키고 몰락하였다(...)[41] 사실 이름값에 비해 요미우리는 일본시리즈 스윕패를 비교적 자주 당한다. 그만큼 일본시리즈에 자주 올라가기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총 6회 중 3회가 요미우리의 스윕패, 무승부까지 포함한다면 총 8회 중 4회가 요미우리의 스윕패다.[42] 다만 이닝으로 따지면 한신이 3이닝을 덜 했기에, 이닝당 득점은 요미우리가 제일 적다.[43] 오히려 소프트뱅크가 7점을 못 냈다며 소프트뱅크가 졌다느니 왜 4차전 9회말 안하냐느니 하는 댓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