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정통론
蜀漢正統論
1. 개요
촉한이 한나라를 정통으로 계승한 국가라는 주장을 말한다.
유교가 주요한 통치이념이었던 중국의 왕조들은 어떤 왕조가 정통성을 가지고 있고 어떤 왕조는 그렇지 않은가를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다루었다. 보통 중원을 통일한 국가들은 그 정통성을 인정받아 왔으므로, 후한이 멸망된 후에는 당시 삼국을 통일하였던 서진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후대에 이르러 여러가지 주장들과 근거들이 얽혀 삼국시대에 한나라의 정통을 어느 국가가 이었는지에 대하여 논쟁이 발생하게 된 것인데, 촉한 정통론은 삼국시대가 끝나고 중국 대륙이 다시 나뉘고 통합되는 과정에 등장한 새로운 왕조들이 한나라와 서진 사이에서 촉나라가 한나라의 정통을 이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주장이다.
촉한정통론의 정통성은 전왕조인 한을 기준으로 삼는다. 한 황실의 후예였던 유비가 한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촉한을 건국했던만큼, 국가간의 세력보다는 전왕조와의 연결성에 더 큰 비중을 둔다. 마찬가지로 동진과 바로 이어지는 남조 또한 북조에 비해 세력이 작고 마지막 왕조인 진이 북조에서 나온 수에게 멸망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조를 정통으로 인정하려는 논리가 있는 것과 유사하다. 실제 촉한정통론이 동진 시기부터 부각된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촉한의 정통성을 완전 인정하는 역사가들은 아예 촉(익주, 現 사천성) 지방의 지방정권임을 너무 짙게 드러내는 '촉'한보다는 전한, 후한에 이은 '마지막' 한이라는 의미의 '''계한(季漢)'''[1] 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2. 촉한정통론의 변천과정
2.1. 삼국시대 당시의 맥락
역사적으로 촉한정통론은 후한말의 한실부흥이라는 명분론에 맥이 닿아 있다. 이렇게 한실부흥에 집착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한나라의 독특한 역사적 위상 때문이다. 전설적인 은, 주를 제외하고 매우 잠깐 존재했던 통일 진나라를 제외하면, 한나라는 당시 역사상 중원 사람들이 경험한 실제적인 첫번째 통일왕조였으며, 그 건국과정도 꽤 흥미진진하고 상징적이었다. 현대에도 중원에 거주하던 민족을 '한족(漢族/汉族)'이라 하고 그들의 언어를 '한어(漢語/汉语)', 고유의 문자를 '한자(漢字/汉字)'라 할 정도로 한나라가 중국인들에게 미치는 권위는 엄청났다. 한실은 전한과 후한을 모두 합쳐 400여년간 지속되었으며, 초한대전으로 상징되는 건국신화는 당시 중국인들에게 "유씨만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신념을 만들었다. 때문에 전한과 후한이 이어졌듯이, 촉한 역시 후한을 이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촉한은 유비 이래 '''한실의 부흥''', 정확히 말하면 전한이 멸망하고 후한이 태어났듯, 후한 다음의 새로운 한의 탄생이 목적인 사상을 정치적 이념으로 삼고 있었다. 비록 많은 이들이 한실은 끝났다고 보고 있었으나, 4백여 년 이상의 통치로 인해 한실 그 자체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선비들은 다수 존재했다. 황숙인 유비를 따르던 무리들은 바로 이 대의명분을 받들던 이들이었고, 심지어 조위 내에서도 순욱처럼 한실을 지지했던 세력들이 존재했었다.
물론 위, 진과 병립하던 왕조는 손씨의 오나라도 있었으나, 오나라는 한나라와 연계되는 연결고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고작해야 남북조시대 왕조(오-동진-송-제-양-진, 소위 육조시대)의 정통으로 보는 일부 견해 외에는 대부분 조연급으로 취급된 데에 비해 조위는 헌제로부터 선양받았으며 양한의 수도였던 낙양과 장안을 비롯한 중원을 지배하고 있다는 명분을, 촉한은 왕조를 창립한 유비가 유승의 후예로서 고조 유방과 한나라 황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명분을 갖추었다.
시간이 흘러 이러한 생각들이 다음 시대로 전해지며 자연스레 촉한정통론의 형성과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2.2. 비정상적인 진나라 개국 과정
위나라 말기는 사실상 사마소가 황제라고 할 정도로 조정을 농단하고 장악한 상태였으나, 정작 사마소 본인이 사마의와 형 사마사에게 그 권력을 물려만 받았기만 했지 본인의 큰 공로가 없으므로 딱히 위나라 황실을 겁박해 황위를 찬탈할 명분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소는 선양은커녕 그 중간 단계인 구석과 진공[2] 조차 사양해야만 하는 형국이었다.
당시 황제인 조모가 사마씨 세력 측으로부터의 압박에 의해 사마소에게 진공, 상국, 구석을 내리고 이를 사마소가 거부하는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3] 황실의 권위를 무너뜨리기만 할뿐 무언가 큰 행동을 하지는 못하던 상태에서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이 터지고 마는데, 그게 바로 '사마소 시군(弑君)' 이다.
사마소의 찬탈에 대해 큰 불안을 가진 당대 황제인 조모는 직접 사마소를 참살하고 정권을 되찾기 위해 친위 쿠데타를 시도하기에 이른다. 허나 조모가 친위 쿠데타를 위해 부른 상서 왕경, 시중 왕침, 산기상시 왕업조차 반대할 정도로 세가 기운 상태였고, 이 때문에 조모는 겨우 노복이나 환관 수백 명 정도만을 데리고 사마소를 치러 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쿠데타는 당연히 실패. 황제인 조모가 직접 칼을 휘둘러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고, 이에 병사들은 감히 황제를 공격할 수 없어 이러저리 몸을 피하기 바빴으나, 가충은 성제에게 사마 대장군이 너희를 돌봐준 것은 바로 오늘과 같은 때를 위해서라고 다그치고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일렀으며, 결국 성제는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 창으로 조모를 찔러 황제를 시해했다. 한마디로 '''현위 황제가 백주대낮에 정권의 수하에 의해 참살당한 것이다.'''
조모의 죽음은 사마씨에도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명분에 밀리던 사마씨 정권이었는데 그 망탁조의조차 하지 않았던 '현위 황제가 백주대낮에 정권의 수하에 의해 참살됐다'는 충공깽의 사태에 정권의 인상과 도덕성은 그야말로 시궁창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게다가 이후 뒤처리 과정에서도 '''사마씨는 자신들이 저지른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모두 회피하고 거부했다.'''
이러한 사건을 거치면서 결국 단순히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는 명분으로만 사마씨가 새 나라를 세우기는 어려워졌고, 개국에 있어서 사마씨가 그나마 천하에 내세울 만한 위업으로 여겨질 만한 공이 절실해졌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후에 벌어진 촉한 정벌이다. 촉한은 기본적으로 후한이 위나라에 선양한 것이 조씨의 찬역이라며 위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이었고 자신들이 진정한 정통임을 자부한 세력인 만큼,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조씨가 꺾지 못한 촉한을 실질적으로 사마씨가 정벌하여 진짜 천명을 받은 정통이 누구인지 보여준다''''는 것은 사마소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명분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신하들이 반대할까 봐 오로지 자신의 뜻에 동의하는 종회와 함께 몰래 계획을 세우고 그걸 공표한 이후에는 수십 만 대군을 동원했으며 이에 이의를 가하는 자는 바로 죽여 본보기로 삼기까지 했으니, 당시 사마소가 이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알 수 있다. 종벌이 끝나고 종회의 난 이후 촉한 정벌의 실질적인 최고 공로자인 등애에게 죄가 없음을 분명 알았음에도 역적으로 몰아 일족을 주살한 것도 그런 연유였을 것이다. 촉한 정벌의 공은 오로지 그걸 주도한 최고 권력자 사마소의 공이어야만 했을 테니까.
정리하자면 기본적인 건국 명분마저 외부에서 구해 오게 만들어 버린 비정상적인 진나라 개국 과정이 촉한이 정통을 이어왔다는 인식을 유지, 강화시켜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서진의 인물들도 인식하고 있는 사항이기도 했다. 서진의 지리학자이자 관료인 배수는 자신이 지은 우공지역도 서문에서 '''대진이 용흥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우주를 깨끗하게 하는데 있어 용촉(庸蜀)[4] 으로부터 시작하였다'''고 말한다. 진나라가 시작된 건 (위를 계승해서가 아니라) 촉을 정벌한 것으로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2.3. 위진남북조시대의 정통론
처음으로 삼국시대 역사를 기술한 역사서인 정사 삼국지에서 진수는 차별을 명확히 하고자 위나라 군주만을 황제로 칭하여 그들의 연호를 연도 기준으로 삼았고, 촉한의 군주인 유비와 유선은 각각 선주와 후주로, 동오의 군주는 이름으로 호칭하여 위-진을 정통으로 여겼다. 이처럼 당시 역사가 중엔 삼국 중 조조의 위를 정통으로 여기는 주장이 상당히 우세했다. 다만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위를 계승한 진 시대에 나온 서적이었기 때문에 조조와 위나라를 정통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 정도는 감안하여야 한다. 위의 행적들에서 언급되었듯이, 후한 말에 조조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서진의 창립자였던 사마염은 사치와 낭비를 일삼았고, 황제 뿐 아니라 그 밑의 신하들인 석숭이나 왕개 역시 횡포가 심하여 시간이 갈수록 민심을 잃고 있던 상태였는데, 결국 팔왕의 난과 같은 사화들이 발생한 이후 중원은 장성을 넘어 남하한 이민족들이 차지하였고, 서진의 왕조들은 장강 이남으로 도망쳐 동진을 건국하였다. 바야흐로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오랫동안 이어진 정치계 인사들의 부조리함으로 인하여 동진은 이민족 왕조에 비해 국력에서 열세에 있었고, 더욱이 권신이었던 환온-환현 부자가 국정을 전횡하며 선양까지 노리는 상황이었다.[5]
이러한 분위기에서 환온이 한-위-진의 전례에 따라 선양을 받으려는 계획을 부정하기 위해 등장한 논리가 촉한정통론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한나라 헌제가 조비한테 선양해준 것은 정통성을 부여한 게 아니다. 왜냐하면 한나라 황실의 후예였던 유비가 파촉에서 촉한을 이어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서진이 정통성을 이어받은 연유는 세조 사마염이 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 '''태조''' 사마소가 촉한을 항복시켰기 때문이다.[6][7] 거기에 사마씨는 선양을 받는 과정에서 황제를 살해하고 탈법적으로 정권을 차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위로부터 이어지는 선양논리를 들이대면 명분이 약한 사마씨를 환온이 얼마든지 들고 엎는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따라서 촉한정통론을 통해 환온이 한-위 선양을 본받아서 황제가 되려는 것은 헛일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르는 촉한정통론이 처음으로 등장한 사서는 습착치가 지은 한진춘추였다. 습작치는 후한의 정통성에 대해 이를 촉한이 이었고, 그 촉한의 항복을 받은 서진이야말로 후한의 정통성을 이었다고 여겼다. 그가 '위진춘추'가 아닌 '한진춘추'를 책의 제목으로 삼은 것에는 이러한 까닭이 있었다. 습착치는 조위는 후한 헌제를 협박하여 거짓 선양을 받은 역신 조비가 세운 나라이므로 사마염이 조위로부터 선양받아 진나라를 세운 것 역시 정통성에서 유효하지 못하며, 오히려 사마소가 촉한을 평정함에 따라 한이 멸망하여 진나라가 흥했다고 평가하여 하늘의 뜻은 세력이 있고 권위를 강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후에 동진으로부터 선양받은 유송은 성이 유씨라는 점을 내세워 촉한의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북조에서는 진나라를 장강 이남으로 쫓아낸 흉노 출신 유연이 한왕조의 후계자를 자칭하여 나라 이름도 한으로 지었고[8] 유선에게 새로 시호를 지어올리고, 유비를 한고제 유방과 광무제 유수와 동격으로 삼아 제사를 올리는 등 북조에서도 남조의 촉한정통론과는 별개로 자연스럽게 촉한을 한의 후계로 인식하게 되었다.
다만 촉한정통론을 가장 많이 퍼트린 인사 중 한명은 유송의 초대황제인 송무제 유유였다. 유유 입장에서는 동진의 권위를 실추시키면서, 수도였던 건강(구 건업)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촉 지방의 민심도 자신에게 결속시키기 위해 촉한정통론을 밀었는데, 즉 유비와 같은 한나라 황실의 후손인 자신이 형제국가인 촉한을 멸한 사마씨를 쓰러뜨리고 촉한의 뜻을 이어받겠다는 뜻으로 천명했다. 이 때문에 그가 세운 유송은 촉한의 계승자 대접을 받받았으며, 유유 본인의 위세도 높아졌다.[9]
2.4. 송, 원, 명대의 정통론
송대에 정통론적인 관점이 다시 부각되면서 구양수를 비롯해 조위가 정통이라는 시각이 대두되었다. 신하가 군주를 배신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위진의 건국은 구왕조로부터 정당성을 물려받는 선양을 통해 이루어진 역성혁명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송후기 역사가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조위의 연호를 따랐으되 조위의 정통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관점이었는데 사마광의 논리는 '구주를 하나로 통일하지 않으면 천자의 이름은 유명무실하다. 어떻게 구석의 한 나라를 정통으로 삼고 나머지를 감히 가짜라 부를 수 있느냐?'라 라는 것이었다. 사마광의 주장은 실상 삼국 중에서 정통이 따로 없다는 논리로, 이는 즉 무통에 가깝다. 다만 편의상 연대 표기만 위진의 표기를 빌렸다고 밝히고 있다.[10] 이 때문에 촉한정통론을 지지하는 학자들로부터 소극적으로나마 위정통론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11]
한편, 민간에서는 북송의 속문학이 촉한에 대하여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다. 삼국시대 이후 각종 민담과 전설, 구전문학 등에서 촉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빈도가 높아졌고 민간신앙에서 관우는 천신으로 승격되는 모습까지 보인다. 이후 이는 삼국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은 강담사가 말하는 삼국시대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며 유비가 이기면 환호성을 질렀고 유비가 패해서 도망가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소동파도 왕팽(王彭)의 말을 빌려 비슷한 이야기를 전한다.
하지만 송나라가 금나라에 쫓겨 강남으로 옮겨 남송이 된 후 촉한정통론은 다시 힘을 얻게 되었다. 바로 여진족이 세운 금을 북조로, 남송을 동진으로 대응시키는 경향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주자는 자치통감의 사론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통감을 다시 춘추필법에 따라 재편집하여 자치통감강목을 지어 촉한정통론을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었다. 이후에 등장한 역사서들도 주자가 창립한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대부분 촉한정통론을 따르게 되었고,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의 사대부 계층 역시 촉한정통론을 받아들여 이에 대한 반론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13]민가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집안이 아주 가난하더라도 조금씩 돈을 모아 옛날 이야기를 들으러 간다. 삼국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어 유현덕이 패하여 어려움에 처하면 눈물을 흘리다가, 조조가 패하는 이야기가 시작되면 만인이 아주 즐거워한다.[12]
이로써 군자와 소인의 영향은 백 대를 지나도 끊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塗巷中小兒薄劣,其家所厭苦,輒與錢,令聚坐聽說古話。至說三國事,聞劉玄德敗,顰蹙有出涕者;聞曹操敗,即喜唱快。以是知君子小人之澤,百世不斬。).
소동파(蘇東坡)의 지림(志林) 권1, 도항소아청설삼국어(塗巷小兒聽說三國語)에서
남송대 들어서 주희(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을 통해 주자의 성리학적 역사관이 주요 역사관으로 자리잡았는데, 이후 주자의 성리학이 득세하자, 유비와 그가 세운 국가인 촉한을 후한의 정통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일반화되었다. 이런 정통을 중시하는 사관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보다도 남송의 특별한 위치에 기인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당시 남송은 금나라에 화북을 빼앗기고 금을 상국[14] 으로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정통성에 민감했다. 말하자면 위나라에 비해 약하지만 한실의 후예였던 촉한에 정통 한족국가인 송나라를 투사함으로써 "우리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이러한 역사관으로부터 발생했다는 것이다. 또한 남송의 역사학자인 소상(蕭常)은 자신의 저서 속후한서(1188년, 총 53권)에서 촉나라를 정통으로 보고 촉나라 기록에 위나라와 오나라의 일을 덧붙었다.
한편, 이는 원나라 시기에도 이어졌다. 원나라의 대학자이자 역사학자인 학경(郝經)은 자신의 저서 속후한서[15] 에서 촉나라를 정통으로 하여 위나라와 오나라를 열전에 수록하었다. 관우가 원나라 시기 치우와 강태공을 앞질러 군신의 자리에 오른 것과, 원말명초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는 촉한정통론을 학계를 넘어 민간에까지 더욱 널리 확산시킨 결정타가 되었다. 이전까지 민중들의 지지를 받던 삼국지평화의 유관장 삼형제의 캐릭터는 나관중본과 청나라대의 모종강본 연의로 발전함으로써 유비와 촉한 세력을 완전히 한나라의 후계로 보는 인식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는 명, 청 때까지 계속 이어지고 삼국지연의의 탄생 이후 이는 민간에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2.5. 청대의 정통론
민간과 무관하게 당시 학계에선 기존 관점을 많이 뒤집던 시기라 이전의 정통론 논쟁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즉, 조위정통론(그리고 그를 이은 서진정통론)과 촉한정통론의 분쟁보다는 정통론 자체의 문제에서 벗어난 논의들이 좀 더 주를 이룬다. 결국 진수나 습착치, 사마광이나 주자 등은 모두 각자의 시대상황에 따라 각자의 정통론을 서술한 것 뿐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고증학이나 의고학파가 유행한 학계 자체의 얘기고 국가의 공식적인 입장이나 민간에서는 촉한에 대한 기존의 정통론적인 인식이 계속되었다.[16] 무엇보다도 모종강 부자가 개작한 삼국지연의가 삼국지연의의 정본이 된 탓이 컸다, 모종강 부자의 '모본(毛本)'은 이야기의 구조와 줄거리가 치밀해지고 언어가 간결하게 다듬어져 다른 판본들을 압도하여 오늘날까지 연의의 정본이 되었는데 무엇보다 촉한정통론에 기인하고 있긴 하나 비교적 영웅쟁패의 입장에서 쓴 나관중과 달리 모종강 부자의 모본은 친촉/반위적인 서술이 늘었다. 모본이 민간에 유행하게 되면서 민중들은 기존의 민담, 전설에 내려오던 촉한에 대한 인식에 연의의 영향까지 합쳐져 촉한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그(진수)의 기록은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았는데, 습착치에 이르러 한진춘추(漢晉春秋)를 지어 처음으로 이의를 제기하였고, 주자 이래 습착치가 옳다하고 진수가 그르다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치로 논하자면 진수의 오류는 무수하나, 시세로 논하자면 습착치가 한나라를 정통으로 한 것은 시세에 순응하는 것이니 쉽고 진수가 한나라를 정통으로 하는 것은 시세에 역행하는 것이라 어렵다. 습착치 때 진나라는 남쪽으로 건너가 그 사세가 촉나라와 비슷했다. 편안(偏安)한 자들을 위해 정통을 논쟁하는 것은 당시의 논자들에게 있어 믿음직했던 것이다. 진수는 진무제의 신하의 몸이 되었는데, 진 무제는 위나라를 이었기에 위나라를 거짓이라 한다면 진나라를 거짓이라 하는 것이 되니 어찌 그리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사정은 송나라 태조의 찬립(篡立)이 위나라와 비슷하고, 북한과 남당의 행적이 촉나라와 유사하여 북송의 선비들이 모두 회피하며 위나라를 거짓이라 하지 않다가, 이후 고종이 강좌(江左)에 편안(偏安)한 것이 촉나라와 비슷하고 중원의 위나라 땅이 모두 금나라에게 들어갔기 때문에 남송의 선비들이 분연히 일어나 촉나라를 정통이라 하였다. 이러한 일은 모두 마땅히 그 시세를 논해야 할 것으로, 한 가지만으로 정할 수 없는 것이다.[원문]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2.6. 현대
현대 중국은 과거 유교적 성리학적 역사관을 벗어났기에 이런 정통론의 입장에서 벗어나있다. 그러나 현대 중국 사학계의 역사적 관점도 정치적 입장을 벗어나지는 못하는데 현대 중국의 가장 큰 정치적 논제 중 하나가 바로 '중국 영토에 존재했던 모든 정권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이며 현재의 중국은 이 모든 역사를 아우르는 통일된 하나의 중국'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이 중국 역사관의 중심이 되면서 민중의 인기와 유교, 성리학적인 입장이 혼합되어 완성된 전근대시대의 역사관이었던 촉한정통론을 도태시키려는 움직임이 강해졌다.
따라서 현대의 중국은 기존 명분론적, 정통론적인 역사관과는 달리 중국의 통일과 통일 왕조를 유달리 강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현대 중국의 강역을 완성하고 대만을 정복한 강희제에 대한 찬양이나 장이모 감독의 영화 영웅 등에서 나타나듯 마냥 폭군으로 평가받던 진시황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고, 이는 소수민족, 한족을 가릴 것 없이 모두 하나의 중국이라는 현대 중국 정부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17] 이에 따라 삼국시대를 보는 관점도 삼국 중 한나라의 강역과 체제역량을 가장 많이 아우른 조위와 조위를 이어 삼국을 통일한 서진 쪽에 우위를 두는 시각이 늘어난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두 왕조의 사실상의 창건자 조조와 사마의에 대한 평가 역시 올라갔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주도란 마오쩌둥은 조조 재평가의 선두주자로 유명한데, 그는 조조의 복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현대 중국 문학의 대가이자 스스로도 정치가였던 곽말약은 "누구는 조조를 가리켜 찬탈자라고 부르는데, 이는 옳지 않다. 체제의 정통성은 황제의 혈통이 아니라 체제가 백성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조조는 후한 말의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하고 여러 정책을 시행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했다. 이것이야말로 정통성의 근거가 아니겠는가."라며 조조에 대해 후한 평을 내리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한 것이 조조의 공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청조의 멸망 이후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하고 다시 하나의 중국으로서 질서를 바로 잡은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후한말의 혼란을 수습하지도 못했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서주 대학살에서 볼 수 있듯 전쟁 중에 민간인 학살도 주도했으며 둔전민들에게서 세율을 50% 이상 뜯어내고 강제이주 시키는 등 민중들에게 많은 원한을 샀다. 조조는 찬탈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현대 사마의에 대한 평가도 재밌는 부분이 많은데, 당장 사마의가 주인공인 중극사극 군사연맹의 시놉시스는 고평릉 사변을 두고 '위나라의 내란을 평정했다' 쓰고 있으며 '사마의가 쌓은 업적은 난세를 끝내는 기초가 되었다'는 둥의 서술을 하고 있다. 이는 곽말약이 조조를 평가하면서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하여 백성을 구했다며 이를 조조의 공으로 삼은 평가와 다르지 않다.[18] 현대 중국의 역사관이 어떤 관점을 보이고 있는지는 이로서 명백해진다. 사회 질서의 붕괴와 무질서의 방치는 더 이상 정당화 될 수 없으며 이를 수습하고 (그 과정이나 절차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건 간에) 우선 질서를 세우고 중국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일이야말로 정당하다는 것이 현대 중국의 사관인 것이다. 중국 국민당 주도의 기존 질서를 붕괴시킨 중국 공산당이 가진 관점이라 하기엔 좀 묘하게 웃기긴 한 부분.
현대 한국과 일본의 관점도 이와 비슷한 논리가 있다. 어쨌든 삼국을 통일한 기초를 세우고 삼국을 통일한 최종 승자는 조조와 사마의이며 유교적 정통성을 내세운 촉한은 어쨌거나 과거의 논리에 얽매인 역사의 패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라는 시각이 보이는 것. 또 한국의 경우 민주공화정이 들어서고 민주화운동, 혁명 등을 통해 정권을 교체해 본 적이 있는 경험이 생기면서 과거 성리학적인 명분론인 촉한정통론이 밀려나는 경향이 생겼다. 성리학의 시조로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을 지킨 정몽주가 격하되고 역성혁명을 통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창건하는데 일조한 정도전이 오늘날 혁명가로 추앙받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19] 현대 동아시아 3국의 삼국지 매체에서 촉한을 대신해 조위와 서진이 주인공격으로 내세워지는 작품이 서서히 증가하는 것도 3국의 역사관이 더 이상 촉한정통론에 대해 예전만큼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물론 촉한정통론이 엄청나게 오래된 세월 동안 자리잡아 왔기 때문에 현재의 사학계 일부나 일반 대중들, 삼국지 팬들에게 촉한정통론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부분도 여전히 존재하긴 한다. 촉한정통론의 역사와 그 중심에 있는 삼국지연의의 영향력이 쇠퇴하지 않는 이상 촉한정통론은 앞으로도 살아남을 공산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현대적 관점에서 조위와 서진의 평가와 연구가 이루어짐에 따라 그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던 조위와 서진의 문제점들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반발 역시 만만치 않게 된 면도 분명 존재한다.
3. 결론
촉한정통론은 상술되어있듯 처음부터 정치적인 목적을 지니고 나왔는데, 이것이 후대 성리학의 명분론까지 더해지면서 지금까지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조위정통론을 잘못 이해한 몇몇 사람들이 진나라까지 정통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촉한정통론이 진나라의 무능함 때문에 등장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중국사의 정통론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는가의 여부가 정통성을 판별하는 데 절대적인 고려 대상인 것은 아니었다. 조위가 정통이나, 아니면 촉한이 정통이냐의 문제는 역사를 편찬한 중국의 역사가들이 자신들이 속한 정권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현대의 역사학계 주류는 촉한정통론을 위에서 언급했듯이 멀게는 남조시대부터, 가까이는 송나라 시절 성리학의 명분론과 결합되어 형성된 것으로 본다. 이는 민간에 촉한을 중심으로 한 삼국지 설화나 전설이 만들어져 널리 퍼졌던 것도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송나라 초기까지 조위와 서진이 엄연히 한나라의 뒤를 잇는 정통성 있는 왕조라고 인식한 경우가 많았다는 부분은 결국 촉한정통론이 처음부터 압도적으로 사가들의 지지를 받는 학설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촉한은 마지막까지 한실부흥을 명분으로 북벌을 시행하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암군과 환관이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에 급급하여 나라를 무너뜨렸고 원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정권으로, 결국 촉한이 중국을 통일하여 정통성을 이어받았으면 모르되 결과적으로 중국을 통일한 정권은 조위의 뒤를 이은 서진이었기에 많은 역사가들이 조위-서진을 정통으로 본 것이다. 물론 한진춘추처럼 삼국 당시로부터 멀지 않은 시기부터 촉한-서진으로 정통성이 이어진다고 본 경우도 있긴 하지만.
다만 조위정통론 문서에서 설명했듯이 조위정통론은 조위가 멸망하고 꾸준히 부정적인 평가를 받다가 나중에 완전히 촉한정통론이 대세가 되어 버렸으며 남송 시기에 가면 촉한정통론의 우세로 이어져 청나라 시기까지 이어져 왔다. 심지어 학자들의 연구가 어떻든 역대제왕묘 같은 국가가 제사 지내는 공식적인 사당에서도 촉한정통론을 택했다는 것은 전근대 시기 촉한정통론이 점차 대세가 되어갔다는 증거이다. 물론 위와 진나라는 대규모 학살과 수탈, 폭정, 단명으로 저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왕조들이었지만 위진에 대한 반감이 촉한 옹호로 이어진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며, 그런 점에서 왜 중국의 민중이나 지배층까지 결국엔 촉한정통론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