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타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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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오시프 스탈린
1. 개요
2. 상세
3. 여담
4. 한반도 관련
5. 관련 문서


1. 개요


이 회담은 비밀로 해둡시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맘대로 자기들의 '''운명'''을 재단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매우 불쾌해할 테니 말이오.

윈스턴 처칠, 얄타 회담을 마치며

제2차 세계 대전기간 유럽 대륙에서 나치 독일과의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임박한 시점인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흑해 연안 크림 반도에 있는 휴양도시 얄타에서 연합국 소속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이오시프 스탈린, 윈스턴 처칠이 모여 전후 세계질서를 논의한 회담. 처칠은 개인적으로나 영국을 대표하는 입장으로나 루스벨트와 뜻을 같이 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이오시프 스탈린의 담판 회담 성격이 짙었다.

2. 상세


독일의 분할(동독/서독) 및 비무장화와 나치 독일 잔재의 청산, 소련의 대(對) 일본 전쟁 참전, 폴란드의 영토 문제 등이 결정되었다. 이 회담에서 독일은 동부 영토를 대거 폴란드와 소련에 넘기는 걸로 결정 났다. 오데르-나이세 동쪽 모든 영토(예를 들면 쾨니히스베르크 등) 및 서쪽에 있더라도 슈테틴과 같은 도시는 폴란드에 할양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2차대전 후 독일과 폴란드의 영토 문제 참고.
루스벨트는 진정한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미국-소련의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안에 대해서는 소련의 손을 들어줬다. 유럽에서 소련의 팽창을 염려한 영국 수상 처칠의 반대를 루스벨트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유럽의 세력 재편성도 루스벨트가 스탈린의 제안을 거의 다 수용한 전형적인 사례이다. 한편으론 아직 핵무기가 완성되지 않은 불명확한 시점에서, 일본과의 전쟁에서 미국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소련의 참전이 필요했다는 점도 루스벨트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소련군이 만주에서 일본군을 순식간에 붕괴시킨 것을 보면 이는 충분히 설득력을 가진다. 반면 영국말레이 해전으로 인해 미국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전력을 동아시아에 제공할 수 없었고, 유럽에서도 그 세력은 소련이나 미국에 비할 바가 못 되었기 때문에 루스벨트는 회담의 실질적 파트너로 스탈린을 선택했던 것이다.
처칠에 따르면, 10년 동안 연구해도 이곳보다 더 나쁜 장소는 찾을 수 없었을 거라고 한다. 이렇게 들으면 크림 반도 남부에 위치한 얄타가 매우 안 좋은 곳 같지만, 얄타 자체는 흑해 연안의 아름다운 휴양도시이고, 소련 고관들이 여름을 보내는 곳이었다. 문제는 영미 측 협상단의 방 안에 도청기가 쫙 깔려 있었다는 것(...). 더구나 영미 측 협상단 내에는 소련 간첩도 있어서 소련 측은 영미 측의 의도를 대부분 알고 협상을 할 수 있었으니 당연히 소련이 전후 처리의 흥정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철의 장막이 세워지는데 톡톡한 역할을 한 것.
그런데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 쪽에서는 숙소에 도청기가 널려 있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체하며(!) 소련에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이는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의향이었는데, 전후 세계 평화가 확립되려면 양대 초강국인 미국소련의 진정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루스벨트는 얄타 회담 중 처칠이 미-영 회담을 제안하거나 소련을 배제한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면 한사코 거부했고, 오히려 스탈린에게 친근하게 굴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스탈린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발트 3국의 소련 병합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하여 스탈린의 호감을 산다.
원래 영미에서는 자기들에게 가까운 스코틀랜드, 몰타아테네에서 회의를 하자고 제안했으나 스탈린이 주치의의 권고에 따라 모두 거절했다. 덕분에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던 루스벨트는 의사와 동료들의 권고를 뿌리치고 4,883마일을 항해한 후 대통령 전용기로 1,375마일을 더 비행해 얄타에 도착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루스벨트는 회담 2개월 후인 그해 4월에 뇌출혈로 사망한다. 스탈린 역시 비행기 여행을 극히 싫어했으나, 공군 장성이 조종하는 수송기에 20여 대의 호위기 경호를 받으며 왔다.
국제정치학계에서는 이 얄타 회담을 냉전의 시작으로 본다. 이때부터 영미와 소련은 이해관계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바란 연합국 간의 균열은 벌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나치는 이미 그런 단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미 1944년 나치는 괴벨스를 중심으로 소련과 단독 교섭을 진행하다가 크게 실패를 거두기도 했다. 다음 회담은 아예 독일령인 포츠담 회담이었다.
애초에 '3거두 회담'이라고 하지만 1945년 2월 시점에서 더이상 영국은 초강대국이 아니었고, 미국과 소련의 흥정과 거래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들러리 신세에 가까웠다. 어떤 의미에서 얄타 회담은 초강대국으로서 19세기20세기 초반을 풍미한 대영제국 몰락의 마지막 방점을 찍은 사건이었던 것이다. 윈스턴 처칠 개인으로서도 그의 영예의 마지막이었는데, 그해 7월에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는 아예 보름 가량 이어지던 회담 도중에 영국 노동당으로 정권이 교체되어 처칠이 클레멘트 애틀리에게 자리를 비워주어야 했다.
사실 회담 당시 이미 각국 수장들은 모두가 고령의 노인인데다가 전쟁을 치르면서 격무에 시달린 탓에 건강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스탈린은 전쟁 지도 및 행정 업무의 격무로 매우 심신이 지쳐 있었고[1], 루스벨트는 이미 뇌경색으로 한 번 쓰러졌던 사람이라 전시만 아니었다면 대통령을 그만둬야 할 정도로 건강이 무척 좋지 않았던 탓에 이 회담 이후 불과 2달 후에 사망한다. 처칠은 세 사람 중 가장 오래 살았으나 훗날 그도 치매로 사망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건망증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2] 그래서 사실 당시 회담은 겉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해리 S. 트루먼이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같은 양측 보좌관들이 합의한 거나 마찬가지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이 회담이 끝나고 약 5개월 후 포츠담 회담이 다시 열린다.

3. 여담


회담은 6일간 계속 됐는데, 공식적인 만찬은 3번에 그쳤다. 미국의 루스벨트가 주최했던 첫 번째 연회와 영국측 처칠이 주최했던 마지막 저녁식사는 그 차이가 엄청났다고 한다. 첫 번째 만찬에서는 물론 스탈린이 대접한 보드카캐비어가 나오기는 했으나, 나머지는 미국측의 남부식 프라이드 치킨과 미트로프, 콜라와 탄산음료들, 애주가인 루스벨트 대통령이 직접 만든 레시피의 자신작인 마티니 칵테일을 대접을 했는데, 스탈린과 처칠은 별로 입에 맞지 않아서 환영받지 못한 칵테일 이였다. 그가 만든 마티니는 엑스트라 드라이 마티니가 대세임에도 베르무트를 다량으로 첨가한 마티니 레시피 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영국총리가 개최한 디너에는 청어, 연어, 홀스래디시를 곁들인 새끼 돼지 요리와 영국산 와인, 로스트 토끼고기 파이 등 영국 현지 특산 요리가 대부분이었다. 미국식 메뉴는 얄타에 문화적 충격을 남긴 반면, 처칠이 제공한 메뉴는 개성 있는 영국 귀족의 우아함으로 남았다. 심지어 조지아인인 스탈린에게 그 지역 특선 음식인 양고기 케밥, 샤슬릭까지 대접했으니 말이다.

4. 한반도 관련


이 회담은 한반도와는 별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속내를 따져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 회담에서 미국은 당시 일본 제국과 서로 상호불가침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에게서 대일전참전을 약속받았고, 이로 인해 일제 패망 후 한반도가 38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에 의해 분할점령되는 계기가 마련된 회담이기 때문이다. 당시 스탈린은 일본과의 전쟁 참여를 대가로 1905년에 러일전쟁에서 상실했던 영토인 남사할린 등을 요구했고, 소련의 협력이 절실했던 미국은 이를 받아들인다.
당시 조선을 둘러싼 각국 정상은 서로 다른 목적을 두고 독립문제를 논의한다. 루스벨트는 당시 새로운 세계대전을 피하고자 하는 목적이 강하였다. 그래서 한국을 독립시키는 과정에서 열강들의 이권 다툼을 방지하기 위해 신탁통치라는 방안을 제시한다. 물론 이 단계에서 이루어진 합의 내용은 구체적인 조항을 논의한 것이 아닌, 한국 독립 시에 모두 다 같이 객관적인 입장에시 협력하자 정도의 추상적인 이야기가 오고 갔기 때문에 더 논하는 것은 소설의 영역이긴 하다.
한편, 스탈린한반도 자체에 관심을 두기보다 일본의 위험을 방지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한국 문제를 조망했다고 한다. 그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독일이 매우 빠른 속도로 세력을 회복해서 소련을 비롯한 전 세계에 위협이 되었던 것을 잊지 않았고 러일전쟁으로 러시아를 패배시킨 전적이 있는 일본 역시 잠재적인 소련의 적이 될 것을 두려워해 일본에 대해 강한 견제책을 고민하고 있었다. 고로 소련이 한국문제를 다루면서 가장 핵심적으로 바라본 점은 한반도에 일본을 견제할 친소 정권이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련이 1918~1922년간의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일본 제국에 의해 시베리아를 실질적으로 빼앗겼었다는 사실을 본다면 소련이 한국을 공산화시키는데 얼마나 집중했는지 알 수 있다.
이승만은 1945년 4월부터 열린 UN 창립총회에 참관인 자격으로라도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 보장을 받으려했으나 잘 되지 않아서 사무국과 각국 대표들에게 카이로 선언의 기본정신에 따라 임시정부를 즉각 승인할 것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보냈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무산되자 "얄타 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했다."라는 미·영·소 3국 간의 이른바 '얄타 밀약설'을 폭로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한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이어 또다시 비밀 협약의 희생물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당시 미국은 밀약 같은건 없었다고 부인했다.
월간조선복거일이 기고한 주장에 의하면 얄타 밀약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조선을 소련의 영향 아래 두기로 했는데 이승만의 노력으로 미국의 관심을 끌었고, 남한에 미국이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

5. 관련 문서



[1] 스탈린은 전쟁 기간 내내 12시간의 격무에 매달렸고, 이는 이미 60대의 노인이었던 그에게는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었다. 전쟁 초기의 1941년과 전쟁 말기의 1945년의 스탈린의 사진을 비교해보면 머리가 하얗게 세고 얼굴이 쭈글쭈글해지는 등, 노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 참고로 나이는 윈스턴 처칠이 1874년생, 스탈린이 1878년생, 루스벨트가 1882년으로 당시엔 각각 71세, 67세, 63세였다. 이중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나이가 적은 루스벨트가 제일 먼저 사망하고 그 다음이 스탈린, 결국 가장 장수한 사람은 최고령이었던 처칠. 더욱이 회담 후 20년은 더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