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바라캇
[clearfix]
1. 소개
캐나다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뉴에이지[1] 아티스트이다.
간략하게 이 사람의 연혁을 적어보자면,
1973년 5월 17일 캐나다 퀘벡 주 출생(부모는 레바논 출신). 4세 때 부터 클래식 피아노를 공부했고 13세 때 퀘벡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등 어린 나이에 실력을 인정받았다. 14세 때 첫 앨범 Double Joie 발매, 18세 때 발표한 두번째 앨범 Audacity 발매, 전 수록곡이 바라캇의 자작곡이다. 2007년 보컬앨범 Here I Am을 내놓았는데 비틀즈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이 참가했다.
아주 어려서부터 정통 클래식 수업을 받아 13살 때는 퀘벡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했을 정도로 천재 소년이란 소리도 들으며, 게스트 솔리스트로서 어릴 적부터 많은 도전적인 음악적 경험을 하게 된다. 그가 14살이 되던 해인 1987년 첫 데뷔 앨범 'Double Joie'를 발매, 일주일 만에 캐나다 앨범 판매 순위 20위권 내에 진입하는 쾌거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90년대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앨범의 대부분을 자작곡으로 채우기 시작, 작곡가로서의 재능까지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의 작곡 영역은 피아노 연주곡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시아권내의 유명 가수 및 자국의 가수들에게 추후 히트곡의 반열에 오르게 될 팝송들을 제공해 왔다는 점에서 가히 그 넓이를 짐작하게 한다. 16살 무렵 그는 작곡과 편곡, 그리고 프로듀스 작업에 매료되어 본격적인 엔지니어와 실무자의 능력도 겸비하게 되었다. 즉 그는 이미 10대 때부터 뮤직 프로세스의 모든 기술을 마스터한 것이다.
2. 음악
2.1. 특징
국내에서는 2000년도에 정규앨범과 베스트 콜렉션이 발매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어렸을 때는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이후 재즈 음악에 심취해 팝 뮤지션으로의 길을 걷게 된다. 클래식의 기본기와 재즈의 즉흥성을 모두 갖춘 천재 음악가.
뉴에이지 피아니스트인데 대편성 연주곡을 좋아해서, 뒤에 현악기 연주자들을 잔뜩 세워놓고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웅장해서 작은 오케스트라 느낌이 나는 곡도 많다. 러시아의 붉은 군대 합창단을 세워놓고 연주를 하는 일도 있었다.(Eternity)
2.2.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노래
굉장히 듣기 좋고 편안한 음악을 한다. 이는 피아노라는 악기의 서정적인 음색과 본인의 출중한 기량에 기인한 것으로, 이러한 대중성 덕에 바라캇의 음악은 각종 매체에서의 bgm으로 자주 활용된다. 그래서 이 사람의 노래들을 찾아서 듣다보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노래'''가 많다.
대표곡으로는 Rainbow bridge, Flying 등이 있다. 한때 Flying 은 서울시 중/고등학교 영어 듣기 평가에 매번 오프닝 음악으로 나왔었고, 현재는 현대백화점의 개장 음악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영화 공공의 적에서 뷔페 장면에 삽입곡으로도 쓰였다. 그 외에도 이 사람의 곡인 The Whistler's Song은 정말로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노래'''(일기예보에 쓰이던 BGM이다.)다.
사실은 일기예보 노래다(모 올드 팝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 오프닝 노래로도 쓰인다.).
그리고 KTX가 종착역에 도착하기 직전에 안내 방송 후 음악이 흐르는데, 그 음악이 바로 이 사람의 곡 중 하나인 Dreamers이다.예시[2] 그러더니 2010년 11월 1일 경부선 KTX 2단계 개통과 함께 종착역 안내방송으로 Dreamers 대신 이랑의 happiness가[3] 도착역 안내방송으로 California Vibes가 쓰이게 되었다. 덕분에 숙명가야금연주단과 함께 대한민국의 철도 동호인들에게도 친숙한 뮤지션이다(...). 본인도 내한공연 때 KTX를 타다가 자기 음악이 나와 깜짝 놀란 것이 후문이다. #
위기탈출 넘버원에서 출연자가 정답을 맞췄을 때 Eternity의 맨 끝부분이 나온다.
3. 여담
* 영미권 캐나다 출신이지만 뮤지션으로서의 경력이나 명성은 사실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곡들은 일본의 유명한 드라마 배경음악과 일본의 정상급 가수들의 앨범 수록곡들을 통해 많이 알려지게 되며 일본에서의 뮤지션으로서의 명성을 쌓아가게 된다. 한귀에서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하기 수년 전부터 이미 방송 및 광고계에서 그의 곡들이 각종 BGM으로 많이 사용된 이유 또한 일본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기에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의 음악 관계자들 사이에서 이미 잘 알려진 뮤지션이었던 것이다.[4]
그가 머나먼 태평양 건너에 있는 아시아에 눈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정통 클래식에 기반을 둔 보통의 연주자들과 달리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덕분이다. 특히 아시아 진출 당시 타이밍과 프로모션도 시기 적절 했는데, 그의 연주력을 인정한 일본의 유명 악기 제조업체인 Roland는 1992년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NAMM 신제품 프로모션 쇼에 그를 초대하여 신제품 키보드를 연주하면서 일본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1993년 2집 Audace/Audacity를 내놓고[5] , 이듬 해인 1994년에 거의 소리 소문도 없이 우리나라에서 프로모션 공연을 해야 했던 무명의 설움을 겪기도 했다는 사실은 지금으로서는 꽤나 충격적인 사실이다. 이후 일본,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 권을 중심으로 점차 그의 활동범위가 넓어진다.
1997년 그는 캐나다 가수 Johanne Blouin에게 ‘C’est Une Promesse’와 아르헨티나 남자 가수 Guillermo Saldana를 위해 ‘En La Arena’를 작곡 해 주는 것을 시작으로, 마침내 일본에서도 스티브 바라캇의 곡인 ‘Kaze to Kino Uta-Quebec 1608’을 일본 대중 가수 신세레(Sincere)가 노래하면서 그의 인지도가 올라가게 된다. 1999년에는 당시 일본 최고의 대중가수인 오기노메 요코가 ‘We’ll Be Together’를 녹음하게 되는데, 이 곡은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했던 TV 쇼 <Shitteru Tsumori>의 메인 테마로 쓰이기도 하였다. 홍콩에서도 많은 유명가수들이 그에게 작곡의뢰를 했는데, 1995년에는 진혜림을 비롯한 네 명의 스타들이 부른 ‘Mou Tian & Quot’을 작곡해 줬고, 1996년에는 듀엣곡 ‘Song Of Stars’을 알란 탐과 여명에게 선사했다. 그리고 같은 해 여명을 위해서 『Fell Leon & Quot』앨범의 ‘Ni Shi Shui’라는 곡을 작곡해주었다. 2000년에는 ‘Watashi Dake de Ite’를 일본의 슈퍼스타 사카이 노리코에게 주면서 다시 한번 일본에서의 인기를 실감케했고, ‘Nuit d’Amour A Paris’는 이듬해 일본 NHK 드라마인 <One More Kiss>에 삽입되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국내 배우인 윤손하가 캐스팅되어 화제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이렇게 스티브 바라캇의 곡들은 특히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며 본국인 캐나다보다도 뮤지션으로서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하게 된다.
1997년에 발매한 스티브 바라캇의 라이브 음반에 수록된 곡 중에 '''Don Na To Ki Mo'''라는 노래가 있는데, 일본의 인기 가수 마키하라 노리유키(槇原敬之)의 대표곡인 どんなときも(돈나토키모)를 스티브 바라캇 본인이 콘서트에서 직접 피아노 연주는 물론이거니와 '''일본어 가사 그대로 노래까지 불러준''', 당시 뉴에이지 뮤지션으로서는 파격적인 곡이다.[6][7] 스티브 바라캇의 언급에 따르면 뉴에이지를 사랑해주는 일본 국민들에게 선사한다는 노래인데, 이게 인지상정으로 당연한 것이 캐나다 출신이지만 일본에서 데뷔하고 뉴에이지 뮤지션으로서 성장한 스티브 바라캇으로서는 당연히 일본의 팬들에 대해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기에 이런 팬서비스 정도는 당연한 것이고, 더구나 どんなときも(돈나토키모)의 일본 국민 가요급의 명성까지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렇다.[8]
그의 일본팬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은 공연장에서도 느낄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일본보다 뒤늦게 인기를 얻게 된 한국에서 진행된 내한공연과 그가 주역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던 일본에서 진행되는 라이브 투어와의 공연의 질에서도 무척 차이가 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투입 되는 세션 또한 일본의 라이브 투어가 더욱 풍부하기 때문에 실제 같은 곡을 연주함에 있어서 연주나 음향의 질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느끼게 된다.[9]
데뷔 중반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갸름한 턱선에 인상이 날카로운 꽃미남이었지만 2006년 즈음부터 급격히 주름살과 함께 약간 후덕한 아저씨같은 이미지로 바뀌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엄청 좋아한다. 라이브에서도 3~4곡 정도는 반드시 본인이 직접 노래를 부르며, 2007년에는 앨범을 내기도 했지만 실력은 썩 시원치 않은데다 앨범 판매도 부진했다.
아내와 함께 부부 동반으로 캐나다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는 등 인권 문제에도 적극적이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와 인연이 깊어서 2008년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을 기념한 'The Beating of a Butterfly's Wing'이라는 곡을 캐나다지부가 아니라 한국지부에 헌정하고 같은 해에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에서 내한공연도 했다.
라이브 공연 시작 시 "And now, please welcome Mr. Steve Barakatt!!"라는 멘트가 고정적으로 나간다. 매 공연마다 같은 목소리에 같은 멘트인 것으로 보아 사전에 녹음된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한국에는 2005년 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에서 한 내한공연을 시작으로 거진 1-2년에 한번 정도 꾸준히 공연을 열고 있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매년 오더니 2011년에는 존박과 김그림을 게스트로한 내한공연을 펼쳤고, 특히 가수 선민이 스티브 바라캇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Rainbow Bridge를 가사를 입힌 곡으로 싱글을 냈고, 지나가 이 곡으로 엠사운드플렉스 무대에서 스티브 바라캇과 함께 출연하기도 했는데,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다. 연주곡은 그냥 연주곡으로 남는 것이 가장 바람직함을 보여주는 예이다.
2011년에는 현대카드의 STOP&LISTEN이라는 길거리 콘서트에서도 나왔다. 2012년에도 3월 3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내한공연을 진행했으며, 2013년 3월에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했다. 지금까지의 내한공연과 다르게 피아노 솔로가 아니라 다섯 악기 연주자들이 함께 내한한 가장 큰 규모이다. 2015년 3월 8일에는 내한 20주년 및 국제 여성의 날 기념 공연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가졌다. 2017년 3월 1일에는 새만금을 주제로 한 'One More Heart, One More Dream'이라는 곡을 새만금개발청에 헌정했다.
전작인 'All About Us(2002)' 이후 5년 만인 2007년에 그가 의욕적으로 출시했던 보컬 앨범의 반응이 시원찮아지면서 그 이후 앨범들의 발매도 뜸해지고 작년에 출시된 그의 새 연주 앨범은 초중반기 시절의 포스를 풍기지 못한다는 팬들의 평이 많다. 그가 뮤지션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에는 일본에서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거의 모두 내뿜고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최근에는 전성기에 작곡한 곡들로만 우려먹는 수준이라는 혹평도 있을 정도다. 사실 그의 진가는 정통 클래식보다 참신한 퓨전 재즈 및 팝 스타일에서 많이 나오곤 했었는데, EBS 스페이스 공감에 출연하면서 가진 그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초심으로 돌아가 정통 클래식으로 회귀하고 싶다고 언급할 정도로 스티브 바라캇 본인도 음악적인 역량에 대한 한계 내지 음악 성향에 대한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것으로 보인다.
- TV CHOSUN 프로그램인 아내의 맛 2019년 7월 30일 방영분에 출연했으며, 해당 회차에서 홍현희 ♡ 제이쓴 부부를 집에 초대해 아내와 딸과 함께 식사했다. 아내는 러시아의 체조선수 출신이라고 한다.
[1] 사실 instrumental musician, 즉 기악주자로 부르는 편이 더 타당하다.[2] 그 전에는 새마을호 출발 시 나왔었다.[3] 2012년 한때 이슬기가 연주한 신나는 곡으로 바뀌었다가 2014년경 가야금 독주의 곡로 다시 환원되었다.[4] 물론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2000년대 극초반까지의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일반 대중들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긴 하지만 그 당시에 음악 관계자들과 심지어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일본을 건너온 비공식 루트를 통해 일본 음반을 접하는 형태들이 많았고, 이는 90년대 가요계의 흑역사로 일컫는 표절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5] 이 앨범의 1번 트랙에 그 유명한 The Whistler's song이 실려있다.[6] 최근에는 뉴에이지 뮤지션들의 보컬 참여가 이례적이라 하기도 말하기 좀 이상할 만큼 많이 대중화 되어있는데, 가까운 예로 한국인 뉴에이지 뮤지션 이루마를 보아도 본인의 곡인 '널 그리다'와 '너의 마음속엔 강이 흐른다'에 가사를 붙여 직접 보컬로 녹음하여 디지털 싱글로 발매도 했었다.[7] 콘서트에서의 보컬 팬서비스를 계기로 스티브 바라캇은 본인의 보컬 실력에 점차 자신감을 얻었는지 2007년 그의 최근작 앨범에는 기존의 연주곡 음악 스타일을 버리고 그의 목소리가 담긴 보컬 앨범을 출시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여가수와의 듀엣곡도 있다. [8] 역으로 생각하면 그가 한국 음반시장에서 데뷔를 하여 뉴에이지 뮤지션으로서 성장했다면 한국 콘서트에서 우리나라의 유명한 가수의 대표곡을 연주하고 한국어 가사로 직접 노래도 불러주는 팬서비스를 당연히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이런 곡 하나 불렀다는 사실만 가지고서 와패니즈니 극우성향을 가진 인물이니하는 무분별한 추측은 어불성설이다.[9] 실제 2006년 내한공연시 일본의 라이브 투어와는 다르게 퍼커션 없이 대신에 CD 앨범의 MR 연주로 떼우기도 했고, 한국에서 섭외된 현악 4중주 오케스트라 또한 일본의 현악 4중주 오케스트라보다 연주 실력이 매끄럽지 못함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