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임관

 


  • 한자: 特別任官
  • 영어: special commission
1. 개요
2. 종류
2.1. 건군기 임관
2.2. 탈북자 임관
3. 해외 사례


1. 개요


장교 임관제도 중 하나. 사실 제도라고 하기에는 좀 어폐가 있는데, 말 그대로 특수한 경우의 특별 임관을 가리킨다. 사관학교를 비롯한 임용기관을 거치지 않고 바로 장교로 임관시키는 케이스를 말하는데, 대한민국에서는 크게 2가지의 경우가 있었다.

2. 종류



2.1. 건군기 임관


첫 번째는 대한민국 국군 창군 당시 일본군, 만주국군, 한국 광복군의 고위 장교나 장성직에 있었던 사람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였다. 독립운동가로 조선의용군 사령관직을 맡기도 했으며 후에 중국군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하던 김홍일 장군의 경우가 그 예. 중국군 중장에서 한국군 준장으로 특별임관하였다. 이종찬의 경우도 일본군 소좌에서 한국군 대령으로 임관했는데 이 또한 특별임관에 해당한다. 물론 그 밖에도 특별임관의 예는 많다. 창군 당시에는 생긴지 얼마 안 되는 군을 지탱하기 위해 외국군 경력이 풍부한 고급 장교 자원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 비유하자면 경력직 특채라고 볼 수 있다.

2.2. 탈북자 임관


두 번째는 조선인민군 출신으로 귀순해온 경우가 있다. 이 경우는 북한군에서의 계급을 거의 그대로 인정(깎아봐야 한 계급)해 주는 경우[1]가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6.25 전쟁 당시 정봉욱 장군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6.25 당시 조선인민군 육군 포병 중좌 계급을 가지고 있었는데, 다부동 전투 중이었던 1950년 8월 21일 휘하 포병대대를 이끌고 귀순하였다. 그가 위장된 포의 위치 등이 모두 적혀있던 작전지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 전투를 유리하게 이끄는 데 그의 공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대한민국 육군 포병 중령 계급을 받아 그대로 한국 육군 장교가 되었으며, 이후 육군훈련소장, 초대 육군3사관학교장 등을 거쳐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고 2018년에 별세했다. 여담으로 박정희 시절 그가 제7보병사단장을 맡고 있을 당시 북한군이 야간에 대규모로[2] 침투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즉시 제7보병사단 휘하의 포병연대를 동원하여 포격으로 북한 육군을 격멸하고, 다음날 사단 GP로 직접 올라가 방송을 통해 해당 사단장 및 연대장 이름을 부르면서 만일 여기로 다시 침투하면 그때는 직접 북한군 진지에 포격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호명한 북한군 지휘관들은 과거 그가 귀순하기 전 북한군 후배 장교들이라고 한다. 이 사건 이후 문책을 요구하는 미국측에 의하여 보직 변경을 당했으며 2년 후 3사단에서도 북한측의 도발에 포병으로 대응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아예 백린 연막탄 한 발이 GP를 관통하면서 터져 GP 안의 북한 육군들을 구워 버렸다고 한다.
귀순 특별임관자로 대령 이상 진급자는 모두 10명이다. 첫 번째는 1950년 4월에 lL-10을 타고 넘어온 이건순 공군 중위로 1974년에 공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두 번째는 위에 언급한 정봉욱 중좌로 대한민국 육군 대령을 거쳐 장군으로 진급, 7사단장과 3사관학교장을 역임하고 육군 소장으로 전역했다[3]. 세 번째와 네 번째는 1955년에 야크-18 훈련기로 함께 탈북한 북한 공군 이운용 상위와 이인선 소위이다. 다섯 번째는 1960년에 미그-15를 타고 귀순했던 정낙현 대한민국 공군 대령[4], 여섯 번째는 1965년 보트를 타고 귀순하여 대한민국 해군 정훈감을 지낸 이필은 해군 대령[5], 일곱 번째는 1970년에 미그-15를 타고 넘어온 박순국 공군 대령[6], 여덟 번째가 1983년 2월 미그-19를 타고 귀순한 이웅평 대령이고, 아홉 번째가 1983년 5월 귀순한 신중철 육군 대령[7]이다. 하지만 신중철 대령은 전역 후 대한민국 사회에 적응을 어려워하다 중국에서 잠적하는 사고를 쳐서 흑역사 취급을 받고 있다. 참조. 그리고 마지막 대령 진급자가 1996년 미그-19로 귀순한 이철수 대령이다.
그러나 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 탈북자가 엄청나게 증가하면서부터는 북한 군관이 귀순해와도 특별임관으로 국군에 편입시키지 않고 군무원이나 민간인 신분으로 있게 하여 사실상 이 제도는 폐지되었다. 심지어 대좌 계급 탈북자도 민간인으로 있게 할 정도. 물론 여기에는 북한 특유의 답없는 계급체계와 계급 인플레이션 및 계급에 부합하지 않는 전문성의 결여도 한몫 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북한군 출신 군관이 특별임관을 하는 일이 나오려면 장군급 이상의 야전 고위간부는 돼야 할 것이며 이마저도 북에서 본래 수행하던 직책을 그대로 수행하기는 곤란할 것이다. 그런데 북한군의 계급 인플레이션이 심각하다는 것을 대한민국 국군도 익히 잘 알고 있기에 탈북 군관이 특별임관으로 대한민국 국군에 편입된다면 마치 독일이 통일될 당시의 동독군 마냥 계급환산표가 나올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게...
탈북군관 계급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서 재임관 계급[8]
소위
소위
중위
상위
중위
대위
소좌
대위
중좌
상좌
소령
대좌
소장 이상
퇴역 조치[9]

3. 해외 사례



3.1. 미군


연방공공보건서비스부대, NOAA 파견부대의 경우 미합중국 해군과 거의 같은 복제를 착용하는 민간 조직의 형태라서 자리에 따라 해군 장교 계급을 부여한다. 그래서 최고 리더십인 부대장 의무총감의 경우 해군 중장(Vice Admiral) 계급을 초임 계급으로 받는다.
19세기에 미군이 필요할 때마다 예비역을 소집하는 형태일 때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바로 영관급 장교 계급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영향력 뿐만 아니라 지휘능력까지 겸비할 경우 소장이나 중장 계급을 주기도 했다.

3.2. 자위대


창군 시절에 장교단을 형성하면서 일본 경찰 출신의 인물들을 고위 장교로 임관시켰고[10] 일본군 위관급 장교좌관급 장교 출신들 역시 자위대의 고위 장교로 발탁했다.[11]
1950년 10월 9일에 내무성 추천으로 내무성 출신의 요시다 주이치(吉田忠一), 하야시 게이조, 쓰쓰이 다케오, 오모리 간, 다케우치 쇼헤이(武内征平)가 경찰감(중장)으로 특별임관되었다. 1952년 10월 15일엔 보안대 개편이 되면서 새로이 내무성에서 추천된 나가노 도시오(中野敏夫), 가나야마 구니치(金山國治)와 육사 34기 출신의 기시모토 주이치(岸本重一)와 37기 출신 이모토 구마오(井本熊男)도 보안감(중장)으로 특별임관되었다.
일본군 출신들의 경우 위관급은 위관으로, 좌관급은 좌관으로 임용되었으나 위의 사례처럼 좌관급 가운데 일부는 장관급으로 임관하기도 했다. 곧 고속 진급하여 자위대/장관급을 차지했다.
군치의관의 경우엔 민간 근무경력에 따라 중령까지로 임관할 수도 있다.

[1]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 정통정부인 한국의 법과 북한 정권이 하는 행동을 보면 정식국가가 아닌 반군집단이지만 그곳도 나름의 체계가 잡힌 이상 어느 정도의 노하우는 있게 마련이고 대내외적으로도 훌륭한 홍보대상이 되기 때문에 받아준다. 아닌 게 아니라 대좌를 소위임관시키면 넘어온 사람도, 김씨반군집단 영역 내에서 이 소식을 들을 사람들도 뭐라고 생각하겠는가?[2] 중대규모라는 설에서 거의 연대규모였다는 말도 있다[3] 2018년 작고[4] 귀순 당시 조선인민군 공군 소위[5] 귀순 당시 조선인민군 해군 대위, 1980년대 초반 작고[6] 귀순 당시 공군 소좌. 1976년 사망했으며, 사망 당시 중령이었으나 사후 대령으로 추서되었다는 자료가 있음.[7] 귀순 당시 육군 상위[8] 군관 1인당 휘하병력 기준이다.[9] 국가전복 방지 차원에서 이 이상 계급에는 부여하진 않는다.[10] 당장 각 관구대 총감 등의 인원을 선발해야 하는데 이들의 계급은 중장급이다. 자위대 역사 초기에서 일본군 출신들을 배제해야 했기 때문에 경찰 출신들을 중장에 상당하는 보직에 임명해야 했고 이들을 중장 계급으로 임관시켜야 했다.[11] 육상자위대에선 이들의 비중이 엇비슷했지만 해상자위대일본군 해군 인원이 그대로 흘러갔기 때문에 경찰 출신들이 극소수에 불과했다. 정확히는 경찰 출신도 아니고 운수국 출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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