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덴노/전쟁 책임
1. 방관자였는가?
제2차세계대전 당시 내각총리대신였던 도조 히데키는 극동국제군사재판 중 '''"천황의 의사에 반하여 개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는 요지의 발언을 한 일이 있다. 하지만 극동재판소는 천황을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진행된 재판이어서, 피고들은 덴노의 전쟁 책임을 언급조차 할 수 없었다. 도조 히데키 역시 해당 발언 직후 연합군 측에 해당 발언이 천황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음을 경고받고, 다음 번 재판에서 이 발언을 철회했다. 도조는 본인이 천황의 충성스러운 신하라고 자부(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의 정신승리)하고 있었고, 교수대의 이슬이 되는 순간까지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쳤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이 재판으로 천황 폐하께 폐(弊)를 끼치지 않게 될 것이 명백해져서 안심했습니다.”''' 형 집행 한달여 전 도쿄 전범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도조는 미국의 방조로 히로히토가 전쟁의 법적 책임에서 벗어난 것을 누구보다 만족스러워했다.[1] 또 천황의 측근 기도 고이치는 자신의 일기를 제출하며 '''진주만 공습이 천황의 재가를 받고 이루어졌다고 증언'''했으나, 이는 재판 중에 묵살됐고 본인 역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요시다 유타카 교수가 쓴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 6권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 따르면 천황은 메이지 유신부터 최종 승인을 할 수 있는 능동적 권한을 가졌고, 히로히토 자신도 전쟁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리였으며 '''실제로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일례로 전시(戰時) 국정에도 직접 참여한 건 물론, 작전 수립이나 시행에도 직접 참여했고 작전을 수정하게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일본에선 누구보다 전시상황을 자세히 파악했으며, 실제로 일본 육해군은 서로에게조차 정보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 '''히로히토에게만큼은 돌려서 말하지 않고 그대로 보고했다.''' 해군은 명색이 총리대신씩이나 되는 도조 히데키에게조차 (육군이라는 이유로 혐오해서) 부정확하게 보고하는 바람에 도조는 히로히토에게서 정확한 정보를 다시 받았을 정도였다. 물론 육군 정보는 도조가 히로히토보다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
한마디로 히로히토야말로 누구보다 전시상황과 일본군 전체의 실태를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소리이며 당연히 태평양 전쟁, 중일전쟁, 난징대학살, 731 부대, 일본군 위안부 등 각종 전쟁 범죄에 대해서도 전부 파악했던 게 분명하다. 아닌 게 아니라 일단 731 부대 자체부터가 천황의 재가를 통해 창설된 부대였다.
혹자는 히로히토도 731부대의 실체를 몰랐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일본군 부대 중 천황의 재가로 창설된 부대는 '''731 부대가 유일하다.''' 또 731 부대가 특별 허가 없이 접근 불가능할 만큼의 보안을 유지했던 것, 그리고 군 수뇌부가 생체 실험에 참관한 명백한 증거가 다수 남아있는 걸 고려하면, 히로히토는 731 부대의 존재와 그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미드웨이 해전 결과는 물론 모든 전황을 파악하던 사람이 731 부대의 실상만 유독 쏙 빼놓고 몰랐을까? 히로히토가 731 부대를 알고 있었을 법한 정황은 수두룩하게 많지만, 몰랐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거기다 히로히토는 생물학에 관해 전문지식을 갖춘 자로 이 부대에서 행할 '''실험'''에 관해 군부의 누구보다 정확한 이해가 가능한 배경지식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평소 자신이 물고기에 행하던 각종 실험을 사람에게 하겠다는 의미일테니 말이다.
'''그 도조 히데키조차 전체적인 실태를 파악하지 못했다.'''[2] 하지만 그 모든 만행을 막거나 이후로는 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놔뒀다. 히로히토 본인 역시 GHQ 연합국 최고사령관였던 더글러스 맥아더와의 회담에서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소"'''라는 뜻을 맥아더에게 전했다는 일화가 맥아더의 회고록을 통해 알려져 있었으나, 회담 기록이 공개됐지만 그런 내용은 없었다. 오히려 "나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전쟁이 일어나서 유감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오히려 전쟁 책임을 통감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책임을 부정하고 책임을 전쟁을 일으킨 군부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하지만, 예상보다 빨리 항복선언을 한 일본제국의 전범들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도조를 비롯한 전범들이 모두 천황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실상은 "우린 천황 시킨대로 했어요"라며 책임을 전가시켰다. 일본 열도를 장악하기 위해 날아온 미군과 맥아더에게 있어, 천황을 전범으로 처리하여 제재를 실행에 옮길 경우 일본인들의 역린을 건드려 엄청난 저항이 발생할 것이 우려되는데, 하필 당시 중국 대륙에서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과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 간 국공내전이 시작되고, 소련군이 빠르게 남하하여 한반도 북쪽을 점거하여 일본 열도까지 들어오려는 상황이었다. 결국 일본을 빠르게 미국의 영향하에 두기 위해선 천황을 꼭두각시로 남겨두어 일본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미국 정부의 암묵적인 뜻으로 인해 극동재판소는 천황을 법정에 기소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전범이 되지 않았다.[3] 간단히 말해, 맥아더가 최대한 빨리 일본제국 국민을 자기에게 머리숙이게 하려면 히로히토가 일본제국 국민들에게 맥아더를 '블루 아이드 쇼군', 즉 '벽안의 외국인이지만 이 사람이 쇼군이다'라고 공표를 해줘야 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천황-쇼군 지도 체재에 익숙했던 일본 사회구조상 그렇게 해야 일본제국 국민이 적이었던 미국의 맥아더에게 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맥아더가 히로히토와 함께 사진을 찍은 의도 역시 '나는 히로히토를 지지한다'는 뜻이 담겨있다는 해석이 있으며, 실제로 맥아더는 히로히토를 보호하는 데 있어 가장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맥아더의 회고록에도 히로히토에 대한 악담은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는 일본 최고의 젠틀맨'이라는 식으로 치켜세우는 문장까지 있었다.
결국 맥아더 사령부의 황족 전범재판 불기소처분 방침에 의해 전쟁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는 않았지만, 전쟁 재발을 막기위해 무장해제가 필요한 '''평화헌법(일본국 헌법/1947년 제정)'''이라는 것을 만들어, 일본군은 해산하고 천황제를 유지하되, 대신 국가 운영에 관한 모든 권한 박탈과 전 재산 몰수 등의 조치를 받아 '일본 국가통합과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 지위만 남게 된다.[4] 일본 헌법학계에서는 대체로 상징천황제라 하여 현실적으로 일본 천황이 상징적인 국가원수로서의 특징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해도, 국정에 관한 실질적인 권한이 없고[5] 국가원수로서의 천황의 지위에 대한 규정이 없으며 그저 일본국 헌법 제4조에 '국가통합의 상징'이라고만 명시되어 있으므로 '''천황을 국가원수로 보지 않는다.''' 일본 역사에서 천황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오랫동안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로 돌아간 셈이다.
한편 패전 직후 일본 국민들에게 있어서는 쇼와 덴노가 오히려 '무조건 항복으로 일본인 전멸을 막은 평화주의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덴노는 1945년 8월까지 일반인은 '절대로 볼 수 없는 현인신(아라히토카미)'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존재감이 없었다. 실제로 다른나라의 지도자들과 달리 덴노는 언론에 거의 노출되지 않았다.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신이 갑자기 '인간 선언'을 하며 전쟁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인 관계를 회복했다는 사실만이 당시 일본 국민에게 보여진 현상이기 때문에 이 갑작스런 선언는 천황에게 인간을 위해 지상으로 내려와 대신 희생한 신과 같은 이미지를 부여했고 결국 천황은 실권과 재산을 잃은 대신 중대한 '상징성(象徴性)'을 획득했다.[6] 실제로 히로히토가 GHQ의 전후 수습 작업에 협조하면서 군부에 의해 경직된 사회에서 살다가 전쟁까지 겪고 무기력해져버린 국민들을 다시 일으켜세우는 일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미국 역시 히로히토를 살려둔 효과가 나타나자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히로히토가 죗값을 치르지 않고 여전히 황위를 지키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은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언급하며 비판했다. 이에 히로히토의 평화적 상징성을 지켜야 했던 GHQ와 일본의 몇몇 보수파 정치인들은 히로히토를 두둔했으며, 심지어 여전히 히로히토를 숭배하던 극우파들은 히로히토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협박, 공격하기도 했다.[7]
그러나 세월이 흘러 히로히토가 전쟁책임을 뒤로한채 죗값을 제대로 받지 않고 호의호식하다 십이지장에 붙어있는 췌장암으로 1989년 1월 7일에 사망하자 일본 내에서는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따지는 움직임이 늘어났고, 수많은 지식인들과 학자들에 의해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증명하는 자료들이 계속 공개되었다. 결국 일본 내에서도 히로히토를 평화주의자로 보는 경향은 점점 약해지고, '히로히토에게도 전쟁 책임이 있다' 혹은 '히로히토의 전쟁 관여에 대한 좀 더 심도있는 심의, 조사를 통하여 국민들이 모든 진실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등의 의견이 늘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재평가의 결과 덕분인지 2000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순수 민간 단체의 사설 법정에서 결국 히로히토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다만 이는 민간단체의 사설법정일 뿐이며 일본 정부의 공식입장은 아니다.
그 외에 보면 사이판 전투를 보면 알겠지만 '''자국민에게 자살을 권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국민인 일본인에게 한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 도조 히데키가 처음엔 "천황 폐하께서 그러실 리 없다"고 의심하였으며, 심지어 옥새가 찍힌 것을 보고도 멋대로 칙명을 가로채기까지 했다.
2. 꼭두각시였는가?
한편 꼭두각시였다는 설도 있다. 꼭두각시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내세우는 근거는 분명 히로히토는 전쟁을 수차례 반대했음에도 당시 내각총리대신이자 군부의 수장이었던 도조 히데키는 전쟁 준비를 멈추지 않으며 히로히토를 계속 전쟁하도록 앞장서서 설득했다는 점, 그리고 전쟁을 도조가 주도적으로 이끄는 과정에서 히로히토가 도조에게 반감을 상당히 품었고 의견 충돌도 있었으나 결국 바뀐 건 딱히 없었다는 점 등이 있는데, 사실 이러한 근거들로 도출해낼 수 있는 결론은 '도조가 정말 엄청나게 전쟁에 미친놈이었다'에 가깝지, 히로히토가 도조의 꼭두각시였다고 보긴 힘들다.
어쨌든 전쟁의 주도권은 도조 히데키에게 있었고, 도조가 워낙 막 나가다 보니 히로히토와도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국가원수로서의 권한은 도조가 아닌 히로히토에게 있었으므로 히로히토는 전쟁을 멈출 힘이 없었던 게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인 전쟁을 '''군부와의 전면적인 충돌을 각오하면서 멈출 생각이 딱히 없었던 것'''이라고 보는게 더 그럴 듯 하다. 도조조차도 히로히토와 의견 충돌이 있다고 해서 대놓고 히로히토를 쌩까는 짓을 저지르진 않았으니 말이다.[8]
물론 천황의 정치적 의사 표현은 막부 수립 이래의 전통적 천황제 아래서든, 메이지 유신 이후의 천황제 하에서든 금기시됐기 때문에 히로히토 역시 동일한 문화적, 심리적 제약을 느끼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쇼와 덴노는 이미 2.26 사건 진압 결정에서 금기를 깨고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관철시킨 바가 있었다. 매우 예외적인 경우이긴 했으나, 전례가 존재하는 만큼 히로히토가 이때처럼 단단히 마음먹고 반대를 고수했다면 태평양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을지는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쇼와 덴노의 개전 방조 혐의가 성립한다.
때문에 도조와 히로히토의 관계는 실권자와 꼭두각시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대립 관계였다고 보는게 더 가깝다. 도조 히데키 항목을 참조하면 왜 역사학자들이 히로히토가 아닌 도조를 히틀러, 무솔리니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은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도조야 말로 일본 제국의 히틀러 같은 존재였으며, 전범으로서의 죄가 누구보다도 무겁다 = 히로히토는 무고한 꼭두각시일 뿐이었다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요약하자면 일본 제국의 전범 중에서 가장 죄가 무거운 인물은 전쟁을 일으키고 주도적으로 이끈 도조가 맞지만, 당시 국가원수로서 전쟁을 허가하고 방관한 히로히토 '''역시 죄가 있다는 것이다'''.
3. 전후 히로히토의 입장
NHK가 보도한 히로히토 덴노가 궁내청 초대 장관이 남긴 발언(배알기)에 따르면 전쟁에 대한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연합뉴스 기사
위 기사에 따르면, 첫째로 맥아더 회고록에서 전부 자신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다고 한 것과 반대로 "군부 기세를 누구도 막지 못했다. 도조 내각 때는 이미 병이 진행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라며 본인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쟁 책임을 회피했으나, 태평양 전쟁 자체에 대해 반성하기는 했다. 예를 들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기념 행사의 발언에서 히로히토 일왕이 "나는 아무래도 '반성(反省)'이라는 글자를 넣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군도, 정부도, 국민도 모두가 하극상이나 군부의 전횡을 놓친 것을 반성해 나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넣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요시다 시게루 당시 총리가 "(천황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책임을 인정할''' 위험이 있다.[9] 이제 전쟁이라든가, 패전이라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10] 라며 반대했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들이 합사되자 야스쿠니의 참배를 거부했다. 단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은 보냈다.[11]
셋째로 평화헌법 개정을 요구했다. 1952년 2월 "헌법개정에 편승해 밖에서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해 부정적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부분은 다루지 않고 군비에 대해서만 공명정대하게 당당히 개정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1952년 5월 "재군비에 의해 군벌이 다시 대두하는 것은 절대 싫지만, 침략을 받을 위협이 있는 이상 방위적인 새로운 군비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당시 궁내청 장관은 "(현재) 헌법상 그런 말은 할 수 없다. 최근의 전쟁에서 일본은 침략자로 불렸다. 그건 금구(禁句)다." 라고 대답했다. 평화헌법이 정의한 상징에서 벗어나 개헌과 군대를 갖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런 히로히토 덴노의 입장은 궁내청이 편찬한 쇼와덴노실록(昭和天皇御實錄)에는 빠져있다. 그래서 궁내청이 사실을 은폐 축소하고 덴노에 관한 불리한 중요 정보를 빼고 편찬한 것이 아닌지 의혹이 일었다.
[1]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 호사카 마사야스 지음, 정선태 옮김, 페이퍼로드[2] 대표적인 게 '''미드웨이 해전.''' 왜냐하면 아무리 군부의 수장이라고는 하나 도조는 엄연히 육군 대장 출신이었기 때문에, 해군 측에서는 도조에게 전시상황을 보고할때 사실과 다르게 보고하거나, 혹은 중요한 내용을 빼놓고 보고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다만 지위가 지위인 만큼 육군 측의 전시상황에 대해서는 히로히토보다도 디테일하게 파악하고 있었다.[3] 당시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의한 전쟁 피로로 여론이 매우 악화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특히 오키나와에서의 치열한 전투로 인적, 물적 손해를 입은 미군 입장에서 일본 본토에서 싸우게 될 경우 그 피해가 더욱 커질 것이라는 경각심이 늘어나게끔 한 계기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빠른 전쟁 종결을 원하는 여론이 득세하였다.[4] 그리고 히로히토와 그의 친형제 일가들을 뺀 나머지 황족들은 모조리 평민으로 떨어졌다(신적강하).[5] 국정에 개입하려고 하면 어떻게 하냐가 대두되는데 여기에는 그러면 그 덴노는 폭군이니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가 생겨났다. 물론 이는 천황뿐 아닌 섭정도 마찬가지.[6] 다만 일본 황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치명적인 패배 이후 그 상징의 중요성을 잊지 않고 현재도 과거사를 꾸준히 반성하고 있는 중이다. 당장 그 히로히토도 A급 전범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해 들어가자 그날부로 야스쿠니의 신사 참배를 영원히 하지 않았고, 대신 덴노 관인이 찍혀 있는 공물만 보내어 현재에 이른다.[7] 이는 당시 일본내 반전여론의 중심에 있었던 좌익세력이 주도하였다. 일본내 좌익세력은 군국주의 시절때부터 이미 조선의 식민지독립을 지원하고 반전여론을 주도하는 등 일본정부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입장을 취해왔는데, 전후에는 GHQ가 소련의 영향에 의한 일본의 공산주의화를 막기위해 보수 우파 정치인을 적극 등용하는 한편, 천황보호를 주도하자 자연스럽게 이를 격렬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8] 덴노를 신성시하는 시대였으니 덴노에 정면으로 맞선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특히 당시 일본군은 육해군 대립이 있었는데 도조가 육군 출신이기도 한 만큼 이런 일이 벌어지면 해군에서 당장 도조를 열심히 물어뜯었을 것이다. 명분이야 '어디서 감히 천황폐하에게 대드냐?' 라고 하면 끝이다. [9] 戦争を御始めになつた責任があるといはれる危険がある[10] 今日は最早戦争とか敗戦とかいふ事はいつて頂きたくない気がする[11] 야스쿠니 신사의 시작은 무진전쟁에서 친덴노파 전사자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메이지 덴노가 왕정복고를 하고 지금까지 일왕가가 있게 해준 공로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전범 몇명 때문에 나머지 다수의 덴노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덴노 입장에서 마냥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