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기
1. 개요
중국 오대십국시대 후주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했다. 역사 속의 대표적인 중국계 한국인 중 하나.
2. 생애
후주의 사신단으로서 고려에 왔다가 병이 나서 사신단과 함께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눌러앉아 고려에 귀화했다. 병이 어떤 병이었는지는 기록에 따로 나와있지 않지만 애초에 꾀병이었고 광종이 직접 그를 영입한 것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956년에 고려로 들어왔는데 그의 모국이었던 후주는 4년 뒤인 960년에 송나라 태조 조광윤에게 멸망했으니 어찌 보면 제때 갈아탄 셈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사실 후주에서 북송으로 바뀐 것은 평화적 정권 교체에 가까워 관리들은 거의 대부분 그대로 승계[3] 되었고[4] 일개 관리의 진퇴에는 별 영향도 없었을 것이므로 이는 좀 심한 비약이다.
쌍기는 광종의 총애를 받아 광종의 개혁 정책들을 뒷받침하는 브레인 역할을 맡았다. 이 사람이 한국사에서 중요한 이유가 이미 중국에서는 수, 당 시대부터 시행되고 있었던 한국사 최초의 과거 제도 시행을 전격 건의하여 과거 제도가 고려에 정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직접 시험 감독인 지공거를 맡아 과거를 주관하기도 했다. 또한 광종에게 상당히 우대를 받아 광종이 호족의 집과 땅을 빼앗아서 쌍기에게 하사해주기도 했다.
과거 제도를 도입하고 인재를 많이 양성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을 받으나 정작 귀화인으로서 고려의 호족들을 치는데 가담한 덕택에 최승로, 이제현 등을 비롯한 많은 유학자들에게 크게 까였다. 허나 애초부터 쌍기의 등용 자체가 호족이라는 국내 정적#s-2을 견제하기 위한 광종의 포석이었으므로 쌍기는 제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5]
쌍기가 광종에게 받은 품계는 원보로 4품 2등위이다. 당시 1품, 2품, 3품은 고려의 개국공신들만 받았다는 걸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의 품계를 받은 것인데,[6] 광종의 호족들을 누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