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무라 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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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활약했던 일본의 전 프로야구 선수. 특출난 장점은 없었지만 타격, 수비, 주루 모두 평균 이상을 해내는 베태랑 외야수였다.
2. 선수 생활
2.1. 아마추어 시절
당시 오사카 최고의 야구명문으로 불리던 PL학원고등학교[7] 에서 고교시절을 보냈으며. 1994년 봄 고시엔 대회때 1번타자로 활약하면서 팀을 4강까지 올려놓는데 이바지했다. 졸업 후엔 대형 내야수 자원으로 주목받으며 드래프트 1순위로 치바 롯데에 입단하였는데, 당시 롯데엔 그와 같은 성씨를 가진 오무라 이와오[8] 가 있던 탓에 '사부로(サブロー)'라는 등록명을 사용하게 되었다.[9]
2.2. 프로 시절
팀의 기대와는 달리 사부로는 불성실한 성격 탓에 더딘 성장세를 보였고, 프로 5년차인 1999년이 되어서야 외야수로서 비로소 1군멤버로 자리잡는데 성공은 했지만 여전히 기대에 못미치는 활약을 보였다. 그렇게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 유망주 꼬리표를 떼지 못하다가 2002년에는 첫 규정타석을, 2003년에는 첫 두자리수 홈런을 기록하며 뒤늦게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2005년과 2010년에는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특히 2005년 시즌에는 클러치 히터로서의 모습에 주목한 바비 발렌타인 감독에 의해 이승엽, 베니 아그바야니, 맷 프랑코 등의 외국인 강타자들을 제치고 4번에 자주 기용되었는데, 이는 바비 발렌타인의 야구와 '마린건 타선'을 상징하는 '연결형 4번 타자'로 매스컴의 주목을 샀다. 2할 후반대의 타율에 두 자릿수 홈런, 안정적인 외야 수비를 기대할 수 있는 올라운드 외야수로서 롯데 전력의 기둥 역할을 했다.
하지만 2011년 중순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되버리면서 팬들과 선수단은 큰 충격에 빠졌었다.[10] 하지만 시즌 후 FA로 친정팀에 복귀, 이후로는 노쇠화로 인한 하락세를 보였지만 후쿠우라 카즈야 등과 함께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내고 깨소금 활약을 펼치며 치바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인정받았다.
2016년 9월에 은퇴 선언을 했다. 2016 시즌에는 은퇴경기 딱 1경기에만 1군에 올라왔다. 이날 4번 지명타자로 나와 4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마지막 2루타를 쳤을 때의 응원 영상을 보면 그야말로 감동.
은퇴 이후에는 롯데 구단에서 일하다가 2020년부터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팜 디렉터로 자리를 옮겼다.
3. 플레이 스타일
20대 중반부터 주전으로 자리는 잡았으나, 본격적으로 포텐이 터진 것은 30즈음 부터였다. 20대 시절엔 야구센스는 있지만 컨택능력이 아쉽고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평가가 있었다. 하지만 이후 '연결형 4번 타자'로 활약하면서 본격적으로 진가를 드러냈고, 실패한 1라운더라는 오명도 씻어낼 수 있었다.
전성기 기준으로 공 수 주 모두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앞서 말했듯 천부적인 센스가 뛰어났다. 득점권 타율이 좋은 편임과 동시에 젊은 시절엔 희생 번트, 30대 이후에는 희생 플라이를 적지않게 기록해내면서 준수한 작전수행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 시즌 뿐이지만, 투수친화구장을 홈으로 쓰면서 시즌 20홈런을 넘긴 적이 있을 정도로 의외로 펀치력도 좋았다.
수비는 외야수비 한정으로 매우 능숙하고 뛰어나다. 어깨도 약하지 않아서 송구능력도 평균 이상. 내야수비는 2루수로 잠깐 기회를 받았던 2001년 기준으로 썩 좋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막상 그때도 2루 수비율 9할8푼대를 기록하는 등 수치상으론 생각만큼 나쁘진 않았다. 주력은 3루까지 11.66초에 도달할 정도로 나름 빠른 편이었지만 도루를 많이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후배 중에서 그와 전반적인 툴이나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한 선수를 꼽자면 기요타 이쿠히로가 있다.
4. 여담
- 대한민국 게임 덕후들 사이에서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시리즈가 유명했을 때, 외국인 선수 숫자 제한이 당시에도 있었는데 카타가나식 등록명 때문에 이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 이 팀에 왜 용병이 한명 더 있지?' 라고 의문을 품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이 당시 일본 프로야구가 한국에 크게 알려져 있었던 것도 아니라 벌어진 혼동.[11] 물론 비슷한 케이스로 자신의 등록명을 가타가나로 이치로라고 등록한 스즈키 이치로의 예도 있지만 당시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로 일본야구를 접한 한국의 겜덕들은 이치로라고 하면 워낙 인지도도 높았고 이름자체도 금방 일본인 이름인게 티가 나지만 사부로는 당시 게임에서 발음에 따라 샤브로 라고 들릴수도 있어서 외국인 선수라고 여긴 사람들이 많았다. 사부로가 한국 사람들에겐 크게 알려진 선수가 아닌탓도 있었고. 여담으로 실제 NPB 최장수 외국인 선수는 세이부에서 12년, 오릭스에서 2년 해서 도합 14년간 활동한 쉬밍지에(허명걸)고[12] , 롯데 소속이었던 기간만 한정하면 1977년부터 1987년까지 11년간 팀의 중심타자로 활약한 강타자이자 일본프로야구 통산타율 2위(.320) 보유자인 레론 리다.[13]
- 젊은 시절엔 나름 훈훈한 얼굴 덕에 여성 팬도 많았다. 사부로가 커리어 상으로는 후쿠우라 카즈야나 이구치 타다히토에게 밀리지만 인기에서 밀리지 않았던 것은 팀 공헌도와 더불어 얼빠들 덕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14][15][16]
- 만 24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전직 아이돌인 나카지마 미치요와 결혼했으며 슬하에는 딸 하나와 아들 둘이 있다.
- 1996년에 시즌 10할 타자였다.
-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던 시절엔 계속 카타카나로 된 사부로를 등록명을 쓰고 싶어했으나 역시나 수구꼴통 요미우리 구단이 절대 안된다고 하는 바람에 본명인 오오무라 사부로를 등록명으로 쓸 수 밖에 없었다. 훌륭한 인성을 갖춘 외국인 선수인 알렉스 라미레스와 이승엽이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가졌음에도 그걸 못믿어서 통역을 쓰게 만든 꼴보수 구단이니...[17]
- 2012년 FA로 복귀하면서 '롯데 사랑'을 이야기했고, 이후 2012년에 새롭게 응원가가 만들어질 때 응원가에서 이를 감안해 '사부로, 자 일어나라. 지금이야말로 사랑하는 팀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어 그 싸우는 모습을, 빛나라 사부로'라는 가사를 붙였다.
- 홈경기 때 장내 아나운서인 타니호 에미가 사부로를 소개하는 것 또한 하나의 명물이었다. 사부로오오오오오오오 타니호 에미 아나운서 목소리가 앳된 것에 한번 놀라고, 사부로를 길게 안 늘리고 사부로! 하고 끝내는 것에서 또 한번 놀랐다.(2002년 라인업 발표 영상)~~]
-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에 이름이 나온다. 작중 무대가 치바인지라, 마린스 팬인 히키가야 하치만이 이름으로 드립을 친다.
- 사토자키 토모야가 유튜브에서 SS급 선수로 꼽았다. 누적 커리어가 SS급이라고 보기 어려운 선수지만 사토자키가 본인(...)도 SS랭크를 줄 정도로 재미로 랭크를 매긴 거고[18] 200세이브와 메이저리그 진출을 이뤄낸 코바야시 마사히데를 S로 매긴 걸 보면 그냥 웃고 넘기면 될 랭크.
[1] 본명 오오무라 사부로(大村 三郎)[2] '''オオ レッツゴー サブロー ラララ...''' (오오 렛츠고 사부로 라라라라라)[3] 예전 응원가. 사부로의 은퇴 시즌 한정으로 부활. 부활했을 떄는 렛츠고 사부로를 제외하면 가사가 다 사라졌다.[4] 롯데 복귀 이후 응원가. '''サブロー さあ立ち上がれ今こそ 愛するチームのため 待っていたんだ その戦う姿を 輝けサブロー(사부로, 자 일어나라. 지금이야말로 사랑하는 팀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어 그 싸우는 모습을, 빛나라 사부로)'''[5] '''夢かける ホームラン 我らの願い 届けよ 熱い想い サブロー ともにゆこう''' (꿈을 건 홈런 우리의 소원을 전달하라 뜨거운 마음으로 사부로 함께 가자)[6] 보통 템포보다 느리게 부른다.[7] 쿠와타 마스미, 키요하라 카즈히로, 타츠나미 카즈요시, 마쓰이 가즈오, 후쿠도메 고스케, 마에다 켄타와 사부로의 팀 동료이던 이마에 토시아키 등 대선수들을 많이 배출했다. 현재는 폭력 사태에 연루되는 등의 곡절을 거쳐 휴부 상태로, 2000년대를 거쳐 오사카 고교야구의 패권은 니시오카 츠요시, 나카무라 타케야, 이와타 미노루, 아사무라 히데토, 후지나미 신타로, 모리 토모야 등을 배출한 오사카 토인고교로 넘어갔다.[8] 1969년생으로 고졸 거포 유망주였으나 난청과 잦은 부상으로 인해 주전이 되지 못하고(커리어하이는 99경기 13홈런을 기록한 1999년.) 2003년 은퇴. 그 후 해설가로 일하다가 닛폰햄과 요코하마를 거쳐 2019년 현재 롯데에서 1군 타격코치를 하고 있다. 여담으로 응원가가 Old Macdonald had a farm의 반주에 맞추어 '이와이와오!'를 외치는 것이었다.[9] 비슷한 예로 스즈키 이치로가 '이치로(イチロー)'라는 등록명을 사용했다.[10] 그 해 치바 마린 스타디움의 롯데리아에서는 '사부로 멘치카츠 버거'를 팔고 있었으나 사부로가 트레이드된 뒤 판매를 중단했다고 한다.[11] 시리즈 몇몇 작품에서는 외국인을 선수명에 별도의 분류표시를 넣어서 분류하는 작품도 있다. 예를 들어 포터블 4나 2010 PSP판은 외국인 선수의 경우, 선수명 밑에 보라색 선을 그어 놓았다.[12] 단일 팀 소속이었던 기간만으로 한정하면 세이부에서 13년간 투수 생활을 한 궈타이위엔이다. 그 밖에 주니치에서 16년간 활동한 카쿠 겐지(곽원치/궈위엔치)도 있긴 한데 카쿠 겐지는 9년차에 일본으로 귀화를 해서 제외. 왕정치나 장훈, 스타르핀 같은 경우는 국적만 일본이 아닐 뿐 일본에서 학교를 다녀서 제외. 애초에 이런 선수들은 외국인 선수로 취급하지 않는다.[13] 투수 쪽이라면 대만 출신으로써 1985~1995년까지 11년간 뛴 소 카츠오도 있으나, 이쪽도 7년차인 1991년 사카모토 요시키로 개명하고 일본으로 귀화해서 제외.[14] 후쿠우라는 20대부터 탈모가 와서 얼빠가 거의 없었다(...)[15] 대신 커리어나 상징성으로 볼 때 이구치랑 후쿠우라에게 밀려서 감독 후보로는 언급도 안 됐다(...) 이구치는 은퇴 직후 감독이 됐으며 후쿠우라는 구단 수뇌부가 대놓고 이구치 다음 감독이라고 인터뷰했을 정도인데...[16] 사부로가 잠깐이나마 국가대표에 몸을 담기도 했고, 소속팀도 잘 나가던 2000년대 중후반엔 일본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야구선수 인기투표에서 10위권 안에 들기도 했다. 비인기팀 소속의 유부남임에도 꽤 선전한 편. 참고로 해당 투표는 그 다르빗슈 유조차 유부남이라는 이유로 고전하던 투표였다. 당시에 1위를 도맡던 선수들은 사카모토 하야토나 가와사키 무네노리, 니시오카 츠요시등 총각 선수들(...). [17] 다만 그러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긴 하다. 터피 로즈 항목 참고.[18] 아무래도 동갑이고 원클럽맨이라 팀에서 계속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것도 랭크를 후하게 준 원인이 되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