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광현

 


'''발해 작위'''
세자(世子)
'''향직 품계'''
원보(元甫)
'''봉토'''
백주(白州)
''''''
대광현(大光顯)
'''개명'''
왕계(王繼)
'''생몰연도'''
? ~ ?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발해거란의 군사에게 격파되자 그 나라 세자인 대광현(大光顯) 등이, 우리나라가 의(義)로써 흥기하였으므로 그 나머지 수만 호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달려왔습니다. 태조께서는 이들을 더욱 가엾게 여기시어, 영접과 대우가 매우 두터웠고, 성과 이름을 하사하시기까지에 이르렀으며, 또한 그들을 종실의 적(籍)에 붙여서 자기 조상들에 대한 제사[禋祀]를 받들도록 하셨습니다. 그들 중 문무(文武) 참좌(叅佐) 이하에게도, 또한 모두 벼슬과 품계를 넉넉하게 더하셨습니다. 이처럼 멸망한 나라를 보존해 주고 끊어진 제사를 이어가게 해 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니, 능히 먼 곳에 있는 사람까지 와서 복속하게 만든 것입니다.

- 최승로, 오조치적평(五朝治績評)[1]

발해왕족으로 발해 멸망 이후 고려에 수만여 명의 발해 유민들을 이끌고 망명온 지도자이다.

2. 생애


당시 기록이 적다 보니 가계에 대한 주장이 분분한데 발해의 왕자라는 것이 현재 학계의 통설이며 발해국 세자라는 기록이 고려사고려사절요에 나와 있다. 다만 대광현이 대인선의 아들이라면 고려사에서 굳이 숨길 이유가 없는데 발해국 세자라고만 하고 있을 뿐이지 대인선의 아들이라고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약용은 "대광현이 꼭 대인선의 아들이라는 법은 없고 이를테면 대인선이 항복한 뒤 동생이 임의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 동생의 아들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2]고 주장했다. 태자라고 해서 정말로 후계자였는지는 알 수 없는게 일본귀화한 백제의 일반 왕자도 태자 또는 왕이라고 불린 것처럼 그냥 왕자였을 여지도 있기 때문. 고려사에는 특이한 기록이 있는데 대광현이 망명하기 전에 개경의 왕궁 뜰에 7척이나[3] 되는 커다란 지렁이가 나와 있었고 사람들은 발해에서 귀순해 올 징조라고 해석했다고 한다.[4]

발해국 세자인 대광현大光顯이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투항해오자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종실의 족보에 올렸다. 또 특별히 원보元甫 벼슬을 주어 백주白洲(현 황해남도 배천군)를 지키면서 집안 제사를 지내게 했다. 따라온 막료들에게는 벼슬을 주고 군사들에게는 토지와 집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 고려사 934년 7월 기사 中

발해가 거란의 군주 야율아보기의 침공으로 멸망당하고 11년 뒤인 고려 태조 17년(934년) 7월에 대화균, 대균로, 대원균, 대복모, 신덕, 대심리 등 다수의 관료, 수 만의 병력, 백성들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했다. 왕건에게 왕계(王繼)[5]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왕씨 종친으로 대우받아 고려 왕실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으며 원보(元甫) 품계과 함께 백주(白州)[6] 땅을 식읍으로 받아 발해 왕실의 제사를 받들었다고 한다. 다만 대광현이 수만 명의 발해 사람들을 데리고 왕건에게 투항한 시점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의 기록들이 서로 다른데 고려사는 934년 7월, 고려사절요는 925년 12월, 동국통감은 926년 1월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공식적인 발해 멸망은 926년 1월로 이에 대다수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대광현이 수만 명 혹은 수만 가구의 발해 사람들을 데리고 고려로 투항한 년도는 926년 1월 이후로 보고 있어 동국통감의 기록이 가장 맞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망명은 발해의 멸망과 관련해서 발해에 발해부흥운동 과정에서 내분이 있었다는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앞서 고구려백제 역시 부흥 운동 과정에서 구 왕족과 권력을 가진 실권자 간의 치열한 권력 다툼이 발생한 것처럼 말이다. 이후 후발해가 발해를 계승하지만 정안국이 건국되어 구심점이 여러 군데로 분산되어 버리고 정작 정안국의 임금은 대씨가 아니었기에 발해 구 왕족은 이미 발해 멸망 직후부터 실권을 상당히 잃어버렸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자치통감에서 왕건이 같이 거란을 치자며 석경당을 부추겼을 때 "발해는 우리와 혼인한 나라입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왕씨 성을 받고 왕실로 편입된 대광현이 고려 왕족과 혼인했을 가능성이 있어보인다. 경순왕의 사촌여동생인 신성왕태후 김씨와 혼인하고 낙랑공주와 왕씨부인[7]을 경순왕에게 시집보낸 왕건의 행보를 볼 때 충분히 가능성있는 대목이다.
대광현의 투항을 고려가 고구려를 적극 계승했다는 근거로 쓰이기도 하지만 조금 복잡한 점은 고려 왕조가 ‘고(구)려를 계승하는건 발해가 아니라 우리’라고 주장했기에 스스로를 고려의 후예라고 칭한 발해를 껄끄러워했다는 것이다. 발해 유민의 편입은 어디까지나 왕족 및 백성을 자국 밑으로 받아들이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이후 고려의 관찬 역사서에서도 발해의 비중이 낮은 편이다. 이로 인해 발해에 대한 기록이 매우 부족해져 버렸는데 발해 왕들 15명 중 1/3인 5명의 시호가 전해지지 않을 지경으로 왕이 15명이었는지 더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하다.[8] 동 시대인 고려인들이나 발해 왕자 출신인 대광현이 몰랐을리는 없다.
전술했던 정치적 입장과는 달리 태조 왕건은 대광현을 우대해 주었는데 사성정책을 펼치고 봉토 백주(白州)를 하사했음은 물론 4품 2등위 품계인 원보(元甫)까지 줬기 때문. 당시 고려의 품계[9]는 1품부터 3품까지는 개국공신에게만 주어졌고 대광현은 개국공신 바로 밑 품계를 받은 것인데 망국의 세자에게 이 정도면 엄청난 대우라 할 수 있다.
왕씨 성을 받고 고려 왕실의 족보에 편입되었지만 본래 성을 유지하였기에 대씨태씨 후손이 남을 수 있었다. 대광현의 아들인 대도수여요전쟁에서 활약했고 대집성도 고려 시대에 출세한 대씨지만 그의 행적은 전형적인 간신배의 것이었다. 한국의 태씨와 대씨는 대광현을 중시조로 한다고 한다.[10] 왕씨 성을 사성받았는데 후손이 다시 대씨거나 태씨인 이유는 모든 대씨가 왕씨 성을 받은 것도 아닌 듯하고 여말선초 시기 왕씨 몰살 때 진짜 왕씨 이외의 사성 왕씨들을 원래 성으로 복성시켰기 때문이다.[11]

3. 대중매체에서


드라마 태조 왕건 184회에서 수만 명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왕건에게 귀순하는 장면이 짧게 나온다. 그런데 대광현을 맞이해주는 왕건을 연기한 최수종이 대조영을 연기하는지라 자기 후손을 환생한 선조가 맞이해줬다는 배우 개그가 나왔다.
[1] 시무 28조의 서문격이라고 할 수 있는 글로, 고려사 최승로열전과 동문선에도 실려 있다. 성종 이전 5명의 군주의 치적을 유교적인 입장에서 평가한 글이다.[2] 뉘앙스에 주의해야 한다. 정약용은 대광현이 꼭 대인선의 동생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대광현의 가계를 잘 모르겠는데 예를 들자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고 주장한 것이다.[3] 1척 = 약 30cm로 간주하면 7척은 2.1m 정도.[4] 견훤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에는 지렁이를 토룡으로 여겼다고 한다.[5] 발해 왕실의 후사라는 대광현의 입장을 생각하면 계(繼)라는 이름은 의도적으로 준 것이다.[6]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 2010년 태씨 종친회에서 자체적으로 협계, 영순 두 본관을 통합하기로 결정하면서 새로 선택한 본관이 백주였다.[7] 낙랑공주는 제3비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의 딸이며 왕씨부인은 박지윤(朴遲胤)의 딸인 제25비 성무부인 박씨(聖茂夫人 朴氏)의 딸이다.[8] 폐위된 대원의와 마지막 왕인 대인선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는 대이진, 대건황, 대현석, 대위해만 시호가 전해지지 않는다.[9] 태조가 직접 만든 정식 품계. 이후 성종이 문산계 품계를 만들어 교체했고 태조의 품계는 '향직 품계'란 명칭으로 바뀌며 명예직이 된다.[10] 협계 태씨의 경우는 발해의 예부경으로 고려에 망명했던 대화균의 후손인 대집성을 중시조로 하고 있고 밀양 대씨는 마지막 왕 대인선의 아들 대탁(大鐸)을 집안의 시조로 삼고 있으며 영순 태씨걸걸중상의 18대손으로 대몽 항쟁에서 공을 세운 대금취를 중시조로 한다.[11] 비슷하게 복성된 예로 강릉 김씨가 있다.