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역사)

 

正史
1. 개요
2. 상세
3. 정사 = 신뢰성 높은 사서?
4. 정사 개념에 대한 비판
5. 국가별
5.1. 중국
5.2. 한국
5.3. 일본


1. 개요


정사(正史)란 한국(韓國)과 중국(中國) 등의 동아시아 나라들에서 각 왕조(王朝)가 정통(正統)으로 인정하고 공식 편찬한 사서(史書)이다. 중국의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의 24사(二十四史)나 한국의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등이 대표적이다.

정사(正史)는 주로 국가에서 편찬한 관찬(官撰) 사서(史書)로 민간(民間)에서 개인이 편찬한 사찬(私撰) 사서(史書)인 야사(野史), 패사(稗史) 등과 구별되는 말로 쓰인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당(唐, 618~907) 이전에 편찬된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등은 정사(正史)이면서도 모두 개인이 편찬한 사서(史書)들이다. 따라서 국가가 편찬했으면 정사(正史), 개인이 편찬했으면 야사(野史) 하는 식의 구분은 옳지 않으며, 누가 편찬했느냐보다는 왕조(王朝)가 그 정당성을 인정했느냐가 중요하다. 결국 정사(正史)는 근대(近代) 이전의 왕조(王朝) 국가에서 나타난 개념으로, ‘왕조(王朝)에서 정통(正統)으로 인정된 역사서’를 뜻한다.

-두산백과, 〈정사(正史)〉


2. 상세


정사는 관찬 사서 및 '왕조에게 정통성이 인정 받은' 일부 사찬 사서로 이루어져 있다.
공권력이 공인한 사서이긴 하지만 시대적 한계, 저자의 편견이나 착각, 인용된 자료의 오류 등등 정사도 자주 사실과 다른 내용을 전하기도 하며, 오히려 '정사이기 때문에' 공권력의 정치적 이해 관계를 강하게 반영한다. 따라서 정사로 분류된 기록이라도 각 사안별로 사료비평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중국의 24사의 경우 남북조 시대가 있는데, 남조의 정사와 북조의 정사들이 각각 편찬되어 서로를 디스하는 용어, 내용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한자 문화권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시대별로 특정한 역사서를 정사로 지정하여 특별 관리하기도 한다. 현재 남아있는 정사서는 국가의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중국의 흠정 24사와 추가로 언급되는 4권[1], 한국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일본육국사 등이 정사에 속한다.

3. 정사 = 신뢰성 높은 사서?


正이라는 한자가 오해를 부르지만, 정사는 다만 국가 공인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이는 사실 관계 서술의 신뢰성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며, 사서가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는 의미도 아니다. 따라서 정사 개념은 개별 사서의 신뢰성을 결정하지 않는다.
가령 관찬 사서의 전통이 약한 서양의 경우, 헤로도토스의 《역사》나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등의 수많은 고전이 사찬 사서이며, 동아시아식 범주로 따지자면 야사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의 신뢰성은 개별적으로 검토되어야지, 야사라는 이유로 걸러지지 않는다. 정사 개념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동아시아의 경우도, 사마광의 《자치통감》 등은 사찬 사서이자 야사이며, 한국에서 신뢰성에 대한 인식이 안좋은 《일본서기》는 엄연히 정사(관찬 사서)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중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제아무리 일제의 입김이 반영되었다고 한들 정사이며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의 간행 서적 역시도 정사(관찬 사서)이다. 심지어 조선사편수회의 관찬 사서들은 매우 교과서적인 의미에서 정사이다.[2]
그리고 정사는 오히려 국가에서 편찬하는 공문서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정치적 필요에 의해 윤색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이미 1차 사료가 되는 문서가 이미 윤색되어 그 내용이 반영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신뢰성이 높은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 조에서 80년 이후 기사가 차대왕을 폄하하는 내용으로 도배되어 있는 사례, 단종실록에서 지속적으로 세조를 미화하는 사례가 있다.
물론 국가가 예산과 인력을 투자해서 편찬한 책인만큼, 개인이 지은 사찬 사서보다는 대체로는 신뢰도가 높은 편이긴 하다. 정사라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신뢰성이 높다는 게 아닐 뿐이다. 예를 들어 한국 고대사의 양대 사서로 평가받고 흔히 비교되는 삼국사기삼국유사만 해도,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에서 빠진 부분을 보충한다는 의미는 매우 크지만, 일연 개인의 정보수집으로는 한계가 있다보니 같은 내용을 다루는 부분은 대체로 관찬 정사인 삼국사기가 더 신뢰도가 있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관찬 사서의 대표적 사례인 조선왕조실록 역시 대체로 신뢰성이 높으며, 이는 연려실기술 등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의 신뢰성은 '관찬이니까'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1. 비교적 동시대에 저술되었다는 점 2. 비교적 1차 사료에 가깝다는 점[3] 등에서이다. 그리고 그 조선왕조실록도 임진왜란 해전을 연구 할때는 사찬(야사)인 《난중일기》보다 우월한 자료가 되지 않는다.[4]

4. 정사 개념에 대한 비판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나라들은 전근대 시기 오랫동안 역사를 이야기할 때 정사(正史), 정통(正統)이라는 관념을 내세우고 이를 중시하였다. 중국의 왕조들은 이미 당(唐)나라 때부터 특정 역사서를 정사로 지정해왔다. 따라서 정사로 규정된 것 이외의 역사책들은 잡사(雜史), 야사(野史) 등으로 불리며 구분되었다. 정사라는 관념은 물론 왕조의 정통적인 계승관계를 밝히는 것이 역사서술의 핵심이 되는 전근대 왕조국가의 이념과 역사관에 기초한 것이 었다. 애초부터 정사는 정통이라는 관념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중국에서 비롯된 정사 관념은 한국,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유하는 것이 되었다. (중략)

‘공식적 역사서술(official history)’이란 서구에서 주로 쓰는 말인데, 이 용어는 주로 군대나 재무부, 법무부 같은 개별 국가기관 또는 협회나 사회단체 등 민간기관들이 자신의 기관에 대한 역사서술을 각 기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특정 기관이나 단체에 대한 역사서술을 이야기할 때 주로 쓰이는 것으로, 국가 전체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사용되지는 않는다.[5]

이는 기본적으로 국가 내부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근대 민주 주의 국가에서 상정하기 어려운 개념인 것이다. (중략)

특히 박근혜 정부기 국정화 국면에서 이를 추진했던 사람들은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표방했다.[6]

이들이 주장했던 “올바른(正) 역사(史)”에 문자 그대로 정사 관념이 투여되어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들이 검인정 제도하의 다양한 교과서들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단일한’ 교과서를 추구하고, 국가가 주도하여 나라의 최고 학자들을 모아 교과서를 편찬하면, 국민 모두가 동의할 수 있고 또한 동의해야 하는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한 것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그 구성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단일한”, “올바른”, 또한 “객관적”이거나 “균형 잡힌” 역사서술이 가능하다는 발상에는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정사 관념이 투여되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그런 측면에서 정사·정통성 관념을 바탕으로 ‘올바른 역사’를 추구하는 관념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그 근저에 도사리고 있는 국가 중심의 배타적 역사인식, 국가권력이 역사인식에 너무 과도하게 개입하는 문제 등에 대해 학계 내부에서 보다 철저하고 지속적인 자기비판과 성찰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홍석률, 〈역사전쟁을 성찰하며 - 정사(正史) · 정통성(正統性)론의 함정〉

동아시아의 정사(正史) 개념이 '올바른 역사'에 대한 시대착오적 집착을 낳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5. 국가별



5.1. 중국



중국은 사기에서 기전체라는 기록 양식을 창시한 이래, 하나의 왕조가 멸망하면 그 뒤를 이은 왕조에서 전 왕조 혹은 전 시대의 역사서를 기전체로 편찬하는 전통이 수립되었다. 이는 일종의 정통성 확립 작업의 일환이기도 했는데, 정사 편찬을 진행한다는 것은 '이전 왕조가 확실히 망했다'는 선언이자 이를 편찬하는 우리가 정통 후임이라는 프로파간다이기도 했다.[7]
당대에 자신이 소속된 왕조의 역사를 직접 편찬하는 것이 가장 사료가 풍부하고 정확하겠지만, 이런 경우는 아무래도 이미 망해 없어진 존재를 설명하는 것에 비해 객관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령 삼국지의 사마의나 삼국사기의 왕건처럼 전왕조 정사의 후반부에는 편찬자가 소속된 왕조의 시조가 으레 등장하기도 하는데, 당연히 객관성을 잃고 극존칭 사용에 찬양에 가까운 문구, 일부 곡필이 의심되는 대목들을 찾아볼 수 있다.[8]
보통은 한 왕조당 하나의 정사가 편찬되지만, 혼란기인 경우에는 여러 왕조 및 지방 정권의 역사를 묶어서 하나의 시대로 다루는 정사를 편찬하며, 앞서 편찬된 정사가 미흡하다고 판단하여 새롭게 정사를 편찬한 경우도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 구오대사와 신오대사가 대표적인 경우.
정사 편찬을 가지고 '정통성 경쟁'을 딱히 벌이지는 않고 있는 남북한과 달리 중국은 청나라가 망한 뒤에 들어선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이 이를 가지고 정통성 경쟁을 벌이고 있다. 둘다 전근대 왕조가 아닌 근현대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정사 경쟁을 벌이는데 대만이 먼저 '청사'를 펴냈지만 중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 입맞에 맞춘 청사를 다시 펴내는 이른바 '청사공정'을 벌이고 있다.

5.2. 한국



한국도 삼국시대 때부터 신집, 국사 등 자국사를 책으로 편찬하기도 했지만 인용된 일부 내용을 제외하면 현전하지 않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실전된 고대 사서들은 대부분 중국식 기전체 구성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식 정사 전통을 받아들여 고려 중기에 편찬한 삼국사기를 시작으로 이후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등이 정사로 편찬·구분되어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는 중국의 전통에 따라 기전체 양식으로 기록되었고, 고려사절요는 이름 그대로 고려사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다.
고려사 이후 한민족이 펴낸 전통적인 양식의 정사 역사책은 아직 없다. 전통적인 기전체 양식은 아니지만 광복 이후 1970년대 대한민국 정부의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공식 역사서인 《한국사》를 편찬한 바 있다.[9] 다만 이 한국사와 신편 한국사는 자치통감, 동국통감처럼 고조선부터 현대까지 한국사 전체를 요약하여 다루는 통사서다. 다시 말해 기존의 존재하는 역사서를 요약해서 책 한권으로 묶어낸 것이지 새로 나온 정사서가 아니다.
따라서 고려사처럼 조선왕조의 역사만 다루는 정사서인 '조선사'는 아직 없다.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 이후에 대한민국 정부나 북한이든 중국의 사례처럼 원래대로라면 이전 왕조인 조선시대만을 다루는 기전체 정사를 편찬했어야겠지만, 남북한 모두 동양 전통식 기전체 조선사 편찬이 아직도 험난한지라 결국 그 대신에 기전체 '조선사' 편찬에 사용될 원사료여야 했을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가 현재까지는 정사로 취급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원래 실록이지 가다듬어진 정사는 아니지만 현대에는 대충 정사로 취급하는 편인데, 원래 후대 왕조가 전대 왕조의 정사를 편찬하는 것이 전통이지만 조선이 망한 뒤에 일제는 조선시대만을 다루는 기전체 형식의 정사를 따로 편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38년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사(朝鮮史)'가 있기는 한데 이는 일단 편년체 구성인데다, 조선왕조의 역사만을 다룬 것이 아니고 신라 문무왕 시기부터 당시까지의 한반도 역사를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총괄적으로 다룬 책이다.[10]
북한의 경우 조선왕조실록을 '리조실록'이라고 국역한 것을 제외하면 역사서 편찬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편이다. 위와 같이 중국과 대만은 현대적 국가임에도 서로 자신들의 '청사'가 정통이라는 정통성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재밌는 부분.
개인이 만드는 사찬서를 내놓기도 힘든게, 조선시대 역사 기록이 워낙 방대해서 사기와 정사 삼국지처럼 개인이 만든 편년체 혹은 기전체 형식의 사찬서가 나오기도 힘들다. 사실 중국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24사도 후기 들어서는 기록량 자체가 많아지기 때문에 개인이 펴낸 사서는 없고 죄다 관찬서다. 하물며 압도적인 기록량을 자랑하는 조선왕조실록을 가지고 사찬서를 만들기란 매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정사 편찬 작업에 손을 놓고 있는게 아닌만큼[11] 국가가 시도해도 엄청난 노력과 방대한 시일이 걸리는 작업을 개인이 하기란 힘들다고 볼 수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전통적으로 기전체 정사를 편찬해온 이유는 왕조가 바뀌고나서 기존 왕조가 남긴 기록을 수집, 요약, 편집하여 간략히 알아볼 수 있도록 도우며, 후대에 전달하기위해 쉽게 양을 줄이기 위해서다. 당대 왕조가 남긴 기록은 '실록'으로 존재하는데 이 실록이 '''부실하거나 보충해야할 부분도 많고 빠진 부분이 많아서''' 추가적으로 기록을 찾아 교차검증하고 이를 한데 요약한 것이 정사인 것이다. 헌데 조선왕조실록은 '''워낙 세세하게 잘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 시기나 세도정치 시기 정도를 제외하면 실록 자체를 정사 취급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다. 따라서 조선 역사를 다룬 매체에서도 실록 위주로 내용을 전개하다가 임진왜란 정도만 난중일기 같은 현장의 기록을 덧붙이는 정도다. 세도정치 시기는 확실히 실록만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여기에는 또 승정원일기가 아직 번역이 덜된 채로 남아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조선왕조의 역사만을 다룬 기전체의 관찬 '조선사'가 아직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첫째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일본 제국이나 현대 대한민국 정부북한 모두 동아시아 전통의 왕조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근대 동아시아 왕조의 관례를 따라 정통성을 인정 받는 절차 중 하나인 이전 왕조의 역사만을 별도로 다룬 기전체 관찬 정사서 '조선사' 편찬을 해야할 당위성이 적었다. 물론 위에서 설명했듯이 조선왕조만을 다룬 전통적 기전체 사서를 편찬하지 않은 것 뿐이지 일제나 대한민국 정부나 한국 역사 전체를 다룬 통사는 편찬했다.
  • 둘째로 현대 역사학은 왕조나 소수의 권력자 중심으로 역사를 파악하기보다는 다양한 분야별로 다각적으로 그 시대 전체를 종합적으로 바라보는 접근 방식으로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므로 전통적인 왕조 중심의 기전체 역사 서술과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상술한 '한국사' 역시 현대적 역사 연구방식에 입각하여 단순한 왕조나 권력자 중심의 서술이 아니라 문화, 경제, 사회 등 분야별로 종합적이고 다각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 셋째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자체가 워낙 세밀한데다가 온전히 보관되어 있으며 현대시대는 과학기술이 매우 발달하여 이렇게 기록량이 많더라도 쉽게 데이터베이스화하거나 관리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제는 예전과 달리 당시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이용해도 별 무리가 없는데 굳이 여기서 더 요약과 편집을 거쳐야할 필요성이 적기 때문이다.
  • 넷째는 정사 편찬 작업이 너무 험난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진행중인 것이지 관심이 없는건 아니라는 것이다. 정사 편찬에 있어서는 관련 기록을 총정리할 필요가 있는데, 조선이 망하고 난 뒤, 워낙 급격하게 사회적, 기술적 변혁을 겪었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분석하는 작업이 쉽지 않다. 단적으로 말해서 조선의 승정원일기가 마지막으로 쓰여진지 고작 100년 남짓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한국이나 중국이나 대만이나 많은 사회적 변화가 진행되었고 그나마 한자 사용은 유지하여 옛 문서를 읽을 수라도 있는 중화권과 달리 한국은 아예 한자 에크리튀르(écriture) 자체가 무너졌다.[12] 관련 기록을 다 파악하지 못한 채 역사서를 편찬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므로 '정사 조선사' 편찬을 위해서는 국역 과정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번역이 험난하다보니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19세기의 조선의 양반들은 3, 400년 전의 실록을 무리없이 직독직해가 가능했다. 하지만 현대 한국인 식자층들은 아무리 한자 각 글자를 아는 경우는 많이 있다 해도 한문 문장을 제대로 구사하고 해석하려면 별도의 학습이 필요한데 한문을 정식으로 익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한문 문장을 읽는 것은 단순히 생활용 한자를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으로, 일부 전공자와 지식인 외에는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하다. 심지어 '조선사' 편찬에 필수적인 마지막 과제라 할 수 있는 승정원일기의 번역에는 초서체 해독이 필요한데 초서체를 읽을 수 있는 전문 인력 자체가 많지 않은데다가 초서체는 필기체이다보니 쓴 사람에 따라서도 필체가 달라져 번역이 더욱 험난하다.
승정원일기의 경우 2035년까지 번역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인공지능딥러닝 기술의 도입으로 한자 해독과 OCR 작업이 박차를 가하게 된 것도 긍정적인 부분. 이 작업이 완성되면 조선의 관찬 기록에 대한 국역은 완료되므로 이를 바탕으로 1451년 완성된 고려사 이후 600년 만에 한민족의 정사인 '조선사'가 집필될 것이다.
사실 조선왕조가 남긴 기록량이 '''너무 방대하다보니''' 조선 멸망 이후 주체가 누구든 간에 기전체 정사 편찬에 열성적이었다고 한들 제대로 된 역사서가 나오기는 힘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역이나 분석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조선사'가 나왔어도 승정원일기가 번역이 완료된다면 다시 써야할 정도로 남은 기록량이 장난이 아니라는 이야기. 만약 그랬다면 '구오대사-신오대사', '구당서-신당서', '구원사-신원사'처럼 '구조선사-신조선사'와 같이 새로 보충해서 정사를 펴냈을 가능성도 있다.

5.3. 일본


일본은 일본서기를 시작으로 나라 시대~헤이안 시대 중기 까지 6개의 역사서가 국가 주도로 편찬되었다. 이를 육국사(六國史)라고 부르며, 일본에서 정사의 개념은 이 육국사만을 의미한다. 일본서기, 속일본기, 일본후기, 속일본후기, 일본문덕천황실록, 일본삼대실록이 육국사로, 꾸준히 정사가 편찬된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901년에 일본삼대실록이 편찬된 이후에는 국가에 의한 정사의 편찬은 중단되었다. 일본의 중세부터는 정사 편찬의 주체가 되어야 할 일본 중앙정부가 거의 허수아비화하고 지방세력의 난립, 막부 정치라는 이중체제가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10세기에 신국사(新國史)를 편찬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실패하였고,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 미츠쿠니(徳川光圀)가 대일본사(大日本史)라는 역사서를 편찬하였는데, 조정이 아닌 무가정권에 의해 편찬된 책은 일본에서도 따로 분류하는 편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 왕가와 중앙정부가 위신을 되찾은 이후 실록 작성이 재개되고 육국사 이후의 정사를 편찬해보려는 사업이 진행됐다. 책 이름은 대일본사료인데,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일본의 정사는 기전체가 아닌 편년체 양식이며, 속일본기에서 사용한 기록 양식을 국사체(國史體)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5.3.1. 류큐


류큐 왕국의 정사인 중산세감(中山世鑑)이 1650년에 6권으로 편찬되었다.

5.4. 베트남


  • 대월사기(大越史記, Đại Việt sử ký) - 쩐 성종 재위기인 1272년 레반흐우(Lê Văn Hưu, 黎文休, 여문휴, 1230~1322)에 의해 편찬된 베트남의 역사서. 베트남 역사의 시작을 남월로 보았다. 현재는 소실.
  •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 Đại Việt sử ký toàn thư) - 레 성종 시기인 1479년에 응오씨리엔(Ngô Sĩ Liên, 吳士連, 오사련, ?~?)에 의해 편찬된 역사서. 남월 이전의 반랑이나 어우락의 기록을 추가하여 베트남 역사의 시작을 끌어올렸다. 현재 후 레 왕조 이전의 베트남 역사를 연구할 때 중요한 사료로서 취급된다. 그 위상은 한국으로 치면 삼국사기급. 단, 기전체 역사서인 삼국사기와는 달리 편년체 역사서이며, 이전 역사서인 대월사략이 현존하기에 최고(最古)의 역사서는 아니다.
  • 흠정월사통감강목(欽定越史通鑑綱目, Khâm định Việt sử Thông giám cương mục),
  • 대남식록(大南寔録, Đại Nam thực lục) - 응우옌 왕조 시대에 편찬된 실록.
[1] 24사의 선정이 청나라 초기이기 때문에 청나라 멸망 이후에 중화민국 정부에서 청의 역사를 다룬 청사고, 중화민국 총통 쉬스창이 원사를 보충하게 공식적으로 언급하여 편찬된 신원사가 주로 정사로 언급되고 있으며, 여기에 24사 형성 이전 시기에는 정사에 포함되었다가 24사에서 제외된 동관한기나 청나라 멸망 이후를 다룬 중화민국사 정도가 억지로 꼽으면 정사에 포함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4권.[2] '일제가 만든걸 어떻게 신뢰하라는 말이냐?'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중국 24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동아시아의 정사는 원래 그런 것이며, 당연히 승자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이 문서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지만 '정사'는 신뢰성 높은 사서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3] 그리고 바로 이 2가지 이유 때문에 실록이 승정원일기 앞에서는 한 수 접고 가는 것이다.[4] 당연히 난중일기도 (이순신에 대한 한국인의 존경심과는 별개로) 사료비평의 대상이다. 그러나 난중일기가 '사찬이라는 이유로' 실록보다 열등한 사료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5] (논문 내 주석) Martin Bluemenson, “Can Official History Be Honest History?”, ''Military Affairs'', March 1, 1963; A.M. J. Hyatt, “Official Histrory in Canada”, Military Affairs, August 1, 1966.[6] (논문 내 주석)‘올바른 역사’라는 말은 황교안 국무총리가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을 고시하면서 발표한 담화문(2015년 11월 3일)에 나오고, 보수단체의 국정화 지지 성명서에서도 빈번히 사용되었다. 편집부,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논리와 반대 의견을 기록한다」, 『역사와 교육』 13호, 2016 참조.[7] 대표적으로 명사의 편찬 작업 시작은 명나라가 완전히 멸망하기 전에 진행되었다. 즉 명나라의 운이 다했다는 일종의 선언이기도 했던 것.[8] 다른 예시로 해당 왕조 당대에 기록한 조선왕조실록도 봐도 이성계의 즉위 이전 기록이 그렇다. 물론 그가 고려말 구국의 명장임은 검증이 가능하지만 당대 기록으로서 시조 찬양식 비현실적인 일화나 객관성을 잃은 부분을 꽤 찾아볼 수 있다.[9] 이후 국사편찬위원회는 90년대에 개정판인 신편 한국사를 편찬했다.[10] 즉, 일제의 시각으로 쓴 '한국 전체의 역사'가 1938년에 편찬한 조선사이고 이를 대한민국이 다시 쓴 것이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라고 볼 수 있다.[11] 승정원일기를 번역하는 것이 엄연한 정사 제작 과정이다. 관련 기록 분석과 연구가 끝나야 역사책을 만들 수 있으니까.[12] 물론 한문은 어디까지나 고대 중국어를 기본으로 한 문어체이기 때문에 현대 중국어와는 발음도 문법도 다르다. 한문과 백화문을 별개의 언어로 취급하기도 한다. 그래서 현대 중국인들도 별도의 학습이 없으면 한문을 해독할때 엉뚱하게 해석을 하거나 아니면 해석에 애를 먹는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반인 기준에서나 해당하는 말이고 이를 번역하고 정리할 전문 인력의 숫자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큰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