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곤
'''鞭棍'''
[image]
중국 서방 이민족의 '''기병무기'''에서 기원한 장병기. 길고 짧은 두 개의 곤봉을 쇠사슬로 엮은 형태이다.
복잡하고 다양한 움직임을 포기한 대신 묵직한 타격에 올인한 형태의 장병기로 볼 수 있다. 크게 보병이 사용하는 보편곤(步鞭棍), 기병이 사용하는 마편곤(馬鞭棍)으로 나뉘며 서양에 비슷한 무기로 플레일(Flail)이 있다.
무예도보통지 4권에 나오는 무예로 도리깨와 비슷한 형태의 무기와 그를 사용하는 무술 기법을 칭한다.
사슬 무기와 장병기라는 특이한 조합으로서, 잡는 부분이 타격하는 부분보다 월등히 길다. 이는 쌍절곤이나, 삼절곤 아니면 플레일 등의 사슬 무기에서 발생하는 제어 불능이나 자신이 자신을 치는 단점을 없애준다. 물론, 날붙이가 아니기 때문에 파괴력을 내기 위해서는 충분한 공간이 필요하다. 또한 무예도보통지에는 중국식 편곤과 한국식 편곤을 소개하고 있는데, 중국 것은 자편과 모편 사이 쇠사슬이 상당히 긴 데 반해 한국식은 위 그림에 나오듯이 자편과 모편 사이 쇠줄의 길이가 짧아 기존의 쇠도리깨와 비슷하다. 이는 상대와의 교전 중 사슬이 상대의 무기가 얽히는 걸 방지하는 한국의 편곤만이 가진 특징이다.
무예도보통지에 서술된 편곤 기예의 기원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그러나 이전부터 한국에서 창처럼 긴 자루를 가진 도리깨형 무기가 딱히 없었던걸 보면, 기다란 편곤을 사용하는 기예는 중국이 기원으로 추정된다. 사용법 역시 곤방과 매우 유사하다!
철(=쇠)로 만든 60cm 정도의 작은 쇠도리깨(혹은 편곤이나 쌍절곤)로 치마 속에 숨길 수 있는 작은 무기로 조선시대 여형사들인 다모들이 썼다고 말한다. 조선시대 포졸, 무인 혹은 한량들이 일종의 보조무기 비슷하게 사용했던 무기라고 알려졌는데 이 경우에도 아무래도 소형 편곤 쪽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편곤을 수입하기 이전부터 한국에도 도리깨형 전쟁 유물들이 존재했다. 고구려 국내성에서는 서양의 프레일(flail)과 흡사한 도리깨형 타격 병기가 출토되었다.
정리하자면, 막대와 추 사이의 사슬이 매우 짧은 도리깨는 중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한국의 쇠도리깨가 가진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전기에 팽배수들이 환도와 방패를 사용하다, 상황에 따라 도끼나 철퇴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image]
쇠도리깨, 고들개철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은입사로 예쁘게 만든 것도 있다.링크
편곤의 유래에 대해서 송나라 태조 조광윤이 [1] 전쟁통에 쓰던 곤봉이 부러져 급한 대로 줄로 묶어 싸웠는데 그게 더 효과가 좋았던 것이 기원이라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융족의 무기가 전래된 것이라는 설이 더 우세하다. 한국에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때 명군을 통해서이다.
다만 서융의 무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족이 이 무기를 도입한 이후에는 되려 한족이 더 편곤을 잘 다루게 되었다. 이는 수렵민족이었던 서융족과 달리 한족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라 그들이 자주 쓰는 도리깨와 비슷했기 때문이라 한다. 훗날 편곤을 받아들인 조선도 쓰기 쉬운데 위력이 강하다는 점을 똑같이 높이 평가했다.
자편과 모편 사이의 쇠사슬이 길면 잘 엉키고, 짧은 것이 실용적이라고 한다. 무예24기 덧글 참조.
곤을 사용하는 용법이 비슷하므로 곤방과 비슷한 세법이 주를 이룬다.
구조가 간단하여 만들기 쉽고 튼튼하여 보급이 용이하다 보니 제식 병기로서 매우 유용했고, 굳이 오래간 훈련을 받지 않아도 다루기 쉬워서 그냥 양손으로 들 수만 있어도 실전에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이는 편곤과 같은 장병 타격무기가 가지는 최대의 장점이다.
양손으로 휘두르는 장병기인 만큼 타격력은 무시무시하고 그냥 단순히 휘두르는 것으로 모든 공격 동작이 귀결되기 때문에 공격 방식이 직관적이다. 그러나 대신 앞으로 쏠린 무게중심과 이리저리 흔들리는 추 때문에 기민한 움직임이나 재빠른 방어 같은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형태의 무기다. [2] 이러한 무기 형태의 특성에 의해 편곤의 타격은 상대방과 정면으로 대치한 상황에서도 상대의 뒤통수나 등을 가격할 수 있을 정도로 공격 반경이 넓으며, 거기에 더해 공격을 시작하여 타격이 완료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아 방어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렵다. 한마디로 타격무기의 장점을 극대화한 물건으로 이해하면 쉽다. 대신 장병기의 단점도 극대화. 일단 방어 같은 것은 꿈꾸면 안 되고, 휘두르는 데 넓은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밀집한 상황에서는 활용도가 극도로 떨어진다. 결정적으로 제대로 타격을 주기 위해서 필요한 동작이 굉장히 크기 때문에 공격이 빗나가거나 막히면 그다음은 오히려 사용자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공격이 실패하면 답이 없는 구조의 무기인 만큼 당파#s-2나 삼지창같이 무기를 걸어버리는 식으로 공격을 차단하는 무기에 약하다. 사실 당파는 대부분의 장병기에 대해 우세를 보이는 동족 살해자(일종의 소드 브레이커)로, 편곤에 대해서도 역시 강점을 보인다. 구조를 생각해보면 간단히 눈치챌 수 있는데, 삼지창의 창첨 사이에 편곤을 끼워서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키거나 아예 부러뜨려버리면 편곤과 같은 장병기들은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 사실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동양에서 당파를 비롯한 폴암으로 무장한 병사들은 적의 무기를 받아내며 싸우다 보니 용맹한 자들을 선발해 투입했다.
편곤의 메리트는 역시 끝에 달려 있는 추 부분으로, 동일한 길이의 장병기여도 추 부분이 상대의 방어 너머로 머리를 가격할 수 있다. 게다가 길이가 짧아 통제가 어려운 쌍절곤과 달리 편곤은 사슬 무기 범주에 속함에도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지 않는다. 이런 특성과 함께 농경민족들에게는 그네들에 익숙한 도리깨질의 용법이 쉽게 익숙해지기도 하여 굉장히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서양의 플레일 역시 농민이나 농민 출신들이 애용하던 병기였다.
종합하면 편곤은 당시 농경국가에서는 기본적인 사용방법만 익히고 있어도 훌륭한 위력을 선보일 수 있는 무기라 제대로 된 무기 사용법을 익히지 못한 일반인도 손쉽게 다룰 수 있기 때문에 널리 사용될 수 있었다고 보면 된다. [3] 다만 특성상 대규모 밀집 진형 같은 정규전에서 보병이 전열을 지탱하며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많기 때문에 소규모 접전이나 기세를 실어 단숨에 치고 들어가는 공격에 사용되는 무기라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은 새로 징집한 병사들이 칼을 쓰는 데 능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류성룡이 중국에서 쓰는 '쇠 편곤(철 회편)'이 매우 좋다며 추천하여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image]
당시에 류성룡은 고양에 사는 '명회'란 사람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편곤 한 자루로 혼자서 왜군을 '''400명'''이나 죽였다는 예를 들었다. 선조도 마침 조선의 농민들은 '도리깨'를 자주 쓰니 이와 용법이 비슷한 편곤을 무기로 쓰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 곧바로 채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해당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 실제로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
직관적이고 단순한 움직임, 그리고 강력한 타격력은 일격을 먹이고 이탈하는 방식의 용도로 활용하기 용이했고 이는 편곤이 기병의 백병전 무기로 널리 쓰이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기수가 휘두르는 타격력에 더해 기마의 속도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살인적인 위력의 공격이 가능했고, 공격이 실패하면 바로 난감해지는 보 편곤과 달리 그대로 속도를 살려 이탈해버리면 그만이라 편곤 자체의 단점도 상쇄할 수 있었다. 이때 기병이 사용하는 마상편곤은 양손으로 휘두르는 장병기에 속하는 보병의 편곤과 달리 기병이 마상에서 휘두르기 쉽게 한 손 무기처럼 짧아진 것이 많다. 이후 편곤의 중요성은 인조 때까지 강조되어 적진을 뚫는 데는 편곤만 한 게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4]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아예 환도 없이 활과 편곤만 장비하는 기병도 많았다. 하멜 표류기에도 언급된 이야기다.
이는 창기병이 의외로 보급하고 운용하기 매우 까다로운 병과였기 때문인 까닭도 있었다. 창기병 하면 흔히들 생각하는, 반지의 제왕에서처럼 창 하나 꼬나 쥐고 몇십 명을 찌르면서 적 진영을 그대로 꿰뚫어버리는 이미지와는 달리 현실에서의 창기병은 물리법칙의 한계 때문에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우선 창기병의 창은 일회용 소모품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갑옷을 갖춰 입고 무기를 든 보병은 생각보다 상당한 질량을 가지고 있어서, 말의 돌격에 받히면 보병은 죽겠지만 그리 쉽게 돌파당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말도 생물인지라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물체가 있으면 본능적으로 속도를 줄이거나 심지어는 멈춰 선다. 이 상황을 피하기 위해 창기병은 적에게 정면으로 들이받는 게 아니라 비스듬히 우회하면서 창으로 가장 바깥의 적병들을 찔렀다. 이 과정도 그리 순탄한 게 아니라, 일단 적의 몸에 창이 박히면 그 창은 바로 내던져버리던지 하는 식으로 포기해버리고(안 그러면 수십kg짜리 인간의 몸에 박혀있는 창의 반작용으로 기병 쪽이 낙마해버린다) 바로 후퇴해서 새로운 창을 보급받고 다시 돌격해 적병 하나를 찌르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적의 방진을 붕괴시켰다. 기병 돌격의 양상이 이랬으니 해당 과정에서 적병을 공격하는 게 창이 아니라 편곤이어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서유럽보다는 다소 갑옷을 덜 갖춰 입는 경향이 있던 아시아의 군대 상대로는 특히 그렇다.
고고학 자료로는 고구려 국내성 유적에 둔기 타격부로 추정되는 유물이 나온 적 있어 사실 비슷한 무기류는 이미 이때부터도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당시 삼국이 전쟁이 격화하고, 중장화하면서 화살촉도 관통 능력이 좋은 형태로 변하는 양상이 관찰된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만 같은 편곤이지만 의외로 최근까지 일부에서 사용되었다.
[image]
과거 광주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전투경찰 소위 전남 중대에서 사용한 편곤 형식의 진압봉이다. 경찰에서 정식으로 지급한 물품은 아니고 당시 전대협에서도 전투력 NO.1이었던 오월대와 녹두대를 상대하던 일선 경찰들이 부러진 진압봉들을 전깃줄 등으로 연결해서 만든 급조 자작품이다. [5] 편곤이란 무기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없는 상태로 '''시위대와의 백병전(…)'''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 것. 사용자들도 편곤이란 이름보단 그냥 쇠도리깨 혹은 쌍절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image]
최근에도 사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빨간 원 안 속에 (쇠도리깨라고 표현한) 편곤이 보인다. 위 사진은 쌍용자동차 노조원 평택공장 점거 농성 사건 당시의 사진이다. 사진 속 경찰들은 전의경도 경찰기동대도 아닌 경찰특공대로 위와 다르게 급조가 아닌 정식 지급품이다.
게임 디아블로 3의 확장팩 영혼을 거두는 자에 추가된 직업 성전사(Crusader)가 사용한다. 원어로는 flail인데, 한글 번역판에서는 무슨 농기구마냥 '도리깨' 라고 했다. 작중에서 수확(Reap)이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돼 악마들의 목숨을 거두어가는 무기라는 의미로 도리깨라고 번역한 듯 하나 원판에는 이런 언급이 전혀 없는데 제멋대로 연결한 것은 문제가 있으며, 농기구가 아니라 무기이므로 편곤이 옳다. 아니면 한자가 아닌 순우리말로 번역하려다 보니 도리깨로 번역했을지도 모른다.
엠파이어즈 근대사회의 여명의 대한민국 문명에서 조선 도리깨병 이라는 이름의 기병이 등장한다. 당시 외국산 RTS게임 치고 조선의 복식 또는 무기에 대한 고증이 대단했던 걸 감안하면 편곤기병이 아닌 게 아쉽다는 게 유일한 단점. 근거리에 접근해 일반적인 기병처럼 편곤으로 내려친다. 능력치는 보통의 기병 수준.
태왕북벌기에서 담덕이 암살자들을 상대로 사용했다. 자주 산책 다니는 숲길 아래에 편곤을 묻어놨었고 이를 찾아내어 싸운다. 암살자중 하나는 나무 뒤에 숨으며 숲속 같이 좁은 곳에서 편곤을 쓴다며 비웃었지만 편곤의 추가 반동으로 돌면서 암살자의 얼굴을 박살내는 장면이 나온다.
후스 전쟁을 다룬 만화 소녀전쟁에서 농민 출신의 후스파들이 사용한다.
1. 개요
[image]
중국 서방 이민족의 '''기병무기'''에서 기원한 장병기. 길고 짧은 두 개의 곤봉을 쇠사슬로 엮은 형태이다.
복잡하고 다양한 움직임을 포기한 대신 묵직한 타격에 올인한 형태의 장병기로 볼 수 있다. 크게 보병이 사용하는 보편곤(步鞭棍), 기병이 사용하는 마편곤(馬鞭棍)으로 나뉘며 서양에 비슷한 무기로 플레일(Flail)이 있다.
무예도보통지 4권에 나오는 무예로 도리깨와 비슷한 형태의 무기와 그를 사용하는 무술 기법을 칭한다.
사슬 무기와 장병기라는 특이한 조합으로서, 잡는 부분이 타격하는 부분보다 월등히 길다. 이는 쌍절곤이나, 삼절곤 아니면 플레일 등의 사슬 무기에서 발생하는 제어 불능이나 자신이 자신을 치는 단점을 없애준다. 물론, 날붙이가 아니기 때문에 파괴력을 내기 위해서는 충분한 공간이 필요하다. 또한 무예도보통지에는 중국식 편곤과 한국식 편곤을 소개하고 있는데, 중국 것은 자편과 모편 사이 쇠사슬이 상당히 긴 데 반해 한국식은 위 그림에 나오듯이 자편과 모편 사이 쇠줄의 길이가 짧아 기존의 쇠도리깨와 비슷하다. 이는 상대와의 교전 중 사슬이 상대의 무기가 얽히는 걸 방지하는 한국의 편곤만이 가진 특징이다.
무예도보통지에 서술된 편곤 기예의 기원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그러나 이전부터 한국에서 창처럼 긴 자루를 가진 도리깨형 무기가 딱히 없었던걸 보면, 기다란 편곤을 사용하는 기예는 중국이 기원으로 추정된다. 사용법 역시 곤방과 매우 유사하다!
철(=쇠)로 만든 60cm 정도의 작은 쇠도리깨(혹은 편곤이나 쌍절곤)로 치마 속에 숨길 수 있는 작은 무기로 조선시대 여형사들인 다모들이 썼다고 말한다. 조선시대 포졸, 무인 혹은 한량들이 일종의 보조무기 비슷하게 사용했던 무기라고 알려졌는데 이 경우에도 아무래도 소형 편곤 쪽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편곤을 수입하기 이전부터 한국에도 도리깨형 전쟁 유물들이 존재했다. 고구려 국내성에서는 서양의 프레일(flail)과 흡사한 도리깨형 타격 병기가 출토되었다.
정리하자면, 막대와 추 사이의 사슬이 매우 짧은 도리깨는 중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한국의 쇠도리깨가 가진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전기에 팽배수들이 환도와 방패를 사용하다, 상황에 따라 도끼나 철퇴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image]
쇠도리깨, 고들개철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은입사로 예쁘게 만든 것도 있다.링크
2. 상세
편곤의 유래에 대해서 송나라 태조 조광윤이 [1] 전쟁통에 쓰던 곤봉이 부러져 급한 대로 줄로 묶어 싸웠는데 그게 더 효과가 좋았던 것이 기원이라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융족의 무기가 전래된 것이라는 설이 더 우세하다. 한국에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때 명군을 통해서이다.
다만 서융의 무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족이 이 무기를 도입한 이후에는 되려 한족이 더 편곤을 잘 다루게 되었다. 이는 수렵민족이었던 서융족과 달리 한족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라 그들이 자주 쓰는 도리깨와 비슷했기 때문이라 한다. 훗날 편곤을 받아들인 조선도 쓰기 쉬운데 위력이 강하다는 점을 똑같이 높이 평가했다.
자편과 모편 사이의 쇠사슬이 길면 잘 엉키고, 짧은 것이 실용적이라고 한다. 무예24기 덧글 참조.
2.1. 용법
곤을 사용하는 용법이 비슷하므로 곤방과 비슷한 세법이 주를 이룬다.
구조가 간단하여 만들기 쉽고 튼튼하여 보급이 용이하다 보니 제식 병기로서 매우 유용했고, 굳이 오래간 훈련을 받지 않아도 다루기 쉬워서 그냥 양손으로 들 수만 있어도 실전에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이는 편곤과 같은 장병 타격무기가 가지는 최대의 장점이다.
양손으로 휘두르는 장병기인 만큼 타격력은 무시무시하고 그냥 단순히 휘두르는 것으로 모든 공격 동작이 귀결되기 때문에 공격 방식이 직관적이다. 그러나 대신 앞으로 쏠린 무게중심과 이리저리 흔들리는 추 때문에 기민한 움직임이나 재빠른 방어 같은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형태의 무기다. [2] 이러한 무기 형태의 특성에 의해 편곤의 타격은 상대방과 정면으로 대치한 상황에서도 상대의 뒤통수나 등을 가격할 수 있을 정도로 공격 반경이 넓으며, 거기에 더해 공격을 시작하여 타격이 완료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아 방어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렵다. 한마디로 타격무기의 장점을 극대화한 물건으로 이해하면 쉽다. 대신 장병기의 단점도 극대화. 일단 방어 같은 것은 꿈꾸면 안 되고, 휘두르는 데 넓은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밀집한 상황에서는 활용도가 극도로 떨어진다. 결정적으로 제대로 타격을 주기 위해서 필요한 동작이 굉장히 크기 때문에 공격이 빗나가거나 막히면 그다음은 오히려 사용자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공격이 실패하면 답이 없는 구조의 무기인 만큼 당파#s-2나 삼지창같이 무기를 걸어버리는 식으로 공격을 차단하는 무기에 약하다. 사실 당파는 대부분의 장병기에 대해 우세를 보이는 동족 살해자(일종의 소드 브레이커)로, 편곤에 대해서도 역시 강점을 보인다. 구조를 생각해보면 간단히 눈치챌 수 있는데, 삼지창의 창첨 사이에 편곤을 끼워서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키거나 아예 부러뜨려버리면 편곤과 같은 장병기들은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 사실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동양에서 당파를 비롯한 폴암으로 무장한 병사들은 적의 무기를 받아내며 싸우다 보니 용맹한 자들을 선발해 투입했다.
편곤의 메리트는 역시 끝에 달려 있는 추 부분으로, 동일한 길이의 장병기여도 추 부분이 상대의 방어 너머로 머리를 가격할 수 있다. 게다가 길이가 짧아 통제가 어려운 쌍절곤과 달리 편곤은 사슬 무기 범주에 속함에도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지 않는다. 이런 특성과 함께 농경민족들에게는 그네들에 익숙한 도리깨질의 용법이 쉽게 익숙해지기도 하여 굉장히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서양의 플레일 역시 농민이나 농민 출신들이 애용하던 병기였다.
종합하면 편곤은 당시 농경국가에서는 기본적인 사용방법만 익히고 있어도 훌륭한 위력을 선보일 수 있는 무기라 제대로 된 무기 사용법을 익히지 못한 일반인도 손쉽게 다룰 수 있기 때문에 널리 사용될 수 있었다고 보면 된다. [3] 다만 특성상 대규모 밀집 진형 같은 정규전에서 보병이 전열을 지탱하며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많기 때문에 소규모 접전이나 기세를 실어 단숨에 치고 들어가는 공격에 사용되는 무기라고 볼 수 있다.
3. 역사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은 새로 징집한 병사들이 칼을 쓰는 데 능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류성룡이 중국에서 쓰는 '쇠 편곤(철 회편)'이 매우 좋다며 추천하여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image]
당시에 류성룡은 고양에 사는 '명회'란 사람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편곤 한 자루로 혼자서 왜군을 '''400명'''이나 죽였다는 예를 들었다. 선조도 마침 조선의 농민들은 '도리깨'를 자주 쓰니 이와 용법이 비슷한 편곤을 무기로 쓰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 곧바로 채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해당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 실제로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
직관적이고 단순한 움직임, 그리고 강력한 타격력은 일격을 먹이고 이탈하는 방식의 용도로 활용하기 용이했고 이는 편곤이 기병의 백병전 무기로 널리 쓰이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기수가 휘두르는 타격력에 더해 기마의 속도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살인적인 위력의 공격이 가능했고, 공격이 실패하면 바로 난감해지는 보 편곤과 달리 그대로 속도를 살려 이탈해버리면 그만이라 편곤 자체의 단점도 상쇄할 수 있었다. 이때 기병이 사용하는 마상편곤은 양손으로 휘두르는 장병기에 속하는 보병의 편곤과 달리 기병이 마상에서 휘두르기 쉽게 한 손 무기처럼 짧아진 것이 많다. 이후 편곤의 중요성은 인조 때까지 강조되어 적진을 뚫는 데는 편곤만 한 게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4]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아예 환도 없이 활과 편곤만 장비하는 기병도 많았다. 하멜 표류기에도 언급된 이야기다.
이는 창기병이 의외로 보급하고 운용하기 매우 까다로운 병과였기 때문인 까닭도 있었다. 창기병 하면 흔히들 생각하는, 반지의 제왕에서처럼 창 하나 꼬나 쥐고 몇십 명을 찌르면서 적 진영을 그대로 꿰뚫어버리는 이미지와는 달리 현실에서의 창기병은 물리법칙의 한계 때문에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우선 창기병의 창은 일회용 소모품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갑옷을 갖춰 입고 무기를 든 보병은 생각보다 상당한 질량을 가지고 있어서, 말의 돌격에 받히면 보병은 죽겠지만 그리 쉽게 돌파당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말도 생물인지라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물체가 있으면 본능적으로 속도를 줄이거나 심지어는 멈춰 선다. 이 상황을 피하기 위해 창기병은 적에게 정면으로 들이받는 게 아니라 비스듬히 우회하면서 창으로 가장 바깥의 적병들을 찔렀다. 이 과정도 그리 순탄한 게 아니라, 일단 적의 몸에 창이 박히면 그 창은 바로 내던져버리던지 하는 식으로 포기해버리고(안 그러면 수십kg짜리 인간의 몸에 박혀있는 창의 반작용으로 기병 쪽이 낙마해버린다) 바로 후퇴해서 새로운 창을 보급받고 다시 돌격해 적병 하나를 찌르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적의 방진을 붕괴시켰다. 기병 돌격의 양상이 이랬으니 해당 과정에서 적병을 공격하는 게 창이 아니라 편곤이어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서유럽보다는 다소 갑옷을 덜 갖춰 입는 경향이 있던 아시아의 군대 상대로는 특히 그렇다.
고고학 자료로는 고구려 국내성 유적에 둔기 타격부로 추정되는 유물이 나온 적 있어 사실 비슷한 무기류는 이미 이때부터도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당시 삼국이 전쟁이 격화하고, 중장화하면서 화살촉도 관통 능력이 좋은 형태로 변하는 양상이 관찰된다.
4. 현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만 같은 편곤이지만 의외로 최근까지 일부에서 사용되었다.
[image]
과거 광주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전투경찰 소위 전남 중대에서 사용한 편곤 형식의 진압봉이다. 경찰에서 정식으로 지급한 물품은 아니고 당시 전대협에서도 전투력 NO.1이었던 오월대와 녹두대를 상대하던 일선 경찰들이 부러진 진압봉들을 전깃줄 등으로 연결해서 만든 급조 자작품이다. [5] 편곤이란 무기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없는 상태로 '''시위대와의 백병전(…)'''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 것. 사용자들도 편곤이란 이름보단 그냥 쇠도리깨 혹은 쌍절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image]
최근에도 사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빨간 원 안 속에 (쇠도리깨라고 표현한) 편곤이 보인다. 위 사진은 쌍용자동차 노조원 평택공장 점거 농성 사건 당시의 사진이다. 사진 속 경찰들은 전의경도 경찰기동대도 아닌 경찰특공대로 위와 다르게 급조가 아닌 정식 지급품이다.
5. 매체에서의 등장
게임 디아블로 3의 확장팩 영혼을 거두는 자에 추가된 직업 성전사(Crusader)가 사용한다. 원어로는 flail인데, 한글 번역판에서는 무슨 농기구마냥 '도리깨' 라고 했다. 작중에서 수확(Reap)이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돼 악마들의 목숨을 거두어가는 무기라는 의미로 도리깨라고 번역한 듯 하나 원판에는 이런 언급이 전혀 없는데 제멋대로 연결한 것은 문제가 있으며, 농기구가 아니라 무기이므로 편곤이 옳다. 아니면 한자가 아닌 순우리말로 번역하려다 보니 도리깨로 번역했을지도 모른다.
엠파이어즈 근대사회의 여명의 대한민국 문명에서 조선 도리깨병 이라는 이름의 기병이 등장한다. 당시 외국산 RTS게임 치고 조선의 복식 또는 무기에 대한 고증이 대단했던 걸 감안하면 편곤기병이 아닌 게 아쉽다는 게 유일한 단점. 근거리에 접근해 일반적인 기병처럼 편곤으로 내려친다. 능력치는 보통의 기병 수준.
태왕북벌기에서 담덕이 암살자들을 상대로 사용했다. 자주 산책 다니는 숲길 아래에 편곤을 묻어놨었고 이를 찾아내어 싸운다. 암살자중 하나는 나무 뒤에 숨으며 숲속 같이 좁은 곳에서 편곤을 쓴다며 비웃었지만 편곤의 추가 반동으로 돌면서 암살자의 얼굴을 박살내는 장면이 나온다.
후스 전쟁을 다룬 만화 소녀전쟁에서 농민 출신의 후스파들이 사용한다.
6. 둘러보기
[1] 무술의 달인이다. 당대에 곤법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권법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권법 송태조 삼십이세장권은 훗날 조선의 무예도보통지에도 수록되었다.[2] 물론 오랜 시간 훈련을 통해 숙련된 무사가 사용한다면 다채로운 공격/방어 움직임을 수행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럴 바에야 훨씬 기민하고 융통성 있는 다른 장병기들이 넘쳐난다.[3] 이는 철퇴나 곤방과 같은 일반적인 타격무기들과도 공유하는 특성이다. 이들 무기류는 호신용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4] 실제로 인조 정권은 이괄의 난 당시 편곤으로 무장한 이괄 휘하의 기병들에게 탈탈 털린 경험이 있다.[5] 장봉에 단봉을 엮은 것으로 추정된다. 진압봉 항목에 적혀 있지만 장봉은 속이 비고 가벼워 낭창거려 길이에 비해 타격력이 약해 방호구를 잘하고 있다면 타격을 주기 곤란한데 반해 단봉은 단단하고 무거워 타격력이 좋다. 어찌 보면 단봉과 장봉의 장점과 단점을 상호 보완하는 형태일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