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총
'''金摠'''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후백제의 장군으로 순천의 호족.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후백제에서 인가별감을 지냈다.
2. 생애
김총(金摠)은 825년(남북국 시대)에 태어나[1][2]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을 도와 관직이 인가별감(引駕別監)에 이르렀으며 많은 공을 세워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순천(順天)을 본관으로 하였다고 한다. 순천 지역에서는 김총을 진례산의 산신인 순천성황신(順天城隍神)으로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
유명한 후손으로는 조선 초기의 재상인 김종서, 왜란과 호란 정국의 중요 인물들인 김여물-김류-김경징의 3대, 한화그룹 총수인 김승연 일가 등이 있다.
3. 대중매체에서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능환, 추허조와 더불어 견훤이 신라의 무장이던 시절부터 견훤을 따른 최고참 장수이자 견훤의 의형제로서 등장한다. 배우는 류태술.[3] 하지만 의형제로서 부각되는 장면은 없고 능창을 의형제로 받아 들이면서 의형제의 순서를 말할 때 잠깐 인사하는 정도. 의형제의 순서는 견훤-능환-추허조-능창(수달)-김총의 순서. 능애의 경우 친동생이고 능환이 서방님이라고 존칭을 붙여주니 이 문제에서는 열외인 듯하다. 사실 이때 말고는 견훤과 다른 의형제들도 김총을 아우로 여기는 장면이 전혀 없다. 김총 본인도 능창과 추허조가 죽었을 때조차 형님의 원수를 갚는다는 다짐 1마디 없다.
순천 김씨의 시조인데다 고향에서는 산신으로까지 모셔질 정도면 이름있는 인물임에도 극중 대우는 안습하다. 등장 초반에는 나름대로 비중이 있었지만 극의 흐름이 진행되면서 애술, 신덕, 박영규, 최필, 상귀 등 새로 등장한 장수들의 활약이 커지면서 비중이 줄어든다. 그나마 극 초반인 6화~7화 무렵부터 최종화인 200화까지 꾸준히 등장하고 비중도 아주 공기 취급을 받는 건 면하였다.
무력에 대한 묘사는 애매한 편인데 병졸들을 상대로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다른 장수들에게는 후달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편. 처음에 견훤이 서남해에 파견되어 수달과 만났을 당시에는 추허조와 더불어 수달이 숨겨놓은 수십 명의 복병들을 가볍게 쓰러뜨리며 무쌍을 찍는 등 엄청난 싸움 실력을 과시했으나 이후로는 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왕건과 단기 접전을 벌였을 때에는 불과 10여 합만에 왕건의 칼에 맞고 부상을 입어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2차 조물성 전투가 다루어진 147화에서는 신덕의 부장으로 나오는데[4] 박수문과 몇 합 나누다가 박수문이 평소 잘 쓰지도 않는 언월도 자루에 얻어 맞고 낙마를 했다. 일리천 전투에서는 홍유에게 2합만에 칼이 날아가고 사로잡힌다. 싸움을 해서 이기는 경우는 부장급 장수들 이하를 상대할 때. 후백제 최고참 장수치고는 대우가 안습한 편.
견훤이 견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군사 지휘권을 갖고 있던 신덕을 해임하고 자리에 자신의 사위 박영규를 앉힐 때 애술과 더불어 박영규를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다만 견금강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지지했다기보다는 연이은 대패로 위축된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는 박영규의 입장에 공감하는 우직한 무장의 모습을 보여준 것에 가깝다. 결국 견신검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 세력은 거사를 시작하면서 김총을 애술, 박영규와 함께 구금하였는데 쿠데타 세력도 이들이 우직한 무장에 불과하여 쿠데타를 도모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을 뿐 적대하지는 않았다.[5]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에는 견신검에 의해 다시 중용되는데 김총이나 애술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게 무장으로서 조국을 등질 생각은 못했고 견금강이 죽고 견신검, 견양검, 견용검 형제가 전부 한통속이라 70세 넘은 견훤을 다시 모셔온들 후계자가 없어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유일한 후계자인 견신검 아래서 계속 후백제를 위해 싸우는 것 뿐이었다. 견신검이 김총과 애술을 살려준 이유도 이들이 후계자 싸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고 사실상 중립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며 고려와의 싸움을 위해 쓸만한 장수들은 살려서 포섭할 필요성이 있다는 이해 관계도 작용하였는데 애술은 유금필과 싸우게 해주겠다는 말에 혹해 견신검의 회유를 받아들였다. 이후 고려군과의 일리천 전투와 황산 전투에서 항복을 하는데 견훤도 애술과 김총에게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고 하며 윗사람인 견신검의 명에 의해 할 수 없이 전장에 나온 것이라며 왕건에게 용서해 줄 것을 요청하는데 황산에서는 김총이 견훤을 부축한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항복한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그려지지 않았지만 견훤에게 용서받은데다 쿠데타에 가담한 것도 아니며 항복 이후 후백제군의 이동 경로도 알려주었고 실제 역사에서도 김총 가문은 후세에도 이어져 오늘날의 순천 김씨가 된만큼 왕건에게 해를 입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가 무너진만큼 항복한 장수들이 많은데 이들을 죽이면 민심에 악영향을 주는데다 실제로 왕건이 죽인 인물은 왕위 쟁탈 반란의 주동자였던 능환, 견양검, 견용검 뿐이었고 다른 이들은 모두 용서했다.[6]
사실상 후백제 인물들 중 유일하게 극 초반부터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인물이다. 초반 캐릭터들 중 후반부까지 살아 남았던 능애와 능환은 견신검의 몰락 이후 처형되었고 견훤은 등창이 터져 절에서 죽는다. 수달과 추허조는 중반부에 각각 전사하였고 초반부터 견훤의 부하였던 오리지날 캐릭터인 방장군도 수달이 붙잡힐 무렵 신숭겸에게 전사한다. 견훤의 부인이었던 박씨는 방송에서는 편집된 부분의 대본을 보면 견신검이 항복하고 왕건이 완산주에 입성할 즈음에 목을 매어 자결한 것으로 되어 있다.[7] 결국 초반부터 끝까지 살아남은 인물은 김총이 유일하다.
우직하고 맹한 무장인 애술보다는 현실 타협적이고 약삭빠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견신검이 애술과 김총을 살려주었을 때 애술은 뭐라고 해야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지만 김총은 즉시 '어익후 태자님 감사합니다. 사실 우리가 무슨 죄가 있나요? 금강 태자가 너무한 거였지.'라고 아부를 하기도 했고[8] 일리천 전투 때 견훤에게 끌려갔을 때도 애술은 "죽여주시옵소서."라고 했지만 김총은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했다.
[1] 공식적으로는 생몰년 미상이나 순천 김씨 종친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825년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후백제 건국 당시 나이가 지나치게 많게 되어 연대가 잘 맞지 않는다(견훤이 867년생이고 창업이 892년이며 후백제 국호를 사용한 것이 900년).[2] 궁예의 손자라는 주장이 있다. 궁예의 손자가 어떻게 후백제의 장군이 되었는지를 추정한 글에 따르면 왕건의 나주 공방전 당시 세손인 김총도 왕건을 따라 출전하였고 왕건이 철원으로 귀환한 후에도 나주에 있던 도중 왕건의 역성혁명이 일어나자 견훤에게 귀순했다.#[3] 2006년 KBS 드라마 대조영에서 개그 캐릭터이자 설인귀의 인생 동반자인 홍패를 연기했다.[4] 극중에서는 신덕이 한참 나중에 나왔는데 신덕이 고속 승진이라도 한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신덕이 김총의 부장인 것이 자연스럽다.[5] 박영규는 견훤의 부탁으로 견금강의 후원자 역할을 맡았지만 후계자 문제에서 중립적인 입장이었고 견신검에게는 매형이다보니 살 수 있었다.[6] 견신검의 경우 견훤이 죽고 백제 영토의 민심도 고려에 완전히 동화되자 후환을 없애려고 몰래 죽였다는 추측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 당장 죽였을 가능성은 낮은 편.[7] 소설판에서는 견훤의 처우를 놓고 물러터진 모습을 보인 견신검에 실망해 비구니가 됐다고 나온다.[8] 단순 아부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 견금강은 견훤의 지지만 믿고 구신들의 마음과 지지를 얻는데 소홀했던건 사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