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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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같이보기


1. 개요


한국의 민속 신앙에서 을 모시는 사당으로, 솟대, 장승, 무당 등 같은 한국 민속 신앙의 일종이다. 성황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낭당의 이름에 대해서는 선왕당(仙王堂)에서 나왔다고 보아 고대 한민족 고유의 선도 신앙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중국의 성황당(城隍堂)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존재한다. 조선 시대의 오주연문장전산고 화동음사변증설(華東淫祀辨證說)에는 고대 마한소도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我東八路嶺峴處有仙王堂。卽城隍之誤。古叢社之遺義歟。是如中國嶺上之關索廟也。或建屋以祠。或疊砂石成磊磧於叢林古樹下以祠之。行人必膜拜唾之而去。或懸絲緯。或掛紙條、髢髮。累累然。其積磊以祠者。或沿《通典》馬韓祭鬼神立蘇塗之遺俗也歟。【《演繁露》云。《通典》馬韓祭鬼神。立蘇塗建大木。以垂鈴鼓。注。蘇塗有似浮塗。按浮塗。卽浮圖。浮圖。卽塔也。】

우리 동방 팔로(八路)의 고갯마루 곳곳에 선왕당(仙王堂)이 있는데 이는 성황(城隍)의 오기다. 옛 총사(叢社)[1]

의 남은 흔적으로 중국에서 고개 위에 세운 관색묘(關索廟)[2]와 같다. '''건물을 지어서 사당으로 삼거나 숲의 오래된 나무 밑에 흙이나 돌을 무더기로 쌓아서''' 제사터로 삼기도 한다. 지나는 사람들은 꼭 절을 하고 침 뱉고 지나간다. '''실이나 천을 매달아놓거나 종이조각이나 머리카락을 묶어서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돌무더기를 쌓아서 제사지내는 것은 어쩌면 《통전(通典)》에 "마한에서는 귀신을 제사지내는데 소도(蘇塗)를 지었다." 한 것이 남은 풍속일지도 모른다.【《연번로(演繁露)》[3]에는 《통전》의 '마한에서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소도(蘇塗)를 지어서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매달아두었다'.는 기록에 주석을 달아 "소도는 부도(浮塗)와 닮았는데 곧 부도(浮圖)로써 부도는 곧 이다."라고 하였다.】

대부분은 영험하다는 신목에 장식을 달아 돌을 쌓아놓거나[4] 사당을 지어서 신의 영역임을 표시하고, 신에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로 조성된 일종의 토템이다. 그래서인지 서낭당의 나무를 베면 저주를 받는다는[5] 등의 묘사가 자주 나온다. 근데 지난 세월 동안 도시개발이나 도로건설 등으로 숱하게 베어나갔다.[6]
서낭당의 유래를 두고 삼한시대 소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북방 민족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중국의 성황묘 신앙이 한국에 전래되어 토착화된 결과라는 설도 있다. 어느 하나를 집어서 그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애초에 같은 뿌리를 가진 민간 신앙이 상호간 교류를 통해서 이래저래 섞인 결과가 서낭당이라고 볼 수 있다. 서낭당이 마한의 소도와 뿌리가 닿아 있다는 것은 이미 조선 시대에 제기된 설로 오주연문장전산고가 편찬되었던 시기에 이미 현재 알려진 모습과 같은 서낭당의 모습이 확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몽골에 가면 '오보'라고 해서 위 사진과 똑같이 생긴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서낭당의 기원이 북방 초원의 유목민족 문화와도 어느 정도 닿아있는 것이 아니냐는 추정이 나왔는데, 오보는 초원에서 일종의 이정표 내지 경계 표시선 역할도 하고 있는데, 서낭당의 위치도 대부분 마을 어귀나 입구 혹은 고갯길의 길목으로, '''여기서부터는 신의 영역이고 신이 보우하는 곳이니 다가오지 마라'''는 의미가 있었다. 어떤 영역의 경계선에 위치해서 그 경계선을 오가는 자들을 감시하고 그 영역을 관장한다는 신격 덕분에 주로 어떤 지역의 수호신처럼 여겼다. 서낭당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중국 성황묘 역시 성황(城隍) 즉 성벽해자를 관장한다고한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공을 막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 성황신에게 고려 조정이 관직을 하사한 일도 있다.
서낭당(성황당)의 신으로 받드는 신들은 단순히 '서낭(성황)님'이라고 부르지만, 신격을 보면 한국이나 중국이나 모두 실존인물들이 대부분인 경우가 꽤 많다. 유명한 강릉단오제의 경우 '대관령국사성황'으로 모셔지는 신이 신라 시대의 김유신[7] 내지 고승 범일 스님이었다고 하고, 부여군 임천면에 소재한 가림성의 성황신이 고려 시대의 명장 유금필이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순천에서도 고려 초기의 인물인 김총을 '순천진례산성황'으로 모셨다. 의성에서는 견훤을 막아 싸우다 전사한 의성부의 성주장군 김홍술[8]을 성황신으로 모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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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숲속에 세우고 잡신(雜神)을 제사하는 사당집을 가리키지만 으레 사찰을 가리키는 다른 명칭으로도 사용한다.[2] 중국 귀주성 관령현과 진령현 사이에 있는 관색령 고개에 세워진 사당. 관우의 아들로 제갈량을 따라 남쪽을 정벌했다는 관색(關索)을 모시는 사당이다. 『삼국지三國志』에는 관우에게 관색이라는 아들이 있었다는 언급은 없지만 중국 민간에서는 인기가 좀 있었는지 관색을 주인공으로 한『화관색전』이라는 소설도 있다.[3] 중국 송나라의 학자 정대창(1123~1195)의 저서.[4] 이 돌과 흙을 두고 '''외부의 적이 쳐들어 왔을 때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서'''라는 매우 실용적인 용도가 있다는 해석도 있다.[5] 무속에서는 이를 '동티 났다'고 표현한다.[6] 사실 중국에서도 문화대혁명으로 사당들이 많이 파괴되었고, 일본에서도 메이지 시대 신불분리령에 수반한 폐불훼석으로 사찰은 물론 전국의 신사 가운데도 강제통폐합당해 사라진 신사가 8만 곳이나 된다. 신사(신토) 항목 참조. 일본의 조치가 국가신토를 따르지 않는 신사들을 금했고 중국의 경우 공산주의, 마오주의 이념을 내세워 봉건 잔재를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전통 문화에 대한 파괴가 이루어졌다면 한국의 경우는 아예 민속신앙 자체에 대한 부정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조선 시대의 기록에는 어느 마을의 서낭당 제사를 금지하고 폐지하였음을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한 내용이 종종 나오고, 특히 한국 전역의 서낭당 대부분을 사라지게 만든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새마을운동의 경우에는 그 배후와 선봉에 개신교가 있었다. 그나마 1980년대에 들어서 '민족문화 재흥'이라는 정책이 나오면서 미신으로 몰려 타파되었던 마을굿들이 부활한 것.##### [7] 허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에 '대령산신찬'이라고 해서 대관령산신에게 바치는 글이 있는데, 이 글에서 대관령산신이 김유신 장군이라는 설을 소개했다.[8] 의성 김씨의 시조라고 하는데, 김홍술이 전사하자 왕건이 "'''내가 팔을 잃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슬퍼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