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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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泂植
1926년 10월 9일 ~ 1991년 12월 8일
1. 개요
2. 상세
3.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관료, 정치인이다. 본관은 고령(高靈)[1], 호는 귀범(歸帆).
동생 신중식[2]은 국정홍보처장, 제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2. 상세


1926년 10월 9일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옥하리[3]에서 해방 후 해남군수를 역임한# 아버지 신지우(申址雨)와 어머니 경주 이씨 이중경(李仲卿) 사이의 4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흥양공립보통학교(현 고흥동초등학교)와 경기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고흥군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64년 1월 민정당 윤보선 대표최고위원의 정책기조 연설이 박정희 정권에 도전하는 것이라 하여 의정단상에서 비판하고, 징계동의안을 제출하였으나 흐지부지되었다. 1965년 3월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만류에도 특혜금융에 대한 책임을 물어 장기영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장관 해임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표결에서 재적 과반수 찬성을 얻지 못해 폐기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고흥군에서 출마했으나, 군소정당인 대중당 후보 서민호에 700여 차로 패해 낙선했다. 1969년 국정교과서주식회사 사장이 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고흥군 선거구에 출마해 신민당 후보 서민호와 접전 끝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6월 9일 공화당 대변인으로 기용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고흥군-보성군 지역구(중선거구제)에 출마해 신민당 후보 이중재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 해 3월 대한민국 국회 상임위원장인 재무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75년 12월 제1무임소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이 된 김재규의 후임으로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건설부장관에서 사임하였으며 해당 선거에서 무소속 김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선거 후인 1979년 2월 민주공화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0.26 사건 이후인 12월 사무총장직에서 사임하였다.
1980년 5.17 내란 이후 신군부에 의해 서울특별시의회 본관[4]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이후 정치규제에 묶이다가 1984년 2월 해금되었다. 그 해 4월 한국국민당에 입당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고흥군-보성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민주정의당 이대순 후보와 민주한국당 류준상[5]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85년 8월부터 해태그룹 상임고문으로 활동였다.
1991년 12월 8일 간암으로 사망했다.

3. 관련 문서



[1] 시중공파 25세 식(植) 항렬.[2] 나이 터울이 14살이나 난다.[3] 인근의 고소리와 함께 고령 신씨 집성촌이다.[4] 당시 세종문화회관 별관[5] 아이러니한 것은 1996년 공천에서 밀린 류준상은 한나라당으로 전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