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발해)
1. 개요
'''대국은 마땅히 신의를 보여야 하거늘 어찌 속임수를 쓴단 말인가?'''
명황(당현종)은 위엄으로는 무예(발해 무왕)를 당하지 못하고, 은혜로 문예(무왕의 동생)를 감싸지 못하였다. 소인들 마냥 사기를 치다가 작은 나라에 망신을 당하고 자기 나라 관리를 파면하게 되었으니, 어찌 수치가 아니겠는가?
발해의 제2대 군주이자 대조영의 장남이다. 건국한지 불과 30여 년 밖에 안되는 신생국 발해를 이끌고 당시 당나라로 망명한 동생 대문예 문제 등이 엮여 당대의 최강대국인 당나라와 대결하여 2차례의 선제 공격으로 승리하였다. 정말 시호처럼 무(武)로 살다간 인물인데 이름부터 바로 흔히 떠오르는 일반 명사 무예(武藝)와 한자까지 같다.
2. 당나라 정벌
2.1. 배경
698년 발해가 건국된 후 719년 고왕(대조영)이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 무왕(대무예)이 즉위했는데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하였다. 그리고 발해 주변에 위치한 여러 나라들에 대한 정복 사업을 벌였다. 이러한 발해의 세력 확장이 당나라는 꽤 거슬렸는지 슬슬 발해에 대해 견제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725년 당나라는 흑수말갈의 땅[3] 에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려고 한다. 당나라가 발해의 후방을 직접 통치하고자 한 것. 특히 흑수말갈이 당나라의 관리를 요청하면서 이전까지 잘 해오던 보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방의 당나라와 후방의 흑수말갈이 정치적 결합을 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커져갔다. 발해는 앞뒤로 공격받게 생긴 셈.[4] 발해 무왕은 아들이자 왕자인 대도리행을 당나라로 보내 당의 조치에 항의했다. 그러나 당현종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에 발해 무왕 대무예는 동생 대문예와 장인어른 임아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흑수말갈을 치도록 명했다.
당시 당나라는 역사상 가장 강성한 통일 제국을 이루고 있었다.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의 문명을 고루 흡수한 당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 및 과학 기술, 수많은 병사와 강력한 무기를 갖춘 세계 최고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건국 초기 당나라에서 숙위로 8년 동안 머물렀던 대문예는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해 무왕이 대문예에게 당나라와 연합한 흑수말갈을 치라고 한 것, 대문예를 토벌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흑수말갈의 국경 지대에서 대문예는 형인 무왕 대무예에게 "고구려도 당나라에게 망했는데 당나라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된다"며 흑수말갈을 치는 것을 다시 한 번 반대하는 의견을 보냈고 이에 무왕은 분노라며 대문예를 소환했다. 그러자 무왕에게 처벌받을까봐 두려워한 대문예는 군영을 탈출하여 당나라로 망명했다. 당현종은 대문예를 크게 환영하고 벼슬을 하사했다.
이에 격분한 발해 무왕 대무예는 당나라에 사신을 급파해 당대의 강대국인 당나라의 황제인 당현종에게 대문예를 처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당현종은 발해 무왕 대무예의 요구를 묵살했다. 당현종은 대문예를 멀리 귀양보냈다고 발해에 통보하고는 대문예를 몰래 피신시켰으나 비밀도 오래가지 못했다. 당현종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발해 무왕 대무예는 더욱 화가 났고 이후 당에 보낸 국서에는 외교 전례상 유례없던 파격적인 표현이 등장한다. 신생국 발해왕 무왕이 당나라 황제 현종을 꾸짖었다. 물론 문구는 꾸짖었다기보다는 불만을 나타냈다고 보는게 더 정확하지만 이는 강대국의 군주에 대한 모욕이기에 그것만 해도 간 큰 행동이기는 했다.
대문예를 사이에 두고 신경전이 한창이던 728년에 당에 사신으로 가있던 발해의 왕자 대도리행이 갑작스럽게 죽는다. 왕위 계승자가 죽자 우유부단하던 당의 태도가 달라진다. 당현종은 대문예를 죽이라는 무왕의 요구를 아무리 그래도 친형이 친동생 죽이는게 맞냐고 타이르는 동시에 더 심기 불편하게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며 단호히 거절한다.'''대국은 신의를 보여야 하거늘, 어떻게 속일 수가 있소이까?'''
바라건대 예전의 청대로 그를 죽이시오!
이에 무왕은 크게 분노했고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경은 당나라의 은혜를 모르고 마침내 짐을 배반하려고 한다.
경이 믿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 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짐은 근래 관용을 품고 중원을 보살펴 왔으나
경이 명을 받들지 않으면 언젠가는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발해의 차기 왕위계승자가 없는 상황에서, 동생 대문예를 왕으로 세울 수 있다는 암시를 한 것. 당현종의 협박인 셈.
2.2. 1차 정벌 - 등주성 전투
무왕은 장군 장문휴에게 당 정벌을 명했다. 732년 9월 드디어 출격 명령이 내려졌다. 발해 수군 함대는 황해로 진격했다. 목적지는 중국 산동반도 등주[5] 였다. 당시 등주는 북방지역에서 가장 큰 항구로 무역의 거점이었다. 수많은 무역선들이 항로를 따라 등주로 들어왔다. 또한 등주는 당나라 수군의 거점이었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배를 출격시킨 곳도 이곳 등주항이었다.
만약 당나라가 발해를 친다면 당나라의 군사는 등주항에서 출발할 것이다. 선제공격으로 당나라 수군 거점을 무너뜨려야 이후 당의 반격을 원천봉쇄할 수 있었다. 732년 9월 5일 발해군은 마침내 등주성을 침공했다. 발해군의 기습적인 상륙작전에 당나라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고, 등주 자사 위준이 발해군에게 살해되었다. 기습 선제공격은 대성공이었다.
당시 발해 수군의 상륙전이 당나라에 끼친 결과는 엄청났다. 『신당서』 「오승자전」을 보면 발해군의 침공으로, 성읍이 도륙되었고, 많은 유민과 실업사태를 일으켜 등주라는 항구도시를 완전히 파탄시켰다고 씌여 있다. 엉망이 된 등주를 재건하기 위해 전쟁으로 발생한 실업자들을 위해 세금을 해마다 30만의 규모로 줄이는 긴축재정을 펴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등주의 복구를 위해 다른 데에 예정된 30만의 세금 지출계획을 바꿔, 용도를 변경하여 지출해야만 했다.
2.3. 신라의 개입과 자객
발해군의 기습 공격을 전해듣고 분노한 당현종은 급히 토벌군을 보냈지만 발해군의 기세를 누르지 못했다. 당황한 당나라는 신라를 끌어들인다. 733년 1월 신라는 약속대로 병력 10만명을 파견한다. 그런데 추위와 눈보라 때문에 신라 군사중 절반이 죽어 아무 성과없이 돌아간다.
다만 기록에는 신라 병력 10만명 중 절반이 죽었다고 되어 있지만, 과연 신라가 이 정도로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며 무리한 공격을 했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지는 견해도 있다. 한마디로 싸울 생각이 없었고 공격하는 '''척'''하기만 했다는 것. 어쨌건 나당전쟁으로 서먹서먹했던 관계를 풀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신라는 이때 (큰 병력 손실이 없었다는 전제하에) 외교적으로 이득을 얻었다고 보는 것이 중론. 이후 신라는 대동강 이남의 국경선도 당나라에게 인정받게 된다.[6]
한편, 신라군이 퇴각했다는 소식에 급해진 당현종은 발해를 직접 공격하기로 한다. 총사령관은 그동안 숨어 있었던 동생 대문예. 이에 분노한 무왕 대무예는 당나라 도시였던 낙양으로 자객을 보내서 동생 대문예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이런 당의 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진 대담한 암살기도에 당현종은 대노한다.
2.4. 2차 정벌 - 마도산 전투
그러자 무왕도 가만있지 않고 다시 2차 당나라 정벌에 나선다. 이미 당이 쳐들어올것이 분명하기에 그전에 먼저 선제공격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733년 만리장성 바로 앞 마도산[7] 으로 발해군은 거란과 연합하여 진격한다. 마도산 공격은 1차 공격과 달랐다. 이번에는 무왕이 직접 친정에 나서 진두지휘했다. 이 전쟁에서 당은 큰 손실을 입었다.[8]
신당서의 오승자전의 기록을 살펴보면"발해 무왕 대무예가 군사를 이끌고 마도산에 이르러 성읍을 점령했다"고 한다. 이러한 때 당나라 조정은 발해의 침공을 막는다고 정신이 없었다.[9] 당시의 기록을 통해 당 조정이 발해군의 공격에 대해 얼마나 긴장했던가를 확인하게 된다. 즉, 발해군이 당 조정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일종의 전면전과 같은 정벌전쟁을 펼친 셈.
또한 당현종은 발해 무왕이 만리장성을 넘어올 것을 걱정해서 마도산에 새로운 병력을 투입한다. 당군은 큰돌로 요충지를 필사적으로 막았다. 당은 가까스로 발해의 진격을 막아냈다.
마도산 정벌을 계기로 당나라는 발해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한편 국가적 자신감을 얻은 무왕은 그에 걸맞는 정책들로 새로운 발해로 만들어간다.
2차례의 당나라 정벌 후, 무왕은 중경 서고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발해의 땅이 넓어졌기 때문에 국가 규모에 맞게 중경(현주 서고성)으로 옮긴 것. 현주는 이전 수도 동모산에 비해서 날씨가 적당하고 강이 흐르는 넓은 분지 지역이라 주변 여건이 좋았다. 지금의 연변 조선족 자치구에 해당된다.
이후 당은 발해의 내정에 쉽게 간섭하지 못했고, 무왕은 국정을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발해의 당나라 정벌은 신생국이지만 절대 강대국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결과 발해는 당시 동아시아의 강대국인 당나라도 쉽게 넘보지 못하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3. 외교
3.1. 당나라
무왕 초기에 당나라와의 관계는 나쁜 편이 아니었지만, 당나라의 흑수부 설치 문제 및 대문예의 당나라 망명 등으로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후 730년 대낭아 억류 사건[10] 732년 발해 장수 장문휴의 등주 공격, 733년 거란과 연합해 마도산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는 736년 아들 대번이 파견되고, 737년에 3차례 사신을 파견해 관계가 개선되면서 적대관계가 다소 풀리게 되었다.
3.2. 일본
발해 건국 30년째인 727년 8월에 일본으로 처음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었다. 일본으로 가는 루트는 부산 쪽까지 내려가서 대한해협을 넘는 게 가장 가깝고 안전한 루트이지만,[11] 남쪽은 아직 별로 친하다고 할 수는 없는 신라 땅이니 동해 바다를 관통해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727년의 첫 사절단은 폭풍을 만나 홋카이도로 표류했고 아이누족과 싸우다 여덟 명만 살아남아서 728년 겨우 교토에 도착해 천황에게 국서를 전달할 수 있었다.[12] 이 때부터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약 200여년 동안 발해사 34회, 견발해사 12회 등 꽤 많은 교류가 있었다.발해왕이 아룁니다. 산하(山河)가 다른 곳이고, 국토가 같지 않지만 어렴풋이 풍교도덕(風敎道德)을 듣고 우러르는 마음이 더할 뿐입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대왕은 천제(天帝)의 명을 받아 일본의 기틀을 연 이후 대대로 명군(明君)의 자리를 이어 자손이 번성하였습니다. 발해왕은 황송스럽게도 대국(大國)을 맡아 외람되게 여러 번(蕃)을 함부로 총괄하며,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習俗)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너무 멀어 길이 막히고 끊어졌습니다. 어진 이와 가까이 하며 우호를 맺고 옛날의 예에 맞추어 사신을 보내어 이웃을 찾는 것이 오늘에야 비롯하게 되었습니다.
《속일본기》, 728년 1월
4. 가계
5. 기타
- 행적에서 공격적이고 냉정한 성격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대무신왕과 비슷한 포지션에 있는 임금으로 볼 수 있다. 대무신왕이나 발해 무왕이나 건국 초기 정복 군주라는 공통점에다 가까운 가족에게 냉정했고 모험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차가운 면모는 건국 초에 국가의 기틀을 잡아야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스스로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모양.
- 삼국유사에 나오는 대조영의 기록 중 '고려구장'라는 기록을 토대로 대조영이 고구려 시대 때 활동했던 장수라면 발해 건국까지 30년간 활동했음을 고려했을 때 최소 50대 정도로 추정된다. 이렇게 되면 대무예 위에도 형제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고구려부흥운동 과정에서 자식들이 모두 사망하면서 실질적인 장남이 대무예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 잃어버린 고구려의 고토를 대부분 회복했으며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당나라를 상대로 2차례에 걸쳐 크게 승리로 이끈 정복 군주이자 명장이다. 2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크게 패한 당나라는 더이상 발해에 대해 침공이나 내정 간섭을 하지 못했으며 중국 본토를 두들겨 패고 아수라장을 만들었는데 당나라가 제대로 대항을 못했다는 것이 특이하다. 발해 역사상 최대 영토를 정복하여 발해를 해동성국으로 만든 선왕과 함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비교되는 편.
- 발해 왕들 중 유일하게 무덤의 소재가 판명된 왕. 능호는 진릉.
6. 대중매체에서
7. 연대기
719년 무왕 즉위
720년 9월, 당나라가 낭장(浪將) 장월래(張越來)를 보내다.
720년 왕자 대도리행(大都利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다.
721년 대수령(大首領)을 당에 파견함.
722년 미발계(味勃計)를 당나라에 보내 매를 바침
724년 하조경(賀祚慶)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하다.
725년 오차지몽(烏借芝夢)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 인사를 하다.
726년 대도리행(大都利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다.
727년 9월 21일 고인의(高仁)등을 일본에 보내 교류하다.
727년 이진언(李盡彦)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다.
728년(일본서기 쇼무 덴노 5년) 1월 17일 발해 고제덕(高濟德)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13]
728년(일본서기 쇼무 덴노 5년) 2월 16일 일본이 발해에 사신을 보내다.
728년 어부수토(夫須討)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냄
729년 아우 대호아(大湖雅)와 대림(大琳)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다.
730년(일본서기 쇼무 덴노 덴표 2년) 8월 29일 발해에 갔던 일본 사신이 돌아오다.
730년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730년 아우 대낭아(大郞雅)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다.
731년 1월 당나라에 새해 인사를 하다.
732년 대성취진(大姓取珍) 등 120인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다.
732년 대장군 장문휴를 보내어 당나라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그곳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였다.
733년 1월 당나라가 대문예(大門藝)를 보내어 발해를 공격하다.
733년 자객을 보내어 대문예를 살해하려 하다.
736년 수령(首領) 율기토(聿棄討)를 당나라에 파견하다.
737년 무왕이 죽고 그의 아들 대흠무가 즉위하다.
8. 《신당서》 기록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즉위하여 크게 영토를 넓히자
또 전중시(殿中寺)와 종속시(宗屬寺)를 두었는데, 각 시마다 대령(大令)이 있다.
문적원(文籍院)에는 감(監)을 두었다. 영과 감 밑에는 소령(少令), 소감(少監)이 각각 있다.
태상시(太常寺), 사빈시(司賓寺), 대농시(大農寺)에는 각 시마다 경(卿)이 있다.
사장시(司藏寺), 사선시(司膳寺)에는 각 시마다 영(令)과 승(丞)이 있다.
주자감(冑子監)에는 감장(監長)이 있다.
항백국(巷伯局)에는 상시(常侍) 등의 관직이 있다.
무관(武官)으로는 좌맹분위(左猛賁衛), 우맹분위(右猛賁衛), 웅위(熊衛), 비위(羆衛), 남좌위(南左衛), 남우위(南右衛), 북좌위(北左衛), 북우위(北右衛)의 8위가 있으며, 각 위에는 대장군(大將軍) 1명과 장군(將軍) 1명씩 있었다. 대체로 중국의 제도를 본뜬 것이 이와 같았다.
관리의 품계는 질(秩: 벼슬의 차례를 뜻함)로 표현하는데,
3질 이상은 자색 옷에 상아 홀[14] 과 물고기 모양의 금빛 주머니를 찬다.
5질 이상은 분홍색 옷에 상아 홀과 물고기 모양의 은빛 주머니를 찬다.
6질과 7질은 연분홍색 옷을 입고, 8질은 녹색 옷을 입는데, 모두 나무 홀(木笏)을 찼다.
발해의 민간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태백산의 토끼, 남해의 다시마, 책성의 된장, 부여의 사슴, 막힐의 돼지, 율빈의 말, 현주의 베, 옥주의 솜, 용주의 명주, 위성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가자미이다. 과일로는 환도의 오얏과 낙랑의 배가 있다. 나머지 풍속은 고구려나 거란과 비슷하다.
유주절도부(幽州節度府) 동북의 여러 종족들이 두려워 복속하였다. 또 사사로이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고쳤다. 현종이 책봉을 내려 왕위 및 관할 영역을 세습하도록 하였다. 얼마후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사자가 입조하자, 현종은 그 지역에 흑수주(黑水州)를 세우고, 장사(長史)라는 관직을 설치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대무예가 신하들을 불러 의논하였다.
그리고 동생 대문예와 외숙 임아(任雅)에게 군사를 일으켜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대문예는 일찌기 인질로 당나라 수도에 머무른 적이 있었으므로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무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흑수말갈이 처음에는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당나라와 통교하게 되었고, 지난번 돌궐에게 토둔(吐屯)을 요청할 적에도 모두 우리에게 먼저 알렸다. 그런데 지금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하면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당나라와 함께 앞뒤에서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대무예는 듣지 않았다. 군사가 국경에 이르러 대문예가 다시 상소하여 간절하게 간하였다. 대무예는 화를 내어 사촌형 대일하(大壹夏)를 보내어 대신 통솔케 하고 대문예는 소환하여 죽이려 하였다. 대문예가 두려워서 사잇길을 통하여 당나라에 귀순해 오니, 당현종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을 제수하였다."흑수말갈이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하였다 하여 우리가 공격한다면 이는 당나라를 등지는 셈이 됩니다. 당나라는 대국으로 군사가 우리보다 만배나 되는데 그들과 원한을 맺는다면 우리는 곧 망할 것입니다. 옛날 고구려가 전성기에 군사 30만으로 당나라와 맞서 싸운 것은 굳세고 강했다고 할 만하지만, 당나라 군사가 한번 이르자 땅을 쓸 듯이 다 없애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의 군사는 고구려에 비해 삼분의 일밖에 되지 못하니, 임금께서 저들의 뜻을 어긴다는 것은 불가합니다."
대무예가 사신를 보내어 대문예의 죄악을 폭로하고, 죽이기를 요청하였다. 당현종은 대문예를 안서(安西) 지방에 거처하라고 조서를 내리고, 대무예에게는 "대문예가 곤궁에 처하여 나에게 귀순해 왔으니, 의리상 죽일 수가 없어서 벌써 나쁜 곳으로 유배보냈다"라고 꾸며서 답장을 보냈다. 아울러 발해 사신을 머무르게 하여 보내지 않고, 별도로 홍려소경(鴻臚少卿) 이도수(李道邃)와 원복(源復)에게 칙서를 보내도록 전하였다.
대무예는 당현종이 전후 사실을 숨긴 것을 알아채고 글을 올려 "폐하는 거짓을 천하에 보여서는 아니 되오"라고 꾸짖으니, 그 뜻은 반드시 대문예를 죽이라는 데 있었다. 이에 당현종은 이도수와 원복이 국가의 기밀을 누설한 데 대하여 노하여 모두 좌천을 시키고, 거짓으로 대문예를 내쫓았다고 회답하였다.
10년 뒤에 대무예가 장군 장문휴를 보내어 해적을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치니, 현종은 급히 대문예를 보내어 유주(幽州, 지금의 북경)의 군사를 동원시켜 반격하고,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15] 을 신라에 보내어 군사를 독려하여 발해의 남쪽를 공격하게 하였다. 신라 측은 나당전쟁 이후 당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다가 이 제안을 계기로 국교 회복을 염두에 두고 군대를 출진했으니 마침 날씨가 매우 추운 데다 눈이 한 길(3미터)이나 쌓여 군사들이 태반이나 얼어죽으니,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대무예가 그 아우에 대한 원한이 풀리지 않아서 자객을 모아 당나라 동쪽 수도인 낙양(洛陽)에 들여보내 길에서 저격케 하였으나, 대문예는 자객들을 물리치고 살아났다. 하남부(河南府)에서 자객들을 체포하여 모두 죽였다. 대무예가 죽자, 발해에서 사사로이 무왕(武王)이라 시호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