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호

 

* 정치인/목록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서민호'''
'''徐珉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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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월파(月坡)
'''본관'''
이천 서씨#
'''출생'''
1903년 4월 27일
전라남도 흥양군 대강면 죽산리
(현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 죽산마을)#
'''사망'''
1974년 1월 24일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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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전 정치인.

2. 생애


1903년 4월 27일 전라남도 흥양군 대강면 죽산리(현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 죽산마을)에서 아버지 서화일(徐和日)[1]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성고등보통학교,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 미국 웨슬리언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정치사회학부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덴마크에서 농권사회 및 농권교육을 연구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보성중학 3학년 재학 중에 있으면서 소위 반도목탁지(半島木鐸誌)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1924년 미국으로 유학할 당시 '급진과격주의사상'을 가졌다고 하여 용의조선인명부에 오르기도 했다.#
귀국 후 1931년부터 아버지가 경영하던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 소재 남선무역주식회사(南鮮貿易株式會社)#에 감사로서 경영에 참여하였고, 1935년부터 1942년까지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한편, 1935년 벌교 송명학교(松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후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전에 표면상 조선흥업주식회사(朝鮮興業株式會社) 사장취체역으로 경영에 참여하면서 조선어학회 활동에 가담한 것이 일경에 탐지되어 함흥형무소에서 1년을 복역하다가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8.15 광복미군정 당국에 의하여 1946년 6월 전라남도 광주부윤, 같은 해 10월 전라남도지사에 임명되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고흥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단민당 유성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고흥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2년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국회 조사단장으로 활동하던 중, 그 해 4월 자신을 암살하려던 대위 서창선을 살해한 사건으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그러다가 1960년 4.19 혁명으로 출옥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고, 민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61년 5월 남북교류를 주장하다가 입건되었으나, 혁명검찰에 의해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63년 자유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임되었고, 그 해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5년 민중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그러나 같은 해 한일기본조약을 반대하는 정치투쟁으로 김재광, 윤제술 등과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66년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민주사회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67년 민주사회당을 대중당으로 개칭, 제6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으나, 야당후보 단일화를 위해 사퇴하였다. 같은 해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중당 후보로 전라남도 고흥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신형식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71년 신민당과 대중당의 합당을 추진하다 이루지 못하고 신민당에 개별 입당하였다. 그 해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공화당 신형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3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200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전남 제13선거구(고흥군 을))
한국민주당
12,899표 (46.36%)
낙선 (2위)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제26선거구(고흥군 을))
무소속
'''27,902표 (81.14%)'''
'''당선'''
'''초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제15선거구)
무소속
'''23,634표 (59.68%)'''
'''당선'''
'''재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제12지역구)
자유민주당
'''27,384표 (31.3%)'''
'''당선'''
'''3선'''
1967
제6대 대통령 선거
대중당
후보 사퇴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제9선거구(고흥군))
대중당
'''44,364표 (50.43%)'''
'''당선'''
'''4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제10선거구(고흥군))
신민당
31,186표 (35.64%)
낙선 (2위)


[1] 1860 ~ 1933.10.9. 극빈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자수성가하여 일제강점기보성군 벌교읍고흥군 동강면을 중심으로 사업가 및 자선가로 활동했다. 1919년~1925년 벌교금융조합(筏橋金融組合) 감사##2, 1923년~1925년·1929년~1931년 남선무역주식회사 이사##2#3#4, 1926년~1927년·1933년 남선무역주식회사 대표이사##2#3, 1926년~1933년 벌교수산주식회사 이사##2, 1931년 벌교번영토지주식회사(筏橋繁榮土地株式會社) 대표이사# 등 사업가로서 여러 회사 경영에 참여하는 한편, 1914년·1918년에 각각 벌교사립학교(현 벌교초등학교) 기금 및 영산포공립고등심상소학교 증축비에 각각 20원과 토지를 기부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목배(木杯) 1개씩을 수여받은 바 있으며##2, 1922년에는 고흥청년회관 건립기금으로 500원을 기부하였고# 1930년 고흥 동강면 소방조(消防組)에 250여 원을 들여 피복을 구입·기부하였다#. 또한 1931년 대지주로서 소작료를 530여 석 경감해주고 소작조합을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농자 융통·우수 소작인 포상·종자 교환 등 소작인의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그후 1933년 10월 9일 별세하였는데, 임종 때까지도 그동안 모은 돈 5500원을 고흥동강공립보통학교(현 동강초등학교) 장학기금·동강면 빈민구제금·동강면 노동리 기금·동강기독교회 유지금·동강주재소 종각 건설비·고흥경찰서·고흥유치원·벌교공립보통학교(현 벌교초등학교) 장학기금·벌교공립보통학교 건물 건축금·벌교사립송명학교·벌교기독교유치원·벌교사립경로당·경성사립계성고등보통학교 대강당 건축비 등 여러 단체에 기부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1936년 그의 자선활동을 기리는 송덕비가 고향 고흥군 동강면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