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창

 

정체: 許昌
간체: 许昌
현대 표준중국어 발음(한어병음): Xǔchāng
한국 한자음: 허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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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축물은 이름부터가 위루(魏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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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창의 위치: 구글맵)
1. 개요
2. 역사
3. 몰락의 원인
4. 삼국지 게임에서


1. 개요


삼국시대(중국)에 유명했던 중국의 도시이며, 현재 인구는 430만 명인데 현재 기준으로도 중국에서 중간 규모의 도시.
중국어로는 쉬창이라고 한다. 현재 허난 성(하남성)에 위치해 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도시 중에서 낙양, 장안과 더불어 가장 유명하다(거기에 덤으로 성도, 건업 정도가 더 낄 것이다.). 허난성과 함께 예주에 속하는 지역으로, 후한 시절 예주 영천군의 허현이었다.

2. 역사


원래는 주나라 시대 허나라(許) 지역이라서 허라고 불렸다. 낙양의 동남쪽으로 약 80km정도 떨어진 곳이지만, 춘추전국시대-한나라 시기에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곳이 아니었다.
이 도시가 바로 역사의 주무대가 된 것은 바로 조조 때문이었다. 서기 196년 군벌인 조조가 장안에서 이각-곽사의 수중에 있다가 낙양으로 탈출한 헌제를 보호하게 되었는데, 이때 조조는 이곳을 낙양을 대신할 새로운 도읍으로 삼았다. 당시 낙양은 동탁에 의해 불에 타버려 폐허가 되어 있었고, 장안은 이각과 곽사의 난을 겪은 데다 안보에 취약하였다. 또한, 허는 조조 자신의 근거지(연주)와 가깝고 주변 물자가 풍부하다는 이점도 있었기에 조조는 헌제를 이곳으로 모셔와 새로운 도읍으로 삼았던 것이다.[1]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듣보잡이었던 도시가 명목만 남은 후한의 수도가 되어 유명해졌으며, 이때 도(都)가 붙어 '허도'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연호를 건안(建安)으로 바꾸니 이것이 24년[2]간 지속된 건안 연간의 시작이다.
조조가 죽자 조비가 제위를 선양 받고 221년 "魏基昌于許"(위기창우허, 위나라의 기초는 '''허'''에서 번'''창'''할 것이다.)라는 말을 지으며 허창으로 개칭되었다. 그래서 삼국지연의에서 조조 생전에 허창허창 거리면 고증 오류. 역사서 삼국지에서는 허창으로 개칭되기 전에 "허", "허도"라는 말도 자주 쓰인다. 그런데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190년부터 떡하니 허창이라고 되어있다.[3]
제후 시절 모개가 건의하고 건안 1년 한호가 건의한 둔전제의 가장 큰 효과를 본 동네. 196년 가을 시작해 197년 첫 해에 무려 '''양곡 백만 석'''의 식량이 모였다고 한다. 이후 둔전제는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조조가 쇠락하지 않고 주변 군웅들을 제압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조비의 시대엔 이미 둔전제가 한계를 보이며 서서히 쇠락하는 상황이었고, 사실 천도는 이런 경제적 배경을 반영한 측면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안 연간에는 장안, 낙양, 업군, (譙, 조조의 고향으로 흔히 말하는 초현)와 더불어 리즈시절에는 5대 도시라고 불렸으나, 결국 조비는 220년대 낙양을 복원하고 황궁을 지었으며, 이전하며 허창의 황궁은 헐어버렸다. 그리고 인구도 모두 이전하며 허창은 다시는 수도가 되지 못하고 듣보잡이 된다. 결국 오늘날까지 길이 남은 "허창"이란 이름을 지어준 조비는 약주고 큰 병 준 셈(...).
고평릉 사변에서 환범조상에게 허창에서 조방을 데리고 농성하라고 진언했으나 조상이 듣지 않았다. 또 한번은 태위 왕릉연주자사 영호우가 모의해 황족 조표를 황제로 맞아들이고 수도를 다시 연주의 허창으로 옮기려고 했다. 영호우는 장군 장식(張式)을 파견해 조표와 왕래했지만 흐지부지 되었고, 후에 모의가 발각되자 사마의는 왕릉을 토벌하러 친히 수춘으로 출정, 왕릉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런데 다시 음모가 드러나서 왕릉은 자결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허창은 완벽하게 몰락하고 말았으며, 이후의 역사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북쪽의 정저우를 통과해 우한에 이르는 길목에 있던 덕분에 철도가 놓이게 되었고, 이때부터 1700여 년간의 쇠락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3. 몰락의 원인


좋은 입지조건이지만, 촉한정통론이 득세하고 조조의 본거지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면서 위나라 이후 발전이 가로막혔다.
2천 년이 가깝게 흐른 현재에는 조금씩 발전하는 추세라고 하며, 인근에 헌제의 무덤인 선릉과 헌제가 선양했던 수선대를 포함해서 위나라 유적이 좀 남아 있어서 삼국지 빠들이 좀 오는 모양이긴 한데...그래도 낙양이나 서안(장안), 성도, 남경(건업)에 비하면 유명세로 보나 유적으로 보나 부족한 감이 크다(...). 게다가 거의 다 현대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일부에선 이렇게 건립된 위나라 유적이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나, 사실 아래 나오는 청두의 촉나라 여러 유적들도 대부분 다 후대(오래되어봐야 명청대이고, 그것도 홍위병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1980년대 재건한 것들이 많다.)에 다시 재건된 것으므로 마찬가지로 역사적 가치는 별로 없다. 목조건물이 천 년 넘는 세월을 버티기는 힘든 데다가, 중국 대륙에는 외침에 의한 전란 이 많았기 때문에 원래 유적들은 대부분 소실되었다.[4]
원래는 허창에는 조조의 생가와 집, 그리고 조조가 세운 계획도시 등이 존재했지만 서진과 동진이 멸망한 후에는 본격적인 쇠퇴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하는데, 그 후에 들어선 전조나 후조 등이 모두 위나라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후조의 시조 석륵은 오랑캐인 갈족 출신이지만, 아예 조조와 사마의를 소인배에 역적이라고 대놓고 깠고 유송 때는 아예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유송의 건국자인 송무제 유유가 바로 한나라 황족의 후예였기 때문이다.[5] 따라서 자기의 조상 국가인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형제국가인 촉한과 적대시했던 위를 원수 취급했으며, 철저히 위의 문화를 억압하는 동시에 400년을 이은 한나라의 정통은 자신과 같은 황족의 후예인 유비가 세운 촉한뿐이라는 촉한정통론을 밀게 된다.(물론 유송은 남조였기 때문에, 장강이북 위치한 허창을 지배한 적이 없다.)
그 후 송, 명대에 들어서는 아예 중원의 영토에 역적의 건물은 있을 수 없다며 조조의 생가와 집, 그리고 유적들을 모두 부숴버리거나 문화를 탄압했다.
그에 반해 청두는 촉한의 수도였고 역대 한족의 왕조들도 한나라의 계승국가는 오직 촉한뿐이라는 촉한정통론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에 후대에도 청두의 무후사, 그리고 유비의 묘인 한 소열제릉 등이 위나라 유적처럼 완전 소실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삼국지연의 등의 기록에서도 주인공을 유비, 제갈량, 관우, 장비 그리고 촉한으로 맞추었으며, 그동안 한나라의 황제의 계보에서 없었던 유비와 그의 아들 유선을 각 각 한나라의 30대 황제와 31대 황제로 제왕묘에 배향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이런 것들도 대부분 명청대에 재건된 것이다. 다만 완전히 무에서 새롭게 재건한 위나라 유적과는 달리, 좀 더 오랫동안 내려오던 것을 다시 리모델링 했다고 할 수 있겠다.
조조 때문에 역사에 전면에 등장했으나, 바로 그 조조 때문에 그 이후에 지속적으로 발전이 가로막힌 도시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교통은 좋은 곳이라서 현재도 수도 베이징에서 중국 중부의 교통중심지인 우한으로 가는 고속철도가 지나고 있기 때문에 계속 발전하고 있다.

4. 삼국지 게임에서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중국 한가운데[6]에 있고 발전 가능성이 높은 도시로 나온다. 특히 삼국지 11에서는 개발지도 18개라서 시장 6개+조폐, 농장 6개+곡창을 깔고 병영, 공방, 마굿간, 대장간을 지으면 딱 맞는다. 하지만 지도를 놓고 봤을 때 서쪽의 개발지들은 신야에서 공격을 온다면 100% 테러당하며, ZOC 때문에 파괴하기 싫어도 3개쯤 파괴해야지 쉽게 진입할 수 있다. 테러당하는 입장에선 시장이나 농장 단지가 깨지면서 돈, 쌀이 날아거나 특히 적이 벽력 기술이 개발된 투석기를 갖고 온다면 피곤해진다. 중국지도를 기준으로 도시 북쪽에 강 바로 아래가 또 따른 개발지 단지인데, 강 건너가 진류(카이펑)이라서 만약 진류의 적이 투석기를 들고 오면 피곤하지만 보통 허창을 갖고있는 사람은 진류도 중반쯤에 갖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삼국지 11에서는 군사지리적으로, 또 경제적으로도 유용한 도시. 하지만 군사 지리적으로 유용하다는 게 나쁘게 바꿔 말하면 공격당하기 쉽다는 말이므로 계륵 같은 면도 크다.
역대 시리즈 중에서 사람들이 다들 잘 아는 인재들이 굴비엮듯 수두룩하게 나오는 중심지가 다름 아닌 허창이다. 초기 시나리오에서는 순욱, 곽가, 종요, 진군 등의 무장들이 나오고 몇몇 시리즈에서는 허저 역시 등장하기에 그쪽 지역에서 시작하는 군주들을 플레이하는 유저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금싸라기 같은 땅이다. 진류에서 시작하는 조조는 허창을 얻기 쉽고, 인재 없어서 허덕이는 여남의 공주 같은 약소 세력과 나름 인재풀은 있지만 조조나 동탁[7]을 신경써야 하는 원술로 할 때도 인재 확보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8]


[1] 그때 허현이 속한 예주자사가 죽은 상황이라 조조는 헌제를 모셔오면서 예주를 먹은 것이다.[2]유비는 26년, 손권은 27년간 사용했다.[3] 비슷한 케이스인 건업의 경우도 212년에 오나라가 도읍을 옮기면서 새로 붙인 명칭인데, 이에 맞춰 그 이전 시나리오까지는 과거 지명인 말릉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허창의 경우는 최근까지도 딱히 신경쓰고 있지않은 모양새다.[4] 한국에서도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은 중국 삼국시대보다 400년 정도 뒤인 통일신라시대의 봉정사 극락전(672) 건물이며, 일본은 이보다 60여 년 앞선 법륭사(607) 건물이다. 오랜 시간 외침이 많았던 중국은 의외로 한일보다도 훨씬 그당시 만들어진 목조건물이 희귀하며 중국 최고 목조건축물은 오대산 남선사 건물로 782년에 건립되었다.[5] 정확히는 한고조의 동생 초원왕 유교의 후손이다.[6] 청나라 이후 중국 영토가 서쪽으로 늘어난 뒤에는 천수가 정중앙에 가깝지만, 한나라~삼국시대에는 허창이 정중앙이다.[7] 반동탁연합 시나리오에서 원술은 완에서 시작한다.[8] 군웅할거 시나리오라면 장수 상성이 좋은 손책을 멸망시켜도 되지만, 반동탁연합 시나리오라면 거리 문제 때문에 손견/손책을 빨리 흡수하기 힘들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