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무기)

 



[image]


히스토리 채널에서 중국의 다발화전과 한국식 화차를 비교하는 영상
Ancient Hwacha-From Lock n'Load with R. Lee Ermey
1. 개요
2. 개발 역사
2.2. 원조 논쟁
2.3. 중국식과 조선식의 차이점
3. 종류
3.1. 최무선 화차
3.2. 태종화차
3.3. 문종화차
3.5. 류성룡화차
3.6. 변이중화차
3.7. 융원필비 화차
3.8. 목화수거
3.9. 신경준 화차
3.10. 귀거(구거)
3.11. 조총부착화차
4. 창작물에서의 등장
4.1. 목록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


화차는 화약무기를 싣은 수레를 칭한다. 화약무기를 싣은 발사기 겸 전차(화거라고 불렸을 수도 있다.). 사진은 영화 신기전에 나온 신기전 화차이다.
동명의 영화 때문인지 화차라고 하면 무조건 신기전을 떠올리지만 본래 신기전은 화약으로 날아가는 로켓만을 의미한다. 화차라는 단어는 화약을 설치한 전차라는 개념으로 송나라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최초로 설계도가 남아있는 문종화차의 운용이념이 매우 시대를 앞서 나갔으며, 이것이 한국식 화차의 대표격으로서 유명해졌다.

Mythbusters에서 신기전과 함께 문종화차를 재현했던 영상. 자막 영상
영상은 소신기전과 화차의 조합이며 안전을 위해 폭약을 쓰지 않았다. 위의 영상은 바람 때문에 보병을 한명도 못 맞췄지만(실제로 단 50기의 적을 상대로 화차를 운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탄착군이 생각보다 조밀한 것을 볼 수 있다. 만약 제대로 맞춘 상황에서 폭약을 썼으면 표적의 파편만 간신히 남았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조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수백기'''를 동시에 퍼붓거나 궁수, 조총수들을 보조하는 용도로서 사용했다.
잘 알려진 신기전 화차는 조선중기부터 이미 쇠퇴했다. 후기형 화차들은 이동식 오르간 건을 수십여기 탑재하여 현대의 장갑차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조총이 등장하면서 쓸모가 없어진 승자총통류를 40여발 장착한 변이중화차다. 즉, 조총이 등장한 이후로는 일종의 전차로서 선회했다가 후대로 가면 훨씬 발달한 유럽식 화포(홍이포)가 일반화되면서 사라진 무기라고 볼 수 있다.
운반시에는 말도 끌 수 있도록 손잡이가 길고 넓었다. 하지만 전투 중에는 무조건 인력으로 밀도록 되어 있었다. 지향성 화약무기를 동물에게 싣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2. 개발 역사



2.1. 다발화전


화약무기의 원조라고 볼 수 있었던 중국에서도 다발화전과 함께 화차를 사용했다. 하지만 한국과는 달리 우선 전투 마차를 이용하여 방벽을 쌓아둔 다음 그 위에 다발화전을 쌓는 방식으로 화차를 만들어서 사용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처음부터 수레와 화약무기를 일체화시켜 보다 규격화 되고 근대적인 사격제어를 위한 도구로서 발달했다.
양쪽 국가에서 화차의 양식이 달랐던 이유는 '''지형'''에 따른 차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광활한 중국 대륙에서는 기병들의 기동력이 중시되었는데, 화차는 기동성이 떨어지고 빠른 대응을 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운반성이 높은 다발화전과 수레를 따로 만들어서, 대규모 야전에서 쌓아두고 운용하는 조립식 바리케이드로서 이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에서는 각종 지형지물(산, 바다, 강)과 산성에 의존하여 수비를 했다.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기마민족을 막기 위해서 화약무기의 운반성을 중시했던 중국과는 안보 상황이 달랐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야전에서 돌격에 쓰이는 성능보다는 화약무기와 수레를 짜맞추어서 포탑(Turret)으로서의 기능이 발전한 화차를 개발했다. 이것은 화차의 장점들을 한반도 지형에 맞추어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첫째, 장전 이후에는 사용자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는다.

둘째, 정면을 향하여 다발화전보다 훌륭한 단위당 화력을 퍼부을 수 있었다.

셋째, 다발화전보다 세밀한 탄착군을 형성할 수 있어서 집단적인 곡사에 유리하다.[1]

넷째, 화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화포, 방패, 수레를 장착하며 각 지형에 최적화할 수 있다.

위의 특징들은 한국 지형에서 대단한 강점이었고 한국식 화차의 특성으로서 세밀하게 발달하기 시작했다.
즉, 중국에서는 넓은 안보 환경에서 쓰기에 편한 돌격수레와 다발화전을 따로 만들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처음부터 수레와 화약무기를 같이 제조하여, 보다 섬세한 각도제어를 가능케하는 지지대이거나(화차) 수비형 포탑 기능에 집착하는 벙커처럼(전차) '''포탑'''으로서의 기능에 많은 투자를 하는 독특한 발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한국의 화차들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했다.

2.2. 원조 논쟁


[image]
중국에서는 기록에 남아있는 가화전차를 근거로, 한국이 이를 베껴다 만든 것이 화차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화전차는 다발화전과 백자총통을 수레에 싣고 정면에서 싸우는 야전용 전차였다. 따라서 '''발사를 제어하는 시스템'''으로서 발전한 조선의 화거류 병기와는 기초개념이 살짝 다르다.[2]
사료에서 가화전차의 등장은 1403년 발간된 《화룡경》이라는 책에 나오지만, 문제는 이게 위서라는 것이다. 현존하는 필사본은 가정제 말년에 만들어진 것이고 본문 내용에서도 훨씬 후대에 만들어졌다고 판단되는 내용들이 나와 신용할 수 없다. 관련 링크, 관련 네이버캐스트 더욱이 화룡경에는 가화전차의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 가화전차의 모습이 나오는 중국 문헌은 <무비지>인데, 무비지는 '''1621년 만들어진 책'''이고, 여기 나오는 가화전차와 화룡경에 나오는 가화전차가 같다는 증거는 없다. 한국의 화차와의 연관성은 더욱 더 입증할 수가 없다.[3]
[image]
[image]
무비지에 실린 신화전병(위)와 화궤공적차(아래). 둘다 화차보다 문헌에 등장시기가 늦으며, 인지도도 낮아 한때 구글에서조차 자료를 찾기 힘들었지만 한국 영화 신기전으로 한국, 중국 간 논란이 붙으면서부터는 검색이 좀 낫다.
더욱이 단순히 문헌에 나오는 '''화기'''로서의 추측이 가능한 언급만을 따져도 '''이것도 한국의 화차가 앞선다.''' 왜냐하면 고려 말 권근이 쓴 최무선을 찬양하는 시에 화차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에서 찬양하는 진포대첩은 1380년 벌어진 전투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님의 계략이 때맞추어 태어나니

삼십 년 왜란이 하루 만에 평정되어도다

바람 실은 전선은 새들도 못 따라가고

화차(火車)는 우레소리를 울리며 진을 독촉하네.

주유가 갈대숲에 불 놓은 것이야 우스갯거리일 뿐이고

한신이 배다리 만들어 건넜다는 이야기야 자랑거리나 될까보냐

이제 공의 업적은 만세에 전해지고

능연각에 초상화 걸려 공경 가운데 으뜸일세

공의 화약무기 제조는 하늘의 도움이니

한 번 바다 싸움에 흉포한 무리 쓸어버리네

하늘에 뻗치던 도적의 기세 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세상을 덮은 공과 이름은 해와 더불어 영원하리

긴 맹세가 어찌 긴 세월 후에까지 기다릴까

응당 군사의 대권을 맡게 되어도다

종묘사직은 경사롭고 나라는 안정을 찾았으니

억만 백성의 목숨이 다시 소생하는도다.[4]

다만 위의 사료에서도 한국식 화차가 발사화기로서 확실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후 최무선의 아들이 개발한 조선 태종 시대의 화차는 문종화차와 흡사한 사격과 기동성을 중시한 성향이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설계도와 기록이 분명하게 전해 내려오는 이동식 + 다연장 + 곡사포 형식의 로켓은 문종화차가 최초'''다.
그 밖에 조선왕조실록에 명나라 영락제의 화차에 대한 기록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건 성종실록에만 한 번 나오며 그 이전이나 이후의 실록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문은 아래와 같다.

성종 54권, 6년(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4월 18일(병신) 1번째기사 신숙주가 양계의 여러 진의 방비책 등에 관해서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영사(領事) 홍윤성(洪允成)이 아뢰기를,“건주위(建州衛)의 적이 두 번씩 침입하였으나 이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또 침입해 올 형세이며, 따라서 금년의 방비를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진년5120) 에 신숙주(申叔舟)를 원수(元帥)로 삼아 야인(野人)을 토벌하였는데, 오랑캐들이 이에 보복하고자 근년에 노략질이 잦고, 기어이 이득을 얻으려고 날뛰고 있는 것입니다.”하였다. 영사(領事) 신숙주(申叔舟)가 아뢰기를,“세종께서 명나라 영락 황제(永樂皇帝)가 야인(野人)을 정벌하다가 포위되었으나 화차(火車)로써 포위를 뚫고 탈출할 수 있었다는 것을 듣고서 마침내 화차를 만들어 여러 진(鎭)에 나누어 보내었는데, 지금은 폐기되고 정비되지 않아 유사시(有事時)에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군기시(軍器寺)로 하여금 제조하게 하여 양계(兩界)의 여러 진(鎭)에 나누어 보내고 항상 훈련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역대 병가(兵家)들의 공격용 무기와 수비용 무기에 각각 그 방략이 있습니다. 예문관(藝文館)의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사전(史傳)을 널리 고증하여 아뢰게 하고, 무사(武士)로 하여금 각 진(陣)의 공격하고 수비하고 전투하고 행군하는 방책을 채택하여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작 세종실록에는 영락제의 화차에 관한 기록이 없고, 위의 기사는 중국의 화차를 들여왔다는 기록이 아니라 화차의 유용함이 전해졌다는 기록이다. 즉, 중국제의 영향이라기보다는 화차라는 대륙의 개념에 관한 논설에 가깝다.
가장 먼저 등장한 화차(火車)의 기록은 중국에 있다. 송나라 때 기록에도 화차는 나온다. 근데 이런 물건이다.
[image]
보다시피 우리나라처럼 포탑의 기능을 강조한 전차가 아니라, 기름 가마와 간이 부뚜막을 수레에 장착해 적 성문을 파괴하는 데 쓰는 무기다. 이 화차는 수호지의 108 호걸 중에서 한명이자 지살성의 신화장군 위정국이 자주 쓰는 무기다.

2.3. 중국식과 조선식의 차이점


조선의 화차는 대규모 발사제어에 중점을 둔 병기이다. 대체로 조선식 화차의 특징이나 상징성이라면 대규모 발사제어 장치를 다연장 로켓에 처음으로 도입한 물건이라는 것이다.
[image]
조선 중기 이후에는 한국에서도 중국식 전차 형태의 화차를 자주 만들었는데, 조선중기 이후 전차운용을 보여주는 마병배차도를 보면, 일종의 이동식 벙커 역할을 하여 불랑기포조총 등을 구멍으로 쏠 수 있다. 하지만 화포를 대동할 수 있는 이동식 '파이어베이스'에 가까운 물건으로서, 발사제어를 위한 병기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 전차의 모양
화차는 각국에서 전투용 수레의 운용법 만큼 유효한 차이가 있다. 중국식 화차는 화약 시대 이전부터 사용한 전투수레에 가깝다. 또, 야전에서 사용하는 돌격형 전차로서의 특징이 강하다. 전투 마차에 다발화전을 비롯한 화약무기들을 싣어서, 되도록이면 야전에서 사용하는 전투마차와 큰 차이가 없이 사용했던 것이 중국의 화차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서 한국의 화차는 처음부터 화약무기와 수레를 일체화시키고 조금 더 근대적인 운용이념을 가진 병기로서 발달했다. 덕분에 문종화차처럼 각도제어와 화력을 중시하는 '''순수한 발사제어 도구''', 혹은 사방을 막는 튼튼한 벽을 세워서 군인들이 들락거리며 거점에서 성채의 역할을 수행하는 '''이동식 벙커''' 로서 조금 더 좁은 지형에 알맞게 형태가 세분화 되는 화차들이 발달했던 것이다.

중국식 '화차'의 특징

1. 중국에서 기마민족들을 상대할 때 대규모로 운용했던 대륙식 채리엇에 화약무기를 싣은 것이 원조다.(사실상 전투마차와 같다.)

2. 화약무기와 수레를 분리하여 각각의 생산, 운반성, 대응력을 중시했다.

3. 단순히 전투마차에 화약류를 싣는 것을 중시했기에, 각도제어가 매우 어렵거나 불편하다.

4. 화약과 수레를 결합한 화차들은 주로 성벽, 성문 공격용으로서 돌격적인 기능을 중시했다.

5. 대규모로 수송, 조립하여 '''넓은 평지'''에서 쌓아두고 적을 몰아내는 바리케이드 로서의 기능이 발달했다.

조선식 '화차'/'화거'의 특징

1. 한반도 지형에서 적들의 진입을 틀어막는 수레가 원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검차 등)

2. 화기와 수레의 규격을 기관총/미사일 발사용으로 다듬는 과정에서 보다 섬세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3. 발사기형 화차들은 각도제어 및 대규모 곡사에 유리했다.[5]

4. 발사기형 화차들은 중국식 화차와는 달리 1~2명이면 조종할 수 있는 크기였다.[6]

5. 대형 화차들은 육중한 장갑을 두르고 '''조선 지형'''에서 병사들이 들락거리며 수비에 유리한 이동식 벙커로서 발전했다.

화차는 화약무기를 싣은 수레를 뜻하는 단어로서, 이러한 개념 자체가 중국에서 먼저 탄생했다는 주장은 매우 상식적인 판단에 가깝다. 하지만 조선시기의 화차는 독자적인 규격을 지녔으며, 중국식 돌격 전차보다는 2가지 계통으로 발달했다. 즉, 문종화차와 그 설계를 이어받은 한국식 화차들이 지니는 특성까지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말은 비약이 강하다.
한국과 중국의 화차는 각국의 지형에서 차이가 생겨난 아이디어와 유래는 같지만 각국의 구체적인 사용법에 따라서는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설계되었던 전차+화포라고 해석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3. 종류


크게 나누면 신기전을 사용하는 것과 총통을 부착해 사용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중세 시대의 로켓이라는 개성 때문인지 대중매체에는 신기전 화차가 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화약 사용량이 극심하여 총통을 사용하는 총통기가 더 많이 쓰였다.[7]

3.1. 최무선 화차


권근의 시에 등장하는 화차이다. 최무선이 화통도감 설립 후 만들었다. 화기 목록에는 없고 권근의 시에 그 존재만 등장하기 때문에 상세한 정보는 아직 불명이다. 하지만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에는 중국식 다발화전도 널리 사용되었던 기록이 있으므로 한국식 화차의 특징이 나타난 증거사료는 이후부터 라고 보는 추측이 일반적이다.

3.2. 태종화차


>화차(火車)의 제도는 철령전(鐵翎箭) 수십 개를 구리통(銅桶)에 넣어서 작은 수레(小車)에 싣고 화약(火藥)으로 발사(發射)하면 맹렬(猛烈)하여 적(敵)을 제어할 수 있었다. - 태종 9년 태종실록 18권
문헌기록에 나오는 화차 중 두 번째로 오래된 화차이다.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이 개발하였다. 철로 만든 날개를 단 화살 수십여발을 화약을 통해 동시에 발사하였다고 하며 그 외 형태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고 다만 태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만 나온다. 문종화차와 비슷하다고 여겨지기에 한국식 화차의 특성을 나타내는 사료 중에서는 이쪽을 더 중요하게 해석하기도 한다.

3.3. 문종화차


군기감(軍器監)에 명하여 화포(火砲)를 쏘게 하고 추인(芻人)[8]

을 만들어 갑옷을 입히고 방패를 가지게 하여 그것을 7, 80보(步) 밖에 세워 두고, 화차(火車)의 화살을 쏘아서 추인과 방패를 모두 관통하였다. 임금이 내금위(內禁衛)의 활을 잘 쏘는 자 5인에게도 또한 편전(片箭)을 가지고 이를 쏘게 하여 그 우열(優劣)을 비교하니, 화차(火車) 때와 같지 아니하였다. -문종실록 5권, 문종 1년 1월 16일 병진 1번째기사

[image]
'''국조오례의서례의 화차, 위가 수레이고 왼쪽 아래가 신기전화차용 신기전기, 오른쪽 아래가 총통화차용 총통기의 모습'''이다. 기록상 전해지는 화차 중 세번째의 화차로 1474년(성종 5년)에 만들어진 국조오례의서례 병기도설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일반적으로 한국식 화차의 대표격이다. 외국에서도 화차를 알면 보통 이걸 안다고 생각해도 된다. '''문종이 직접 설계해서''' 어명을 내려 동생인 임영대군이 제작하였다고 한다.
사전총통(한번에 4발의 화살(四箭)을 쏘는 총통) 50개틀, 중신기전 100개틀과 수레로 구성되어 있고, 탈착식으로 용도를 바꿀 수 있다.[9] 한 마디로 시대를 초월한 모듈화에도 성공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전 세계에서 제작 설계도가 남아있는 다연장 로켓병기[10]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이 화차의 운용법은 문종이 직접 고안'''했다. 평지에서는 2명, 오르막 길에서는 4명이 운영하고, 장전에서 발사 과정 그리고 불발탄 처리 방법까지 완벽하게 구현했다. 무섭게도 개발이 끝나서 '''양산 및 전국 실전배치 하는데까지 1년도 안 걸렸다.'''
문종화차는 후기 성종임금 시기에 "나라에서 화차를 만들 때는 다 이유가 있으니 잘 쓰도록 하라"는 말이 나올만큼 큰 활약을 하는데, 기사를 찾아서 읽어보면, 적의 위치를 확인하고 사격을 해서 타격을 줄 경우 당시로써는 다연장 로켓급이었고, 설령 맞추지 못한다고 해도 그 소리와 화력 때문에 맞은 적들이 혼비백산해 도망가기 급급했다. 특히 대신기전의 경우에는 직접 타격하는 것이 주목적은 아니었으나, 직접 타격 용도로도 사용한 기록이 꽤 보인다!
[image]
'''영집궁시박물관에서 복원한 문종 신기전 화차'''
본래 문헌과 설계도만 남아있던 것을 채연석 박사가 사료를 연구하여 다시 제작한 것이 현재 전해지는 것이다.[11] 특이점으론 직사모드와 장거리 사격을 위한 고각모드 두가지로 발사각을 고정해서 탄도학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 운용편의를 봐준 점이다.(고각으로 설치하면 최적의 사거리가 나온다는 40~45도를 정확하게 맞추도록 설계되어 있다.) 한때 아래의 융원필비 화차나 위 영화 신기전의 화차처럼 좌우에 방패판을 달아 방호력을 높이고 신기전 발사구멍에 철을 씌워 내화성을 높이자는 건의가 올라와 실행되었으나, 조작의 불편함을 이유로 방패는 제거되었다.

3.4. 주자총통부착화차


[image]
'''행주대첩기념관에 전시된 문종 총통 화차의 복원 모형'''
문종화차의 총통기에 4전총통 50개틀 대신 주자총통(宙字銃筒) 50개틀을 설치한 것이다. 성종 21년인 1490년에 개발되었으며 주자총통은 세종대왕 때 개발된 삼총통(三銃筒)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아래에 나오는 문종화차들은 성종대에 새로 개발된 주자총통부착화차를 의미한다.
성종 9년 8월 10일(기해) 3번째기사에서는 홍귀달에게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을 물어보는데서 화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시애의 반군이 화차를 보자마자 도망쳤다고 하고 있으며, 성종 23년 5월 25일(갑오) 2번째기사에서도 이극균이 '''“본도(本道)에서는 철(鐵)이 생산되지 않으므로, 화차(火車)가 겨우 4백여 대뿐입니다. 만약 제진(諸鎭)에다가 각각 1백 대씩 설치한다면 어찌 유익(有益)함이 없겠습니까? 화차가 한 번 출동하면 적(賊)이 모두 피해서 도망하니, 그것을 믿고서 적을 방어하고자 할 뿐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방법으로 견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고 주장해 화차의 위력을 실감할 수가 있다.
문종화차의 개발 덕분에 4군6진에서 힘들게 보초생활하던 병사들의 수도 줄일 수 있었고 임진왜란에서도 중요하게 쓰였다고 한다. 조선 초기엔 중신기전을 주로 쓰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엔 승자총통, 조총을 주로 사용하였다.

3.5. 류성룡화차


승자총통을 장비한 화차이다. 기존 문종화차와 달리 각도 조절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민간에서 쓰이던 수레를 그대로 이용할 수 있어 대량생산에 용이하며, 승자총통을 10~15정 정도만 달아서 무게를 가볍게 하여 운영의 편의성을 높였다고 한다.

3.6. 변이중화차


변이중의 문집인 망암집에 실린 도면과 관련 설명내용 링크.
[image]
[image]
[image]
위 망암집의 그림과 기록을 토대로 복원한 모습. 관련뉴스 관련사이트
1592년 임진왜란 중에 변이중(邊以中)이 문종화차를 개량한 물건으로 승자총통 40문이 장착되어있고 도화선에 연결되어 일제히 발사된다고 한다.
사단법인 봉암서원에서 복원을 추진했는데 그 형태는 일반적인 수레 사방에 외부를 살필 수 있는 관측구멍이 하나씩 뚫린 방호판을 장착하고 그 중 양 옆과 뒤쪽 총 3면에 총통을 탑재한 모습이다. 뒤쪽에는 출입문이 있으며 안에서 닫을 수 있는 형태이다. 발사제어용 수레라기보다는 이동식 벙커에 가깝다.
의외로 베일에 싸인 부분이 많은 화차다. 강항의 묘지명에 기록된 내용에 변이중 화차는 움직임이 나는듯 빨라,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바퀴가 반절 이상 감춰진 저 장갑차 형태로는 그런 기동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 화차는 임진왜란이 발생한 해에 변이중이 재산을 털어서 300량이나 제작한 화차다. 저런 장갑차 형식이라면 제작에 소모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으므로 개인이 300량을 제작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승자총통을 40문이나 장착하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방호판을 4면으로 장착했던 전차가 날듯이 움직였다는 언급에도 미심쩍은 면이 많다. 그래서 해당 언급은 변이중 및 관련 인물들을 추켜세우기 위한 과장된 묘사라는 추측도 있다. 게다가 기록에는 일제히 발사된다고 나와있는데 저렇게 양옆과 앞면 동시에 쏘면 자칫 아군이 피해를 볼 수가 있다.

2010년 김평원 교수가 마포고등학교 재직 당시 마포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복원한 변이중 화차의 또 다른 모습. 영상에 나오듯이 해당 복원품은 총통기를 탈착식으로 해석해서 이동중에는 총통기를 분리해서 수레에 싣고 가다가 교전시 총통기를 부착해서 사용하게 되어있다. 이 밖에도 여러 모형이 제시되기도 했다. 이러한 형태는 날듯이 움직였다는 기록과 어느 정도 일치되지만 망암집에는 따로 탈착식이라 명시되지 않다는 문제가 잇다.

3.7. 융원필비 화차


[image]
<융원필비>에 실린 모습, 저 구멍이 전부 조총승자총통이라고 생각해보면 무섭다.
숙종1년 윤휴의 제안에 따라 훈련도감에서 제작했다. 융원필비에도 따로 기재되어 있으나 둘다 설계가 똑같으므로 이름은 기록된 문서의 이름을 따른다. 기본적으로 5개의 조총이 여러 층으로 장비되어 있다. 정확히는 조총이라고는 해도 묶음단위의 조총인 오연자포, 십연자포가 주로 사용되었다. 방어를 위하여 좌우에는 소가죽을 씌운 나무 방패를, 위에는 기름먹인 소가죽을 씌웠다.

3.8. 목화수거


목화수거 완성도이다. 중국식답게 매우 이채롭다.
날개를 단 호랑이 모양의 목각을 수레위에 얹은 화차. 아랫 부분엔 조총 5개씩 3개의 배열로 총 15정의 조총을 탑재하고 있다. 호랑이 목각의 입에서는 여러가지 재료를 섞은 화염을 방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른 한국식 화차들과는 굉장히 차이점이 큰 편인데, 무비지(武備志)의 화룡권지비차(火龍捲地飛車)를 모방했기 때문이다. 주요한 차이점은 하부 차체에 날붙이 대신 조총을 달았다는 점이다. 용도는 적이 일정 거리마다 접근시 알리는 역할이다.
충청남도 서산시해미읍성에 목화수거 복원품이 있다. 꽤 유명하지만 아무런 무장이 없이 수레에 호랑이를 달랑 태운 수준이라 전시용 목조상에 가깝다.

3.9. 신경준 화차


[image]
문헌의 신경준 화차 설계도
실학자이자 제주목사를 지낸 신경준이 여암전서의 거제책에 설계, 기록한 화차이다. 무서운 점은 이 물건의 운용 개념이 '''현대의 전차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수레의 사방과 뚜껑을 철판과 나무판으로 보호하고 접히는 칼을 달아 근접전에 대비하였으며 위에는 복토라 불리는 포탑을 설치하여 불랑기포나 황자총통을 장비했고 게다가 안에는 포탄과 화약을 실어놔서 재장전도 가능했다.
사람이나 말이 끌 수 있도록 튀어나온 손잡이 부분이 길어서 언뜻 보면 대포를 싣어놓은 수레처럼 보인다. 하지만 본체는 4면이 철판으로 보강되어 있어서 내부에 들어간 사람을 보호하는 상자 구조이다. 손잡이가 지나치게 길어진 이유는 그만큼 무겁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3.10. 귀거(구거)


龜車. 효종 3년 박산남의 제안에 따라 전남병사(全南兵使)에서 제작한 화차. 초대형 화차로 70명이 움직여야 했다. 여러 문의 화포와 조총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나 느린데다 지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다루기 힘들고 제작비가 많이 들어 시제품을 만들어 실험했다는 기록이 전부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출처 묘하게 굉장한 스케일 때문에 종종 인지도가 있다.

3.11. 조총부착화차


19세기 초에 사용된 화차, 승자총통 대신에 조총 50개를 설치한 것이다. 사실상 오르간 건에 가깝다.

4. 창작물에서의 등장


'''서양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한국 무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차 발사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불꽃과 연기를 뿜으며 대량의 화살을 뿌려대는게 엄청난 임팩트를 자랑하는데, 이게 인상이 깊었던지 그 위력 또한 강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 거의 '''중세 한국의 다연장로켓''' 취급.
서양 게임에서도 한국 문명에서 거북선과 함께 몇 안되는 특수 유닛으로 넣어주는 때가 많다. 사실 비슷한 시기에 서양에서도 화약을 사용하는 무기인 대포가 널리 쓰였지만, 수백발의 화살이 현대의 로켓과도 같이 무수히 날라가 포격을 퍼붇는 모습이 묘하게 서양인들에게는 '''중세 동양 판타지 로망'''을 자극하는 병기였던 모양. 실용성을 제쳐두고 모습만 놓고 보면 현대에 봐도 오버테크놀러지 그 자체이다. 다만 인마살상용이었기 때문에 건물이나 시설보다는 대인전이나 부대 공격에 특화시켜 자주 나온다.

4.1. 목록


대대로 조선군의 유닛으로 등장한다. 충무공전1/2와 임진록1/영웅전쟁에서는 4륜차에 포탑을 올린 탱크같은 모양의 중거리 다연장 지원화기의 컨셉으로 등장하며[12], 충무공전2에서는 어째서인지 신기전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하며 공격 방식도 원래 화차와 조금 다르다. 화살을 한 발씩 매우 빠르게 연사하는 형식이다.
임진록2와 확장팩인 조선의 반격에서는 스탈린의 오르간을 연상케하는 장거리 다연장로켓포의 컨셉으로 등장한다. 특히 조선의 반격에서는 화차는 사거리가 더 늘어나 거의 한 화면 수준이다. 다만 대공 공격은 불가능하며, 포탄(?)이 날아가는 속도는 빠르지 않다. 최신패치를 하면 원거리 공격에 공격 실패 확률이 생기는데 화차는 어차피 6발씩 다연발로 날리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한발한발 공격력이 약하고 근접 공격을 못하는게 흠이지만 그건 다른 원거리 유닛들도 다 그렇고 게다가 한발 한발에 데미지와 스플래시가 따로 적용되므로 화차가 모이는 순간 상대 입장에서는 버틸 수가 없다! 이런 이유때문에 화차는 임진록2 조선의 반격에서 조선 최종병기이며 최후의 보루이다. 경기가 중후반으로 가면 반드시 행해지는 한방병력 편성에서 화차는 핵심이 된다. 스타크래프트 테란이 공성 전차 비율을 유지해야하는 것처럼 조선 한방 병력에는 반드시 화차가 일정수 유지되어야한다. 그 비율이 유지되지 못하면 화력에서 밀려서 이길 수가 없으므로 전선에서 펼쳐지는 계속된 전투에서 잃는 화차를 꾸준하게 보충해야한다. 물론 그 화차를 호위할 병력도 적절하게 맞춰주어야 한다.
  • 문명 시리즈
문명 3, 문명 4, 문명 5, 문명 6까지 한국의 고유 유닛으로 개근.
문명 3에서는 대포를 대체하는 공격력 8의 포병 유닛으로 등장한다. 특이하게 HP가 1 남은 유닛에 명중시키면 유닛을 죽일 수 있는 특수 능력이 붙어있고, 그 덕분에 게임 내에서 유일하게 유닛을 죽일 수 있는 포병이 되었다. 포병 자체가 후반에 가기 전에는 공격력이 낮아서 그리 쓸모가 많지는 않지만 일단 뽑으면 공성전 때 적의 죽어가는 유닛을 정리함으로써 아군의 피해를 크게 줄여준다.
[image]
문명 4의 화차. 문명 4에서는 초기 공성유닛인 캐터펄트를 대체하는 고유유닛으로 등장한다. 스텟 변화없이 백병전 유닛 상대로 50% 추가데미지를 가하는 고유능력이 더해졌다. 중세의 전장을 주도하는 것이 백병전 유닛이라는 점에서 매우 강력한 고유능력이다. 하지만 문명4의 공성유닛은 소모품 취급이라 주력병력으로 삼을 수 없고, 도시주둔 궁병상대로는 일반 캐터펄트와 다를바 없기 때문에 공격용으로 써먹기 애매하다. 농성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지만 문명 4에서 고유유닛의 존재가치는 최적화된 공격 타이밍을 뽑아내는 것이기에 그 위상이 미묘하다. 유닛의 특성이 게임의 시스템이랑 어울리지 않아 빛이 바래는 케이스이다.

[image]
[image]
문명 5에서의 화차, 영집궁시박물관에서 복원한 화차를 모델로 한 듯하다.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신기전처럼 트레뷰셋을 대체하는 유닛인데 위력은 트레뷰셋을 능가하는 초월적 위력인 26, 다음다음 테크 유닛인 야포와 맞먹는 괴물같은 위력이지만 대신 도시 공격에서는 패널티가 들어간다.
의외로 잉여스러운데 성능이 안 좋아서 잉여가 아니라 '''한국 종특이 과학 보너스라 활약 해보기도 전에 고테크 유닛이 나와서 묻힌다.''' 그래도 테크가 컴퓨터에 비해 점점 느려지는 고난이도로 갈수록 더욱 활약하는 오버스펙 유닛이다. 화차의 강력함은 문명 5 한국 DLC에서 추가된 시나리오에서 느낄 수 있다. 제 아무리 사무라이들이 쳐들어 온다 할지라도 언덕과 성에서 화차로 몇 번 공격해주면 간단하게 방어가 가능하다.
문명 6에서도 어김없이 한국의 고유 유닛으로 개근했다. 문명 5와는 달리 문명 6에서는 전장포와 기관총사이의 테크 거리가 늘어난 데다가 화차를 르네상스 시대부터 뽑을 수 있게 되었기에 짧아도 산업시대까지는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전투력도 60으로 동시대 유닛들 중 꽤나 상위권에 속하는 편이다. 다만 이동력 문제때문에 장군등의 위인 수급이 제때 되지 않는다면 전장에서 불리할 수도 있다. 전투력이 워낙 높아 고대성벽까지는 화차가 공성 능력을 수행할 수 있다. 다만 패치 이후 AI들의 성벽 수요가 올라가며 이전같은 공성역할은 하기 힘들것으로 보인다.
번역 명은 신기전이지만 구현된 유닛은 수질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실 영어명도 Flaming Arrow지 Hwacha가 아니다. 번역자들이 수질노와 팔우노를 몰랐던 것 같은데, 확실히 신기전을 쏘는 설정으로 보일만큼 불붙인 피사체가 연기를 뿜으며 날아가서 인게임에서의 느낌은 불타는 대장군전, 혹은 대신기전과 같아 강렬하다. 기본적으로 포병이 개별 유닛에 강하지 않고, 밀집된 유닛과 건물에 강한 게임이기에 명중률은 낮지만 맞추면 허우적대며 불에 타죽는 불쌍한 적군을 볼 수 있다. 팔우노나 수질노가 실재로 그렇듯, 구현된 모양새가 로마군의 발리스타와도 유사하여 중세시대에 몰고다니면 로마의 후계자 조선 밈의 뽕을 맛볼 수 있다. 대신기전을 궁력으로 날린 것으로 본다면 중국의 화창병과 함께 다른 문명보다 한 시대 빠르게 등장하는 화약무기다. 마침 불타 사망하는 적군의 모션도 화창병과 같다.
[image]
여기서는 신기전기 화차만 등장하며 중국의 로켓 발사기를 보고 몽골이 만들었다고 잘못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외형 고증은 좋다. 비슷한 형태와 능력치, 용도를 가진 리볼트/대형 리볼트에 비해 사거리와 화력 면에서 월등하고 대 건물 공격력도 의외로 좋지만 리볼트 계열과 달리 탄환에 몸 관통능력이 없다. 그리고 리볼트 계열과 마찬가지로 한번에 다량의 탄약을 퍼붓기에 탄환 소모가 극심하다.
사용 가능한 국가는 몽골과 티무르(커스텀 병과로만 한정 등장)이며 화약시대에 돌입한 이후에 몽골침략 이벤트가 터진 이후에는 러시아, 스텝 지역에서 용병으로 고용 가능하다. 용병 화차와 일반 화차의 기본 능력치 차이는 없지만 일반 화차의 제작비/용병 화차의 고용비가 1100, 유지비는 250인데 비해 캠페인에서의 용병 화차의 경우 고용비가 1650이다.
[image]
무시무시하게 마개조된 화차가 '만티코어 헤비 화차'라는 이름으로 등장. 유효거리는 좀 짧은대신에 다수의 폭발 로켓을 미칠듯이 꽂아 넣는데 하도 OP라 너프 좀 시키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 중.
중세시대~제국시대의 대한민국[13] 문명에서 사용가능하다. 신기전기 형태로 등장하며 여러발의 화살을 한꺼번에 발사해 일대를 초토화 할 수 있으며, 탄도학 기술 적용시 적중율이 높아지는 반면 높은 언덕이나 성벽 뒤에서 발사할 경우 걸리는지 데미지가 들어가지 않는다.
[image]
[image]
[image]
[image]
  • Totally Accurate Battle Simulator에서도 등장. 알파버전 시절엔 한번 사용하면 다시 사용할수 없는데다 공격 방향과 각도도 제한되어 상당히 좋지 않았었으며, 이후 얼리 액세스 버전에서 왕조 팩션에 다시 추가되었다. 전과 달리 재장전이 가능하며, 등장하자마자 기존의 단일 대상 데미지 최강 유닛의 자리를 빼앗았다.
  • 도미네이션즈에서 전술성 병력으로 등장했고 이후 MRL이라는 공장에서 훈련 가능한 유닛으로 등장했다.
  • 토탈 워: 쇼군2 임진왜란 모드 Morning Sun 시리즈에서도 등장한다. 그런데 사거리가 250으로 공성전에 써먹기도 애매하고 지상전에서 써먹기도 약간 애매한 계륵같은 존재[14]
  • 원나라의 일본원정 당시를 배경으로 다룬 게임인 고스트 오브 쓰시마에서도 등장한다. 문종 화차의 디자인을 가지고 있으며 영문판 표기도 Hwacha이다. 몽골군이 일본 침략을 위해 동원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를 주인공 측이 노획하여 사용한다.

당연히 고증상으로는 허무맹랑한 묘사에 가까운데, 본작은 원나라의 일본원정 당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서 시대가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당대의 몽골군은 중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입수한 화약 병기를 상당히 적극적으로 사용한 군대이기는 했지만 앞서 문단에서 서술했듯 중국에서 화차 형태의 무기를 운용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중국이 아닌 고려에서 노획했다고 보기도 애매한 것이 기록 상 등장하는 최초의 화차는 고려 말 최무선에 의해 개발된 무기로 알려져 있는데, 최무선은 14세기의 인물로 당대보다 훨씬 후대의 인물인데다 이 최무선 화차 역시 기록으로만 존재할 뿐 실물이 남아있지 않다. 도안을 비롯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매체에서 유명한 화차 수레는 문종화차로 조선 시절의 무기이다. 본작의 화차 역시 이 문종 화차의 디자인을 따왔는데, 문종 재위기는 15세기 시절로 작중의 시대적 배경인 13세기에 몽골군이 운용한다는 설정으로 등장할 수 있는 병기가 아니다.
다만 게임 자체가 고증에 신경쓰지 않는 퓨전 사극 내지는 시대극에 가깝고 서양인들이 지닌 오리엔탈리즘이 잔뜩 들어 있는 작품이라서 화차 또한 등장한 듯. 위력 자체도 굉장히 강력하게 묘사되어 있어 대보병,대건물,대함용 등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며 목제 구조물을 폭파시키고 불태울 수 있는 초병기로 등장한다. 매체에서 등장하는 화차 중에서 순위권에 꼽힐 만큼 강력한 무기로 묘사된 셈이다.

5. 기타


유튜브 등지에서 중국이 원조라며 키배를 유발하는 중국인들이 종종 보인다. 그들의 말을 요약하자면 화차는 중국 무기의 복사품이라는 것이다. 물론 해외에서도 별로 인정받지는 못하며, 특히 동양무기에 대해 빠삭하게 잘 알고 있는 유럽과 미국의 양덕후들은 '''"낡아빠진 중화사상 좀 집어치워!"'''라면서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일부 중국인들이 중국 문헌의 출처가 위서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는 중국인들이 화차가 다연장/곡사형 발사제어장치로서 인정받는다는 점을 모르고 단순한 전차로서 생각하는 듯 하다.
위키백과에 보면 화차로 생성된 언어 페이지는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한국어, 러시아어, 스웨덴어, 덴마크어, 카탈루냐어, 인도네시아어, 중국어 등이다.영문 위키백과 링크.

6. 관련 문서




[1] 단체 사격시에 직사일 때는 개인의 재량으로 반동제어가 가능한 다발화전, 곡사일 때는 세밀한 지지대를 통한 각도 제어가 가능한 신기전 화차가 유리해진다.[2] 대체로 서구권에서 화차를 인정하는 것도 대규모 곡사/발사 제어를 근본에 두고 설계한 병기라는 특성 때문이다.[3] 무비지에는 특정 연도가 나오지 않는다. 링크 : 별무사(신재호)님 댓글 참조.[4] 출처: 청소년을 위한 한국과학사(정인홍 저)[5] 대체로, 설계 단계에서부터 곡사와 탄도학을 고려하는 기술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점 때문에, 중국식 화차들보다는 조금 더 근대적인 형태라는 평가를 받는다.[6] 덕분에 언덕이 많은 한국 지형에서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고, 사수들이 직접적인 조작을 통하여 화력을 제어하기에 편리했다.[7]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4298&cid=59087&categoryId=59087[8] 허수아비[9] 신기전을 쓸 경우에 신기전기(문종 신기전 화차), 총통을 쓸 경우에 총통기(문종 총통 화차)라고 한다고 한다.[10] 문종화차 중에서 문종 신기전 화차를 말한다. 문종 사전총통 화차는 다관식 총통 화차다.[11] 채연석 박사의 저서 <로켓이야기>에 보면 당시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설계도대로 부품을 만드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조립시 아무리 노력해도 계속 남아도는 부품이 생겨, 참다못해 문종이 안장된 현릉에 가서, 관리인 몰래 왕릉을 붙들고, '당신이 만들었다면 제발 좀 알려달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근데 그날 꿈에 완성된 화차가 나타났고, 다음 날 조립해보니 완성에 성공했다고 한다.[12] 실제로 임진록1 데모 설치시 동봉된 텍스트 파일에 보면 '조선탱크'라고 나온다.[13] 이름은 대한민국이나 당시 조선에 대응된다.[14] 사실 기본 게임에 있는 로켓 발사체가 사거리가 250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