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대중당

 




1. 개요
2. 활동
3. 당 강령
4. 선거 이력
5. 기타
6. 역대 선거결과
7. 같이 보기
8. 둘러보기


1. 개요


사회대중당은 헌정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는 유일하게 국회에서 제1야당이 된 진보정당이다. 총선거에서 득표율은 낮았지만, 제2공화국 당시 민의원 제1야당이며 이는 민주화된 현재의 제6공 체제에도 좌파/혁신/진보 정당이 이런 위치에 있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 당시 총선은 민주당이 완벽하게 싹쓸이해서 남아 있는 의석이 얼마 없었고, 제1야당이라 해도 겨우 참의원 1석, 민의원 4석을 차지했으므로 이름뿐인 제1야당이었고 얼마지나지 않아 민주당내 신구파 갈등으로 신민당이라는 거대야당이 나타나게 되면서 일개 군소야당이 되었다.

2. 활동


제2공화국 시기 활동했던, 대한민국의 혁신(진보)정당.[1] 약칭 사대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사실 혁신(진보)정당으로 분류되곤 하지만, 사대당 정당의 구성원들을 파고 보면, 크게 보면 '중도'에서 '온건우파'에 가까웠다. 미군정 시대에 존재했던 여운형근로인민당김규식민족자주연맹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그리고 이승만 정권에서 강제해산된 조봉암진보당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진짜 좌익으로 분류되었던 세력들은 한국전쟁 시기 전후로 거의 '멸균실' 수준으로 사라졌으니.. 물론 이들이 일제강점기 때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했던 것들은 맞지만 해방 이후 박헌영 등 정통 좌파 세력에게 기회주의 회색분자라고 낙인찍히고 조선공산당에서 쫒겨남으로서 사회주의 계통과는 완전히 연을 끊게 된다.
한국의 '혁신계'(이른바 진보계열) 세력들은 해방공간 당시의 중도파 세력인 여운형, 김규식 세력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이들은 국회의원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제헌의회와 1950년 2대국회에서 1/3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을 거치며 상당수 인적 자원(조소앙, 원세훈 등)이 납치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고 휴전 이후 조봉암과 서상일을 중심으로 정치적 재기를 모색하게 되지만, 불행히도 공산주의자가 '멸균실' 수준으로 사라진 한국사회에서 50년대의 혁신계는 당시 '사회적으로 좌익'으로 취급받았고 이승만 정권 당국으로부터 철저한 경계를 받았다. 실제로 혁신계의 거두 조봉암이 1959년에 처형된 형국이었으니..
당시 사회대중당의 구성을 보면 정치성향 스펙트럼이 넓었던 것이 특징인데, 미군정 시절 반공 활동가로 유명했던 인물들도 수두룩했다. 대표적으로 민단에서 재일교포 북송 반대 투쟁에 앞장섰던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한국민주당 출신 서상일, 좌우합작남북협상을 주도한 김규식의 비서를 지낸 송남헌, 안창호 선생의 비서를 지낸 구익균, 심지어는 미군정 때 대표적 우파정당이었던 한독당 출신 인사, 서울대학교 반탁학생회의 수장이자 이승만 대통령 시절 경무대에서 근무하다가 결별한 박용만까지 있었으니... 이들을 정의하라면 평화통일과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진보계 정당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듯 싶다.
그리고 이렇게 정치노선과 출신이 다른 다양한 인사들이 한 정당에 묶여 있다 보니, 다음 항목에 나오는 계파간의 대립이 고질병이 되었다.

3. 당 강령


혁신 정당의 재건을 목표로 舊 진보당 간부들과 민주혁신당등 혁신세력 일부가 결집해 결성되었다. 1960년 5월에 창당준비위가 조직되었고, 6월에 당 조직 결성되었다.
사회대중당은 "4.19 혁명의 완수를 저지·반전시키려는 일체의 반동 세력과 혁명의 진행을 억제·침체시키고 협소한 당파적 이익만을 얻으려는 일체의 기회주의적 보수 세력과 과감히 싸울 것"을 결의하고 이어 "농민, 노동자, 지식인·중소 상공업자 및 양심적 자본가 등의 대변자가 되지만 결코 계급주의적 입장을 의미하지 않는다"것 당령으로 밝혀 "민주 혁명의 완수와 평화적 통일의 실현 및 민주적 복지 사회의 실현이라는 역사적 민족적 과제를 담당, 완수하는 것"을 밝혔다.
정강 및 정책은 다음과 같다.
  • 유엔 감시 하의 자유 선거를 통한 평화적 민주적 국토 통일 달성 등 4가지의 통일 및 외교 정책.
  • 3.15부정 선거 법 위반자의 처단.
  • 불법 축재 몰수 등 6가지의 4월 혁명 완수 정책.
  • 부재 지주의 토지 겸병의 불법화.
  • 주요 농산물에 대한 가격 보증 제도 등 3가지의 농어촌 진흥 정책.
  • 계획 경제와 자립 경제를 혼합시킨 계획성 있는 경제 체제의 확립.

4. 선거 이력


1960년 7월 29일, 제5대 국회의원 선거을 치르고, 전국 득표율 6%.. 민의원에서 4석, 참의원에서 1석을 차지했다.(당시, 사회대중당은 경상도에서의 호응이 상당했다. (특히 대구광역시부산광역시일대가..) 예를 들어, 사회대중당 선거 연설에 대구에서만 약 4~5만 명이 모였다고 할정도...## 반면, 서울은 겨우 3천명 왔다고 한다.[2]
7.29 총선때, 사회대중당은 사실 6% 득표보다 더 많은 지지율을 받을 수 있었는데, 문제는 당內 계파 다툼과 공천문제로 분열이 매우 심각했었다.# 어느정도였냐면, 한 예를 들어서 부산 동래구에만 사회대중당 소속의 4명의 후보자가 한꺼번에 지역구 출마를 낸 것을 비롯해 모두 5곳에서 2명 이상의 후보가 같은 당 간판 아래 출마한 이런 사례가 나돌급이었다.(...)# #
그리고 이어 1960년 12월 네 차례에 걸쳐 치러진 지방 자치 선거가 치러졌는데[3], 이 선거에서도 사회대중당을 비롯한 혁신계는 심각한 계파 갈등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완전히 몰락한 수준을 보여줬다.[4] 이런식으로 계파 싸움과 분열로 단일화하지 못해 전국적으로 갈라져버려 많은 득표를 얻지못하고 사회대중당은 커다란 한계점을 남기게 되었다.
이후, 김달호를 중심으로 사회대중당이 새롭게 출범하여 이듬해 1961년 초창기 통일 운동하고 2대 악법 반대 투쟁에 큰 역할을 이끌어내기도 하였으나, 1961년 5월. 5.16 군사정변으로 군사쿠테타 세력이 정치 활동 전면 금지령을 내리면서 사회대중당은 해체되고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대부분의 세력은 민주당으로 흡수되었다.

5. 기타


여담으로 당시 "혁신계"라고 불리던 집단 중 북한과 연계된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고 한다.# 1차 인민혁명당 사건 제 1차 인혁당 사건은 남파 간첩 등 일부의 사건에 혁신파 중 북측과 '순수한' 접촉한 사람들까지 엮어서 크게 만들려다가(즉 부플리는 조작. 간첩은 있었음.) 폭로 등으로 해결된 사건이다. # 당시 항명파동[5]으로 사표를 쓰고 퇴직한 어느 한 검사는 "당시 혁신계라고 불리던, 사회대중당과 625당시 북한에서 월남에서 활동하던 사람들 질이 가장 안 좋았다"라고 평가한다.[6][7] 한편 주북 소련 대사 알렉산드르 푸자노프는 1960년 6월 13일 북한 김일성과 가진 대담에서 그가 '우리는 (남한의) 대중 정당이 하나가 아니라 몇 개 있으면 좋겠다고 본다. 현재에 이런 정당은 (한국)사회당, 사회대중당 등이다. 이 정당의 지도부들과 우리들은 좋은 관계를 갖고 있고 이 정당들이 우리 영향 하에 있다'고 발언한 것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6. 역대 선거결과



7. 같이 보기



8. 둘러보기




[1] 당시에는 좌파, 진보라는 단어보다는 혁신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 이는 일본의 영향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혁신이라는 단어를 "진보"처럼 사용했고, 당시 일본에서 우파들이 진보라는 단어를 썼다. 심지어 일본진보당(1945년)은 2차대전 당시 집권 극우세력이었던 대정익찬회를 뿌리로 하고, 2차대전 당시 입헌민정당이 모체다.[2] 이 시기의 대구광역시는 혁신계의 총본산이라 볼 수 있을 정도로 지식인들 활동이 매우 활발했던 시기였다. 제2공화국 시기, 혁신계 정치운동을 비롯해 교원노조 운동, 노동운동 등 결성이 시작된 곳이 대구였다. [3]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그리고 1995년 김영삼 정권 때 지방 자치 단체장 선거까지 치러지기 전에는 실시되지 않았던 전면적인 지방 자치 선거다.[4] 사회대중당에서 도의원이 2명 정도 된 것을 빼놓으면, 당선됐다고 내세울 만한 걸 찾아보기가 어려웠던 정도.[5] 검사들이 상부의 무리한 수사요구에 "증거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하느냐"라며 항명한 사건.[6] 출처 : «사법살인 - 1974년 4월의 학살». 천주교인권위원회 편저[7]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사대당은 출신 성분이 다양하고 이념의 스펙트럼이 넒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