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구성체 논쟁
1. 개요
80년대 중반 한국의 학생운동 진영에서 제기된 이념 논쟁. '사회구성체 논쟁', 이를 줄여 '''사구체 논쟁'''이라고도 한다. 사회구성체는 social formation의 번역어로, 마르크스가 사회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로 구성된다는 자신의 사회관을 반영시켜 만들어낸 개념이다[1] . 개념에 충실하게 해석하자면 사회구성체 논쟁은 "한국사회의 하부구조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즉 "한국사회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며, 더 나아가 "한국사회에서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는 누구이며, 누가 누구에게 투쟁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라 할 수 있다.
CNP란,
- CDR(Civil Democratic Revolution, 시민민주혁명)
- NDR(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 민족민주혁명)
- PDR(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민중민주혁명)
이 셋 중에서 NDR이 운동권의 주류 위치를 차지했다. 80년대 중반에 NDR은 주체사상을 수용한 세력이 성장하면서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NLPDR. 약칭 NL)으로 진화하여 80년대 후반에는 다수파 민족해방('''NL''') 노선과 소수파 제헌의회('''CA''') 노선으로 분립된다. 이때 CA 노선에 대한 비판으로 PDR의 방법론을 차용한 헌법제정민중회의(CPC) 노선이 등장하며, CA 노선은 자기해체 과정을 거쳐 CA다수파는 NL 노선에 합류하여 NL-좌파가 되고 CA소수파는 민족민주(ND) 노선의 소수정파로 존립한다. 한편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수용한 여러 소정파들이 형성되었는데, CPC와 아울러 제파PD 계열로 통칭되었다.
이외에도 양김 등 기존 민주당계 정당 내 반군부 인사를 BDR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2. 역사
2.1. 80년대 이전
사실 80년대 이전까지 한국에서 재야 운동권은 대부분 민족주의운동이나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 혁명운동에 지나지 않았다. 4.19 혁명부터 시작된 사회운동의 계보를 관찰해 보면 좌파를 비롯한 사회주의 운동은 아직 금기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70년대까지 재야 운동권에서 인기를 얻은 이론은 매판자본론이나 종속이론, 반독재 자유주의 이론 등에 기반한 자본주의 사회 비판이었지 사회주의 혁명론은 별 인기가 없었다. 아니 인기가 없었다기 보다도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의 통제,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공산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로 성장할래야 성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60~70년대 내내 남한에 좌파나 사회주의, 주체사상 노선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에는 서울대 도서관에 일본어로 된 <자본론> 등 여러가지 책들이 비치되어 있어서 의외로 손쉽게 접할 수 있었고, 1960년 총선에서 사회주의 계열정당인 사회대중당이 의석을 확보하기도 했으며 박정희 정권 하에서 합법정당으로 활동했던 사회민주주의계열의 통일사회당도 존재했다. 그리고 60년대 초반의 사회대중당등 사회주의 정당을 북한이 지원했던 일도 있었고, 통일혁명당 같이 북한과 직접적인 연계가 있는 지하당도 존재했다. 소수이긴 했지만 마르크스/블라디미르 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집단도 존재했다. 물론 이들은 지속적인 단속과 탄압으로 하나둘씩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70년대에 유신독재가 강화되면서 끝없는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결정적으로 한국전쟁의 후폭풍으로 한국은 철두철미한 반공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설사 의회 선거를 통한 합법적인 사회개조를 내건 개량주의, 사민주의 계열이라 할지라도 사회주의/좌파 진영은 대중들에겐 역적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2.2. 80년 ~ 83년: 준비기
그러던 중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고 서울의 봄이 도래하자 민주화의 꿈에 부풀어 올라 있던 학생운동 세력은 확실한 노선을 정립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을 결정하고 결국 자신감을 얻은 신군부는 5.17 쿠데타를 일으키고 저항하는 광주시민들을 유혈진압하면서 오월 광주의 비극을 연출한다.
이런 일련의 상황에 학생운동과 전체 재야민주화운동세력은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그때까지 재야 운동권은 미국(정확히는 카터 행정부)의 인권외교로 인해 미국을 우방으로 믿고 있었지만 미국이 수수방관하는 바람에 엄청난 희생자가 났다는 결론에 부딪히게 되고,[2] 또한 단순히 이때까지의 시민민주주의/자유주의 민권운동에 국한되는 이론으로는 사회의 구조적인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특히 학생운동 세력내에선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대학교내의 지하서클들은 10.26 직후부터 계속해서 앞으로의 대처방법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소위 무림-학림 논쟁이다.
그리고 광주의 비극과 신군부의 집권으로 끝난 서울의 봄에 대한 반성으로 학생운동가들과 재야민주화 운동가들은 기존의 친미-자유민주주의의 틀을 깨고 본격적으로 반미/좌파/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80년대 초중반은 '''"원전 탐독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조잡한 필사본이나 복사본으로 된 자본론이나 <공산당 선언>, <모순론>, <무엇을 할것인가> 등등 외국의 서적들을 돌려보기에 이르른다.[3]
이러던 와중에, 사회 혁명에 도달하는 방법과 사회 혁명의 모델을 구상하던 재야 운동권의 사람들 사이에서 "현재 한국의 사회발전 단계가 어디냐"와 "변혁의 주체인 민중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에 이르게 된다. 이는 사회혁명 운동을 할 때 필수적으로 '''현재의 정세 파악'''과 '''이 국가의 근간을 구성하고 있는 민중이 누구냐'''를 따지고 가야 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바로 이것이 "사회 구성체 논쟁"(약칭 사구체 논쟁)이다.
사회구성체 논쟁은 이전까지의 재야 운동권의 이론과는 사뭇 달랐다. 왜냐하면 기존의 민족주의 운동이나 자유주의 운동가들의 시각에서 사회 혁명은 '''"독재가 물러가고 모든 시민들이 한 표씩 얻는"''' 상황만 도래하면 종료하는 것이기 때문. 하지만 사회구성체 논쟁은 이러한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 구조적 개혁으로 노동자/농민등의 민중이 주체가 되고 사회의 모순을 생산하는 자본가/군벌들이 타도되는 사회를 최종점으로 잡았다. 이는 사실 맑스/레닌주의의 무산대중 혁명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이때 논쟁 내용은 무림-학림 논쟁을 참고.
2.3. 84년~85년: 1단계 논쟁(CNP 논쟁)
1984년에서 1985년까지 운동권 내에서는 본격적으로 'CNP' 논쟁이 벌어진다. 개요 문단에서도 서술했듯이 각각 CDR, NDR, PDR의 앞글자를 따온 것이다.
CDR은 시민민주주의혁명의 약자로 당대 남한 사회를 '파쇼적 군사독재'로 규정하고, 당면 목표를 시민민주주의혁명으로 정한 학생운동 계파를 의미한다. 이들은 남한이 제1세계권에서 주변부 자본주의로 성장했기에 더이상 식민지가 아니라고 하였으며, 파쇼적인 군사독재로 인해 그 봉건성이 상당히 남아 있고 대중의 민주주의 의식이 정체되어있기에 파쇼적 군사독재 체제를 끝장내고 시민민주주의를 이루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운동의 변혁중심세력을 광범한 대중이라고 하였는데, 민족자본가와 중소자산가 및 민주적 지식인의 역할을 상당히 강조했다는 점에서 당대 학생운동권 내에서는 우경주의라고 불렸다.
NDR은 민족민주주의혁명의 약자로 당대 남한 사회를 식민지 또는 신식민지에 따른 반식민반자본주의라고 규정한 계파이다. 이들은 당면 혁명의 목표를 반봉건혁명이라고 규정하였다. 이후 사회상에 대한 논의나 변혁의 중심세력에 대해서는 내부 계파마다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제1차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다수를 점하였다.
PDR은 민중민주주의혁명(People's Democracy Revolution)의 약자이다. 이 계파는 남한 사회의 식민지성과 신식민지성을 모두 부정하였지만, 독점자본주의성은 긍정하였으며, 계급모순을 중시하였다. 하지만, 혁명론에서 민중민주주의혁명론을 따랐는데, 이는 식민지성을 인정하지 않는 PDR노선에서 엄연히 모순적인 노선이었다. 왜냐하면, 식민지성이 존재하지 않으면, 봉건성이 없기에 곧바로 사회주의혁명을 주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론의 허점으로 인해 극소수파를 점하게 되었다. 민중민주파로 오해되는 경우가 있으나, 민중민주파는 NDR계통에서 파생된 그룹이며, PDR계통은 PD노선과 관련이 없다.
이 중 CDR론과 PDR론의 실천적 결합을 주장한 NDR론이 운동의 주류로 성장했다. 이후 CDR은 NL좌파가 분리되어 생성된 21C의 이념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고, PDR의 방법론을 차용한 제파PD가 탄생한다.
2.4. 86년~87년: 2단계 논쟁(NL-CA 논쟁)
NDR이 학생 운동의 주축으로 자리잡은 86년, 강철서신이라는 팜플렛이 전국의 대학가와 공장지대를 강타하였다. 훗날 서울대 단재사상연구회 출신의 김영환(1963)이 뿌린 것으로 알려진 강철서신은 과감하게 북의 주체사상을 소개하고 있었고, 반공반북의 억압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북에 대한 정보가 지극히 제한적이었던 학생운동가들은 오히려 체제에 대한 반감으로 주체사상에 경도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주체사상이 제시하는 반미투쟁, 민족대단결의 주장에 따라서 NL을 구성하게 된다. # 주체사상은 이전까지의 이론에서 설명되지 않던 한국인의 '''민족성'''에 대한 부분이 해소(?)시켰다. 이전까지의 이론들은 민중이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서로서로 우리가 남이가 식의 공동체 정서가 남아있는 한국에서 무자비한 계급혁명을 완수할 이론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은 깔끔하게 이를 "민족적 애국인사"와 그렇지 않은 자들로 이분화 시켜버린다. 일단 민중 주체의 혁명을 하긴 하되, 양심적인 자본가나 기업가는 우리 편이고, 민족적 공동 이익을 위한 그 외의 사회 상층부 인사들도 전부 규합 대상이라는 것. 이들은 현 단계를 일제시대와 별 다를바 없는 식민시기로 규정했기 때문에 민족해방이 우선이라고 불렸고, 민족공동체 건설을 최 우선으로 꿈꿨다.
이러한 주체사상의 유입은 당시 젊은 세대들에게 애국과 민족이라는 기치 하에 엄청난 감수성 폭발을 일으키고, 순식간에 사회혁명과 민족봉승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는 꿈을 심어주기에 이른다. 반면 '''민족이 장땡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 단계가 아직 레닌의 이론에 나와있듯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완성단계에 머물러있고, 이를 먼저 해결 해야 그 다음에 비로소 민중이 주체가 될 수 있는 사회가 다가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 상층부와 민중(민족)을 분리한 민족민주주의 혁명이 완성되어야 그 다음에 민중이 주체가 되는 혁명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민족 민주 민중, 즉 '삼민투' 투쟁을 함께 이끌던 이들은 결국 견해의 차이로 인해 자민투(자주민족투쟁위원회)와 민민투(민족민주투쟁위원회)로 분열되었고, 자민투는 NL로, 민민투는 CA으로 발전하게 된다. CA는 당시 현재의 정부를 타도하고 제헌의회를 구성해서 아예 나라를 새로 만들자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는 사실상 러시아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케렌스키 정부의 설립을 본딴 것이다. 민족민주를 주장하던 CA는 ND라고도 불렸다. 80년대 중반까지 NL과 CA는 계속적으로 이론적 갈등을 겪었다.
6월 항쟁의 진행과정에서 NL은 일반 시민에게 잘 다가갈 수 있는 직선제 개헌을 목표로 내세운 반면, CA는 기존의 제헌의회 수립 주장을 반복했기에 CA의 세가 위축되고 NL이 학생 운동의 주류로 자리잡게 된다.
2.5. 88년~90년: 3단계 논쟁(NL-PD 논쟁)
80년대 말에 와서 CA는 분열되었다. CA 다수파는 NL계에 합류했으나 이들은 주류 NL과는 달리 북한의 주체사상에 반대하는 소위 '비주사 NL'(NL좌파) 노선으로 나섰다. 나머지 CA 소수파는 ND(민족민주)를 표방하며 사노맹등에서 활동한다. CA의 다수파는 21세기 진보학생연합으로, 소수파는 전국학생회협의회로 전화했다.
NL과 함께 학생운동진영을 양분하던 CA그룹이 약화되자 PD(민중민주)그룹이 약진하기 시작한다. PD는 기본적으로 레닌주의노선을 따른다는 점에서 CA와도 유사했지만, CA그룹이 NL의 개량주의와 철저히 단절하지 못해 와해된 한계를 비판하며 급진적인 운동을 주장했다. PD는 89년부터 NL에 맞서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4]
이 시기 NL과 PD 사이에 사회구성체 논쟁이 벌어진다. NL은 한국을 봉건제의 연장, 반 봉건 상태의 국가로 보았다. 그러나 NL의 주장은 북한의 이론에 편향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PD는 한국을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보았다. 이 NL과 PD의 대립 구도는 6월 항쟁, 직선제, 노태우의 당선, 90년대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미약하게나마 진보정치 진영에 뿌리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2.6. 90년대 이후
90년대에 들어서 이념 논쟁의 기반이었던 학생운동 자체가 쇠락하였다. 학생운동 자체의 문제도 있었으나[5] , 학생운동 대신 정치적 이슈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시민사회운동이 성장한 것도 학생운동 쇠퇴의 원인이었다. 이를 두고 학생운동은 그 사명을 다했다는 비관론도 없지는 않다.
그래도 이들 세력을 기반으로 1998년 국민승리21을 거쳐 본격적인 진보 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출범하고 진보 세력이 정치권에 입성하면서 8~90년대의 사상 논쟁이 열매를 맺었다고 평가하는 시각도 있었다. [6]
2000년대에 들어 학생운동은 정치적 사안을 벗어나 학내 인권 운동이나 청년 실업 문제 등 사회 현안에 집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정치적 이론을 가지고 싸우던 기존 운동권 세력은 세가 미약해졌다. 그 와중에 학생운동 개혁 이론이 나오기도 했지만 정작 현장에선 별 성과를 얻지 못하는 중(...)
3. 평가와 비판
80년대 당시 학내 운동권 세력들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려는 의도로, 더 나아가서는 새로운 사회를 설립하고자 하는 의도로 여러 이론적 기반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될 사상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는 결여되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다소 이상한(…) 이론을 재조립해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이러한 사구체 논쟁인 것이다. 당시 사구체논쟁은 학생운동, 재야운동권, 노동운동을 비롯한 운동권 각계각층의 이론가들이 총 망라하여 나름대로 심도있게 벌인 논쟁 이었다.
80년대 중반부터 사구체 논쟁은 너무 복잡해지고, 서로가 서로를 지엽적인 문제로 말꼬리 잡는식의 논쟁이 되어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때 나온 강철서신의 품성론(쉽게 요약해서 말은 그만하고 직접 행동으로 보이라는 주장)은 순식간에 주사파를 학생운동의 주류로 만들며 사구체 논쟁이 종료되게 된다. 그 이후의 NL-PD간의 논쟁은 이미 NL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 상황에서 벌어진 지엽적인 논쟁이다.
4. 참고 자료
한국대학신문
[1]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특유의 뉘앙스를 살리고자 society 대신 이 표현을 쓰기도 한다.[2]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을 이상적인 국가로 바라보고, 미국식 민주주의 시스템이 한국의 롤 모델이라고 파악하는 이론가들도 꽤 많았다.[3] 물론 당시에는 아예 시중에서 판매가 금지된 금서였으니 번역의 퀄리티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4] 90년대 이후에는 CA, ND계열도 사실상 PD로 분류된다. [5] 이게 직접적으로 드러낸 사건이 1996년 한총련 연세대 사태와 1997년 이석 치사 사건이며 이 사건은 한총련이 결정적으로 쇠하게 된 사건으로 꼽힌다[6] 그러나 그러한 성과는 2012년 통합진보당의 부정선거와 진보 정당의 대분열로 인해 다시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