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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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설명
3. 구조 및 운용법
3.1. 구조
3.2. 운용법
4. 종류
4.1. 중구경 개인총통
4.2. 대구경 개인총통
4.3. 기마용 개인총통
5. 발사체
5.1. 화살탄
5.2. 철환 사격
5.3. 근접 파편사격
6. 무기 역사에서의 가치
7. 사용자들의 평가
8. 현대의 평가
9. 미디어
10. 관련 문서


1. 개요


[1]
(본 문서는 승자총통과 함께 쓰인 조선시대의 개인화포 전반에 대한 설명을 포함한다.)

2. 설명


조선초기부터 폴암, 소형 로켓, 샷건을 합친 다목적 성향을 띄는 개인화기이다.
핸드캐논의 최종세대이며 조선 초중기에 사용된 개인화기들을 대표하는 무기들이다. 현대인들에게 알려진 승자총통은 조선초기부터 사용했던 일총통, 이총통을 가늘고 길게 다듬어낸 형상을 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다른 시대의 1인용 화포와 큰 차이는 없다. 뱀처럼 가느다란 모양으로 작대기에 꽂아서 쓴다. 사극에서는 위험성이나 소품, 예산 등의 문제로 거의 등장한 적이 없는 비운의 무기이기도 하다.
문서명인 승자총통은 선조 시기에 개발한 버전이었으며, 개발자는 김지(金墀)이다. 총통의 이름인 승자(勝字)는 조선의 화포 규격인 천자문의 글자 순서(천-지-현-황…)에 준하여 붙은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천자문 본문에는 '이길 승(勝)' 자가 없기 때문에 이름이 붙게 된 근거가 공식적으로는 불명이다. 니탕개의 난에서 큰 활약을 했으나, 이후에 벌어진 임진왜란에서는 조총에 밀리는 성능으로 조선의 안습한 개활지 전투 능력에 일조하게 된다. 하지만 무기 자체는 중세 핸드건의 직계로서 여진족 니탕개의 난을 진압할 때 활약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철포전술을 익힌 일본군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나름 괜찮은 무기 계통이었다.
본 문서를 읽어보면 핸드캐논류가 어째서 화승총에 패배했는지를 매우 적절히 알 수 있다.

3. 구조 및 운용법



3.1. 구조


길이는 대략 50~60cm, 무게는 3kg~5kg 정도이다. 비싼 청동합금으로 만들어서 안정성이 높았다. 포신에는 죽절이 나 있고 약실에는 심지를 넣는 부분이 있다. 장전 방식은 핸드캐논답게 심지를 이용하여 매우 원시적이었다.
뒤쪽에다 조립하는 나무 손잡이의 길이는 70~80cm 정도로서, 포체와 결합하면 길이가 110~200cm 내외에 달했다. 포 본체에 따로 소켓식 결속부가 있기 때문에 합치면 짧아진다. 덕분에, 포신이 은근히 무거운데도 불구하고 나무 손잡이를 지렛대처럼 활용하여 방향을 잡을 수 있었으며, 엄폐물 뒤에서 안정적으로 사격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 보러가기
조선화포에는 화살형태의 '''미사일 거치대'''라는 부차적인 목적이 있었다. 일부 개인용 총통은 '''균형이 잡힌 대형철퇴'''로서의 타격력도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핸드캐논류는 위급시 폴암로서 사용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승자총통을 비롯한 조선초기 화포들은 그 모양이나 설계상 급박한 상황에서 철퇴로 이용하기에도 적합한 밸런스를 갖춘 디자인이었다. 현대전에서도 급하면 헬멧, 야삽, 주먹 등을 동원해 싸우니, 화력이 제한적이었던 중세에는 근접무기의 효용도 필요했다.[2][3]
승자총통은 '''조총보다는 오오즈츠 같은 대형조총'''에 비교하는 편이 그 설계나 운용법을 이해하기 쉽다. 당시 조선에 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승자총통의 목적은 백병전에서 갑주를 뚫는 샷건, 폴암, 보병들에게 대형 타겟을 타격하는 능력을 주는 바주카를 조합한 무기체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총을 경험하자 빠른 속도로 밀려난 무기이기도 하다.

3.2. 운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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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총통 방포에 대한 사료 영상이 지나치게 모자라다는 점을 한탄하면서 만들었다고 한다.[5]단, 제작자 역시 사료 부족의 한계로 일부는 추측으로 때운 부분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기존 총통류에 쓰이던 격목이 토격으로 바뀌었다는걸 제외하면 기존 총통과 발사 과정의 유사성이 많다.

4. 종류



4.1. 중구경 개인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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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자총통. 가장 잘 알려진 형태이다. 50~60cm이다. 하지만 조선중기 이후로는 신호용이나 화차 제조용으로 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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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자총통. 58cm. 2개의 포신에 3개씩 화약실이 있었다. 매우 원시적인 6연발 화기였다. 하지만 사거리가 짧고 성능이 매우 조악했다. 주로 수레에 싣어서 화차를 만들거나, 여러 번 장전하기 어려운 지형에서 장전하지 않고 6발을 쏘는 특성을 이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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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연자포, 5연자포. 10연자포도 있었다. 주로 수레, 화차, 성벽에 매달아서 쏘았다. 총신을 하나씩 뒤로 넘기거나 분리할 수 있는데 그렇게 사용한 포신을 빼서 재장전했다고 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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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승총의 전 단계인 소승자총통이다. 승자총통에 총신을 단 형태이며, 1회당 3알의 총알을 사용했다. 임란 이전에 개발되어 의외로 많은 양이 생산되어졌다. 하지만 조선군이 조총 생산라인을 빠르게 가동시키자 주력에서 밀려난다. 당시 사람들이 '''조총 앞에서 내린 승자총통에 대한 평가'''라고도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중에는 정철총통(正鐵銃筒)이라는 화승총도 사용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지시에 따라 휘하의 무관 정사준이 기존 승자총통의 단점(조총보다 짧은 총열로 인한 명중률 문제, 낮은 위력)을 보완하기 위해 노획한 일본의 종자도총을 바탕으로 정철(참쇠)로 된 총열에 조총처럼 총신과 방아쇠를 달아 제작했다.[7] 연구 및 제작기간에는 1년 정도가 소모되었고 성능실험에서 일본군의 조총보다 더 좋은 위력과 성과를 보여주게 된다. 일본군의 조총을 참고해 만들것으로 기존의 핸드캐논에서 본격적으로 조선의 화기가 '총통'에서 '총'으로 거듭나게되는 시발점이다. 틀에 부어서 만드는 기존의 총통과 다르게 철판을 두드려서서 만들었으며 항왜들이 제작에 참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염초와 철을 구하는데에 제약이 있어서 대량생산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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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총통이다. 75cm이다. 무려 15세기의 세종대왕 치세에 만들어진 소구경 개인 화포의 유물이다. 위의 사진을 비롯한 일부 화포들은 포신을 일부러 휘어놓아서 탄착점을 늘리는 특이한 운용법을 쓰기도 했다.

4.2. 대구경 개인총통


한마디로 '''조선시대의 바주카'''이다. 이런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위의 동영상처럼) 멀리서는 화살 모양의 미사일 발사대로 썼다. 근접 상황에서는 다수의 철환으로 근접한 적의 방진을 타격하는 대형 샷건처럼 사용했다. 국궁이나 조총에 부족한 파괴력을 보완한다는 장점이 있어서 이후에도 화승총에 밀려나지 않고 근대적인 개수를 거친 후기형이 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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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전총통이다. 31cm이다. 보병 제압을 위한 다수의 화살탄을 발사했다. 세전 8발, 차세전 12발을 사용했다. 화살을 이용하는데 특화한만큼,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화살이 살상력을 지닐 수 있는 거리는 대략 100m에 달했다. 하지만 갑주를 관통할 수 있는 거리는 화승총보다 짧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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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총통이다. 길이는 58cm이다. 그야말로 개인용 화포에 속했던 종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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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총통이다. 사진은 중백자총통이다. 총길이가 98cm에 달하는, 대형총통과 개인화포의 사이에 있는 개인화기였다. 탄환은 5발씩 넣고 쏘았으므로 효율은 떨어졌으나 위력은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시기부터 명나라에서 도입하여 시험과목으로도 편성했을 정도로 중요한 화력지원무기가 되었다. 편곤처럼 명나라에서 수입했지만 조선군에서 더욱 강조하면서 다양한 개조형이 나왔던 무기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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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자총통이다. 94cm이다. 별승자총통과 함께 승자총통의 대표적인 대형 버전이었다. 중국에서 수입한 백자총통보다 크기는 작지만, 비교적 정확하고 운반이 편리해서 널리 사용되었다. 조선의 지형에서는 이러한 조준의 용이함과 운반성이 중국제보다 유용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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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포(手砲)이다. 89cm이다. 지원용 화포와 개인용 총통이 뒤섞인 형태로서 조선 후기에도 사용했다는 형태는 대부분 이런 모습으로 변모했다.

4.3. 기마용 개인총통


기병들이 사용하기 위한 초소형 개인총통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효율성은 그다지 기대할 수가 없었다. 조선 중기에는 이미 신기전과 함께 신호용으로나 사용되는 신세였다. 삼혈포, 쌍안총, 신제총통 같은 종류가 있다. 잘 쓰지 않아서 상태가 좋지 않은 유물만 몇 점 남아있다.
화승총이 도입 이후에는 이를 단축한 마상총이 등장하면서 대체되었다. 이러한 기술도 보급할만큼, 조선 초기부터 화약무기를 널리 보급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정도의 유물들이다.

5. 발사체


승자총통의 사격법은 종류에 따라서, 크게 3가지로 특화되어 있었다.
1. 총통용 화살포탄 1개를 쏘는 미사일 발사대 방식.
2. 3~5개의 대형 쇠구슬/1발의 피령전을 넣는 조총과 비슷한 방식.
3. 10~20발의 소형 쇠구슬을 넣어서 블런더버스처럼 쏘는 방식.

5.1. 화살탄


화살 모양 미사일이다. 세전/피령전/총통전이다. 개인화포에서 화살을 쏨으로서 핸드캐논의 화력(화약량)을 온전히 사거리로 돌리는 운영법인 만큼, 기록을 보면 대구경 개인총통에서 쏘는 피령전의 사거리는 최대 600보, 현대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480M 이상에 달하는 종류도 있었다. 화약 에너지가 대부분 사거리로 전환되는 만큼, 비거리 자체는 동 시대의 화승총보다 길었던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조준이나 반동제어가 어렵고 포신의 형태로 인하여 에너지 효율이 심각하게 분산되는 문제가 있었다. 즉, 개인화기로서는 조총보다 못하고 화포로서의 성능은 대형총통보다 약한 발사법이었다. 한마디로 '''애매했다.'''

5.2. 철환 사격


조란환(쇠구슬) 3~5개를 넣어서 쏘는 매우 일반적인 운용법이었다. 요컨대 화승총 등장 직전의 개인화기들의 주력 사격법이었다. 살상거리는 30~50M 정도였다. 후기형 개인총통들은 이런 사격법을 나름대로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또한, 포신이 1M에 달하는 대구경 승자총통들은 오오즈츠에 맞먹는 위력으로 훨씬 다양한 탄종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이를 사용할 수 있었다.

5.3. 근접 파편사격


'''조란환 10여발 이상, 대량의 화약을 넣어서''' 완벽하게 근접전에 올인하는 방식이다. 화약과 탄환을 많이 넣으므로 충격력은 강력하지만, 유효 사거리가 20m 이하라서 사실상 근접한 적의 방진에 파편을 끼얹는 방법에 가깝다. 현대인들의 기준에서 생각해보면 보면 터무니 없이 사정거리가 짧지만, 이런 근접 파편사격은 갑옷을 입은 보병, 기병의 대열을 제압하기 위한 용도로서 중세부터 널리 쓰인 방식이었다.
다만 다수의 쇠구슬들이 비거리가 짧고 불확실했으며, 훨씬 폭장력이 약한 '''조총으로도 충분한 관통력이 나온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오버파워라서 효율성은 떨어졌다. 다만, 방어전에서는 이러한 '''파편충격''' 효과가 예상보다 위력적이었다. 또한, 보병들의 방진을 혼란시키는 용도로는 조총 몇개보다 훨씬 강력했다.

6. 무기 역사에서의 가치


조총의 등장 이후의 개인화기, 즉 의 가장 큰 목적은 '''보병 제압'''이다. 승자총통은 고려말기~조선초기부터 사용했던 화포를 소형화해서 보병끼리의 싸움에서 주도권을 얻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승자총통은 임진왜란에서 으로서 편의성 및 정확도를 어느정도 달성한 조총을 만났다. 덕분에, 화약무기의 설계이념이 이룬 발전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패배를 달성했다. 안습하지만 무기 발전의 역사에서 의 가치를 보여주는 매우 적절한 유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승자총통은 핸드캐논 사이에 걸친 무기의 마지막 도달점 중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이런 승자총통에도 장점은 있었다.
첫째, 갑주를 입은 보병들과 인마를 충격으로 무너트리는 '''샷건+폴암'''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둘째, 대형 승자포들은 화살탄을 이용한 원거리 타격, 대형 샷건식 운영을 통해서 조총보다 파괴력이 뛰어났다.
셋째, 수레에 여러 대를 싣어서 화차를 만들거나, 성벽 같은 지형지물에 장착하여 수비용 무기로서 응용이 가능했다.
넷째, 나름 늘씬한 외형으로 운반이 쉽고, 유사시 균형 잡힌 철퇴로서 사용하기에 편리했다.
현대 연구가들에게서도 조총 이전의 핸드캐논이 가진 미덕으로만 평가하면 그럭저럭 잘 다듬어진 형태라고 평가받는다. 3종류 가량의 발사법으로 각 상황에 맞춘 운용을 고려하고, 급박하게 전쟁이 터진 직후에 농성전이라도 그럭저럭 이길 수 있게 만들었던 무기라는 것이다. 즉 이라는 무기의 발전사에서 보면 비판받아야 마땅하지만, 당시 한정된 기술을 가진 조선군의 경험 내에서만큼은 잘 사용했다는 평가. 물론 당사자들도 전쟁 도중에 대부분의 병력이 조총으로 교체하는 타당한 행동을 보였다.

7. 사용자들의 평가


조총이 도입된 이후로는 퇴물 신세를 면치 못했다. 임진왜란이 벌어진 시점에서는 이미 삼안포, 신기전 같은 고전적인 화약무기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신호용으로 이용되는 기록이 많다. 임진왜란에서 불과 1년여가 지난 시점에서 조금이나마 승전을 거두었던 대부분의 부대가 조총을 운용하는 상태였다. 전쟁 후반에는 상당수의 정규군이 조총으로 무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들이 발견된다.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이 진행되는 도중에 '''2만 정의 조총'''을 명나라에서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사용자들도 보병에게 어설픈 화포를 쥐어주기보다는 이 유용하다는 평가를 내린 것이다. 지원용 화기로서는 대형총통 중에서 가장 가벼운 현자총통이 뛰어났고, 승자총통 같은 개인화기의 가치는 어디까지나 에 있다는 교훈을 얻은 셈이다. 반대로, 일본군이 위력적으로 생각했던 대조총(오오즈츠)에 대해서는 선조실록에서 '''수군은 이미 포가 많아서 쓸모없을 테니 육군에나 좀 만들어줘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조선에서 감명 깊게 받아들인 교훈은 화포류의 위력이 아닌 신뢰성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진주성 전투이치 전투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는 승자총통도 쓸모가 있었다. 당시 조선에 보급되어 있었던 화기의 갯수로 따져보면, 지자총통 이상급의 '''대형화포'''만 가지고 수만 명의 왜군을 막았다는 것은 있기 어려운 일이다. 활이나 투석구만 가지고 성벽으로 기어올라오는 갑옷 입은 수만 명을 저지한다는 것도 어려운 이야기다. 즉 조총보다 허접한 무기이기는 해도, 지휘관따라서는 승자총통급의 소형 화기도 왜군을 막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뜻이다. 몇몇 전투에서 승전을 이끌었던 변이중화차의 경우에는 승자총통 40여문을 장비한 화차였다.
현대에 들어서는 천자총통, 현자총통 같은 대형화포에 비하면 인기가 밀리는 편이고, 다른 매체에서는 단 한번도 등장한 적이 없다. 아무래도 조총에게 밀린 무기라는 인식이 강해서일까? 시대적으로 조총에 완벽하게 발린 안습함의 대명사이긴 하지만, 최소한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무적죽장군 같은 화기에 비한다면야 그럭저럭 괜찮은 무기는 맞다.
심지어 조선 후기 기록에도 승자총통은 다시 등장한다. 동조총(銅鳥銃), 동소총(銅小銃), 승자동포(勝字銅砲)등의 이름으로 등장하며 현재 남아있는 승자총통 유물 중에는 임란 이후에 만들어진 것도 상당수 존재한다. 이강칠 교수의 저서 '한국의 화포'에 실려있는 사진/실측자료를 보면 기술적인 차이를 화력의 향상으로 메꾸기 위해 총에 두른 죽절과 약실이 더 두꺼워지고, 총 자체도 약간 크고 튼튼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8] 이렇게 생긴 모양이었다.
승자총통도 시대에 비하면 뒤떨어진 무기지만, 이후의 조총도 서양의 발전한 카빈이나 강선소총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각종 전쟁과 산업혁명을 통해서 부쩍 성장하는 서양의 문명을 따라잡지 못해서, 그때까지도 조총이나 궁술에 만족하던 조선은 또다시 시대에 뒤쳐지고 만다.[9] 사실 이 문제는 조선 뿐만 아니라 비 유럽 문화권 전체의 문제이긴 했지만 말이다.

승자총통의 장점 및 조총과의 비교와 단점에 대한 영상.
개화문부터 폐화문까지의 과정때문에 장전속도에서 조총이 밀리긴 했지만.[10] 역으로 승자총통은 지화식 화기인 탓에 타이밍 조절과 움직이는 표적을 계속 조준하는 것에 실패해서 명중률에서 패배했다.

8. 현대의 평가


현대보병끼리의 싸움에서도 각종 중화기의 우선도가 보다 떨어지는 이유도 승자총통과 조총의 교훈에서 찾을 수 있다.
조총을 최대한 빠르게 양산했던 조선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나 드라마에선 조총에 뒤지지 않는다는 식으로 과대평가 되는 경우가 많다. 역사스페셜에서 진주대첩을 다루면서 조총에 견줄 만한 화기로 들었고, KBS 사극 징비록에서도 소승자총통이 조총에 뒤지지 않는 무기로 등장한다. 물론 승자총통으로 이긴 경우는 예상보다 많다. 문제는 전반적으로 조총에게 밀렸다는 점이 쉽게 간과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승자총통류를 써서 조총을 이긴 승리는 특정한 지휘관들이 뛰어났던 것이지, 시스템적으로는 완패라는 점에서 반드시 반성이 필요하다.
의외로 대형 승자포들은 소형포에 맞먹는 살상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방송사와 매체들에서는 이러한 대형 승자포들을 잘 표현하지 않는다. 많이 생산해둔 천자총통 모형이 값도 싸고 크기도 커서 멋을 살리기 좋기 때문이다.[11]
다양한 화차들이 재현되면서, 주로 수레 같은 지지대에 수십 개를 싣는 재현품을 만드는 경우가 늘어났다. 실제로 조선 초기 이후의 소형 승자포들은 신기전처럼 주력에서 밀려났으며 화차에 장착하는 무기로서 역할이 바뀌었다.
임진왜란의 기록에는 '조총 쇼크'가 반드시 등장하는데 현대 사극에서는 "조선에는 총이 없어서 놀랐다!" 라고 황당한 묘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조선은 초기부터 발전된 핸드캐논을 양산하여 배치한 국가였다. 즉, 임진왜란 당시의 조총 쇼크는 '''조선 초기부터 보급했던 샷건 및 바주카를 겸한 개인 화기가 조총에게 패배해서 받은 충격이라고 해석'''해야 정확하다. 그리고 여기에 훈련도가 부족한 삼남지방의 병사들이 전장 쇼크로 무너진게 더해진 형태이다. 훈련도가 낮은 부대는 아군의 사격소리에도 쇼크를 받아 붕괴될 수 있으며 이런 사례는 조선 뿐만 아니라 후대의 유럽 지역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조선군은 1m에 가까운 크기의 대승자총통, 별승자총통은 천자총통 같은 대형 화포들을 전방위적으로 보급한 상황이었다. 고작 총 소리를 들었다고 제대로 훈련받은 군인들이 놀랄 리가 있겠는가. 조총의 보급이 이웃들보다 한 단계 늦은 이유에는 필요성의 문제도 있었다. 조선은 몇 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조총 보급을 끝마칠 정도의 역량은 충분한 국가였다. 문제는 가까운 명나라, 일본에 비하면 조총이 필요할 정도로 격한 전쟁이 없었다는 점이다.

9.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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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군이 거의 개인화기 수준의 수량을 운용하면서 나름의 화망까지 만들면서 싸우는 모습도 묘사된다. 승자총통 뿐만 아니라 수성전에 대완구,화차,현자총통까지 동원하는 장면도 묘사된다. 행주 대첩이나 진주 대첩처럼 조선이 성공한 수성전의 실제 양상이 막강한 화력의 조선군이 숫자만 믿고 달려드는 왜군을 쳐바르는 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의외로 놀라운 고증이다.
하지만 그 이후 사극에서는 천자총통 같은 대형 화포에 밀려 등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사극에서의 왜곡된 조총 쇼크 같은 묘사가 나오기도 한다. 그나마 징비록 같은 경우에선 소승자총통이나 문종화차 같은 소형 총통을 탑재한 병기들이 활약을 하는 편.
  • 웹툰 호랑이형님에서 '16년 중~하반기 연재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착호갑사들이 승자총통을 운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피령목전이나 소형 화살이 아닌 철환을 사격한다. 인간보다 몇배는 강한 수인(獸人)에게도 상당한 데미지를 입히는 모습이 인상적. 다만 발사시 반동으로 밀려나거나 하는 모습이 보이지는 않다.
-반박: 호랑이 형님에 묘사된 소형총통은 약실부분을 둥글게 처리하였고, 총신이 짧은 형태로 미루어 볼때, 조선중기에 김지에 의해 개발된 소형 화기인 승자총통 보다는 여말 선초의 소형총통류(현재 유물로 남은 경희고소총통慶熙古小銃筒)에 가깝게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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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에서 승자총통의 변종인 오연자총이 등장. 수레 위에 거치한 형태로 나왔다. 일제사격으로 몰려오는 좀비들을 한번에 쓸어버리는 막강한 위용을 보여주지만 좀비들이 너무 많은 나머지 돌진해온 좀비들에게 포대가 부딪혀 무너지며 등장 끝. 영상 매체에서 매우 출연이 드문 총통류 화기, 그것도 아예 출연한 전적도 없는 오연자총이라는 형태로 등장해 활약한 것이 매우 뜻깊다.

10. 관련 문서


  • 한국의 무기
  • 핸드 캐논
  • 조총
  • 샷건[12]

[1] 동영상 초반에 사전총통(4발들이 소형화살을 쏘는 소구경 총통이다. (동영상처럼) 일반적으로 화차에 수십기를 묶어서 사용했다. 사람이 직접 사용하는 버전으로는 8전총통이 있었다.)을 장착한 화차가 등장한다. (위 사진처럼) 소형은 수십개씩 묶어 기관총처럼 운용했다. 2분 30초부터는 대형 승자총통으로 피령목전을 발사한다. 이 무기를 왜 '조선시대의 바주카'라고 부르는지 볼 수 있다.[2] 다만, 총에 가까운 후기형 승자총통들은 내구성이 약해서 철퇴로 쓰면 금방 구부러졌다. 또한 승자총통을 비롯한 여말선초의 총통들은 값비싼 청동합금(당연히 철보다 비싸다)을 써서 만들었기 때문에, 철퇴로서의 용법을 주로 사용하기보단 어디까지나 임시변통으로 쓰는 정도로 추측한다.[3] 아예 대놓고 철퇴로서의 용도를 겸하게 만든 것은 임란 때 중국에서 들어온 핸드캐논인 쾌창. 이 쾌창은 아예 재질부터 청동합금이 아니라 쇠로 만들어졌으며, 사용법도 중근거리에서 장전해 놓은 산탄을 한 방 쏜 뒤 돌격해서 근접병기로 쓰는 것이다.[4] 본격적인 장전 및 방포 과정은 1:15부터이다.[5] 실제 승자총통의 다큐멘터리는 유튜브에서도 셋이나 찾아볼 수 있으나 정작 실제 운용법을 그대로 사용하여 방포 실험한 영상은 없고 끽해야 화력실험이 고작이었다는 점에서 한탄할 만한 점이긴 하다.[6] 비슷한 무기로 서양의 오르간 건개인 화기용으로 개발된덕 풋 피스톨이 있다.[7] 임진장초, 1593년 8월 장계[8] 임란 이후의 재래식 소형화기들은 일본 대조총의 영향을 받아 조총이나 서양 핸드캐논과 유사한 개머리판을 장착하여 일반적인 보병의 화력 지원용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구한말 신미양요 당시 미군의 기록에도 조선군이 징겔(아시아의 핸드캐논류를 서양에서 부르던 이름)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9] 효종과 숙종대에 박연이나 하멜 등과 접촉하고 나선정벌 등이 일어남으로써 조선도 수석총의 존재를 인지하고 개발 및 생산에까지 성공한다. 그러나 습기를 비롯한 환경적 문제와 비싼 가격 때문에 실용화되지는 못했다...[10] 단 영상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구식 화약병기의 장전 과정은 큰 차이가 없고 속도는 개인 기량의 의존도가 큰 탓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11] 정작 천자총통급의 대형 포들은 아시아 국가에서는 자주 안 사용했다.[12] 샷건이 효율적인 대인 저지력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라이플보다 천대받는지, 승자총통과 조총의 예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전장에서 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무기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