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보문종

 


大韓佛敎普門宗
홈페이지 (보문사)[1]
1. 개요
2. 보문사


1. 개요



'''한국 유일의 비구니 종단.'''
한국의 29개 불교 종단의 하나로 부처님의 출세본회(出世本懷)를 봉체(奉體)하고 그 화신인 관세음보살의 구세원력을 성취하기 위한 전미개오(轉迷開悟)의 자리수행과 구세도생(救世度生)의 이타실천을 종지로 한다. 소의경전은 『묘법연화경』. 총본산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사길에 위치한 보문사이다.
마하파자파티(大愛道)[2]를 종조, 신라 시대의 비구니였다는 법류(法流)를 중흥조로 삼고 있는데, 실제적인 개조(開祖)이자 중흥조는 일제강점기에 보문사를 중창한 비구니 긍탄(亘坦 : 1885~1980)과 그 제자 보암당 은영(恩榮, 1910~1981)이었다.
긍탄의 제자 은영은 해방 직후인 1945년부터 보문사에 주석하고 있었다. 1962년 3월 25일에 대한불교조계종 중심의 통합종단이 공식 출범하면서 통합종단을 놓고 비구측과 대처승측의 대립이 격화되어 불교계는 매우 혼란스러웠고, 긍탄이나 은영은 비구 혹은 대처승 어느 쪽에도 가담하는 것을 거부하며 여승의 중립적 권리와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 1971년 재단법인 대한불교보문원을 설립하고 "비구니와 여성의 권익과 위상을 높여 사회발전에 공여한다"는 목적으로 1972년 3월 비구니들만으로 구성된 종단을 출범시킨다.
보암당 은영은 1971년에 오갈 데 없는 여신도들을 위한 양로원을 짓기도 했는데, 시자원(施慈院)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곳에서 왕조의 마지막 황후와 황후를 모셨던 마지막 궁녀들이 여생을 보냈다. 말 그대로 조선 왕실의 여인네들과 마지막까지 함께한 사찰.# 다만 만년은 좋지 못했는데, 사세 확장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사찰 경내에 이런 저런 건물, 그 중에서도 특히 '''경주 석굴암을 그대로 본뜬 모형 석굴암을 사찰 안에 다시 짓느라''' 당시 조흥은행은 물론 신도나 일반인들로부터 10억 원이나 되는 빚을 졌고, 빚 독촉을 감당하지 못한 '''주지 은영과 종무 계월, 행자 공순 등 세 비구니가 음독자살'''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3] 이후 3차례에 걸친 변제로 빚은 어찌어찌 갚았다는 모양.
현재 보문종 종단 소속 사찰은 40여 개이며, 소속 비구니 스님은 약 200여 명이다. 미국일본 등 해외에도 국제포교를 위해 6개소의 사찰을 운영하고 있다. 간행물로 월간 『보문』을 발행 중이다.

2. 보문사


대한불교보문종의 총본산인 보문사는 고려 예종 10년 담진(曇眞) 국사가 비구니 수련장으로 창건한 사찰로 창건 당시부터 비구니 즉 여승들을 위한 사찰이었다. 조선 시대에도 이러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는데, 보문사가 위치한 곳은 이미 조선 시대부터 '탑골승방'이라고 불리며 비구니들이 거처하던 도성 밖의 4대 비구니사찰[4] 가운데 하나였다.[5]
2017년에 보문사의 극락보전을 중수할 때에 발견된 상량문에는 건륭 12년(조선 영조 23년, 1747) 처음 중건되었고, 이후 도광 4년(순조 24년, 1824)과 동치 4년(고종 2년, 1865)에 더 중수되었음이 적혀 있다. 아울러 동치 4년 상량문의 경우는 조선 왕실의 시주를 받아 불사를 진행하고 후궁상궁 등 궁인에서부터 사대부, 평민에 이르기까지 불사에 동참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보문사에는 왕실에서 하사한 연(輦)수식과 인로왕번(引路王幡)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에 제작한 석가불도, 신중도, 지장보살도 등 서울시 유형문화재, 조선 전기에 제작된 묘법연화경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다수의 유·무형의 문화재들이 남아 있기도 하다.
친일 승려 권상로(權相老)가 저술한 「보문사일신건축기(普門寺一新建築記)」가 있는데, 옛부터 비구니 스님들이 상주하며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번성을 기원하는 비구니 사찰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1826년에 승려 수봉 법총(秀峰法聰)이 만세루를 신축하고 1842년에는 승려 영전(永典)이 만세루를 수리하였으며, 1827년에 승려 정운(正雲)이 좌우 승당을 짓고 1872년에 금훈(錦勳)스님이 좌우 승당을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1972년에 보문사를 본산으로 하여 대한불교보문종을 창종했으며, 초대 종정 긍탄스님 이래 2008년 1월 현재 11대 혜일(慧日, 1919- )종정스님이 종단을 이끌어오고 있으며 총무원장은 법종(法綜)스님이다.

[1] 보문사로 연결되는 이유는 후술.[2] 석가모니의 이모이자 길러주신 양어머니로, 불교 최초의 여성 출가자.[3] 출처: 경향신문 1981년 10월 9일[4] 나머지 3곳은 옥수동의 두뭇개승방(미타사), 석관동의 돌곶이승방(청량사) 그리고 숭인동의 새절승방(청룡사). 청룡사는 경혜공주(시누이)와 정순왕후 송씨(올케)가 출가한 사찰이다.[5] 바로 옆에 담장을 맞대고 조계종 소속 미타사가 있는데 서로 탑골 승방을 자처하나 역사학자들의 견해를 따르자면 그냥 근처의 비구니들이 머무는 암자들을 모조리 탑골승방이라 부른듯 하다. 넓게 보면 수 백미터 떨어진 청룡사 까지 탑골 승방이라 인신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