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학교 야구부
1. 연혁
1.1. 태동기
서울고등학교가 세워지기 이전인 경성중학교의 기록을 전신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역사로는 인정하진 않는다.[3] 경성중학교의 경우 1916년 7월에 한반도 최초의 공식야구대회인 "경성시내 중등학교야구대회"에서 우승한 청년회관팀에게 15:2로 패배한 기록도 남아있다. 실질적으로 첫 창단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다. 이해 제 8회 쌍룡기를 시작으로 행보를 이어 나갔으나 재정난으로 제대로된 빛을 보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된다.
- 1956년 제1회 문교부장관배쟁탈 전국학생대회, 쌍룡기(이상 예선 탈락), 전국지구대표고교쟁패전 서울시예선전(4강, vs 중앙고 10:0 패),
- 1960년 서울시중학연맹전(예선 탈락)
- 1962년 서울시고교 춘계리그 B조 4위(2승 1무 2패)
- 1964년 서울시고교 춘계리그 B조 5위(4승 4패)
1.2. 전성기
본격적으로 야구부가 가동한 것은 1974년으로 대구야구의 명장 서영무 감독을 모셔와 1977년 봉황대기 4강, 1978년 봉황대기 우승을 차지하면서 야구계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다.
서울고의 첫 전성기는 1984년과 1985년으로 두 해 연속으로 2관왕을 차지하면서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이 때 주역은 포수 김동수, 내야수 임형석, 심판으로 유명해진 김풍기, 투수로는 박형열 같은 선수들이 있었고, 두터운 선수층을 앞세워서 1980년대 중반 고교야구를 호령했다. 이 때 시작된 전성기는 그러나 아쉽게도 트로피를 쓸어가는 시절로 이어지는 못했다. 이상훈같은 걸출한 투수들도 등장했지만[5] , 고교 시절의 이상훈은 좋은 재질이었지 초고교급의 에이스는 아니었고, 그 뒤로 등장한 박준수, 구자운, 배힘찬같은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1990년대 서울고 야구부는 4강에는 충분히 들었지만, 그 이상 나간 것은 1996년 대통령배 준우승이 유일했다.
1.3. 2000년대
그리고 2000년대 초반에 접어들면서 꾸준하던 시기를 지나 8강권 정도의 다크호스로 꼽히던 서울고는 2007년 절호의 우승 기회를 잡았다. 이형종이라는 에이스를 앞세워 대통령배 우승에 도전한 것. 광주일고와 결승전을 치렀는데, 승리 일보 직전에서 끈질겼던 광주일고의 공세에 이형종이 9회 말에 이철우에게 동점타, 윤여운에게 역전타를 맞고 무너지면서 대역전패로 끝났고, 이 때 이형종이 흘린 눈물은 상대였던 정찬헌 못지 않게 이형종이 더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이형종의 눈물은 그 해 전국체전 우승으로 보답을 받지만, 2000년대 후반의 서울고는 안치홍, 박건우 같은 우수한 선수들이 4강은 올려 놓는 우수한 팀이었지만, 그 고비를 넘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도 종종 나왔다.
1.4. 2010년대
서울고의 두 번째 전성기는 이 안타까움의 역사를 기어이 넘은 2014년이라 할 수 있는데, 최원태-남경호-박윤철로 이어지는 막강한 마운드를 앞세워 황금사자기와 대통령배를 석권하며, 29년만에 다시 2관왕의 위업을 재현했다. 그리고 황금사자기 우승을 통해 메이저 4개 대회를 모두 석권하는데 성공했다.
2016년 청룡기에서 1985년 우승 이후 31년 만에 결승에 진출했으나 덕수고에 4-7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2017년 청룡기에서는 준결승에서 덕수고에 전년도의 패배를 설욕하며 결승에 진출했으나 배명고에 1-2로 패배 2년 연속 준우승을 기록했다. 이어진 대통령배에서는 에이스 강백호를 앞세워 결승 진출에 성공했고, 경남고를 상대로 진땀을 뺀 끝에 13-9로 승리하며 3년 만에 이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2018년 들어서는 전국대회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황금사자기에서는 1회전에 신일고에게, 청룡기에서는 32강전에서 제물포고에게, 대통령배에서는 1회전에서 라온고에게 각각 패해 초반에 탈락했다. 봉황대기에서도 청룡기와 같이 32강전에서 제물포고에 패배하였다. 남은 대회인 9월 3일에 개막하는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그동안의 부진을 만회하듯 4강까지 진출했다. 신일고와의 준결승에서 10-0으로 대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해 경남고를 맞아 2-1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2019년에는 주말리그 전반기에서 5위를 기록하며 황금사자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어 개최된 청룡기에서는 야탑고에 패배하며 16강전 진출이 좌절되었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참가하며 대통령배에는 참가하지 않는다.[7] 협회장기 2회전에서 전주고를 만나 전년도까지 동료였던 박재민의 호투에 막혀 0-2로 패하며 탈락했다. 이어진 봉황대기 첫날 경기에서 중앙고에 2-8로 패하며 한 번도 토너먼트를 통과하지 못한 채 공식 일정을 모두 마쳤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여파로 뒤늦게 시작한 주말리그 후반기[8] 에서 전승을 기록했고 이어진 청룡기에서도 우승 후보로 꼽혔으나 16강전에서 신일고에 3-13 콜드게임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협회장기 32강전에서 광주제일고등학교를 8:1 6회 콜드로 이기며 16강에 진출하였다. 16강전에서 충암고에 승리를 거뒀으나 8강전에서 덕수고에 패하여 짐을 쌌다.
1.5. 2020년대
2020년에는 두산 베어스의 1차 지명을 받은 안재석을 포함하여 무려 '''6명'''의 프로 선수를 배출했다.
2020년 봉황대기 8강전에 진출했으며 북일고를 만나 7:3으로 이기며 4강에 진출하였다.4강 상대는 부산고한테 완승을 거두고 올라온 수원유신고이다.4강전에서 5:3으로 유신고를 이기며 봉황대기 결승전에 진출하였다. 결승전 상대는 인상고를 꺾고 올라온 인천고등학교이다. 인천고는 대회 첫 우승에 도전하며, 서울고는 1988년 이후 32년 만에 결승에 진출했다.[9] 1984년 이후 36년 만에 우승을 노린다.[10]
2. 이모저모
- 서울고등학교 운동장[11] 은 (여느 주택가 학교와 마찬가지로) 저녁시간 이후에는 인근 주민들의 조깅트랙이자 놀이공간인데, 이 트랙과 같은 공간에 야구부 연습장과 회관 등이 위치해 있다. 저녁시간에 조깅이나 걷기운동하러 가면 늦게까지 땀흘리고 있는 야구부 선수들을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다.
- 2015~2018 KBO 신인 드래프트에서 1차 지명, 2차 1라운드 고졸 지명자를 가장 많이 배출해낸 학교다. 최원태, 남경호[12] , 주효상[13] , 최원준[14] , 임석진[15] , 강백호[16] . 정작 강백호의 동기로 2017년에 좋은 활약을 보였던 투수 주승우는 신인 2차지명 행사에 초청을 받고도 지명을 받지 못했고, 성균관대학교에 진학했다.
- [image]
동대문야구장이 있던 시절 인창고등학교와의 경기 사진이다. 서울고 특유의 하복을 입은 학생들의 모습이 장관이다.
3. 논란
- 2015년 졸업생 중 한명인 홍승우군의 대학입학을 고의로 막은 것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관련 기사 이후 검찰이 입시비리 정확을 포착해 당시 연세대 감독, 서울고 지도자등 관계자들의 출국 금지 명령을 내렸다. 기사 그리고 홍승우는 2017년도 까지 가는끝에 3수만에 서울대에 합격했다. #
- 거기다 전임 감독이었던 김모 감독[17] 이 2014년에 승부조작을 지시한 혐의가 밝혀졌다. 휘문고와의 경기에서 아웃되기 위해 도루를 지시하거나 번트를 맞으면 일부러 수비수들을 뒤로 물려 안타로 만들어 주는 등의 수법을 사용했다고.
4. 출신 선수[18]
[1] 4대 메이저 + 협회장기[2] 나무위키 등록 선수만... 졸업 연도 순.[3] 경성중학교는 일본인 중학교(오늘날의 중학교+고등학교)로, 대다수의 일본인 학생과 소수의 한국인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인 학교가 위치해 있던 경희궁 터에 해방 직후인 1946년 서울고등학교가 새로 개교하기는 했으나, 역사로는 인정하지 않는다.[4] 여기의 이용호는 아래의 95년 OB 베어스 우승 주역인 이용호와는 선후배 관계의 동명이인.[5] 이상훈과 같이 뛰던 선수로는 임수혁, 조경환, 이용호 등이 있었다.[6] 뒤에 보이는 하얀 운동화를 신은 광주일고 선수는 장민재(당시 장민제)다.[7] 전국 고교야구부 80개교중 39개교는 대통령배, 41개교는 협회장기에 참가한다. 개최 시기가 겹친다.[8] 후반기를 전반기보다 먼저 치렀다.[9] 유지현의 충암고에 우승을 내준 대회다.[10] 대회 MVP는 김동수다.[11] 심석희 선수가 나이키 광고를 촬영할 때 방문하기도 했다.[12] 이상 2015 1차 지명.[13] 2016 1차 지명.[14] 2016 2차 지명.[15] 2017 2차 1라운드 지명.[16] 2018 2차 1라운드 지명.[17] 2006년 이형종의 눈물의 역투 당시에도 감독이었다. 감독 사임 후 몇년 뒤 다시 감독직으로 복귀했다.[18] 나무위키 등록 선수만... 졸업 연도 순.[19] 2013년 박준수에서 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