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탁호텔
'''Sontag Hotel'''[1]
'''孫鐸호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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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기 세워진 서구식 호텔. 지금의 중구 정동에 위치하였으며 오늘날에는 그 터만 남아있다. 창립자인 앙투아네트 존타크(Antoinette Sontag)의 이름을 땄으며, 호텔이라는 말이 아직 전래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손탁빈관(Sontag賓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손탁호텔의 창립자인 손탁(본명:마리 앙투아네트 존타크(Marie Antoinette Sontag))는 독일인[3] 으로 1885년 러시아 공사였던 베베르를 따라 대한제국을 방문하게 된다. 손탁은 베베르의 처형 혹은 처제였다고 하고, 윤치호 일기에서는 베베르 동생의 처형이라고 기록한다.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각종 언어에 능통했던 손탁은 한국어도 빠른 속도로 습득하면서 명성황후의 신뢰를 얻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궁궐에서 양식 조리와 외빈을 접대하는 임무를 수여받게 된다. 당시 조선은 위안스카이에게 한창 내정을 간섭당하고 있던 시기였고, 고종과 명성황후는 손탁에게 궁내부와 러시아공사관 사이 사이의 접선이라는 임무를 맡겼다. 손탁은 한러밀약으로 대표되는 반청운동을 주도하는 등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냈고, 이를 기특히 여긴 고종은 1895년 한옥을 1채를 그녀에게 선사한다.[4] 이 한옥은 을미사변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대한제국의 정세속에서 각국 외교관들의 각축장이 되면서 아관파천과 같은 각종 정치적 책략의 진원지가 된다. 손탁 자신이 이런 계획에 깊이 관여했고,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그녀에게 기존의 한옥을 방 5개짜리 양옥으로 업그레이드(?)시켜주는 것으로 보답한다. 이 양옥을 손탁이 서구풍으로 인테리어하고 각종 투숙객을 맞이했던 것이 바로 손탁호텔의 출발점이다.
한편 대한제국은 세계 곳곳의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그에 따라 외교관들 및 귀빈들의 방문이 증가함에 따라 이들의 투숙시설[5] 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 때 대한제국의 시선이 간 것이 바로 손탁이 운영하던 이 손탁빈관. 그렇지만 방 5개는 호텔로 운용하기에는 너무 작았기에,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기존의 양관을 헐고 2층짜리 양관으로 재건축한 뒤 손탁에게 경영을 맡기니, 이것이 바로 ‘손탁호텔’이다. 2층이 VIP실로 사용됐고, 1층은 일반 외국인 객실 또는 식당, 커피숍으로 이용했다. 특히 정동구락부로 위시되는 개화파 관료들과 서구 외교관들의 회합장소로 자주 이용되었다. [6] 한편 손탁은 1909년 모국인 독일로 돌아갔고, 이후 이화학당이 이를 사들여서 기숙사로 사용하다 1922년 철거하고 새로운 건물을 설립한다. 하지만 이 건물도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붕괴되었고 프라이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재건되었지만 1975년에 화재로 전소된 뒤 철거되었고, 한동안 빈터로 남아 있다가 2004년에 이화여자고등학교 백주년 기념관이 새로 들어섰다. 백주년 기념관 주차장 입구 앞에는 이 자리에 손탁호텔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흔히 이곳을 서울에 건립된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라고도 이야기 하지만, 손탁호텔에 앞서 이미 서울호텔(정동 황국 구내, 1897년 개업), 팔레호텔(대안문 앞, 1901년경 개업), 스테이션 호텔(서대문 정거장 앞, 1901년 개업) 등이 있어 최초는 아니다. 참고로 근대 조선 최초의 서양식 호텔은 1888년 인천에서 개관한 대불호텔[7] 이며 당시 조선과 서울을 드나들기 위한 주요 관문이 인천[8] 이었으므로 서울보다 인천에 최초의 호텔이 세워졌다.
설립자인 손탁의 귀국 후의 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러시아 혁명으로 전재산을 날리고 객사했다는 등 풍문이 많았으나, 1922년에 프랑스 칸에 마련해 두었던 자택에서 노환으로 편안히 사망했음이 확인되었다. 기사 참조. 손탁호텔의 건물이 철거된 해와 같은 해에 사망한 것도 뭔가 묘한 인연인 듯하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글로리빈관의 모티브.
'''孫鐸호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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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 시기 세워진 서구식 호텔. 지금의 중구 정동에 위치하였으며 오늘날에는 그 터만 남아있다. 창립자인 앙투아네트 존타크(Antoinette Sontag)의 이름을 땄으며, 호텔이라는 말이 아직 전래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손탁빈관(Sontag賓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2. 역사
손탁호텔의 창립자인 손탁(본명:마리 앙투아네트 존타크(Marie Antoinette Sontag))는 독일인[3] 으로 1885년 러시아 공사였던 베베르를 따라 대한제국을 방문하게 된다. 손탁은 베베르의 처형 혹은 처제였다고 하고, 윤치호 일기에서는 베베르 동생의 처형이라고 기록한다.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각종 언어에 능통했던 손탁은 한국어도 빠른 속도로 습득하면서 명성황후의 신뢰를 얻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궁궐에서 양식 조리와 외빈을 접대하는 임무를 수여받게 된다. 당시 조선은 위안스카이에게 한창 내정을 간섭당하고 있던 시기였고, 고종과 명성황후는 손탁에게 궁내부와 러시아공사관 사이 사이의 접선이라는 임무를 맡겼다. 손탁은 한러밀약으로 대표되는 반청운동을 주도하는 등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냈고, 이를 기특히 여긴 고종은 1895년 한옥을 1채를 그녀에게 선사한다.[4] 이 한옥은 을미사변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대한제국의 정세속에서 각국 외교관들의 각축장이 되면서 아관파천과 같은 각종 정치적 책략의 진원지가 된다. 손탁 자신이 이런 계획에 깊이 관여했고,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그녀에게 기존의 한옥을 방 5개짜리 양옥으로 업그레이드(?)시켜주는 것으로 보답한다. 이 양옥을 손탁이 서구풍으로 인테리어하고 각종 투숙객을 맞이했던 것이 바로 손탁호텔의 출발점이다.
한편 대한제국은 세계 곳곳의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그에 따라 외교관들 및 귀빈들의 방문이 증가함에 따라 이들의 투숙시설[5] 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 때 대한제국의 시선이 간 것이 바로 손탁이 운영하던 이 손탁빈관. 그렇지만 방 5개는 호텔로 운용하기에는 너무 작았기에,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기존의 양관을 헐고 2층짜리 양관으로 재건축한 뒤 손탁에게 경영을 맡기니, 이것이 바로 ‘손탁호텔’이다. 2층이 VIP실로 사용됐고, 1층은 일반 외국인 객실 또는 식당, 커피숍으로 이용했다. 특히 정동구락부로 위시되는 개화파 관료들과 서구 외교관들의 회합장소로 자주 이용되었다. [6] 한편 손탁은 1909년 모국인 독일로 돌아갔고, 이후 이화학당이 이를 사들여서 기숙사로 사용하다 1922년 철거하고 새로운 건물을 설립한다. 하지만 이 건물도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붕괴되었고 프라이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재건되었지만 1975년에 화재로 전소된 뒤 철거되었고, 한동안 빈터로 남아 있다가 2004년에 이화여자고등학교 백주년 기념관이 새로 들어섰다. 백주년 기념관 주차장 입구 앞에는 이 자리에 손탁호텔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흔히 이곳을 서울에 건립된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라고도 이야기 하지만, 손탁호텔에 앞서 이미 서울호텔(정동 황국 구내, 1897년 개업), 팔레호텔(대안문 앞, 1901년경 개업), 스테이션 호텔(서대문 정거장 앞, 1901년 개업) 등이 있어 최초는 아니다. 참고로 근대 조선 최초의 서양식 호텔은 1888년 인천에서 개관한 대불호텔[7] 이며 당시 조선과 서울을 드나들기 위한 주요 관문이 인천[8] 이었으므로 서울보다 인천에 최초의 호텔이 세워졌다.
설립자인 손탁의 귀국 후의 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러시아 혁명으로 전재산을 날리고 객사했다는 등 풍문이 많았으나, 1922년에 프랑스 칸에 마련해 두었던 자택에서 노환으로 편안히 사망했음이 확인되었다. 기사 참조. 손탁호텔의 건물이 철거된 해와 같은 해에 사망한 것도 뭔가 묘한 인연인 듯하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글로리빈관의 모티브.
[1] Sontag을 독일어 식으로 발음하면 존타크 호텔이다.[2] 손탁의 한자 표기이다.[3] 좀 복잡한데, 태어난 곳은 알자스-로렌으로 태어났을 무렵에는 프랑스 국적이다가 보불전쟁 이후 독일 국적을 취득했다가 중간에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기도 한다. 최종 국적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4] 근데 이 한옥 한채가 무려 1,200평 가량 된다. 오늘날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의 부지가 됐다.[5] 조선시대 사용했던 용어로 표현하자면 영빈관.[6] 덧붙이자면 손탁호텔이 한국의 양식 및 커피숍 경영의 시발점이다.[7]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堀 力太郎)가 설립. 이 건물은 1919년에 한 중국인이 인수하여 "중화루"라는 음식점으로 경영했고, 음식점이 문을 닫은 뒤에는 임대를 하다가 노후화를 이유로 1978년에 철거되었다. 철거 이후에는 주차장으로 쓰이다가 2011년에 이 부지를 인수한 사업자가 상가를 짓기 위해 터를 파다가 건물 기단부가 발견되었다. 인천광역시는 이 부지를 인수하여 대불호텔을 복원, 전시관으로 꾸며서 2018년에 개장했다.[8] 정확히는 제물포. 제물포에 근대적 호텔이 생기던 무렵에 조선을 방문하는 외국인은 제물포에서 1박을 하고 짐꾼을 고용해서 한양으로 향하는 여정이 일반적이었다. 제물포에 호텔이 발달할 수 밖에 없는 여건이 형성되었던 것. 그러나 제물포에서 성업하던 근대적 호텔들은 경인선이 개통된 이후 급격하게 몰락했다. 외국인들이 굳이 제물포에서 묵지 않고 바로 경인선을 이용해 한양으로 향하게 되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