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미증식계획

 

1. 개요
2. 계기
3. 구분
3.1. 1차 증식 계획
3.2. 2차 증식 계획
4. 결과
4.1. 일본 내부
4.2. 김제 평야의 간척과 개간
4.3. 빈부격차의 확대
5. 조선인의 생활수준에 대한 논쟁


1. 개요


(さんべいぞうしょくけいかく)
일제강점기인 1920년 ~ 1941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일제가 식민지 조선식량 및 원료 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실시한 농업정책. '산미 증산 계획'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린다. 태평양 전쟁 시기처럼 강제로 뜯어가는 형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상업적 교역의 형태로 수출되었으나 식민지 조선이 스스로 쌀 수출입을 통제할 권한이 없다는 점에서 구조적인 수탈 성격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2. 계기


개항기 때부터 일본은 조선의 최대 식량 수출 지역이었다. 또한 일본이 당시 다른 식민 지배 지역에서 나는 쌀보다 특히 조선의 쌀을 선호했던 것은, 일본의 주된 쌀 수요가 집중되는 품종이 동북아시아에서 주로 소비되는 자포니카 쌀이고, 자포니카 품종의 쌀은 당시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 북부 일부 지역과 극동 러시아 일부 지역 그리고 이탈리아 남부 일부 지역에서만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식민지인 조선을 본격적인 식량 공급처로 키우고자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18년 일본 농촌 인구의 이농(離農)현상과 도시 집중 현상으로 인해 쌀 재고량이 바닥나며 '쌀 소동(米騷動)'을 겪게 되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쌀 재고를 충분히 확보함과 동시에, 무제한 1:1 교환이 가능한 통화권 내에서의 쌀 유통을 촉진해 외화 지출을 줄이고자 하였고, 이에 조선총독부는 일본 내 식량 증산 계획에 발맞춰 산미증식계획을 발표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도 일본의 쌀 시세가 조선 쌀 시세보다 더 비싸기 때문에 지주들과 일부 부농들이 조선 내부 시장보다는 일본 시장에 쌀을 파는 것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쌀 생산량도 크게 늘었으나, 쌀의 수출량이 더 크게 증가하였기 때문에 쌀 가격을 중심으로 조선 지역 내 물가가 크게 올랐으며, 이는 가구 실질 소득과 식량 소비량을 비롯한 조선의 민생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더불어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산 농작물 생산량과 국제 시장 유통량이 줄지 않은 상황에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핀란드, 아일랜드를 비롯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유럽 국가들이 경기 부양과 외화 확보를 위해 경쟁적으로 농업 생산물들을 국제 시장에 풀기 시작하고, 여기에 영국으로부터 대규모 자치권을 획득한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의 농업 생산물들이 세계 시장에 대거 유입되며 국제 식량 가격의 대폭락이 일어났는데, 이 대폭락의 영향이 대규모 곡물 증산을 진행 중이던 일본제국의 상황과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식민지 조선을 포함한 일본제국 전역의 농촌 사회에 큰 경제적 충격을 야기했다.

3. 구분



3.1. 1차 증식 계획


1차 증식 계획은 1920년부터 실시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쌀 920만석을 증산한 다음 그중 460만석을 기준으로 일본으로 보내려 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여 단계적으로 양을 늘리기도 했으나 경제 여건상 열악한 조달 방식과 농민들의 반발 때문에 결과는 부진했으며, 오히려 일본인, 조선인 지주들만 이득을 보았다.
또 다른 1차 증식 계획이 실패한 원인으로는 일제의 방만한 정책 설계가 지적된다. 일본은 당초 정책 설계 당시 일본과 한반도의 기후 여건 등 농업을 위한 환경이 유사할 것으로 막연히 계획하고 일본에서 사용한 쌀의 종자를 그대로 조선에 가져와 이를 재배하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벼 농사에는 수자원 확보가 가장 핵심적이고, 따라서 계절에 따른 하천의 수위 변동 등 하천 환경은 벼 농사에 있어 매우 핵심적으로 고려될 사항임에도 이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한강을 기준으로 보면 하상 계수가 180 ~ 190에 이르는, 즉 1년간 최대 유량이 최소 유량의 180배 ~ 190배에 이른다. 거기다가 낙동강과 금강은 300이상이다. 한편 일본 하천의 경우 하상 계수가 40 ~ 100 정도로 이 역시도 서구의 하천에 비하면 큰 수치지만 한반도에 비해서는 하천 환경이 크게 양호한 편이었다. 결국 한반도에서 안정적인 농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수리 시설을 확충하여 안정적으로 수자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했고, 한반도와 일본의 다른 기후 환경을 반영하여 한반도에서 재배하기 적절한 종자 개발 역시 선행되었어야 함에도, 그러하지 아니하고 방만한 정책을 추진한 결과 증식을 하기는 하였으나 당초 목표량에 현저히 미치지 못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3.2. 2차 증식 계획


1차 증식 계획이 부진하다고 판단한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26년부터 2차 증식 계획을 발표하여 계획된 재고량보다 더 많은 쌀을 유출시켰다. 이것은 일본 본토의 공업화를 위해서 일본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을 유지하고 치솟는 인플레이션으로부터 미곡가를 지켜서 노동자들의 생계를 유지시켜 그들이 사회주의에 물들지 않게 해야했기 했기 때문이었다. 총독부 입장에서는 쌀의 품질이 일본 쌀에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개선되고 조선 농민들의 소득이 이전에 비해서는 확실히 상승하는 등 1차보다는 성공적이었지만, 하필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고, 일본 국내의 조선 쌀 대량 유입으로 인해 쌀값이 폭락하여 일본 농촌 경제가 악화일로로 치닫자 일본 농민 등 국내의 집단 반발에 부딪히게 되면서[1] 결국 1934년 산미 증식 계획은 실패로 끝을 맺었다.
이후에도 일제는 산발적인 소규모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했다. 이것은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침략 전쟁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이 때부터는 경성공립농업학교에 농업토목 전수과를 설치하는 등, 농법 개량과 더불어 농지개간과 수리(水利)를 정비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다만, 몇 년 뒤에 일제가 패망하면서 유의미한 성과는 나오지 못했다.

4. 결과


산미 증식 계획은 식량문제를 값싸게 해결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론 기존의 일본인 농민들을 생각하지 않은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반대에 부딪혀 정책적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정책 자체보다는 오히려 정책에 영향을 받아 민간에서 주도된 농업 변동 쪽이 농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4.1. 일본 내부


산미 증식 계획은 실상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지만, 정책적인 효과와 별개로 조선 내부에서는 쌀을 생산하여 일본으로 이출하는 것이 인기였으므로 많은 양의 쌀이 일본으로 이출되었고 이 시기를 거쳐 조선에는 기계를 이용한 벼도정이 자리잡으면서 쌀의 도정 상태가 매우 좋아졌다. 이 때문에 벼를 주로 가정에서 도정하던 일본산 쌀보다 조선 쌀은 더 값이 낮고, 품질은 더 좋았다. 이런 이유로 일단 일본 내부의 쌀 부족 현상은 해소되었지만, 반대로 조선산 쌀이 유입되면서 일본 농가의 소득이 감소하면서 일본의 제국 의회에서는 쌀의 이출을 두고 농림성과 조선 총독부가 매번 갈등을 빚었다.
쌀 농사를 짓지 않는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는 쌀값이 낮아져 물가 안정에 보탬이 될법싶으나, 쌀값 폭락기가 경제 공황 시기와 맞물려 있을 때는[2] 농사에 종사하지 않는 인구라 할지라도 경제적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

4.2. 김제 평야의 간척과 개간


산미 증식 계획의 일환으로 논 농사의 물을 대는 수리 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수리 조합 개설 운동이 벌어진다.
그 중 논 농사의 보급이 가장 원활한 지역은 현 전라북도로, 조선 시대 초기와 중기에는 유명한 곡창 지역이자 풍요 지대로 명성이 높았지만 조선 말기 혼란 상황에 황폐해진다.
산도 없이 드넓은 평야가 계속되는 김제 평야 지대에 지주들과 농민들의 주도로 개간과 수리 시설의 정비 등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게된다. 또한 넓은 갯벌에 대한 대대적인 간척 사업이 벌어지며 광활면 등이 생겨나게 된다. 총독부에서도 관용 수리 시설의 개설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참여도나 추진력이 낮아 실패하였고, 되려 민간에서 주도된 수리 조합 개설이 활발해지면서 논 농사를 위한 수리 시설의 정비와 개설 끝에[3] 전라북도 일대에는 광범위한 논농사 지대가 형성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쌀을 일본에다 이출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대지주들이 형성되었다. 현재 한국 최대의 미곡 생산 지역이 전라도인 것은 여기에 연유한다.[4]

4.3. 빈부격차의 확대


정책의 효과는 차치하더라도 이시기의 대지주(일본인과 조선인)들은 확실히 이득을 보았다. 당시의 소작 제도하에 지주들은 땅을 소작내어준 농민들에게 수확한 벼의 절반을 수취하였고, 이렇게 쌀을 축적한 지주들은 해외 시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일본으로 판매하고 막대한 이득을 보았다. 자작 / 소작, 자소작 농민은 식량의 자급과 판매를 조선 내부에서 거래에 의존하는데에 반해 지주는 도정 설비를 갖추고 벼를 도정하면서, 직접 유통하여 시장에다 내다파는 등 유통과 판매를 겸하여 더 큰 수익을 얻었다.[5] 더불어 수리 조합 개설이나 수리 시설 확충 등 농촌 기반 시설을 투자하기 위한 예산도 농민에게서 수리 조합비를 별도로 거둬서 부담을 전가하여 농민의 세부담이 증가되어 농촌 빈부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 그리고 이러한 지주의 성장은 일본의 의도였고 결국 일본은 지주층을 식민지 체제에 대한 지지자들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산미증식계획으로 이득을 본 조선인은 전체적으로 일본제국의 지배 정책에 동조적이었던 지주층이나 화이트 컬러 인텔리층 그리고 아직 소수에 불과한 도시 노동자층에 한했다. 조선의 인구 중 많은 비율을 차지하던 농민들 사이에서는 정책의 혜택보다 부작용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하였고, 이로 인해 산미증식계획 이후 조선인의 1인당 쌀 소비량은 감소세를 보였다.

5. 조선인의 생활수준에 대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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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미 증식 계획 시기에는 쌀 생산량이 늘었지만, 일본으로 쌀을 파는게 상당한 이득이 되었던 일본 상인들에 의해 생산량보다 이출량의 증가가 급격하였고, 그로 인해 벼를 자가 소비하는 것보다 판매하는 것이 금전적으로는 이득이었으므로 조선인 1인당 미곡 섭취량은 오히려 감소하였다.
기존의 학설은 미곡의 이출로 인해 농민의 섭식은 오히려 악화되고, 농작 상황의 악화로 유랑민이 증가하여 만주로 이민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중심으로 상반되는 연구 결과 등이 발표되어 반론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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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익종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일제 강점기는 1인당 미곡 소비량은 이전에 비해 줄어들었으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식료 구입비의 총량이 증가하였다. 재래 조선의 농업은 1년의 절반 이상이 맑은 날씨인 기후적 특성상 논농사보다 감자와 고구마를 중심으로 하는 밭농사의 비중이 높았고, 쌀보다 수수, 등 잡곡의 섭취량이 많았으므로[7] 다른 식품군의 섭취를 제껴두고 쌀의 섭취량 감소만 두고 식생 수준이 악화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1910년 기준 한반도 남부 기준 60%, 한반도 전체 기준 44%의 농업 생산이 미곡인 것을 감안하고, 쌀의 생산량이 보리, 조보다 세 배나 생산량이 많았던 것을 고려한다면 "쌀보다 잡곡의 섭취량이 많았다"는 근거가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또한 미곡의 소비량이 1930년대에 급격히 감소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주익종 박사는 "육류, 어패류 등의 소비량이 증가하였다"라는 주장을 통해 쌀의 소비량이 감소했어도 조선인의 삶의 질이 증대되었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허수열 교수는 이에 대해 1910년대 초반의 통계적 오류가 이와 같은 결과의 원인으로 지적하면서[8] 1914년 ~ 1918년의 평균값과 1934년 ~ 1938년의 평균값의 비교를 통해 어패류를 제외한 모든 식품의 소비량이 감소 또는 정체되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동시에 약 2000여명의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는 일제 감시대상 인물 카드와 2100여명의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는 사할린 한인 기록물을 통해 조선인 신장 변화를 연구한 조영준 교수의 연구를 보면, 1890년대에 출생된 남성보다 1920년대에 출생된 남성의 신장이 약 3cm 감소한 것을 알 수 있다.[9] 다만 전국민 대상 병역판정검사와 교육 과정에서의 신체검사가 실시되기 시작한 1950년대 이전 한국 지역의 신장 통계는 각각의 통계가 어떤 조사기관이 어떠한 목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통계를 수집했는지, 어느 정도의 신뢰성을 갖는지, 그리고 표본 집단의 대표성을 담보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산미 증식 계획 실시로 인해 미곡의 생산량이 증가한 것은 맞으나, 농촌 빈부격차는 확연하게 커졌고, 평균적인 영양 상태의 개선 또한 물가 상승과 인구의 증가로 말미암아 이뤄지지 않았다. 종합하면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증가한 생산량으로 말미암은 수혜는 주로 일본인 지주와 조선인 지주들에게 돌아갔고,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절대다수의 조선 중층~하층 농민들의 경우 충분한 1인당/가구당 소득의 증가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인구의 증가와 상류층 소득의 급격한 증가로 시장의 총 구매력이 기형적으로 늘어나는 바람에 뛰어오른 물가에 고통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의 빈부격차는 다수 민중의 절대 소득이 떨어져서 벌어졌다기보다는, 일본인들과 지주들, 도시민들의 소득이 가파르게 늘어나는 상황에서 일반 농촌 민중의 소득은 답보 상태였기 때문에 벌어졌다. 결국 경제적 중층과 하층의 절대 다수를 구성하는 조선인 대다수의 소득은 그대로였지만, 총 인구의 증가와 맞물려, 조선인/일본인 지주들을 비롯한 상류층의 소득은 크게 늘어나 전체적인 구매력과 시장 수요의 상승으로 인한 물가 상승의 직격탄을 맞아 중류층과 하류층 조선인은 상대적으로 더 가난해졌다.
다른 한 편, 이 시기 동안 조선 내 지주[10]들의 재력과 발언권이 강해졌는데, 이는 관습적으로만 행해지던 전통적인 고율의 소작료율이 명시적으로 굳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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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이후 그래프가 감소세인 것은 태평양 전쟁 이후 전쟁 경제가 실시되며 일본제국의 수탈이 가속화되면서 식민지 경제 경영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들조차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전 직후 철수를 앞둔 일본인 관료들은 조선과 만주 지역의 히키아게샤들의 귀국여비 문제를 해결하고자 엄청난 양의 화폐를 발행해 철수하는 일본인 예금주들에게 지불하는 방식으로 화폐 유통량을 늘렸다. 그리고 이들이 철수하자 당시 이들이 화폐를 찍어내던 인쇄소에서 일하던 조선공산당 소속의 조선인 직공들이 인쇄원판을 빼돌려 이를 조선공산당의 활동 자금 확보 및 남한 지역 내 민생경제 혼란 목적의 공작 수단으로 활용하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벌어졌다.[11] 결과적으로 1946~1948년 동안 5500%에 달하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났으며, 미군정이 전후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하고 대한민국에 통치권을 이양하자마자 이번에는 6.25 전쟁이 터지고 전후에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의 정책 실패가 겹쳐 침체가 장기화되었다. 결국 경제 상황의 정상 상태 회복과 성장세로의 돌입은 남북한을 통틀어 1960년대 초반 정도나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즉, 일본제국의 해체로 말미암아 제국의 공동 경제권/산업권이 붕괴되어 조선이나 대만, 만주 지역의 경제와 산업에 어느 정도 충격이 가해지기는 했으나, 1950년대까지 한국 경제의 대침체는 제국 경제권의 해체의 후폭풍 그 자체보다는 앞서 언급된 광복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실시 이전까지 있었던 일련의 혼란에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즉, 광복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1950년대까지의 한국 경제 대침체기를 직접 야기했다고 할 수 없다. 한편 영양 섭취량은 1920년대부터 이미 약하게나마 하락하고 있었다는 연구 결과[12]도 있다.

[1] 특히 쌀값 폭락으로 큰 손해를 보게 된 일본 농민들의 반발이 컸다. 1930년 동아일보는 금년엔 작년보다 삼백여만 석을 더 생산했으나 일본에서 조선 쌀 배척으로 인해 쌀값 폭락으로 농민들이 동요하고 있다고 기록했다.[2] 하필 쌀값이 크게 폭락할 때 경기도 함께 폭락했다. 1차 세계 대전 시기에 쌀값은 전체적으로 상승하다가 세계 대전이 끝나고 그간 수출을 안 하던 동유럽 국가들이 곡물 수출을 재개하자 쌀을 비롯한 곡물 가격이 급락함과 동시에 유럽 각국이 공산품도 자급하기 시작하면서 일본 산업도 같이 침체되었다. 또한, 1930년대 쌀값 하락기에는 세계 대공황이 겹치면서 쌀값과 경기 침체가 동시에 일어났다.[3] 이영훈ㆍ장시원 외, <근대조선수리조합연구>, 일조각, 1992년[4] 조선 시대에는 오히려 전라도와 경상도의 농업 생산량은 크게 차이가 나지않았다. 오히려 생산량에서 경상도가 더 높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단, 경상도가 애초에 전라도보다 훨씬 면적이 큰 점은 감안해야 한다. 또한 경상도는 세곡으로 불리는 미곡보다는 보리의 생산량이 많았으므로,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전라도가 한국 최대의 미곡 생산 지역이었다. [5] 이때 얻은 수익으로 재화와 사치품을 구입하고 주식 투자를 병행하여 경제가 활성화되었다. 자세한 것은 식민지 근대화론 참조[6] 해당 그래프의 세로축은 무게가 아니라 식료비, 즉 가격이다. 가격은 크게 변동이 없었으나, 실제 쌀 소비량 자체는 1912년 0.77석에서 1936년 0.38석으로 반토막이 났다. 결국 미곡 섭취량은 반토막이 났지만 가격이 배로 뛰어서 더 적게 먹고도 식료품비 지출은 그대로거나 더 늘었다는 얘기다.[7] 조선인의 식사량이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잡곡을 주로 섭취해서라고한다.[8] 대표적인 예로 육류 소비량 증가의 근거가 되는 소의 숫자가 1913년 ~ 1914년 단 1년 사이 두배가 증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9] 이를 1960년대와 2000년대 북한을 비교하면 인구는 3배로, 평균 수명은 2배로 크게 늘었으나, 1960년대 생에 비해 1990년대 생의 평균 신장은 크게 줄어든 상황과 비교하기도 한다. 다만 북한의 사례는 평균 신장과 영양 상태의 상관 관계에 대해 설명할 때에는 적절하나, 일제 치하 조선의 상황과 직접 비교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존재한다. 북한의 인구와 평균 수명 추이의 경우 경제가 그나마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1990년대 중반까지 상대적으로 높은 증가세를 보이다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급격한 악화를 겪고 이것이 고착화한 모습이다. 즉, 19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북한의 경우는 영양 상태의 악화와 평균 신장의 축소와 인구 증가세의 둔화, 평균 수명의 단축이 함께 이뤄진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10]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까지 포함.[11] 출처 - 중앙은행 오디세이 ②해방 직후 벌어진 위폐 사건 계기로 한국은 반공사회로 / 한국은행[12] 육소영(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