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영

 



'''신태영 장관의 역임 지위'''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 제4대 국방부 장관
신태영[1]
申泰英 | Shin Tae-young
'''
[image]
제3대 육군참모총장 시절
'''출생'''
1891년 2월 1일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사망'''
1959년 4월 8일 (68세)
서울특별시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2장군묘역
'''본관'''
평산 신씨
'''재임기간'''
제4대 국방부 장관
1952년 3월 29일 ~ 1953년 6월 30일
[ 펼치기 · 접기 ]
'''배우자'''
천기주
'''자녀'''
아들 신응균, 신철균, 신박균
'''종교'''
불교
'''학력'''
육군유년학교 (졸업)
'''경력'''
제4대 국방부 장관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26기)[2]
'''복무'''
일본제국 육군
1912~1945
대한민국 육군
1948 ~ 1981년
'''최종계급'''
중장
'''최종보직'''
육군참모총장[3]
'''주요보직'''
육군행정참모부장
호국군참모부장
육군전북편성관구사령관

1. 개요
2. 상세
3. 기타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일본군 고급장교이자, 대한민국의 군인. 일본군에서의 최종 계급중좌였다. 대좌였던 이응준, 김석원보다는 한 계급 아래, 소좌였던 이종찬보다는 한 계급 위.

2. 상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기록에 따르면 '''국가공인 친일파의 불알'''. 191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나고야 제3사단 보병 제33연대에서 복역한 친일반민족행위자다. 1918년 중위로 진급하고, 시베리아 내전에 참전한 뒤 1924년을 전후해 조선 주둔군으로 옮겨간 뒤 1933년경까지 근무하며 소좌까지 진급한다. 이후에도 계속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상기되었든 중좌까지 된 것만 봐도 상당히 능력이 있었거나 어지간히 아첨 잘하는 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1942년 용산정차장 사령관을 역임하는데, 이 과정에서 경성일보에 올린 수기에 "조선인들은 한시바삐 제국의 신민이 되어 동아시아를 개척해야 한다. 내 첫 출진의 목표는 야스쿠니 신사다."라는 문구가 있다. 즉, '''야스쿠니 신사에 안장되는 것이 목표'''였을 정도로 골수 친일파였다는 이야기.관련 기사
8.15 광복 이후 그의 다른 동기생들은 대부분 조선경비대에 참여했으나, 그는 일제에 부역한 것에 대한 자숙인지 아니면 보신인지 참여하지 않았다가 여순사건이 터지면서 잽싸게 입대했다. 1949년 10월육군참모총장자리에까지 올랐으나, 대한민국 국방부높으신 분들과의 의견 충돌로 7개월만에 그만뒀다. 6.25 전쟁에서는 전라북도 방어를 맡았으나 국방장관 신성모와의 마찰로 얼마되지않아 해임되었다가 1952년에야 복직되었다.
예편 후에는 이기붕의 후임으로 제4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이 되어 휴전협정 직전까지 재임했다.
이후 1959년 사망한 뒤, 1974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돼, 현재 초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응준과 함께 장군2묘역에 잠들어 있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응준 역시 '''골수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일본군 복역 기록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아들과 함께 수록되어있다. 그러나 그런 이력에도 불구하고 국립서울현충원의 묘비에는 아래와 같이 왜곡 서술 되어 있다.

"개화의 선구자호국의 간성이었고, 강직과 청렴으로 시대의 등불이었으며, 덕과 지용으로 국군을 세워 기르셨으니 뜻의 굳으심이 눈바람에 푸르른 청송이시오. 덕의 굳으심이 뭇 봉우리 우뚝한 태산이시라. 높은 뜻 해와 함께 이 땅 위에 머무르시고 빛난 달과 함께 어둠 속의 등불 되시어 조국을 길이길이 비치오소서. 비치오소서."


3. 기타


그의 아들 신응균 역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으로 복역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며, 종전 당시 계급은 소좌였다. 광복 후 이등병으로 입대했다가, 6.25 전쟁 당시 포병사령관으로 특별임관되었다. 예편 후에 국방과학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맡기도 했다.
막내아들인 신박균은 한국전쟁에 하사로 복무하다 전사했다.관련 기사

[1] 일제강점기 당시 썼던 창씨명은 히라야마 호에이 (平山輔英(ひらやまほえ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