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봉
1. 소개
前 삼성 라이온즈 소속의 투수.
2. 선수 경력
경북고 시절 전성기의 주역으로 대통령배, 쌍용기(이후 화랑대기), 우수고교 초청경기에서 경북고의 우승을 이끈 에이스였다.[1] 경북고 졸업 후 고려대에 진학했는데, 고려대 1학년 때부터 국가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불과 20세에 선수 생활에 지장이 가는 큰 부상을 당했다.''' 1973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대회 때 대표팀이 묵고 있었던 호텔에 화재 사건이 났는데, 미리 대피한 다른 선수들과 달리 미처 대피하지 못한 황규봉은 결국 화재를 피하기 위해 '''3층에서 그대로 뛰어내리고 말았다'''.
생명은 건졌지만 허리 부상, 늑막염에 고소공포증, 협심증, 극도의 정신불안 등으로 1년 반 동안 투병 생활을 했다.[2]
다행히도 고려대학교 4학년 때인 1976년, 봄에는 대통령기 때 감투상을 수상하고 그 해 말에는 국가대표로 복귀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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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졸업 후 1976년에 실업 야구 팀인 한국화장품의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3] 입단 첫 해인 1977년 중순까지만 20승 이상을 올리며 팀의 에이스는 물론이고, 국내 최고의 투수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그 해 팀이 일본 원정을 가던 중 비행기 안에서 고소공포증으로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처음으로 고소공포증이 생겼을 때보다 증세가 더욱 심해졌는데, 고층에 위치한 입원실에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수 개월을 집에서 요양하며 증세가 조금 나아진 후에야 병원에 입원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79년 실업 야구에서 평균자책점 1위에 오르며, 한국화장품의 에이스로 다시 재기한다. 1980년에는 세번째로 성인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창설되며 삼성 라이온즈의 창단 멤버로 입단했고 그 해 3월 27일에 열렸던 MBC 청룡과의 개막전에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삼성 라이온즈 역사상 최초의 선발투수'''였던 셈. 이 때 그의 나이가 29세로 당시에는 노장이라는 얘기를 들을 무렵이었다.
프로 첫 해에 다승 공동 2위[4] 에 구원 1위[5] 에 올랐지만 이 때에 200이닝 이상을 던진 여파 때문인지, 이듬해에는 6승[6] 4패로 다소 부진했다.
역시 삼성 마운드를 이끌면서 역시 많은 이닝을 소화한 동기 이선희는 이후로 구위 회복을 하지 못했지만, 황규봉은 다시 재기했다. 1984년에는 10승[7] 2패로 승률 1위에 올랐고, 1985년에는 14승[8] 7패를 기록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후기 통합 우승을 경험했다.[9]
이듬해인 1986년에 3승 5패로 성적이 떨어지자 은퇴했다.
3. 은퇴 후
은퇴 후 삼성의 투수코치로 있었고, 1989년 이후 미국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지만 야구계를 아예 떠났다.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사업 실패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야구인들과 교류를 끊는 바람에 근황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사업 실패로 인해 가족들과 헤어져 부산에서 홀로 지냈다고 한다. 매제를 통해 2015년 11월에 대장암 판정을 받은 사실이 알려졌고, 끝내 2016년 1월 18일 사망했다. 워낙 근황을 알리지 않다 보니, 그의 부고도 '''중고교 동기이자 같이 삼성에서 원년멤버로 뛰었던 이선희를 통해 알려졌을 정도.'''
4. 여담
- 1982년 9월 4일, 구덕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10회말 4-3으로 이기는 상황에서 1사 만루 풀카운트 김용철 타석에서 폭투를 저질러 최초로 끝내기 폭투를 기록했다. 참고로 이때 포수는 이만수.
- 경상중학교 때 1년 유급하여 이선희와 동기생이다. 이선희와는 중학교 때부터 같이 야구를 해 온 사이다.
- 못할때 별명은 방구뽕(.....)이었다.
5. 연도별 성적
6. 관련 문서
[1] 경고 동기로 이선희가 있었지만, 이선희가 두각을 드러낸 건 한국실업야구에서였다.[2] 이 때문에 유급 경력이 있다.[3] 입단 동기로 김재박, 정구왕 등이 있다.[4] 7선발승을 기록하여 권영호, 이선희가 11선발승으로 팀내 최다 선발승 공동 1위, 성낙수가 8선발승으로 팀내 최다 선발승 3위를 기록해 팀내 최다 선발승 4위[5] 삼성의 창단 첫 세이브도 황규봉이 기록했다. 당시는 구원승 + 세이브인 세이브포인트로 기록하였다.(8구원승)[6] 5선발승[7] 4선발승[8] 모두 선발로만 기록하여 김시진(21선발승), 김일융 (20선발승)에 이어 그 해 최다 선발승 3위[9] 참고로 황규봉의 오랜 친구이자 원년 불운의 투수였던 이선희는 청룡으로 트레이드되어 친정팀의 우승을 함께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