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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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이다. 제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활약한 유명한 장군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처조카인 인연으로 양손자, 즉 그의 장남의 양자로 유서 깊은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문에 입양되었다. 제3차 포에니 전쟁 3년째에 집정관으로서 로마군을 지휘하여 맹렬하게 저항하던 카르타고를 최종적으로 함락, 멸망시켜 아프리카누스의 칭호를 얻었다. 이에 따라 양할아버지 '대 스키피오'에 이은 '소 스키피오', '소 아프리카누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카르타고에 이어 끈질기게 로마에 저항하던 누만티아를 멸망시키기도 해 당대 로마 최고의 지휘관으로 평가받았다.
유능한 군인으로서의 평판과 더불어 유력한 정치인이기도 해 집정관을 2회, 감찰관을 1회 역임하고 프린켑스 세나투스를 맡았으며 스키피오 가문의 수장으로서 원로원에서의 영향력도 대단했다. 정치적으로는 양할아버지처럼 친헬레니즘적 성향을 가지면서도 기존의 공화정 체제를 옹호하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시도에 반대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사후인 기원전 129년 갑작스럽게 외상 없이 사망했으며, 이는 가이우스 그라쿠스나 가이우스의 누이이자 아이밀리아누스의 아내인 셈프로니아에 의한 암살로 의심받기도 한다.
2. 생애
이름은 아주 길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 누만티누스'''(라틴어: Publius Cornelius Scipio Aemilianus Africanus Numantinus)라고 하며, '대' 아프리카누스의 맏아들의 양자로서 당대 로마 최고의 명문가인 스키피오 가문에 입양된 것이다. 본래 가문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이며 입양 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되었지만 아이밀리우스 가문 출신임을 나타내는 아이밀리아누스가 뒤에 붙었다. 아프리카누스는 양할아버지에게 물려받아 칭할 수 있는 별칭이기도 하지만, 카르타고를 완전히 함락시키면서 스스로 얻은 칭호이기도 하다. 누만티누스는 누만티아의 정복을 확립하여 얻은 칭호이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처남이자 역시 당대 로마 최고의 유력 정치인이자 장군이었던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차남이다. 마케도니쿠스는 필리포스 2세의 아들 페르세우스를 피드나 전투에서 무찌르고 안티고노스 왕조를 멸망시킨 것으로 마케도니쿠스의 칭호를 얻었는데, 당시 17살이었던 아이밀리아누스도 아버지의 군대에 종군했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어린 나이부터 리더십을 드러내 인망이 높았으며, 피드나에서 실종되어 아버지와 많은 병사들이 동요했으나 알고 보니 한참 전부터 적을 추격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마케도니쿠스는 두 번 결혼해서 4명의 아들을 보았는데,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삼남과 사남을 자신의 후계자로 정하고 맏아들은 파비우스 막시무스 가문으로, 둘째 아들인 아이밀리아누스는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문으로 입양을 보냈다. 파비우스 가문과 스키피오 가문은 모두 당대 로마 최고의 명문인데, 후계자가 없었기에 마케도니쿠스의 아들들이 대신 가문을 이어받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마케도니쿠스의 삼남과 사남은 마케도니쿠스가 한참 개선식으로 개인의 명예를 드높일 때 요절하여 아이밀리아누스의 본가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이 단절되어 버렸다.
기원전 151년에는 처음으로 누만티아로 파견되어 집정관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의 휘하 장교로 복무했다.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누만티아에서의 패배로 시민들이 겁먹고 패배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상황에서 스키피오가 직접 누만티아 파견을 요청, 모범을 보여 지원병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고 한다.
기원전 149년 시작된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장교(military tribune)로 종군했으며, 몇 차례 로마군을 위기에서 구하고 능력을 인정받았다. 로마군이 카르타고의 악착같은 저항에 고전하자 기원전 147년 연령 미달에도 불구하고 집정관으로 당선되어 전쟁을 이끌게 되었다. 146년 초 카르타고를 마침내 함락시킨 이후에는 원로원의 지령에 따라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하고 잿더미로 만들었다. 남아있던 5만명의 카르타고 시민들은 노예로 팔렸다. 먼나라 이웃나라에는 카르타고의 도시를 정복하고 파괴한 참혹한 현장을 보고 그 자신이 멸망시킨 카르타고의 잔해 아래서 눈물을 흘리고 카르타고인들이 3년 동안 버틴 것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여 노예로 만들거나 전리품으로 끌고가지 않고 아프리카의 외딴 곳으로 보냈다고 한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역사가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카르타고 함락 이후 스키피오는 침통한 표정을 짓다못해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트로이와 아시리아, 메디아, 페르시아, 그리고 가장 최근의 마케도니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멸망의 운명을 맞이함을 생각한 것이다. "언젠가는 트로이도 프리아모스 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전사들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라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글귀를 읊었는데, 폴리비우스가 자신의 제자이기도 했던 스키피오에게 그 이유를 묻자 스키피오는 자신의 조국인 로마도 그러한 인간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스키피오의 시대 이후로 로마는 서로마 제국을 기준으로 해도 500여년, 동로마 제국을 기준으로 하면 1500여년이라는 장구한 기간 동안 존속했지만 결국 멸망을 피할 수는 없었다.[1]
기원전 134년 스키피오는 집정관에 다시 당선되어 마찬가지로 로마군이 고전하고 있던 스페인의 누만티아로 재차 파견되었는데, 이는 누만티아의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스키피오뿐이었다고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스키피오는 기대에 부응하여 누만티아를 포위하고 도시를 굶어죽을 위기에 몰아넣는 데 성공하며, 카르타고와 마찬가지로 누만티아도 파괴하고 항복한 주민들을 노예로 팔았다. 누만티아를 정복하여 로마의 지배를 확립한 공으로 누만티누스라는 칭호를 받는다. 한편, 누만티아에서 친척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중용하여 공을 세우도록 배려했지만, 티베리우스가 독단적으로 평화 협정을 맺은 것이 원로원에서 거부된 것을 계기로 불화가 싹트기도 했다.
그라쿠스 형제와는 친가 쪽으로는 5촌, 양가 쪽으로는 4촌 형제였으며 아이밀리아누스가 그라쿠스 형제의 누이인 셈프로니아와 혼인했기 때문에 처남 매부 사이로 아주 가까운 사이였으나,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에는 반대했다. 아내인 셈프로니아와의 사이는 당대부터 최악이라고 널리 알려져, 스키피오는 자기 아내가 못생기고 후계자도 낳아주지 못했다고 아주 싫어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죽음 이후인 기원전 129년, 농지개혁을 단행하려는 그라쿠스 파의 연설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기 하루 전에 의문사를 당하였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죽음을 방조한 것에 분노한 아내 셈프로니아 혹은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가 그를 독살한 것이라고 하나 증거는 없다.
스키피오는 이전에 그라쿠스의 개혁안과 비슷한 것을 친구이자 자신이 후원하던 집정관인 라일리우스를 통해 내게 했다가 반대에 부딪혀 철회한 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라쿠스를 지지하였는지는 당시 사람들도 궁금했는지, 훗날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스키피오는 "만일 그의 목적이 공화정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면, 그는 정당하게 살해된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2] 사실 그라쿠스가 죽은 이유는 농지법보다는 호민관 연임이었고, 이는 참주가 되려는 시도처럼 비쳐졌기에 개혁 자체는 찬성했어도 그를 반대한 이들이 많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티베리우스가 죽었을 때, 스키피오는 "그와 같은 일을 도모하는 자는 그렇게 망하리라."는 고인드립성 독백을 남겼다고 한다. 당연히 민중들에게 욕을 엄청 먹었고 전쟁 영웅으로서의 인기를 거의 다 까먹었다.
3. 기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 이전까지는 로마군의 가장 뛰어난 장군이기도 했으며, 키케로의 <국가론>에서 고대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세련된 논리로 공화정을 옹호했다. 법적으로는 조카뻘에 해당되는 그라쿠스 형제에게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다분히 귀족적인 인물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당시 로마에서는 그라쿠스 형제의 의도에는 공감을 보이면서도 그들이 참주가 될까봐 경계하는 사람도 많았다.시작하겠습니다. '''공화국(re publica)은 국민의 것(res populi)입니다.'''[3]
국민이란 대중의 아무 연합이나 일컫는 것이 아니고 '''법의 이름으로 정의된 것(法正義)에 대한 동의와 이익의 공유에 의해 결속된 연합'''입니다. 한편 인간이 결속하는 첫 번째 이유는 인간들의 연약함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어떤 것, 마치 군집성(congregatio) 같은 것입니다. 사실상 인간은 홀로 떠도는 종류가 아니라, 모든 것의 풍부함을 부여받았어도 사회 속에서 사는 것이 자연에 의해서 강제되도록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잔인함에 의해서 전체가 억압받고, 또 하나의 법적인 유대나 합의나 계약된 결속, 즉 국민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 '''누가 그것을 국민의 것, 즉 공화국이라 하겠습니까?'''
왕정에서는 나머지 사람들이 공통의 법과 계획에 거의 참여하지 않게 됩니다. 최선량들의 지배에서는 모두에게 공동의 계획과 능력이 없으므로 다수는 자유에 대한 참여자가 거의 될 수 없습니다. (중략) 따라서 '''페르시아의 키루스가 매우 정의롭고 현명한 왕이었지만, 한 사람의 명령과 양식에 의해서 통치되었을 때에 국민의 것은 — 사실 이것이 앞서 말했듯이 공화국의 본질인데 — 별로 기대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우리의 피호민인 마실리아 사람들이 선발된 자들과 제1 시민에 의해서 가장 정의롭게 통치되었는데도 그 국민의 상태는 어떤 노예제와 유사한 것이 있었습니다.
'''국민의 권력이 최상인 곳을 제외하고는 어떤 다른 나라에도 자유가 머물 수 있는 곳은 전혀 없습니다.''' 사실 이보다 더욱 달콤한 것은 확실히 있을 수 없지요. 그래도 이 자유가 동등하게 향유되지 않는다면, 사실상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국민이 노예상태가 되는 것이 사실상 불분명하지도 않고 의심의 여지도 없는 왕정에 관해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 이 말들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국가론(De Re Publica)>''' 에 쓰여진 것이다.[4]
역사가 폴리비우스 등 여러 헬레니즘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을 모아 후원했다고 한다. 다만 현대 학계에서는 하나의 일관적인 집단으로서의 '스키피오닉 서클'의 존재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위의 키케로로부터의 인용처럼 키케로는 플라톤의 대화편에서의 소크라테스처럼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자신의 글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키케로는 공화정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스키피오의 정치적 입장에 동의하고 자신의 주장을 스키피오라는 인물을 통해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키피오의 친구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의 사위인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아우구르가 키케로의 스승이기도 했다.
대 아프리카누스의 아들들이 후손을 두지 못해 아프리카누스의 후계자로 입양된 것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이지만, 그 또한 아내 셈프로니아로부터 후계자를 얻지 못해 아프리카누스의 가문은 단절되었다. 이후 스키피오 가문의 주도권은 아프리카누스의 사촌의 후손인 강경 보수파 스키피오 나시카 가문으로 넘어갔다.
4. 가계
- 할아버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 고모: 아이밀리아 파울라[5] = 고모부: '대' 아프리카누스
- 양아버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고모부의 장남
- 아버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 부인의 어머니: 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 아프리카나 = 부인의 남편: (대)그라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